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 대왕 묘지문[誌文]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대왕(大王)의 휘(諱)는 이모(李某)인데 덕종(德宗)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 한씨(韓氏)가 천순(天順) 원년117) 정축년 7월 30일(辛卯)에 왕을 탄생하셨다. 덕종이 세자가 되어 일찍 훙(薨)하자 세조(世祖)께서 왕을 궁중에서 양육하며, 봉(封)하여 자산군(者山君)으로 삼으셨다. 왕은 타고난 자질이 밝고 슬기로우니, 세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였다. 일찍이 동모형(同母兄)인 월산 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과 더불어 궁중에 있다가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지며 그 자리에서 시인(寺人)118) 에게 벼락이 떨어지자 좌우가 모두 넘어졌는데 왕은 홀로 예사롭게 여기셨으므로, 세조가 더욱 이상하게 여겨서 일찍이 말하기를, ‘이 아이는 기도(器度)가 우리 태조(太祖)와 비슷하다.’고 하셨다. 성화(成化) 5년119) 기축년에 예종(睿宗)이 훙(薨)하자 사자(嗣子)가 어리고 어리석으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의논을 정하여 왕을 후사(後嗣)로 삼으시고 경인년120) 에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고명(誥命)을 내렸다. 왕이 신료(臣僚)에게 명하여 편의(便宜)를 진술하게 하며 어질고 능한 이를 천거하고 효자(孝子)·절부(節婦)를 정려(旌閭)하며 그 효행이 더욱 뛰어난 자를 녹용(錄用)하게 하셨다. 경연관(經筵官)으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 진강(進講)하게 하고 밤에도 소대(召對)하도록 하여, 상례(常例)로 삼게 하셨다. 신묘년121) 에 시학(視學)122) 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시고 문사(文士)로 하여금 경의(經義)123) 를 문난(問難)하게 하시며 임금을 잘 보좌하여 정치를 잘한 공훈이 있는 여러 신하들을 기록하여 공신호(功臣號)를 내려 주고 대간(臺諫)이 일을 말하여 직책을 다한 자에게는 각각 작(爵) 1급(級)을 내려 주셨다. 임진년124) 에 교서(敎書)를 내려, 백성에게 절검(節儉)하기를 유시(諭示)하시고, 역대(歷代)의 제왕(帝王)과 후비(后妃)의 착하고 악한 것으로 본받을 만하고 경계할 만한 것을 채택하여 정리해 세 편(編)을 만들어서, 이름을 《제왕명감(帝王明鑑)》·《후비명감(后妃明鑑)》이라고 하셨다. 또 밝은 임금과 어두운 임금의 사적(事跡)을 병풍에 그림을 그려서 앉거나 눕거나 관찰하면서 반성하셨으며, 응방(鷹坊)에 해동청(海東靑)이 있었는데 놓아 보내도록 명하시고 끝내 다시 기르지 아니하셨다. 갑오년125) 에 사신을 보내어 덕종(德宗)을 추봉(追封)하여 왕으로 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를 윤허하여 시호(諡號)를 내리기를 회간(懷簡)이라고 하고, 아울러 인수 왕대비(仁粹王大妃)의 고명(誥命)을 내렸는데, 왕이 대사(大赦)를 시행하고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을 내려 주었다. 을미년126) 에 선농(先農)에 제사지내고 적전(籍田)을 갈며 왕비가 친잠(親蠶)하였다. 존경각(尊經閣)을 성균관(成均館)에 세우고 경적(經籍)을 내려 주어서 간직하게 하셨다. 