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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실록 69권, 중종 25년 8월 23일 庚辰 2번째기사 1530년 명 가정(嘉靖) 9년

산릉을 간심하는 것과 지문에 대해 논의하고 비망기를 예조에 내리다

삼공 및 예조에 전교하기를,

"산릉(山陵)을 친히 간심(看審)하는 것이 예문에는 없는 일이지만 옛 사적(史籍)에는 있었고 또한 조종조에도 있었던 일이므로, 내가 친히 간심하고 싶은데 해도 되겠는가?"

하였다. 삼공 및 예조가 아뢰기를,

"세종조에는 형편에 따라 친히 간심하신 일이 있었지만 성종조에는 승지를 보내 간심했습니다. 이번은 그때와는 다르니 아랫사람들을 보내 간심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국가 초기의 일을 오늘날에도 그대로 거행함은 마땅하지 않은데다, 상사에 관한 일은 후세의 일정한 전례가 될 것입니다. 어찌 자손들에게 보여줄 계책을 생각해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모두 온당치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산릉으로 내려가신 다음에 친히 가서 제사하는 것이 곧 임금이 하는 상례의 일이다. 그러나 산릉을 친히 간심하는 일도 하지 않을 수 없다. 옛적에도 그렇게 한 분이 있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삼공 및 예조가 아뢰기를,

"상께서 친히 간심하고자 하시는 것은 정이 한없어 그러시는 것이지만, 유사(有司)로 하여금 보도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어찌 산릉을 간심하는 한 가지 일을 가지고 성의와 공경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예문에 있는 일들도 오히려 다 거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선왕(先王)들도 혹 간심을 거행하지 못한 적이 있는데, 어찌 친히 간심하려고만 하십니까? 신들의 생각은 모두 온당치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지문(誌文)349) 을 어떻게 하려는가. 행적(行迹)을 보지 않아도 오히려 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행적을 보아야 되겠는가?"

하였다. 삼공 및 예조가 아뢰기를,

"지문은 이미 심사순(沈思順)으로 하여금 짓게 했습니다. 다만 행적을 보지 못했으므로 시호(諡號)를 의논할 때는 부득이 의범(懿範)과 선행(善行)을 안 다음에 해야 합니다."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조금 있다 비망기(備忘記)를 예조에 내리며 이르기를,

"대행 왕대비(大行王大妃)께서 생존하셨을 적에 언문(諺文)으로 써 놓은 것을, 내가 지금 황망하고 총총하여 대략만 쓴 것이다."

하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자순 왕대비(慈順王大妃) 윤씨(尹氏)파주인(坡州人)이다. 아버지 윤호(尹壕)가 신창 현감(新昌縣監)으로 있을 때인 임오년350) 6월 무자일에 그 고을 관아(官衙)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창(昌)자를 가지고 창년(昌年)이라고 이름을 지었었다. 이에 앞서 어머니 전씨(田氏)가 꿈에 하늘 위의 채색 구름 속에서 천녀(天女)가 내려와 품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서 매우 기이하게 여겼는데, 그길로 임신하였으므로, 부모들이 마음에 매우 특이하게 여겼었다. 나이 12살이 되던 계사년351) 6월 계유일에 숙의(淑儀)로 뽑혀 들어왔는데, 정희(貞熹)소혜(昭惠)352) 두 왕후께서 특별하게 무육(撫育)하여 부도(婦道)로써 가르치니 받들어 순종하고 어기는 것이 없으므로, 정희 왕후께서 항시 칭찬하고 감탄하기를 ‘너를 두고 시험해 보니 사람은 반드시 나이가 어려서 뽑아들인 다음에야 가르치기가 쉽기도 하고 또한 익히기가 쉽기도 하겠다.’ 하셨고, 정희 왕후께서 항시 성종께 분부하시기를 ‘윤 숙의(尹淑儀)는 나이가 젊으면서도 순박하고 조심스러우며 말이 적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하시었다.

기해년에 옹주(翁主)를 낳으셨고 경자년353) 10월에 왕비(王妃)로 책봉(冊封)되셨는데, 성품이 인자하고 은혜로왔으며 총명하고 민첩하여 널리 배워 문견(聞見)이 많으셨다. 성종 섬기기를 소심(小心)하게 날마다 새롭게 하고 조금도 질투하는 일이 없었으며, 모든 비빈(妃嬪)들의 자녀를 어루만져 돌보기를 소생(所生)처럼 하여 시종(始終) 간격이 없게 하였으며, 위로는 자위(慈闈)354) 들께 효도하고 아래로는 권속(眷屬)들을 무육하여, 비록 옛적의 왕후라 하더라도 더할 수 없이 하였다. 성종께서 매양 칭찬하기를 ‘예부터 부인들이 질투하지 않은 사람이 적은데, 나의 마음이 편안한 것은 진실로 중궁(中宮) 때문이니 현비(賢妃)라 할 만하다.’ 하였고, 소혜 왕후께서도 얼굴에 기쁨이 넘치며 항시 칭찬하기를 ‘중궁다운 사람이 들어 왔으니 낮이나 밤이나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하시었다.

