안동 죄수 우천필·우천보·우치서·우천서·문덕룡 등의 충주 이감에 대해 사헌부에서 아뢰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안동(安東)에 살고 있는 출신(出身) 우천필(禹天弼), 봉사(奉事) 우천보(禹天輔), 봉사 우치서(禹致敘), 교생(校生) 우천서(禹天敍), 봉사 문덕룡(文德龍) 등을 방금 충주(忠州)로 옮겨 가두었는데, 당초 사람을 죽인 것으로 고발을 당한 자들입니다.
지난 정유년096) 에 서울에 살던 사노(私奴) 진말성(秦末成)이 그의 아내 신원(愼遠)이라고 부르는 자를 데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안동 땅에 우거하면서 입마(立馬)하고 닭을 기르면서 명(明)나라 군사와 장사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습니다. 우치서의 밭이 말성의 집 앞에 있어서 닭과 말이 밟기도 하고 곡식을 먹기도 하여 피해가 매우 많자, 우치서가 이웃에 사는 양반으로서 말성 부부를 잡아다 머리칼을 잡아 끌고 뺨을 때리는 등 가혹하게 학대하기를 매우 심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유감을 맺게 된 시초였습니다. 그러다가 경자년097) 8월에 흉포한 명화적(明火賊)이 말성의 집에 침입하여 말성과 그의 아들이 모두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는데, 그의 아내인 신원은 마루 밑에 숨어 들어갔다가 겨우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본부의 부사 이암(李巖)이 사람을 죽인 사건에 놀라 즉시 나장(羅將) 남경(南涇)을 보내어 신원이 있는 곳에 나아가 도적을 맞은 연유를 물으니, 신원이 ‘우천필 등 아무개와 아무개가 와서 우리 집을 털면서 나의 남편과 나의 아들을 죽였다. 내가 불빛 속으로 보았다.’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유감을 품고 중상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암이 한결같이 신원이 말한 대로 전부를 체포하였으나, 혹 신원의 말이 두서가 없어 의심스럽게 생각되었으므로 그의 거짓을 시험하려고 부사의 눈앞에서 사령(使令) 영숙(永叔)이란 자를 묶어다 보이니, 신원은 ‘이 사람은 진짜로 우리 집에 왔던 도적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원의 집에 도적이 침입하였던 밤은 바로 석전 제일(釋奠祭日)이었으므로 우치명(禹致命)은 액내(額內)의 교생으로 여러 선비들과 회동(會同)하여 교사(敎舍)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신원은 ‘우치명도 우리 집에 왔던 도적이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관찰하면 신원이 무고(誣告)한 형상은 환하고 분명하며 기타 앞뒤로 공술한 바도 전도되고 잘못된 단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대체로 살인 강도 사건을 귀일(歸一)시키려면 장물을 찾아내고 흉악한 짓을 한 기구가 나타난 연후라야 바야흐로 옥사(獄事)를 성립시킬 수 있는데, 이 사건의 경우는 사건의 관계를 묻지 않고 장물이나 흉기도 찾아내지 못한 채 단지 죽은 자의 친족이 말로 호소하는 내용에 의거하여 우씨 한 문중의 사람을 모두 체포하여 대옥(大獄)을 이루게 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암이 경망하여 일을 처리함이 소홀한 소치가 아닌 게 없으니, 지금 말한다 하더라도 이미 미칠 수 없습니다.
