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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 6월 12일 癸酉 1번째기사 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대행 왕후를 광릉에 장사지내다

대행 왕후(大行王后)를 광릉(光陵)의 동혈(東穴)에 장사지냈는데, 인시(寅時)469) 에 하관[下玄宮]하였다. 그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유세차(維歲次) 성화(成化) 19년470) 계묘(癸卯) 3월 임술(壬戌)에 대행 대왕 대비(大行大王大妃)가 온양(溫陽)행궁(行宮)471) 에서 훙(薨)하셨으므로, 모월 모일에 모릉(某陵)으로 천좌(遷座)하려 하니, 이는 예(禮)입니다. 좋은 날을 점치어 검은 말[馬]이 앞에 서서 떠나는데, 늘어선 시위(侍衛)에 새벽 횃불이 빛나고, 수운(愁雲)472) 은 곳곳마다 끼어 있습니다. 팔신(八神)473) 이 장차 벽제(辟除)474) 할 것이고, 세번의 헌작(獻爵)은 이미 부어 올렸습니다. 애왕손(哀王孫)인 주상 전하(主上殿下)께서 조전제(祖奠祭)에 정성을 다하였고, 애통(哀痛)하고 사모(思慕)하여 마음에 병이 되었으며, 선장(仙仗)475) 이 돌아오지 못함을 애통해 하고, 영항(永巷)476) 에 나아가지 못함을 슬퍼하였습니다. 이에 예지(睿旨)를 내려 휘음(徽音)477) 을 칭송(稱頌)하게 하였습니다."