정유년127) 에 선성(先聖)을 참배하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셨으며, 탄일(誕日)의 축수재(祝壽齋)를 파하게 하셨다. 무술년128) 에 선성에게 제사하고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노인(老人)들에게 좋은 말을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명하여 고금(古今) 동인(東人)의 시문(詩文)을 모아서 이름을 《동문선(東文選)》이라고 하였고, 지리지(地理誌)를 찬(撰)하게 하여 이름을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라고 하였으며, 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찬(撰)하게 하셨다. 기해년129) 에 황제가 군사를 발하여 건주(建州)의 야인(野人)을 토벌하면서 칙서(勅書)를 내려서 군사를 내어 정벌을 돕게 하였는데, 왕이 군사를 발하여 이를 격파하고 포로를 바치니, 황제가 칙서를 내려 포상(褒賞)하였다. 신축년130) 에는 원유(園囿)에 나무하고 사냥하는 것을 금하는 법을 완화시켰다. 계묘년131) 에 금상(今上)132) 을 책봉하여 세자(世子)로 삼고, 3월에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훙(薨)하자 3년상(三年喪)의 복(服)을 입으셨다. 갑진년133) 에 중외(中外) 관리의 선악[淑慝]을 명확히 구별하여 올리고 내쳤으며, 성균관(成均館) 학생에게 전지(田地) 4백 결(結)을 내려 주고 향학(鄕學)에도 전지를 내려 주었는데, 차등을 두셨다. 을사년134) 에 명하여 이 뒤로는 재가(再嫁)한 여자의 자손은 조반(朝班)135) 에 끼이지 못하게 하셨다. 세조조(世祖朝)에 일찍이 《동국통감(東國通鑑)》을 편찬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는데, 계속해서 완성하도록 명하셨다. 정미년136) 에 고려(高麗)의 충신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게 하셨다. 홍치(弘治)무신년137) 에 인수 대비(仁粹大妃)가 병이 있자, 왕이 일찍이 시약(侍藥)하고 병이 낫자 대사(大赦)하며 여러 신하에게 작(爵) 1급을 내려 주셨다. 기유년138) 에 향위(鄕圍)139) 의 책사(策士)140) 가 ‘부처에게 제사하여 재앙을 물리친다.’는 말을 한 자가 있었는데 수교(手敎)로 이를 귀양보내어 내쫓게 하였다. 경술년141) 에 여주(驪州)에 거둥하여 영릉(英陵)에 참배하고 고을 백성에게 이해 조세(租稅)의 반(半)을 감해 주게 하시고, 지나가는 곳 고을에 관원(官員)을 보내어 선성묘(先聖廟)에 제사하게 하셨으며 학생에게 쌀을 차등이 있게 내려 주셨다. 신해년142) 에 명하여 지금부터 형제(兄弟)·숙질(叔姪)·당형제(堂兄弟)143) 가 서로 소송하여 도리에 어긋난 자는 사변(徙邊)144) 하게 하셨으며, 영안도(永安道)에 야인(野人)이 침략하여 진장(鎭將)을 죽이니 군사를 보내어 토벌하여 격파하셨다. 임자년145) 에 도승법(度僧法)을 혁파하고 선성(先聖)에게 제사하여 스승과 학생 및 백관에게 크게 잔치를 베풀고 악장(樂章)을 짓도록 하여 흥을 돕게 하였으며, 전대(前代)의 군왕(君王)과 명현(名賢)의 능묘(陵墓)가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도록 명하시고 초목(樵牧)을 금하게 하셨다. 갑인년146) 가을에 왕이 편찮으시면서도 서무(庶務)를 재결하시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아니하셨고 12월 24일(戊寅)에 위독하셨는데 관복(冠服)을 갖추고 대신을 불러 보셨으며, 이튿날 25일(己卯)에 정침(正寢)에서 승하하시니, 향년(享年)이 38세이고, 재위(在位)하신 지 26년이셨다. 