평안 감사 신 이시발(李時發)이 일찍이 경상 감사가 되어 이 옥사의 원통한 상황을 상세히 알고, 함경 감사로 배사(拜辭)할 적에 탑전(榻前)에서 진달하였는데, 선왕(先王)께서 이미 실제로 죽이지 않았다면 용서하는 것이 가하다는 전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앞뒤의 추관(推官)이었던 신 안동 부사 김륵(金玏)·황극중(黃克中)·정구(鄭逑) 등이 상세히 힐문 추구하고는 그들의 억울함을 극력 진달하며 조목으로 열거하여 남김없이 첩보(牒報)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공명한 인사들이므로 그들의 견해 또한 충분히 신임할 만합니다. 그리고 신 정사호(鄭賜湖)가 【대사헌(大司憲)이다. 】 정미년098) 에 본도의 감사로 임명되어 추안(推案)을 자세히 조사하고 겸해서 여론을 물었는데, 영남(嶺南)은 바로 사론(士論)이 있는 곳으로 진실로 숨기는 미미한 과오라도 있으면 공격하고 배척하기를 힘을 남기지 않습니다. 따라서 만약 우천필 등에게 참으로 사람을 죽인 대악(大惡)이 있었다면 털끝만큼이라도 용납하거나 비호할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이 옥사의 경우는 사족(士族)이나 상인(常人), 원근이나 노소를 따질 것 없이 지극히 원통하다는 것으로 일컫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공공의 논의가 기약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으니 어떻게 속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가지고 즉시 갖추어 계문하고 날마다 조정에서 결단해주는 명을 기다렸는데, 해조가 미처 살피지 못하고서 도리어 충주에다 옮겨 가둔 지 지금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신원은 중이 되어 동대문 밖의 승방(僧房)에 있었는데, 금년 2월 사이에 해조가 충주로 압송하여 그로 하여금 다시 우천필 등과 면질(面質)시켰습니다. 추관인 충주 목사 신 박동열(朴東說) 등이 상세하게 조사하여, 신원의 거짓되고 믿기 어려운 형상과, 우천필 등이 별다른 단서가 없는데도 원통함을 안은 채 펴지 못하는 상황을 감사에게 첩보(牒報)하였으며, 감사는 구체적으로 기록하여 장계(狀啓)하였습니다. 그런데 해조에서는 아직도 분간하지 못한 채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청하였으며, 대신 또한 사이의 정상(情狀)을 알지 못하고 단지 ‘추안을 상고하여 보고 사정을 참작하여 헤아려 보건대 과연 의옥(疑獄)이니 분변하여 다스려야 하겠습니다만, 감히 경솔하게 의논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상께서도 ‘사람을 죽인 것은 중대한 옥사이기에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의심할 만한 사람은 엄중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하라.’는 분부를 내렸는데, 해조가 이러한 내용으로 즉시 본도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당초 황극중 등이 추관이 되었을 적에 우천필 등 5명의 처자(妻子)와 노비를 모두 잡아다 가두고 여러 차례 엄중히 형신하며 갖가지 방법으로 다스렸지만 끝내 단서를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10년이 지난 뒤에 이르러서도 다시 의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엄중히 형신했던 사람이 작성한 문서를 상고하여 보면 진실과 허위가 그 자리에서 나타나 불을 보는 것처럼 환할 터이므로 즉시 사유를 갖추어 첩보하고 거듭 장계하여 아뢰어야 마땅한데도 1년이 거의 다 지나가도록 내버려둔 채 시행하지 않았으니, 그 죄수를 불쌍히 여겨 심리를 잘한다는 뜻이 없습니다.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니, 충청감사와 추관 등을 추고하도록 명하소서.