하고, 그 사(詞)에 이르기를,

"규예(潙汭)478) 에서는 순(舜)임금이 아내를 맞았고, 증사(曾沙)479) 에서는 한(漢)나라황후(皇后)480) 가 태어났도다. 왕도(王道)가 이루어짐은 진실로 협력하여 도움에 의거했으니, 대대로 동사(彤史)481) 가 있어 밝고 밝게 기록했네. 아! 우리 조정(朝廷)은 가법(家法)이 모두 바르니, 성선(聖善)이 서로 이어 그 경사(慶事)를 돈독히 하였네. 훌륭한 딸을 탄생시키는 영원(鈴原)482) 에서 훌륭하고 아름다운 후비를 낳았으니, 세조(世祖)의 초년(初年)에 간택(揀擇)에 뽑혔도다. 번저(藩邸)483) 의 배필이 되어 기쁘게 신극(辰極)484) 을 이으니, 축리(妯娌)485)척완(戚畹)486) 이 모두 빈(殯)을 본받았네. 중간에 불행한 일들을 만나 국가(國家)의 정세가 미약해지자, 남몰래 신모(神謀)를 도와 주어서 보명(寶命)487) 이 이에 돌아왔도다. 공(功)은 십란(十亂)488) 에 있고 위(位)는 중위(中闈)489) 에 바로 잡히니, 예(禮)를 따라 화목함을 이루며 사기(史記)를 보고 시(詩)를 지었다네. 마음은 제사(祭祀)에 경건하였고 가르침은 굉영(紘綖)490) 을 천명(闡明)하였도다. 후비(后妃)의 교화가 멀리 퍼진 지 14년 만에 이성(二聖)491) 이 승하(昇遐)하여 근심 걱정이 연속되었으나, 임금이 바른 궤도에 오르게 된 것은 후비의 알선(斡旋)으로 인해서였네. 진기(震器)가 주인(主人)을 얻어 요도(瑤圖)492) 도 안정되었네. 땅처럼 넓고 두터운 덕은 후세(後世)에 떨치고 전대(前代)보다 빛났네. 궁궐(宮闕)에서는 읍손(揖損)493) 할 것을 생각하였고 한가할 때에는 마음을 온화하게 가졌으니, 명덕(明德)같은 덕(德)이고 선인(宣仁)같은 인(仁)이었네. 높고 높은 아름다움을 한 몸에 지녀서 번창한 신손(神孫)494) 들이 자훈(慈訓)을 사모하였으니, 힘써 선대(先代)의 공렬(功烈)을 빛냈고 거듭 창성한 운(運)을 빛냈다오. 이에 효사(孝思)를 다하여 온 나라에서 받들었으니, 거의 미수(眉壽)495) 하여 길이 많은 복(福)을 누리시리라 생각했었네. 지난번에 청질(淸疾)로 인하여 점점 옥체(玉體)가 나빠지시어 봄날씨 틈타 영천(靈泉)에 목욕하시니, 영위(榮衛)496) 가 평온해졌다는 좋은 소식이 처음에 들끓었도다. 적불(翟茀)497) 이 돌아온다고 하자 도성(都城) 안에 기쁨이 가득 넘쳤는데,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풍상씨(馮相氏)498) 가 행궁(行宮)의 재앙을 알릴 줄을. 천지(天地)의 신(神)이 밤을 진동시키고 둥근 달은 허공(虛空)에 잠겨 버렸으니, 삼조(三朝)499) 를 살피지 못하고 팔송(八頌)500) 이 어두워졌네. 아아, 슬프다! 조화(造化) 맡은 조물주(造物主)도 예측할 수 없어 학주(壑舟)가 옮겨가니 만세(萬歲)를 축수(祝壽)함도 잠깐이었구나. 아황(娥皇)여영(女英)501)상수(湘水)에서 추상(追想)하였고502) , 금모(金母)503)요지(瑤池)에서 잔치하였네‘504) 환패(環佩)505) 를 버리고 영의(靈衣)를 걸쳤으니, 이반(夷槃)506) 이 둘러 있고 소유(素帷)507) 를 펴 놓았네. 아아, 슬프다! 용곤(龍袞)508) 이 비통하게도 최의(縗衣)509) 로 변(變)하였으니, 말명(末命)510) 을 따르며 울부짖도다. 조관(朝官)들은 슬퍼하여 벽용(擗踊)511) 하고 사반(社飯)512) 을 생각하며 놀라 부르짖네. 개풍(凱風)513) 을 따라 어찌 보은(報恩)할 것인가? 호천(昊天)514) 을 우러러보니 더욱 높구나. 삐걱거리는 온량(轀涼)515) 이 들을 구불거리며 나가니, 청문(靑門)516) 은 영원히 막히고 자합(紫闔)517) 은 길이 기울어지는구나. 아아, 슬프다! 인산일(因山日)을 미리 점쳐서 좋은 날을 받았으니, 위의(威儀)는 일찍이 갖추어지고 수례(羞醴)518) 는 조촐하고 깨끗하다오. 우혈(禹穴)519) 을 비루하다 하여 구하지 않고 부우(鮒隅)520) 를 따라 무덤을 같이 하였네. 오동잎[梧桐]은 무성하게 우거졌고 봉황새[鳳凰]는 청아하게 울어대누나. 속세(俗世)의 더러움을 싫어하였고 수원(壽原)521) 의 울창(鬱蒼)함을 즐기도다. 아아, 슬프다! 이치는 굴신(屈伸)이 있고 운명도 시종(始終)이 있으니, 망망(茫茫)한 감여(堪輿)522) 를 누가 오래 보겠나. 지덕(至德)의 영원(永遠)함이여 오히려 도사(圖史)523) 에 힘이 될 것일세. 우리 성후(聖后)의 아름다움이여 마땅히 임(妊)·사(姒)524) 에 부합되나니, 홍조(鴻祚)525) 와 더불어 무강(無彊)하겠고 유방(遺芳)526) 은 만년토록 떨치리로다. 아아, 슬프다!"