을사년355) 11월에 아홉 달 만에 공주(公主)가 출생하므로 궁중(宮中)이 깜짝 놀랐었고, 무신년 3월 기사에 대군(大君) 【곧 금상(今上)임.】 이 출생하였고 경술년 11월에 공주가 출생하였으며, 정미년 2월과 계축년 5월에는 본가(本家)에 행행하여 헌수(獻壽)하셨는데, 세자(世子)가 세자빈(世子嬪)과 거가(車駕)를 호위하고 잔치에 가게 되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사롭게 여겼다. 임자년 5월에는 창덕궁(昌德宮) 금원(禁苑)에서 친잠(親蠶)356) 하시었다.

연산군(燕山君)이 일찍 자모(慈母)를 잃게 되어서는 대비께는 어루만져 기르시되 소생에게보다도 배나 하시므로, 안팎이 모두 칭찬하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불행히 갑인년 12일에 성종께서 승하하시자 대비께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여러날을 먹지 않으셨는데, 이로 인해 병이 나 거의 위독하게 되니 소혜 왕후께서 갖가지로 돌보아 치료하셨었다.

문소전(文昭殿)357) 과 연은전(延恩殿)의 천신(薦新)358) 도 번번이 올리고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정성과 효도는 천성(天性)으로 타고나시었고, 연산군이 어둡고 어지러움에 미쳐서는 근심되는 마음과 애타는 생각으로 침식(寢息)이 편치 못하시어 이로 인해 병이 나셨다가 간신히 나으시기도 하였었다.

갑자년359) 4월에는 소혜 왕후께서 훙서(薨逝)하시므로 애통이 망극하셨는데, 연산군단상(短喪)360) 하려고 했었다. 대비께서 옛 예법에 의거하여 분부하시기를 ‘삼년복은 천자(天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똑같은 천하의 공통된 상사인데 어찌 단상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하시자, 연산군이 발끈 노하면서 ‘부인은 삼종(三從)의 의리361) 가 있는 법인데, 시왕(時王)362) 의 법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는가?’고 했었다. 대비께서 마음에는 크게 한스러웠지만 억지로 따르기로 하여 앞당겨 상복을 벗었었고, 좌우 사람들에게 분부하시기를 ‘내가 소혜 왕후께 죄를 지었다.’ 하시면서 종신토록 유감스럽고 한탄스럽게 여기셨다.

정축년363) 5월에는 갑자기 큰 병이 나시어 제안 대군(齊安大君)의 집에 이어(移御)하셨다가 6월에 차도가 있으므로 7월에 도로 창경궁(昌慶宮)으로 돌아오셨다. 임오년 12월에는 또 감기가 드시어 거의 위독하게 되었었는데, 내가 친히 내원(內苑)에서 분향(焚香)하고 하늘에 빌어선지 큰 병이 저절로 나으셨다.

경인년364) 6월에 조금 아프신 병이 점점 더치어 석 달이나 낫지 않으시므로 8월 초엿샛날 계성군(桂城君)의 집에 이어하셨는데 증세가 위중해지므로 8월 17일에 도로 경복궁 승정원으로 오셨으나 증세가 더욱 위급해져, 19일에 다시 경복궁동궁에 드시었다가 22일에 정침에서 훙서하셨다."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47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349]
    지문(誌文) : 죽은 사람의 성명·생년월일·죽은 날짜와 행적 및 무덤의 소재지와 좌향(坐向) 등을 기록한 글.
  • [註 350]
    임오년 : 1462 세조 8년.
  • [註 351]
    계사년 : 1473 성종 4년.
  • [註 352]
    소혜(昭惠) : 덕종(德宗)의 왕비 한씨(韓氏).
  • [註 353]
    경자년 : 1480 성종 11년.
  • [註 354]
    자위(慈闈) : 시어머니를 뜻함.
  • [註 355]
    을사년 : 1485 성종 16년.
  • [註 356]
    친잠(親蠶) : 누에치기 장려를 시범하기 위하여 왕비가 친히 잠실(蠶室)에 나아가 양잠(養蠶)하는 것.
  • [註 357]
    문소전(文昭殿) : 태조가 퇴위(退位)하고 정종이 즉위하여 그의 생모요 태조의 전처인 한씨(韓氏)를 신의 왕후(神懿王后)로 추존하고 별전(別殿)을 세워 신주를 봉안하되 인소전(仁昭殿)이라 하였다가 태종 때에 문소전으로 개칭하고 태조의 신위도 봉안했으며, 세종 때에 태종의 신위도 봉안했음.
  • [註 358]
    천신(薦新) : 그 해에 새로 생산된 것을 먼저 사당에 올리는 것.
  • [註 359]
    갑자년 : 1504 연산군 10년.
  • [註 360]
    단상(短喪) : 연산군 때 삼년상(三年喪)의 기간이 길어 불편하다고 억지로 기간을 단축한 것. 곧 궁인(宮人)들은 27일, 무수리[水賜]들은 12일, 사대부는 27일, 일반 서민은 12일로 제한한 것. 경박한 무리들은 이대로 했지만 근신한 사람들은 전대로 하다가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음.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註 361]
    삼종(三從)의 의리 : 여자가 지켜야 하는 세 가지 도리. 곧 출가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라 하고 시집가서는 남편을 따라 하고 남편이 죽게 되면 아들을 따라 하는 것.
  • [註 362]
    시왕(時王) : 현재의 임금.
  • [註 363]
    정축년 : 1517 중종 12년.
  • [註 364]
    경인년 : 1530 중종 25년.