상(喪)이 알려진 날에 비록 심산 궁곡(深山窮谷)의 백성이라도 분주히 부르짖으며 슬퍼하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왕은 총명 영무(聰明英武)하시고 관인 공검(寬仁恭儉)하시며 경사(經史)에 관통하고 성리학(性理學)에 더욱 조예가 깊으시며, 성력(星曆)·종률(鍾律)에도 강구(講究)하지 아니한 바가 없으시며 사예(射藝)·서화(書畫)에도 그 오묘한 경지에 이르셨다. 효우(孝友)는 천성에서 나와 제사에 연고가 있지 아니하면 반드시 몸소 행하시고 반드시 조심하셨다. 세 대비(大妃)를 봉양(奉養)함에 있어서는 정성과 공경을 극진히 하시고 동복형[母兄]147) 을 대우하기를 은혜와 예(禮)가 지극히 갖추어지게 하였으며, 여러 아들은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셨고, 종족(宗族)에게는 그 화목함을 극진히 하셨다. 대신을 존경하시고 대간(臺諫)을 예우(禮遇)하사 조용히 상의하시고 허심(虛心)으로 채택하여 받아들이시며, 강관(講官)을 사랑하고 대우하여 특별한 은혜를 더하시고 매양 경연(經筵)에서 힘써 받아들이되, 오히려 넓지 못하다고 여기시어 2품 이상 고문(顧問)이 될 만한 자를 골라 날마다 돌려가면서 참시(參侍)하게 하여 이름을 특진관(特進官)이라 하셨다. 그리고 낭리(郞吏)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주와 행실을 자세히 알아서 쓰는 데에 각각 그 능함을 다하게 하셨다. 권강(權綱)148) 을 모두 잡으시고 명작(名爵)149) 을 아끼고 중하게 여기시어 그 어짊을 알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뽑아 쓰며, 만일 명의(名義)150) 를 범하면 비록 재주가 있더라도 반드시 물리치며, 너그러움으로써 아랫사람을 제어하고 죄가 의심스러우면 용서함이 많았으되, 오직 환시(宦寺)에게는 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반드시 징계하셨다. 늙은이를 봉양하고 고독(孤獨)을 구휼하며 상벌(賞罰)은 분명히 하시고 형벌을 삼가하시며, 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정도(正道)151) 를 붙드시며 유전(遊畋)152) 을 끊으시고 일욕(逸欲)153) 을 경계하며 충효(忠孝)하는 이를 녹용(錄用)하고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시며, 문묘(文廟)를 증수(增修)하고 학름(學廩)을 넉넉하게 하셨으며, 장사(將士)를 훈련하고 변수(邊帥)154) 를 골라서 임명하시며 열무(閱武)155) 와 강수(講蒐)156) 를 반드시 때를 맞추어 하셨다. 재앙(災殃)을 만나 기도하여 물리치기를 주청하면, 이르시기를,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덕을 닦는 데 달려 있다.’고 하시고 풍년이 들어 부세(賦稅)를 더하기를 주청하면, 이르시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부족하겠는가?’고 하시며, 진선(進膳)을 물리치면서 이르시기를, ‘위를 받드는 예(禮)가 비록 부지런하다 하더라도 아랫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뜻이 또한 간절하다.’고 하시고, 예연(禮宴)을 정지하도록 하시면서 이르시기를,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는데 홀로 즐기는 것이 가하겠는가?’