하였으며, 그 지문(誌文)에 이르기를,

"삼가 살펴보건대, 대행 왕후(大行王后) 윤씨(尹氏)는 파평(坡平)의 세가(世家)로서, 먼 조상(祖上) 가운데 휘(諱) 윤관(尹瓘)은 고려(高麗) 예종(睿宗)을 도와 지위가 태보(太保) 문하 시중(門下侍中)으로 변경의 영토를 널리 개척하여 공렬(功烈)이 세상을 뒤덮었으니, 시호(諡號)를 문경(文敬)527) 이라 하였으며, 대대로 그 선조(先祖)의 공업을 이어받았다. 황증조(皇曾祖)인 휘(諱) 윤척(尹陟)은 순성 보리 공신(純誠保理功臣) 중 대광(重大匡) 영평군(鈴平君)이고, 황조(皇祖)인 휘(諱) 윤승례(尹承禮)는 숭정 대부(崇政大夫)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황고(皇考)인 휘(諱) 윤번(尹璠)은 순충 적덕 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평 부원군(鈴平府院君)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정(貞靖)이다. 황비(皇妣) 이씨(李氏) 또한 인천(仁川)의 저성(著姓)으로 흥녕 부대부인(興寧府大夫人)에 봉해졌는데, 정헌 대부(正憲大夫)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로서 시호가 공도공(恭度公)이문화(李文和)의 딸이니, 영락(永樂)528) 무술년529) 11월 정해(丁亥)에 태후(太后)를 홍천(洪川)의 공아(公衙)에서 낳았다.

태후(太后)는 태어나면서부터 정숙하고 유순하였으며, 타고난 자품이 남보다 뛰어났다.

선덕(宣德)530) 무신년531)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처음으로 대궐에 나아가게 되자 세종 대왕(世宗大王)께서 현명(賢明)한 배필을 골라 뽑는데, 태후(太后)는 덕용(德容)이 있는 문벌로 뽑혀 빈(嬪)으로 들어와서 낙랑 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으로 봉해졌다.

양궁(兩宮)을 받들어 섬기는 데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게을리하지 않아서 모든 선수(膳羞)와 의대(衣襨)를 반드시 몸소 살펴서 올리는 등 성효(誠孝)를 극진히 다하니, 이로 말미암아 양궁(兩宮)이 총애(寵愛)하여 제부(諸婦)의 위에 두고 궁중(宮中)의 일을 모두 태후(太后)에게 맡겼다. 해산(解産)할 때마다 양궁(兩宮)이 반드시 친림(親臨)하여 돌봐주었고, 때때로 궁을 나가서 부모(父母)를 뵙게 되면 특별히 사옹원(司饔院)에 명(命)하여 음식물을 장만하여 주게 하였다. 본저(本邸)에 있을 때 만일 기쁘고 경사스러운 일이 있으면 주선해 주는 것을 또한 그와 같이 하였으니, 융숭한 대우를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세조(世祖)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세상을 다스릴 큰 뜻이 있어서 서사(書史)에만 정신을 쏟고 자질구레한 사무에는 개의하지 않았는데, 태후(太后)는 공손하고 검소하며 부지런하게 내직(內職)을 잘 처리하였다.

경태(景泰)532) 임신년533)문종(文宗)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端宗)이〉 왕위(王位)에 있었으므로, 종척(宗戚)과 권간(權奸)들이 안팎으로 얽히고 설켜 나라의 형편이 위태로와졌다.

계유년534)세조(世祖)께서 기회를 잡아 정난(靖難)535) 하였으며, 태후(太后)도 계책을 같이 해서 임금을 도와 큰 일을 이루었다.

을해년536)세조(世祖)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왕비(王妃)에 책봉되었다.

병자년537) 에 황제가 사신(使臣)을 보내서 관복(冠服)을 내려 주었으며, 이로부터 여러 번 채단(綵段)을 받았다.

천순(天順)538) 정축년539) 에 뭇 신하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자성 왕비(慈聖王妃)라고 하였다. 태후(太后)는 위(位)가 바로 잡아진 뒤부터 스스로 더욱 겸손하고 삼가하니, 비록 궁중(宮中)에서 매일 행하는 섬세(纖細)한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임금에게 아뢴 뒤에 행하였다. 세조(世祖)께서 내교보여의도서(內敎寶如意圖書)를 만들 때에도 마음대로 하게 하였으나, 그래도 감히 마음대로 행하지 않았다.

성화(成化)540) 무자년541)세조(世祖)가 승하하자, 태후(太后)는 애모(哀慕)하고 갱장(羹墻)542) 하여서 언제나 세조가 평소에 즐겨 먹던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차마 맛보지 못하였고, 비록 채소라 하더라도 만일 천신(薦新)할 말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문소전(文昭殿)543) 에 올린 뒤에야 감히 맛을 보았으니, 성심으로 돈독하게 공경함을 오래 되어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예종(睿宗)이 높여서 왕대비(王大妃)로 삼고, 흠인 경덕 선렬 명순 원숙 휘신 혜의(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의 호(號)를 더 올렸다.