대개 모든 옥수(獄囚)는 죄가 있으면 형률을 상고하여 다스리며 죄가 없으면 명쾌하게 결단하여, 옥사가 지체되어 원통함을 품음으로써 화기(和氣)를 손상시키고 재앙을 이루는 근심이 거의 없도록 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일이거나 또는 인연이나 청탁이 없는 경우 버려둔 채 서로 잊어버리기를 몇 해가 지나도록 오래하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습니까. 이 옥사는 이미 관문에 의거 조정에 품하였으므로 지방 관원이 마음대로 결단할 수 있는 바가 아닌 듯합니다. 앞뒤로 작성한 문서가 해조에 갖추어져 있으니 해조로 하여금 반복해서 상고하도록 명하여, 지연시키지 말고 빨리 결단해서 먼 시골의 하소연할 데 없는 가난한 백성으로 하여금 억울한 죄를 뒤집어쓰는 원통함이 없도록 하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31장 A면【국편영인본】 26책 478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윤리-강상(綱常) / 변란-민란(民亂) / 정론-간쟁(諫諍)
- [註 096]
○己酉十一月三十日丁未(司憲府啓曰: 安東居出身禹天弼、奉事禹天輔、奉事禹致敍、校生禹天敍、奉事文德龍等, 今方移囚於忠州, 初以殺人被告者也。 往在丁酉, 京居私奴秦末成, 率厥妻愼遠其名者, 流寓安東地, 立馬、養鷄, 與天兵買賣爲業。 禹致敍之田在末成家前, 鷄、馬踏喫, 害穀甚多。 致敍以隣居兩班, 捉致末成夫妻, 曳髮打顋, 苛虐殊甚, 此所以結釁之始也。 庚子八月, 明火獷賊入末成家, 末成與其子俱被刃死, 其妻愼遠, 獨投入抹樓下, 僅得生活。 其時本府府使李巖驚於殺人, 卽遣羅將南涇, 就愼遠所在處, 問被賊緣由, 愼遠以爲: "禹天弼等某也某也, 來賊我家, 殺我夫與我子, 我於火光中見之。" 云云, 此乃挾憾中毒之言也。 巖一依所言, 全數緝捕, 或慮愼遠之言胡亂無倫, 欲試其奸僞, 縛致府使眼前使令永叔者, 以示之。 愼遠曰: "此眞來賊我家者也。" 愼遠家賊入之夜, 乃釋奠祭日也, 禹致命以額內校生, 會同群儒, 齋宿校舍, 而愼遠曰: "致命亦來賊我家。" 云云。 以此兩段觀之, 愼遠誣告之狀, 章章明矣, 其他前後所供, 顚倒錯謬之端, 不一而足。 凡殺干歸一, 贓物被捉, 行兇器具現出, 然後方能成獄, 此則不問事干, 未捉贓物、兇器, 只憑屍親口訴, 盡捕禹姓一門之人, 以成大獄, 天下寧有是理? 無非李巖輕妄處事疎漏之致, 今雖言之, 已無及矣。 平安監司臣李時發, 曾爲慶尙監司, 詳知此獄冤狀, 以咸鏡監司拜辭時, 陳達于榻前, 先王已有"實爲不殺, 則赦之可也"之敎。 前後推官臣安東府使金玏、黃克中、鄭逑等, 詳詰細究, 極陳其冤枉, 條列牒報, 更無餘蘊, 此皆公明之人, 其所見亦足信矣。 臣賜湖【大司憲。】於丁未年, 忝授本道監司, 細究推案, 兼訪物情, 嶺南乃士論所在處人, 苟有隱慝微過, 則攻斥不遺力。 若使天弼等, 誠有殺人大惡, 則萬無一毫容庇之理。 而此獄則無論士族・常人、遠近・老少, 莫不以極冤至痛稱之。 公共之論, 不期而同, 焉可誣乎? 以此卽爲具啓, 日竢朝廷斷決之命, 而該曹未及廉察, 反爲移囚於忠州, 今已閱三年矣。 愼遠爲尼, 投在東大門外僧房, 今二月間, 自該曹押送于忠州, 使之更與天弼等面質。 推官忠州牧使臣朴東說等, 詳加盤詰, 極陳愼遠虛妄難信之形, 天弼等別無端緖, 抱冤莫伸之狀, 牒報監司, 監司具錄狀啓。 而該曹尙未分揀, 請議大臣, 大臣亦未知彼間情狀, 只曰: "考見推案, 參商事情, 果是疑獄, 所宜辨理, 而不敢輕議。" 云云。 以此自上亦有"殺人重獄, 不可輕議, 可疑人嚴刑得情"之敎, 該曹將此事意, 卽移文于本道矣。 當初黃克中等爲推官時, 天弼等五人妻子、奴婢, 盡數捉囚, 累次嚴刑, 多般雜治, 竟未得端緖, 到今十年之後, 更無可疑。 嚴刑之人, 考見作文, 則眞僞立現, 明若觀火, 宜卽具由牒報, 申爲狀啓以稟, 而一年垂盡, 抛棄不行, 其無審克恤囚之意。 至爲未便, 忠淸監司、推官等, 請命推考。 大槪凡獄囚, 有罪則按律繩治, 無罪則明快斷決, 庶無滯獄冤鬱, 傷和氣致災沴之患, 而人於自己不切之事, 宜且無夤緣請囑, 則置之相忘, 至於積年之久, 豈不痛乎? 此獄旣已關稟于朝, 似非外官所當擅決。 前後作文, 具在該曹, 請命該曹反覆考閱, 毋致遲延, 斯速讞決, 俾無遠鄕無告窮民覆盆之冤。 答曰: "依啓。")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131장 A면【국편영인본】 26책 478면
- 【분류】사법-재판(裁判) / 사법-치안(治安) / 윤리-강상(綱常) / 변란-민란(民亂)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