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원수 권율이 왜적의 재침략 계획과 목적, 방비에 관한 풍무수의 말을 보고하다
도원수 권율(權慄)이 치계하기를,
"경상우병사 김응서(金應瑞)가 치보(馳報)하기를 ‘전일 죽도(竹島)의 왜장 풍무수(豐茂守)가 죽도를 치겠다는 말로 재삼 공갈하기에 그 사실 여부를 탐지하고자 하여 정승헌(鄭承憲)을 다시 들여보내면서 수작(酬酌)할 말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적들의 수효는 아직까지 가감이 없었으며 양곡선이 끊이지 않고 왕래하였습니다. 왜장 풍무수와 상견(相見)했는데, 그가 묻기를 『중국 군사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그런가? 관백(關白)이 이미 여러 장수에게 조선과 교전해서 승부를 내라고 명령을 내렸다. 6∼7월 사이에 대병이 바다를 건너와 먼저 경상·전라도 등을 치고나서 다시 연해(沿海)에 주둔하며 제주도를 빼앗으려 하는데, 이때 세 나라 국민이 칼날 아래 모두 죽게 될 것이 분명하니, 우리들 역시 매우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다. 조선은 어찌하여 바로 강화를 하지 않고 끝내 이런 환란을 일으킬 흔단을 만들었는가. 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시운(時運)과 관계된 것이니 무엇을 한탄하겠는가마는, 지금이라도 강화를 논의하면 그래도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 하기에, 답하기를, 『중국 군사 20여만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에서 전라도 등까지 연이어 진영을 설치하고 계속 나오고 있으며 연속 양식을 운반하고 있다. 너희들이 반복 무상한 것을 보고는 남김없이 다 죽이려 하는데, 어찌 강화한다는 주장이 있겠는가. 』 하니, 『네 말이 정말 들은 대로구나. 』 하였다. 내가 부산 왜 등이 우리에게 한 말을 이야기했더니, 그도 이미 그런 뜻을 알고 있었는데 이에 그가 말하기를 『중국 군사의 초탐(哨探)이 실로 진주까지 이미 이르렀다면 형세상 막기 어려울 듯하다. 사소한 일로 출병(出兵)해서 흔단을 만들어서는 안되니, 죽도(竹島)를 취하는 일은 내가 그만두겠다. 7월 중에 전투가 벌어질 것인데, 조선에서 이런 기별을 알고 대응하면 혼란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 하고는, 술을 따르며 후히 대접하였다. 이렇게 한참동안 한담을 나누다가 좌우를 물리치더니 통사(通事)를 불러 귀에다 대고 가만히 말하기를, 『조선에서 산성을 의지하여 지키기를 힘쓴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관백이 다시 흉계를 내어 여러 장수에게 명령하기를, [내가 이번에 군병을 출동시키려고 장정과 노약(老弱)을 점검해 보았더니, 정정의 숫자가 거의 50여만 명이었다. 우선 30만을 내보내면서 너희들을 선봉(先鋒)으로 삼는다. 너희들은 선봉이 되어 경상·전라·제주 등지를 유린한 다음, 의령과 경주 등지로 군사를 물려 둔거하면서 조선의 흩어진 군사와 유민(遺民)을 불러모아 아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크게 농사를 지어 군량을 쌓고 명년과 내명년에 해마다 차츰 거점을 빼앗는다면, 조선 지방은 장차 일본 땅이 될 것이다. 따라서 너희들의 처자도 내보내라고 이미 명령하였다. ] 하였으므로, 나 역시 관백의 명을 어길 수 없어 사람을 보내 나오게 하였다. 