기축년544)예종(睿宗)이 승하하자 계사(繼嗣)를 정하지 못하였는데 태후(太后)는 우리 주상 전하(主上殿下)가 덕(德)이 있고 명망(名望)이 있어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붙좇는다고 해서 대통(大統)을 이어받게 하였다.

전하(殿下)545) 께서 태후(太后)에게 청정(聽政)546) 할 것을 청(請)하니 태후가 굳이 사양하였으나, 굳이 청하자 드디어 허락하였다. 그러나 오직 군정(軍政)이 중요한 일이라고 해서 겨우 품결(稟決)할 뿐이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정사(政事)를 돌려 주었다.

전하(殿下)가 높여서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삼고 신헌(神憲)의 호(號)를 더 올렸다. 국가(國家)에서 계속하여 큰 근심을 만나 모든 일들이 어려움을 당하니, 태후는 성궁(聖躬)을 보호하여 정무(政務)에 유의(留意)하게 하였고, 일찍이 한가하게 놀지 못하게 하였다. 자애스럽고 인자하게 양육하여 만물(萬物)이 봄을 만난 것처럼 하니 수년(數年) 동안 조야(朝野)가 편안하였다.

우리 전하께서는 천성(天性)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매일 세 번 시선(視膳)547) 하고 문안(問安)하였으며, 봉양(奉養)하는 데에 정성을 다하였다. 대개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의지(懿旨)에 품(稟)한 연후에 행하였다.

태후는 무자년548) 에 상(喪)을 당한 이래로 지나치게 슬퍼하여 철에 따라 몸조리하는 일에 소홀하셨다. 신충(宸衷)549) 이 진념(軫念)하여 몸소 약이(藥餌)를 지어 온정(溫情)550) 을 어김이 없이 해서 거의 물약(勿藥)551) 의 효과를 얻었다.

임인년552) 봄에 태후(太后)가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 살면서 조섭(調攝)하였으나 정신이 혼미하니, 전하(殿下)께서는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더욱 공경하며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계묘년553) 봄에 태후(太后)가 온양(溫陽)을 행행(行幸)한 뒤로 병세(病勢)가 점점 더하여졌다. 3월 임술(壬戌)에 승하(昇遐)하니, 춘추(春秋)가 66세이었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전하께서는 울부짖으면서 슬퍼하고 철선(輟膳)554) 하게 하였다. 안으로 육궁(六宮)555) 과 밖으로는 여러 신료(臣僚), 아래로는 복례(僕隷)에 이르기까지 비통(悲痛)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전하(殿下)께서 복(服)으로 3년상의 제도(制度)를 행하였고, 태후(太后)의 공덕(功德)이 매우 성대하다고 하여 유사(有司)에게 전지(傳旨)를 내려서 상례(喪禮)를 행하는 데에 힘써 후하게 하고 모든 봉장(奉葬)하는 의식(儀式)을 대왕(大王)과 같이 하라고 하였다. 다만 염(斂)하는 데에 쓰는 기구(器具)에 있어서, 태후(太后)가 일찍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나라에 공(功)이 없으니, 내가 죽으면 후장(厚葬)하지 말라.’ 하고 무릇 옷을 미리 헤아려 준비해서 만들어 두었는데, 모두 면포(綿布)를 쓰고 비단같이 화려한 물건은 쓰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유교(遺敎)에 따르고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5월 25일 병진(丙辰)에 시호(諡號)를 올려 정희 왕후(貞熹王后)라 하고, 6월 12일 계유(癸酉)에 광릉(光陵)의 동쪽 축좌 미향(丑坐未向)의 좌판에 안장(安葬)하였으니, 이것이 예(禮)이다.