고 하셨으니, 위대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참으로 천지 부모와 같은 마음이로다. 하늘이 돕지 아니하여 갑자기 세상을 버리시는 데 이르니, 애통하도다.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양음(亮陰)157) 에 있으시면서 애모(哀慕)함이 다함이 없어 여러 신하를 거느리시고 존시(尊諡)를 ‘인문 헌무 흠성 공효 대왕(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이라 하고, 묘호(廟號)를 ‘성종(成宗)’이라 하셨다. 을묘년158) 4월 초6일(己未)에 광주(廣州) 소재지 서쪽의 학당리(學堂里) 언덕에 안조(安厝)159) 하고 이름을 선릉(宣陵)이라 하였다. 아아! 삼대(三代)160) 이하로 처음부터 끝까지 덕(德)이 온전한 임금이 적은데, 우리 성종께서는 순수(純粹)하여 의논할 것이 없다. 처음 잠저(潛邸)에 계실 때에 영의정(領議政) 한명회(韓明澮)의 따님을 맞이하여 즉위하자 비(妃)로 봉하였는데 아들이 없이 훙(薨)하였으므로 시호를 공혜(恭惠)라 하였고, 숙의(淑儀) 윤씨(尹氏)를 올려서 비(妃)로 삼으니 바로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의 따님인데, 금상 전하(今上殿下)를 탄생하였다. 또 숙의 윤씨를 올려 비로 삼으니, 바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호(尹壕)의 따님이다. 1남(男)을 탄생하였으니, 이역(李懌)161) 인데, 진성 대군(晉城大君)을 봉하였다. 숙의 엄씨(嚴氏)가 1녀(女)를 탄생하였으니, 공신 옹주(恭愼翁主)인데, 청녕위(淸寧尉) 한경침(韓景琛)에게 하가(下嫁)하였다. 숙의 권씨(權氏)가 1남을 탄생하였는데, 어리다. 숙용(淑容) 정씨(鄭氏)가 2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이행(李㤚)은 안양군(安陽君)으로 지사(知事) 구수영(具壽永)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봉(李㦀)은 봉안군(鳳安君)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 조기(趙紀)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여(女)는 어리다. 숙용 홍씨(洪氏)가 7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혜숙 옹주(惠淑翁主)는 고원위(高原尉) 신항(申沆)에게 하가(下嫁)하였고, 이수(李𢢝)는 완원군(完原君)으로 증(贈) 좌찬성(左贊成) 최하림(崔河臨)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이염(李恬)은 회산군(檜山君)으로 봉사(奉事) 안방언(安邦彦)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이돈(李惇)은 견성군(甄城君)으로 참봉(參奉) 신우호(申友灝)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나머지는 어리다. 숙원(淑媛) 하씨(河氏)가 1남을 탄생하였으니, 이순(李恂)인데, 계성군(桂城君)으로, 판관(判官) 원치(元菑)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숙원 김씨(金氏)가 3남 3녀를 탄생하였는데, 휘숙 옹주(徽淑翁主)는 풍원위(豐原尉) 임숭재(任崇載)에게 하가하였고, 경숙 옹주(敬淑翁主)는 아직 하가하지 아니하였으며, 나머지는 어리다. 숙원 권씨(權氏)가 1남 1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숙원 심씨(沈氏)가 2남 2녀를 탄생하였는데, 경순 옹주(慶順翁主)는 의성위(宜城尉) 남치원(南致元)에게 하가하였고, 나머지는 어리다. 금상 전하(今上殿下)가 우의정(右議政) 신승선(愼承善)의 따님을 맞이하여 비(妃)로 삼아서 2녀를 탄생하였는데, 모두 어리다."