관백이 이번에 명령서를 보내왔는데 거기에 또 말하기를, [조선에서 산성을 많이 쌓았다고 하니, 모든 공격하고 책응(策應)할 일이 반드시 임진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의령과 경주에는 대장이 주둔하고 있다 하니, 힘껏 이 성을 공격하면 다른 성은 저절로 궤멸될 것이다. 이 두 곳은 1년이 걸리는 한이 있어도 기필코 공격하여 깨뜨려라. 공격을 잘한 자에게는 중한 상을 줄 것이고 공격을 못한 자는 중한 벌을 주겠다. ] 하였다. 그래서 여러 장수들이 기운을 내 와신상담하면서 따로 공성(攻城)할 기술을 개발하느라 날마다 머리를 모으고 상의하기를 [병목(柄木)으로 두꺼운 방패를 만들고 포대(砲臺)를 운반하며 대총(大銃)을 갖추어 앞을 가리고 나아가면 비록 돌을 쏘더라도 막을 수가 있을 것이니, 점차 성으로 육박하면서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진영을 잇대 서로 버티면 수일이 못되어 깨뜨릴 수가 있다. ] 하였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백 배나 험고한 곳이라 하더라도 어찌 패하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겠는가. 이런 기술(機術)을 알아서 미리 방지해야 한다. 조선은 으레 성을 한 겹으로 두르기 때문에 한 모서리가 무너지기만 하면 온 성 안 사람들이 모두 분궤되어 머리를 싸매고 죽기만을 기다리니 잘못이라 하겠다. 너희가 장차 형세상 부득이하여 산성으로 들어가 지킬 경우에는 노약자와 가속(家屬)을 외딴 곳에 옮기고 정병(精兵)만을 뽑을 것이며 군량과 군기(軍器)를 많이 취해 놓고 성의 기계를 4∼5겹으로 둘러 지키면 절대로 실수할 리가 없다. 외곽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중성(中城)이 아직 있고 중성을 지키지 못해도 내성(內城)이 있으니, 군사들의 마음에 믿을 바가 있어 반드시 보전하게 될 것이다. 이런 뜻을 병사에게 말하여 기관(機關)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나의 이런 말이 우리 나라에 불충(不忠)한 것처럼 보일 것이나 이 또한 전쟁을 싫어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조선에서 한두 성을 굳게 지켜 패배하지 않으면 전쟁을 종식시킬 단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병사와는 일찍이 서로 만나본 교분이 있어 신의를 저버리기 어려워 이에 감히 속마음을 다 토로한 것이다. 기구가 정제되지 못했으면 억지로 산성(山城)을 고수할 필요가 없다. 한갖 일본에게 모욕만 당하고 승승장구하여 이익을 쫓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천만 조심하라. 네가 다시 오면 내가 들은 일본의 기별을 숨김없이 다 말해주겠다. 』 하고는 무명 2필을 예물로 주었다. 나올 때에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왜인과 만나 말을 나누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제 다시 싸움이 시작될 것이니 인생(人生)들이 가련하다. 3월 중에 일본 왜선 1천여 척이 나오다가 조선의 수군이 부산 앞바다를 가로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정류했었는데 그 후에는 어디로 갔는지를 모르고 있다. 