태후(太后)는 나면서부터 성덕(盛德)을 지니셨으므로 세조(世祖)의 배필이 되어서, 집안이 변하여 나라가 되자 궁중의 다스림을 주관하였다. 몸소 옷을 세탁하였고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은 물리쳤으며, 빈(嬪)이나 궁녀(宮女)를 예(禮)로써 대접하니, 깊은 은혜가 아랫사람들에게 미치었다. 비록 여례(女隷)와 같이 천(賤)한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경애(敬愛)하였고, 호생지덕(好生之德)556) 은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들이 죄과(罪過)가 있으면 애써 특별히 용서를 하여 형벌로 다스리지 않았고, 또 마음 쓰는 것이 지극히 공평하여 친척(親戚)을 위해 은혜를 사사로이 하지 않으니, 수재(修齊)하고 치평(治平)하는 교화(敎化)가 멀고 가까운 데에 미쳐서 지치(至治)를 도야(陶冶)한 지 30년이 되었다. 비록 옛날 하(夏)나라 도산씨(塗山氏)557) 와 주(周)나라 신씨(莘氏)558) 의 훌륭함이라 하더라도 어찌 이보다 더 낫겠는가?

더욱이 탁월(卓越)한 것은 능히 대책(大策)을 결정하여 부탁할 만한 성군(聖君)을 얻어 지금까지도 훌륭하시니, 아! 위대하도다.

반드시 길이 장락(長樂)을 누리어 신손(神孫)559) 을 편안하게 보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말명(末命)을 들으니, 아! 슬프도다.

태후(太后)가 2남 1녀를 낳았는데, 장자(長子) 덕종(德宗)은 처음에 도원군(桃源君)으로 봉(封)하여져 을해년560) 에 세자(世子)로 책봉(策封)되었는데, 일찍 훙(薨)하였다. 금상(今上)561) 이 즉위하여 시호(諡號)를 올려서 의경 대왕(懿敬大王)이라 하였고, 갑오년562) 에 황제(皇帝)가 사시(賜諡)하기를 회간 대왕(懷簡大王)이라 하였다. 차자(次子)는 곧 예종(睿宗)이며, 딸은 의숙 공주(懿淑公主)이다. 덕종(德宗)의 배필(配匹)은 한씨(韓氏)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확(韓確)의 딸인데 지금 인수 왕대비(仁粹玉大妃)에 봉해졌다. 예종(睿宗)의 처음 배필은 한씨(韓氏)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인데, 일찍 훙(薨)하여 시호(諡號)를 장순 왕후(章順王后)라 하였다. 다음 배필은 한씨(韓氏)로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한백륜(韓伯倫)의 딸인데, 지금 인혜 왕대비(仁惠王大妃)로 봉해졌다. 의숙 공주(懿淑公主)하성 부원군(河城府院君) 정현조(鄭顯祖)에게 하가(下嫁)했는데 먼저 졸(卒)하였다.

덕종(德宗)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우리 전하(殿下)가 순서로는 끝이 된다. 장자(長子)는 이정(李婷)인데 월산 대군(月山大君)에 봉해졌고, 딸은 명숙 공주(明淑公主)이다.

전하(殿下)의 처음 배필은 한씨(韓氏)로 또한 한명회(韓明澮)의 딸인데 일찍 훙(薨)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공혜 왕후(恭惠王后)라 하였다. 다음 배필은 폐비(廢妃) 윤씨(尹氏)인데, 아들을 낳아 세자(世子)로 책봉되었다. 다음 배필은 영원 부원군(鈴原府院君) 윤호(尹壕)의 딸로, 딸을 낳았는데 어리다. 숙의(淑儀)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엄씨(嚴氏)도 1녀를 낳았고, 숙용(淑容) 정씨(鄭氏)는 2남 1녀를 낳았고, 숙원(淑媛) 홍씨(洪氏)는 3남 1녀를 낳았고, 궁인(宮人) 하씨(河氏)는 1남을 낳았고, 김씨(金氏)는 1녀를 낳았고, 심씨(沈氏)도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월산 대군(月山大君)평양군(平陽君)박중선(朴仲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명숙 공주(明淑公主)는 의빈(儀賓) 홍상(洪常)에게 하가(下嫁)하여 먼저 졸(卒)하였으며 1남을 낳았는데 어리다.