○傳于三公及禮曹曰: "山陵親審, 雖禮文所無之事, 古史有之, 又有祖宗朝事。 予欲爲親審, 其可耶?" 三公及禮曹啓曰: "世宗朝, 有從便親審之事, 而成宗朝遣承旨看審。 今時異於古, 遣下人看審猶可。 國初之事, 不宜行於今日, 而喪事爲後世格例, 何不思示子孫之計乎? 臣等皆以爲未便。" 傳曰: "下山陵而後, 親往祭之, 乃人君常事, 然親審山陵, 亦不可不爲也。 古有行之者, 故予亦欲行之耳。" 三公及禮曹啓曰: "自上欲爲親審, 情雖無盡, 使有司見之可也。 豈可以看山一事, 謂盡其誠敬耶? 禮典之事, 猶不可盡行, 故先王或不能行, 何乃欲爲親審? 臣等意皆以爲未便。" 傳曰: "知道。" 仍傳曰: "誌文何以爲之? 其不見行迹, 而猶可爲耶? 必見行迹而爲之耶?" 三公及禮曹啓曰: "誌文, 已令沈思順製之, 但未見實迹矣。 議諡時, 不得已知其懿範善行而後爲之。" 傳曰: "知道。" 俄而下備忘記于禮曹曰:

大行王大妃生時, 以諺書留之。 今予遑遽, 略書大槪。 其文曰: "慈順王大妃 尹氏, 坡州人也。 父新昌縣監時, 壬午六月戊子, 生於縣衙, 故以昌字作名曰: ‘昌年。 ’ 先是, 母田氏夢, 見於天上彩雲中, 天女下降入懷, 甚奇之, 因以有(脤)〔娠〕 。 父母心甚異焉。 年十二歲癸巳六月癸酉, 選入淑儀, 貞熹昭惠兩王后, 特加撫之, 敎以婦道, 承順無違。 貞熹王后常稱歎曰: ‘以爾試觀之, 人必幼年選入, 然後可以易敎, 亦可易習。’ 貞熹王后, 又常敎成宗曰: ‘尹淑儀年少, 而醇謹寡言, 異於他人。’ 己亥, 生翁主, 庚申十月, 冊封王妃。 性慈惠聰敏, 博學多聞。 事成廟, 小心日新, 小無妬忌, 撫恤諸妃嬪子女如己出, 終始無間。 上孝慈闈, 下撫眷屬, 雖古王后, 無以加焉。 成宗每稱歎曰: ‘自古婦人, 鮮不妬忌, 予心之安, 實由中宮, 可謂賢妃。 昭惠王后喜溢顔色, 常稱曰: ‘中壼得人, 夙夜何憂?’ 乙巳十一月, 九朔生公主, 中宮驚駭。 戊申三月己巳, 生大君, 【卽今上也。】 庚戌十一月, 生公主, 丁未二月癸丑五月, 幸本第獻壽, 世子與嬪, 扈駕赴宴, 人皆稱慶。 壬子五月, 親蠶于昌德宮禁苑。 燕山早失慈母, 大妃撫育, 倍於己子, 內外皆稱歎不已。 不幸甲寅十二月, 成宗晏駕, 大妃撫膺痛哭, 不食數日。 因此患疾, 幾至於危, 昭惠王后百般救藥。 文昭延恩薦新, 數進不怠, 誠孝出於天性。 遭燕山昏亂, 憂心焦慮, 寢息不安。 因此罹病, 艱難得差。 甲子四月昭惠王后薨逝, 哀痛罔極。 燕山欲短喪, 大妃據古禮敎之曰: ‘三年之喪, 自天子達於庶人, 天下之通喪也。 豈可爲短喪? 我不敢從。’ 燕山勃然曰: ‘婦有三從之義, 時王之法, 何可不從?’ 大妃心雖大恨, 黽勉從之。 徑脫衰服, 敎諸左右曰: ‘我得罪於昭惠王后, 終身憾恨焉。’ 丁丑五月, 忽患大病, 移御于齊安大君家, 六月得差, 七月還御于昌慶宮。 壬午十二月, 又感疾幾至於危。 予親禱于內苑, 焚香祝天, 大病自愈。 庚寅六月, 因微𧏮轉劇, 彌留三朔, 八月初六日, 移御于桂城君家, 證勢危重。 八月十七日, 還御于景福宮承政院, 證轉危革, 十九日, 還入于景福宮 東宮, 二十二日, 薨于正寢。"


  • 【태백산사고본】 35책 69권 12장 B면【국편영인본】 17책 247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