- 【태백산사고본】 47책 29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61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註 117]천순(天順) 원년 : 1457 세조 3년. 천순은 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 [註 118]
시인(寺人) : 환관.- [註 119]
성화(成化) 5년 : 1469 예종 원년.- [註 120]
경인년 : 1470 성종 원년.- [註 121]
신묘년 : 1471 성종 2년.- [註 122]
시학(視學) : 임금이 성균관(成均館)에 거둥하여 유생(儒生)들이 공부하는 상황을 돌아보던 일. 이때 석전(釋奠)을 행하고 유생을 시험하여 인재(人才)를 뽑는 것이 상례였음.- [註 123]
경의(經義) : 경서(經書)의 뜻.- [註 124]
임진년 : 1472 성종 3년.- [註 125]
갑오년 : 1474 성종 5년.- [註 126]
을미년 : 1475 성종 6년.- [註 127]
정유년 : 1477 성종 8년.- [註 128]
무술년 : 1478 성종 9년.- [註 129]
기해년 : 1479 성종 10년.- [註 130]
신축년 : 1481 성종 12년.- [註 131]
계묘년 : 1483 성종 14년.- [註 132]
금상(今上) : 현재 임금. 곧 연산군(燕山君).- [註 133]
갑진년 : 1484 성종 15년.- [註 134]
을사년 : 1485 성종 16년.- [註 135]
조반(朝班) : 조정 관리의 반열.- [註 136]
정미년 : 1487 성종 18년.- [註 137]
무신년 : 1488 성종 19년.- [註 138]
기유년 : 1489 성종 20년.- [註 139]
향위(鄕圍) : 시골에서 보이는 과거 시험.- [註 140]
책사(策士) : 책문에 응시한 선비.- [註 141]
경술년 : 1490 성종 21년.- [註 142]
신해년 : 1491 성종 22년.- [註 143]
당형제(堂兄弟) : 사촌 형제.- [註 144]
사변(徙邊) : 죄인을 그 가족과 함께 변방에서 살게 하던 형벌.- [註 145]
임자년 : 1492 성종 23년.- [註 146]
갑인년 : 1494 성종 25년.- [註 147]
동복형[母兄] : 월산 대군(月山大君)을 가리킴.- [註 148]
권강(權綱) : 통치하는 권력.- [註 149]
명작(名爵) : 명예와 작위.- [註 150]
명의(名義) : 명분과 의리.- [註 151]
정도(正道) : 유교.- [註 152]
유전(遊畋) : 사냥하며 즐김.- [註 153]
일욕(逸欲) : 편안하게 성색(聲色)을 탐함.- [註 154]
변수(邊帥) : 변장.- [註 155]
열무(閱武) : 임금이 직접 하는 사열.- [註 156]
강수(講蒐) : 군사 훈련을 위한 사냥.- [註 157]
양음(亮陰) : 임금이 부모(父母)의 상중(喪中)에 있음. 또는 그 기간 중에 거처하는 방. 양암(諒闇). 양음(諒陰).- [註 158]
을묘년 : 1495 연산군 원년.- [註 159]
○其誌文曰:
恭惟我大王諱某, 德宗第二子。 仁粹王大妃 韓氏, 以天順元年丁丑七月辛卯, 誕王。 德宗爲世子早薨, 世祖育王于宮中, 封爲者山君。 王天資明睿, 世祖奇愛之, 嘗(與)〔同〕母兄月山大君 婷, 在宮中, 忽雷雨暴作, 震寺人於座, 左右皆顚仆, 王獨自若, 世祖尤異之, 嘗曰: "此兒器度類我太祖。" 成化五年己丑, 睿宗薨, 嗣子幼騃, 貞熹王后定議, 以王爲嗣。 庚寅帝遣使賜誥命。 王命臣僚陳便宜, 擧賢能, 旌孝子、節婦, 其孝行尤異者錄用。 令經筵官日三進講, 夜亦召對以爲常。 辛卯視學謁先聖, 令文士問難經義, 策諸臣有佐理勳者, 賜功臣號。 臺諫言事稱職, 各賜爵一級。 壬辰下敎, 諭民節儉。 採歷代帝王及后妃善惡可法, 可戒者釐, 爲三編名曰《帝王明鑑》、《后妃明鑑》。 又圖畫明君暗主事迹于屛, 坐臥觀省, 鷹坊有海東靑, 命放之, 終不復畜。 甲午遣使, 請追封德宗爲王, 帝允之, 賜諡曰懷簡, 幷賜仁粹王大妃誥命, 王大赦, 賜群臣爵一級。 乙未祭先農耕籍田, 王妃親蠶。 建尊經閣于成均館, 賜經籍藏之。 丁酉謁先聖, 行大射禮, 罷誕日祝壽齋。 戊戌祀先聖, 養老乞言。 命裒集古今東人詩文, 名曰《東文選》, 撰地理誌, 名曰《東國輿地勝覽》, 又撰《三國史節要》。 己亥帝發兵討建州野人, 勑出帥助征。 王發兵擊破之, 獻俘, 帝賜勑褒賞。 辛丑弛園囿樵獵之禁, 癸卯冊今上爲世子, 三月貞熹王后薨, 服三年喪。 甲辰甄別中外官吏淑慝, 陞黜之。 賜成均館學生田四百結, 鄕學亦賜田有差。 乙巳命今後再嫁女之子孫, 勿齒朝班。 世祖朝嘗撰《東國通鑑》未就, 命續成之。 丁未錄用高麗忠臣鄭夢周、吉再後。 弘治戊申仁粹王大妃有疾, 王嘗侍藥, 疾瘳大赦, 賜群臣爵一級。 己酉鄕圍策士有言: "祀佛禳災者。" 王手敎竄逐之。 庚戌幸驪州謁英陵, 賜州民是年半租, 所過州縣, 遣官祭先聖廟, 賜學生米有差。 辛亥命自今兄弟、叔姪、堂兄弟, 爭訟理曲者徙邊, 野人寇永安道,殺鎭將, 遣兵討破之。 壬子罷度僧法, 祀先聖, 大饗師生及百僚, 令製樂章以侑之。 前代君王及名賢陵墓頹毁者, 命修葺禁樵牧。 甲寅秋王不豫, 裁決庶務不少懈。 十二月戊寅大漸, 具冠服召見大臣, 翌日己卯薨于正寢, 享年三十八, 在位二十六年。 聞喪之日, 雖深山窮谷之民, 莫不奔走號慟。 王聰明英武寬仁恭儉, 通貫經史, 尤深於性理之學, 星曆鍾律靡不講究, 射藝書畫亦臻其妙。 孝友出於天性, 祭祀非有事故, 必躬必謹。 奉養三大妃克盡誠敬, 待母兄恩豊備至, 諸子敎以義方, 宗族極其雍睦。 尊敬大臣禮遇臺諫, 從容咨訪虛懷納採。 寵待講官加以異數, 每於經筵孜孜聽受, 猶以爲未廣。 擇二品以上可顧問者, 輪日參侍, 號爲特進官。 至於郞吏悉知才行, 用各盡能。 總攬權綱, 愛重名爵, 如知其賢不次擢用。 苟犯名義, 雖才必黜, 寬以御下罪疑多㒃。 唯閽寺雖小過必懲。 養耆老、恤孤獨、明嘗罰、愼刑獄, 斥異端、扶正道、絶遊畋、戒逸欲, 錄用忠孝、褒奬節義, 增修文廟、優贍學廩, 訓鍊將士、擇任邊帥, 閱武講蒐必以其時。 遇災請行祈禳, 則曰: "消變在於修德。" 歲稔請加賦稅, 則曰: "百姓足, 君誰與不足?" 却進膳曰: "奉上之禮雖勤, 恤下之情亦切。" 停禮宴曰: "歲歉民飢, 而獨樂可乎?" 大哉王言! 眞天地父母之心乎! 昊天不弔遽至厭世, 慟哉! 主上殿下, 亮陰在疚, 哀慕罔極, 率群臣上尊謚曰: "仁文憲武欽聖恭孝大王", 廟號曰: "成宗"。 以乙卯四月初六日己未, 安厝于廣州治西學堂里之原, 號曰: "宣陵"。 噫! 三代以下, 終始全德之君寡矣, 我成宗, 粹乎無以議爲。 初在潛邸, 聘領議政韓明澮之女, 卽位封爲妃, 無子薨謚曰恭惠。 陞淑儀 尹氏爲妃, 卽判奉常寺事起畎之女, 寔誕今上殿下。 又陞淑儀 尹氏爲妃, 卽領敦寧府事壕之女, 生一男曰懌, 封晋城大君。 淑儀 嚴氏生一女, 曰恭愼翁主, 下嫁淸寧尉 韓景琛, 淑儀 權氏, 生一男幼, 淑容 鄭氏生二男一女, 曰㤚 安陽君, 娶知事具壽永女, 曰㦀 鳳安君, 娶贈左贊成趙紀女, 女幼。 淑容 洪氏生七男三女, 曰惠淑翁主, 下嫁高原尉 申沆。 曰𢢝 完原君, 娶贈左贊成崔河臨女, 曰恬 檜山君, 娶奉事安邦彦女, 曰惇 甄城君, 娶參奉申友灝女, 餘幼。 淑媛 河氏生一男, 曰恂 桂城君, 娶判官元菑女, 淑媛 金氏生三男三女, 曰徽淑翁主, 下嫁豊原尉 任崇載, 曰敬淑翁主未嫁, 餘幼。 淑媛 權氏生一男一女, 皆幼。 淑媛 沈氏生二男二女, 曰慶順翁主下嫁宜城尉 南致元, 餘幼。 今上殿下, 聘右議政愼承善之女, 今爲妃, 生二女, 皆幼。
成宗康靖大王實錄卷第二百九十七終
- 【태백산사고본】 47책 29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2책 616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註 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