예종(睿宗)의 다음 배필인 한씨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 이현(李琄)제안 대군(齊安大君)에 봉해졌고, 딸은 현숙 공주(顯肅公主)로 의빈(儀賓) 임광재(任光載)에게 하가(下嫁)하였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15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10책 46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註 469]
    인시(寅時) : 오전 3∼5시.
  • [註 470]
    성화(成化) 19년 : 1483 성종 14년.
  • [註 471]
    행궁(行宮) : 별궁(別宮).
  • [註 472]
    수운(愁雲) : 애수를 느끼게 하는 구름.
  • [註 473]
    팔신(八神) : 팔방(八方)의 신.
  • [註 474]
    벽제(辟除) : 지위 높은 사람이 지나갈 때 통행을 통제하는 일.
  • [註 475]
    선장(仙仗) : 천자(天子)의 의장(儀仗).
  • [註 476]
    영항(永巷) : 궁중(宮中)을 가리킴.
  • [註 477]
    휘음(徽音) : 왕비의 아름다운 언행(言行).
  • [註 478]
    규예(潙汭) : 땅 이름.
  • [註 479]
    증사(曾沙) : 땅 이름.
  • [註 480]
    황후(皇后) : 원제(元帝)의 비.
  • [註 481]
    동사(彤史) : 사관(史官)으로, 궁중(宮中)의 정령(政令)과 후비(后妃)의 일을 기록하였음.
  • [註 482]
    영원(鈴原) : 파평(坡平)을 가리킴.
  • [註 483]
    번저(藩邸) : 임금이 즉위하기 전을 말함.
  • [註 484]
    신극(辰極) : 임금의 지위.
  • [註 485]
    축리(妯娌) : 형제의 아내가 서로 부르는 칭호.
  • [註 486]
    척완(戚畹) : 임금의 외척(外戚).
  • [註 487]
    보명(寶命) : 하늘의 명령.
  • [註 488]
    십란(十亂) : 주(周)나라 무왕(武王) 때 나라를 잘 다스린 신하 10인. 즉 주공단(周公旦)·소공석(召公奭)·태공망(太公望)·필공(畢公)·영공(榮公)·태전(太顚)·굉요(閎夭)·산의생(散宜生)·남궁괄(南宮适)·문모(文母:태임(太任))임.
  • [註 489]
    중위(中闈) : 왕비의 자리를 말함.
  • [註 490]
    굉영(紘綖) : 면류관의 끈과 덮개로서, 존비(尊卑)의 구분을 말함.
  • [註 491]
    이성(二聖) : 세조(世祖)와 예종(睿宗).
  • [註 492]
    요도(瑤圖) : 임금의 자리.
  • [註 493]
    읍손(揖損) : 자기 감정을 누르고 겸손함.
  • [註 494]
    신손(神孫) : 임금의 자손.
  • [註 495]
    미수(眉壽) : 장수(長壽).
  • [註 496]
    영위(榮衛) : 몸을 보양하는 혈기.
  • [註 497]
    적불(翟茀) : 왕비의 수레.
  • [註 498]
    풍상씨(馮相氏) : 천문(天文)을 맡아 보는 관원.
  • [註 499]
    삼조(三朝) : 내조(內朝)·치조(治朝)·연조(燕朝).
  • [註 500]
    팔송(八頌) : 점서(占筮)의 말.
  • [註 501]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 아황과 여영은 순임금의 두 비(妃).
  • [註 502]
    상수(湘水)에서 추상(追想)하였고 : 순(舜)임금이 남쪽을 순행(巡行)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죽었는데, 요(堯)임금의 두 딸인 순임금의 비(妃)가 쫓아가다가 미치지 못하고 상수(湘水)에 이르러 통곡하면서 상수에 몸을 던져 죽은 일을 말함.
  • [註 503]
    금모(金母) : 서왕모(西王母).
  • [註 504]
    요지(瑤池)에서 잔치하였네‘ : 주(周)나라 목왕(穆王)이 서정(西征)하다가, 곤륜산(崑崙山)에 사는 선인(仙人)인 서왕모(西王母)를 신선이 사는 요지(瑤池)에서 만났는데, 서왕모가 잔치를 베풀며 선도(仙桃) 세 개를 주었다고 함.
  • [註 505]
    환패(環佩) : 고리 모양의 패옥.
  • [註 506]
    이반(夷槃) : 임금이 죽었을 때 시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시체를 안치한 평상 밑에 얼음을 담아 두는 대야.
  • [註 507]
    소유(素帷) : 흰 장막.
  • [註 508]
    용곤(龍袞) : 곤룡포(袞龍袍).
  • [註 509]
    최의(縗衣) : 상복(喪服).
  • [註 510]
    말명(末命) : 임종할 때의 유언.
  • [註 511]
    벽용(擗踊) : 가슴을 치고 뛰며 슬퍼함.
  • [註 512]
    사반(社飯) : 춘사(春社).
  • [註 513]
    개풍(凱風) : 《시경(詩經)》 패풍(邶風)의 편명(篇名)으로, 효자(孝子)들이 어머니의 은혜를 생각하며 읊은 시임.
  • [註 514]
