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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 10월 23일 己卯 2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좌승지 황사우가 대행 대비의 시책문을 지어 바치다

대행 대비(大行大妃)의 시책문(諡冊文)은 좌승지 황사우(黃士祐)가 지어 바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중(喪中)에는 슬픔을 지극히 하는 것이므로 신종(愼終)463) 은 본디 스스로 극진히 하는 것입니다. 예절에 있어서는 시(諡)를 중하게 여기는 것이므로 역명(易名)464) 은 오직 지극히 공정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또한 상법(常法)에 따라 아름다운 호칭을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대행 자순 왕대비(大行慈順王大妃) 윤씨(尹氏)께서는 정숙하고 신중하고 밝고 슬기로우며 부드럽고 아름답고 고요하고 전일하여, 상서(祥瑞)를 여는 신녀(神女)의 일을 시작하고 길상(吉祥)에 들어 맞는 사록(沙麓)465) 의 일이 성취되었습니다.

성품은 하늘을 받들어 순하고 덕은 땅에 어울려 끝이 없으며, 요조(窈窕)는 주강(周姜)466) 을 사모하여 효성이 양전(兩殿)에 사무쳤고, 이치를 추구하여 성취시키도록 경계했으므로 다스림이 이남(二南)467) 에 이르렀습니다. 중도의 퇴폐가 잠시 지극히 높은 자리에 당하고 중간의 재앙이 또한 가까운 사람에게서 싹텄으나 재앙을 돌이켜 흥복시키는 큰 계책을 이루었으니, 한때의 자애를 주저없이 끊으신 것입니다.

사직(社稷)이 다시 안정된 것은 참으로 곤도(坤道)의 큰 조화였고 의뢰할 원량(元良)이 있는 것도 자손을 위하여 평안을 누릴 계책을 남기신 것이었습니다. 외가(外家)에 사은(私恩)을 끊고 내곤(內壼)의 겸허(謙虛)를 바라며, 서지(庶支)를 사랑하되 내 소생처럼 보고 한 나라의 어머니로서 교화를 몸소 행하셨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삼가 양육을 받았습니다.

백세토록 강녕하시기를 바라고 장춘(長春)의 즐거움을 길이 받들려 하였더니, 잠화(簪花)가 갑자기 떨어지자 소내(素柰)468) 의 재앙이 이미 맺혀졌고 와석(媧石)469) 을 깁지 못하여 아픔이 하늘끝까지 사무칩니다. 이에 아름다움을 기리는 정성으로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강구하여 길일(吉日)을 잡아 보책(寶冊)을 베풀어, 삼가 정현(貞顯)이란 존시(尊諡)를 올리고 소의 흠숙(昭懿欽淑)이란 휘호(徽號)를 더 올립니다.

밝은 신령께서 현호(顯號)를 굽어 받으시고, 큰 명을 내려 자손이 더욱 번창하게 하고, 큰 계책을 잠잠히 도와 근본이 굳게 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26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