사람을 보내 탐문(探問)하고 있다는데 우리도 그 배들이 간 곳을 모른다. 지금 행장(行長)은 청정(淸正)과 공(功)을 나누지 못해 이런 환란을 초래했음을 깊이 한탄하고 있다. 청정 역시 자기가 관백에게 조선에 다시 오기를 청하였다가 아직껏 효과가 없는 것을 한탄하고 있다. 군대는 이달 중으로 바다를 건너올 것이다. 』 하였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이상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진고(進告)합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都元帥權慄馳啓曰: "慶尙右兵使金應瑞馳報內, 前(口)〔日〕 竹島 倭將豐茂守, 以伐竹之言, 恐嚇再三, 故欲探其實否, 令鄭承憲, 更爲入送, 指授酬酢之語, 則還言曰: ‘賊衆時無加減, 糧船往來不絶。 倭將豐茂守相見, 問曰: 「天兵大至云, 然耶? 關白已令諸將交戰, 朝鮮以決勝否? 六七月間, 大兵渡海, 先擊慶尙、全羅等道後, 還駐沿海, 欲奪濟州。 此時三國之民, 必盡於鋒鏑之下, 吾輩亦甚痛悶。 朝鮮何不卽講和, 而終致啓釁耶? 此非人之所爲, 乃時運之所係, 何恨之〔有〕 ? 然有此時論和, 猶可免兵禍之起。」 答曰: 「天兵二十餘萬, 已渡鴨江, 自義州至全羅等道連營, 相繼出來, 運糧連續。 觀汝等之反覆, 盡擊無遺, 有何講和之說乎?」 答曰: 「汝言正合所聞。」 我曰: 「釜山 倭等之言, 已知此意矣。」 乃言曰: 「天兵哨探, 實若已到晋州, 則勢似阻防。 以小事, 不可出兵而生釁, 取竹之事, 吾當停寢。 戰期當在七月, 朝鮮知此奇而應之, 則可免其患。」 饋酒厚待。 閑話良久, 僻左右而召通事, 附耳潛言曰: 「朝鮮以山城據守, 爲務云, 果然耶? 關白更出兇計, 令此諸將曰: 『我今方調發軍兵。 點其〔丁〕 壯老弱, 則丁壯之數, 幾至五十餘萬。 三十萬爲先出送, 以汝等爲先鋒矣。 汝等爲先鋒, 躪踏慶尙、全羅、濟州等地後, 退兵宜寧、慶州等處屯據, 召募朝鮮散卒遺民, 合我軍, 大作農事, 積峙兵糧, 明年又明年, 漸次奪據, 則朝鮮地方將爲日本之地。 汝等之妻子, 已令出送云。』 故我亦不違關白之令, 送人出來。 關白今送令書, 又言曰: 『朝鮮多築山城云, 凡攻戰策應之事, 必非壬辰之比。 宜寧、慶州大將駐寨云, 力攻此城, 他城自潰。 此兩處, 雖一年之久, 期得攻破。 能擊者, 當重賞; 不能擊者, 當重罪云。』 故諸將勵氣嘗膽, 別作攻城之術, 日以聚首相議曰: 『柄木厚防牌, 輪砲臺具大銃, 遮前而進, 則雖放石, 可以禦之, 漸次迫城, 又設木柵, 連陣相持, 則不數日而可破。』 如此則雖百倍之險, 安保不敗乎? 知此機術, 預防之。 朝鮮例以城圍一匝, 一隅見敗, 則一城之人, 皆以奔潰, 聚首待死, 可謂誤矣。 汝將勢不得已入守山城, 老弱家屬, 移置深僻之處, 只抄精兵, 多聚軍糧、軍器, 城機四五匝守之, 則萬無一失。 外郭不守, 中城尙存, 中城失守, 內城亦存, 軍心有恃, 必爲保全。 以此意告于兵使道, 勿失機關如何? 我之此言, 似涉不忠於我國, 而亦出於厭兵之故也。 朝鮮一二城, 固守不敗, 則不無解兵之漸, 故如是言之。 兵使曾有相拜之分, 信義難負, 玆敢悉露心腹矣。 器具不齊, 山城不必强爲。 徒爲見侮於日本, 而乘勝逐利也。 千萬愼之。 汝復來則吾當聽日本之奇, 無隱通示。」 木二匹面皮給之矣。 出來時, 名不知一倭, 相逢接話曰: 「今將更戰, 人生可憐。 三月中, 日本 倭船一千餘隻出來, 聞朝鮮舟師橫隔釜山前洋停留, 其後不知去處。 差人探問而去, 我等亦不知其船所向矣。 今則行長深恨, 與淸正不分功而致此患, 淸正亦恨自請於關白, 再來朝鮮, 迄無成效矣。 兵馬渡海之期, 當在此月中」 云云。’ 進告據牒呈事。" 啓下備邊司。
- 【태백산사고본】 57책 89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3책 24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