    호천(昊天) : 하늘과 같은 부모의 은혜.
  • [註 515]
    온량(轀涼) : 상여.
  • [註 516]
    청문(靑門) : 세자의 궁전.
  • [註 517]
    자합(紫闔) : 임금의 궁전.
  • [註 518]
    수례(羞醴) : 음식과 술.
  • [註 519]
    우혈(禹穴) : 명산 대천을 가리킴.
  • [註 520]
    부우(鮒隅) : 산 이름.
  • [註 521]
    수원(壽原) : 묘역(墓域).
  • [註 522]
    감여(堪輿) : 천지(天地).
  • [註 523]
    도사(圖史) : 중국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등에 지니고 나타났다는 그림과,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홍수(洪水)를 다스릴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씌여 있었다는 글로, 천하를 다스리는 대법(大法)으로 삼는 것임.
  • [註 524]
    임(妊)·사(姒) : 문왕모 태임과 문왕비 태사.
  • [註 525]
    홍조(鴻祚) : 큰 복.
  • [註 526]
    유방(遺芳) : 명성을 후세에 전함.
  • [註 527]
    문경(文敬) :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9권에 보면, 윤관(尹瓘)이 죽은 후 문경(文敬)이라고 시호 하였으나, 인종(仁宗) 8년(1130) 예종 묘정(睿宗廟庭)에 배향(配享)하면서 유릉(綏陵)의 휘(諱)를 피하여 문숙(文肅)으로 고쳤다고 함.
  • [註 528]
    영락(永樂) : 명나라 성조(成祖)의 연호.
  • [註 529]
    무술년 : 1418 태종 18년.
  • [註 530]
    선덕(宣德) : 명나라 선종(宣宗)의 연호.
  • [註 531]
    무신년 : 1428 세종 10년.
  • [註 532]
    경태(景泰) : 명나라 경제(景帝)의 연호.
  • [註 533]
    임신년 : 1452 문종 2년.
  • [註 534]
    계유년 : 1453 단종 원년.
  • [註 535]
    정난(靖難) : 수양 대군(首楊大君:세조(世祖))이 정권을 잡기 위해 스스로 일으킨 난(亂)으로, 원로 신하(元老臣下)들을 없애고 왕위에 오를 기반을 만들었음.
  • [註 536]
    을해년 : 1455 세조 즉위년.
  • [註 537]
    병자년 : 1456 세조 2년.
  • [註 538]
    천순(天順) : 명나라 영종(英宗)의 두 번째 연호.
  • [註 539]
    정축년 : 1457 세조 3년.
  • [註 540]
    성화(成化) : 명나라 헌종(憲宗)의 연호.
  • [註 541]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42]
    갱장(羹墻) : 경모하여 추념하는 일.
  • [註 543]
    문소전(文昭殿) : 태조(太祖)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혼전(魂殿). 세종 15년(1433)에 태종(太宗)의 위패(位牌)도 봉안하였으나, 명종(明宗) 때 없앴음.
  • [註 544]
    기축년 : 1469 예종 원년.
  • [註 545]
    전하(殿下) : 성종(成宗)을 말함.
  • [註 546]
    청정(聽政) : 왕대비(王大妃)가 어린 임금을 대신하여 정사를 보살피는 것으로, 이때 신하와 직면(直面)하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발을 드리우고 정사를 들었으므로 수렴 청정(垂簾聽政)이라고 함. 정희 왕후(貞熹王后)는 7년간 섭정(攝政)하였음.
  • [註 547]
    시선(視膳) : 왕세자가 아침 저녁으로 임금이 드실 수라상을 몸소 돌보던 일.
  • [註 548]
    무자년 : 1468 세조 14년.
  • [註 549]
    신충(宸衷) : 임금의 마음.
  • [註 550]
    온정(溫情) : 겨울은 따습게 여름은 시원하게 하는 일.
  • [註 551]
    물약(勿藥) :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병이 나음.
  • [註 552]
    임인년 : 1482 성종 13년.
  • [註 553]
    계묘년 : 1483 성종 14년.
  • [註 554]
    철선(輟膳) : 육미(肉味)를 먹지 못하게 함.
  • [註 555]
    육궁(六宮) : 후비가 거처하는 궁전.
  • [註 556]
    호생지덕(好生之德) : 자애심이 많아서 살상(殺傷)을 싫어하는 덕.
  • [註 557]
    도산씨(塗山氏) : 우왕(禹王)의 후비.
  • [註 558]
    신씨(莘氏) : 문왕(文王)의 후비인 태사(太姒).
  • [註 559]
    신손(神孫) : 임금의 후손.
  • [註 560]
    을해년 : 1455 세조 즉위년.
  • [註 561]
    금상(今上) : 성종(成宗).
  • [註 562]
    갑오년 : 1474 성종 5년.