  • [註 463]
    신종(愼終) : 부모의 장사와 제사 등을 정중히 모심.
  • [註 464]
    역명(易名) : 이름을 바꾸어 시호를 올림.
  • [註 465]
    사록(沙麓) : 춘추 시대(春秋時代) 진(晉)나라에 있던 토산(土山)의 이름. 《한서(漢書)》 원후전(元后傳)에 의하면 원후(元后:원제(元帝)의 후(后)임)의 할아버지 왕하(王賀)는 무제(武帝) 때에 수의 어사(繡衣御史)로서 위군(魏郡)의 떼도둑과 겁먹고 주저한 관리를 잡았으나 놓아 주고 처형하지 않았는데, 타부(他部)에서는 이 때문에 1만여 인이 처형되기까지 하였음. 왕하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하여 면직되어, 위군 원성(元城)으로 이사하여 살았는데, 그곳 사람들이 왕하를 덕이 있는 사람으로 일컬었으며, 한 늙은이가 말하기를 "춘추 때에 사록이 무너졌는데 사(史:일관(日官)임)가 점치기를 ‘음(陰)이 양웅(陽雄)이 되어 토(土)와 화(火)가 상승(相乘)하므로 사록이 무너졌으니, 645년 뒤에 성녀(聖女)가 있어 흥(興)할 것이다.’ 하였으니, 그것이 제(齊)나라의 전씨(田氏:왕하는 전씨의 후손임)일 것이다. 이제 왕 옹유(王翁孺:옹유는 왕하의 자(字)임)가 이사한 곳이 바로 그 땅에 해당하고 햇수도 맞으니, 80년 뒤에 귀한 여인이 있어 천하를 흥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과연 왕하의 손녀인 원후는 애제(哀帝)가 죽은 뒤에 섭정(攝政)하였는데, 그해가 바로 사록이 무너진 뒤 645년에 해당되었다. 왕하의 아들 금(禁)의 아내 이씨(李氏)가 원후를 임신할 때에 달이 품안에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원후가 자라서 부도(婦道)를 갖추었는데 약혼하면 상대가 죽곤하였으므로, 왕금이 복수(卜數)하는 자에게 점치게 하였더니 크게 귀하여질 것이라 하였음. 그래서 글을 가르치고 음악을 익히게 하여 18세에 액정(掖庭)에 들여보냈는데 태자(太子:뒤의 원제)의 후궁 10여 인이 다 임신하지 못하였으되 원후만이 임신하여 성제(成帝)를 낳았음. 뒤에 왕망(王莽)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을 때에 원후는 옥새(玉璽)를 지키고 내어주려 하지 않았으며, 후한(後漢)이 일어나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는 망하였음.
  • [註 466]
    주강(周姜) : 주 태왕(周太王)의 비(妃)인 태강(太姜). 태왕의 아들인 왕계(王季)의 비 태임(太任)과 왕계의 아들인 문왕(文王)의 비 태사(太姒)와 함께 삼모(三母)로 일컬어짐. 삼모가 모두 부덕이 있어 주실(周室)의 기업(基業)에 도움이 컸음.
  • [註 467]
    이남(二南) :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의 합칭. 주 문왕(周文王) 때에 도읍을 풍(豊)으로 옮기고 옛땅인 기주(岐周)를 나누어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의 채읍(釆邑)으로 삼았고 주공은 국중(國中)의 정치를 맡고 소공은 제후(諸侯)를 호령하였는데, 교화가 크게 이루어졌음. 이남은 문왕과 그 후비(后妃)의 덕화를 노래한 것이라 함.
  • [註 468]
    소내(素柰) : 흰 능금나무 꽃으로 죽음을 뜻함. 진 성제(晉成帝)의 황후인 두후(杜后)가 얼굴은 아름다왔으나 시집갈 때까지 이[齒]가 나지 않다가 성제에게 납채(納釆)하자 그날로 이가 다 났는데, 황후에 오른 지 6년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음. 이보다 앞서 삼오(三吳)의 여자들이 흰옷에 흰꽃을 머리에 꽂고서는 직녀가 죽어서 이렇게 소복했다고 했는데 그 꽃이 흰 능금꽃과 같았으며, 마침내 두후가 죽었음. 《진서(晉書)》 후비(后妃) 성공두 황후전(成恭杜皇后傳).
  • [註 469]
    와석(媧石) : 여와씨(女媧氏)의 돌. 여와씨는 중국 상고의 임금 복희씨(伏羲氏)의 누이로서 복희씨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되어 처음으로 생황(笙簧)을 만들었고, 제후 공공씨(共工氏)가 축융(祝融)과 싸워서 이기지 못하고 화가 나서 머리를 부주산(不周山)에 부딪쳐 죽자 천주(天柱)가 부러지고 지유(地維)가 손상되니, 여와씨가 오색석(五色石)을 만들어 하늘을 보완하고 오족(鰲足)을 잘라서 사극(四極)을 세웠다 함.

○大行大妃諡冊文, 左承旨黃士祐製進。

喪止於哀, 愼終固所自盡; 禮重乎諡, 易名惟以至公。 爰擧徽稱, 或遵彝憲。 恭惟大行慈順王大妃 尹氏, 淑愼明惠, 柔懿靜專。 肇神女之啓祥, 果沙麓之協吉; 性承天以乃順, 德合地而無疆。 窈窕思媚乎周姜, 孝格兩殿; 儆戒相成乎宣考, 治臻二南。 中圮頃遭於崇極, 間孽或萌於近昵。 顧能定興復之大計, 豈難割慈愛於一時? 社稷再安, 寔坤道之鴻造; 元良有賴, 亦孫謀之燕貽。 絶恩私於外家, 仰謙沖於內壼。 子庶支視猶己出, 母一國化自躬行。 渺予愚侗, 祗承鞠育, 庶望康寧於百歲, 永奉怡愉於長春。 簪花忽傳, 災已構於素奈; 媧石莫補, 痛罔極於昊天。 玆用歸美之誠, 以講追崇之典。 吉日斯卜, 寶冊寔陳, 謹上尊諡曰貞顯, 加上徽號曰昭懿欽淑。 伏冀明靈, 俯膺顯號, 申錫景命, 以衍瓜瓞之緜; 默佑洪圖, 俾繫苞桑之固。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17책 26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사(宗社)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