○癸酉/葬大行王后于光陵東穴, 寅時下玄宮。 其哀冊文曰:

成化十九年歲次癸卯三月壬戌, 大行大王大妃薨于溫陽之行宮, 某月日, 將遷座于某陵, 禮也。 龜猷協日, 騩馭首途。 晨燎晣晣於廞衛, 愁雲靄靄於緜區。 八神將蹕, 三爵旣㪺。 哀孫主上殿下, 祖載殫誠, 摧慕疚心。 痛仙仗之不返, 悲永巷之莫臨。 乃降睿旨, 俾頌徽音。 其詞曰: "潙汭, 曾沙。 王道之成, 實資協贊。 代有彤史, 昭哉粲粲。 於皇我朝, 家法最正。 聖善相繼, 曰篤其慶。 纉女鈴原, 是生碩媛。 世祖初載, 誕膺妙選。 儷體藩邸, 承懽宸極。 妯娌戚畹, 咸懷嬪則。 間罹不造, 國步中微。 密佑神謀, 寶命有歸。 功存十亂, 位正中闈。 率禮蹈和, 顧史陳詩。 心虔蘋藻, 敎闡紘綖。 壼化川流, 十有四年。 二聖禮陟, 憂虞相聯。 日行黃道, 由其(幹)〔斡〕 旋。 震器得主, 瑤圖帖然。 博厚載物, 振後光前。 深惟挹損, 燕處怡神。 明德之德, 宣仁之仁。 嵬嵬衆美, 總之一身。 翼翼神孫, 拳拳慈訓。 懋昭前烈, 重熙昌運。 式罄孝思, 奉以一國。 庶幾眉壽, 永享多福。 頃因淸疾, 稍愆玉度。 靈泉薰浴, 乘此春煦。 吉語初騰, 榮衛和裕。 翟(笰)〔茀〕 將返, 懽溢都中。 何圖馮相, 告祲行宮? 皇祗震夜, 圓魄淪空, 三朝未展, 八頌其瞢。 嗚呼哀哉! 司造莫測, 壑舟倐移。 萬歲之祝, 一霎已而。 追湘水兮, 宴金母瑤池。 委環珮兮披靈衣, 擁夷槃兮張素帷。 嗚呼哀哉! 龍袞慘以變縗兮, 撫末命而攀號。 鷺班隱以成踊兮, 懷社飯而驚咷。 循《凱風》兮曷報? 仰昊天兮(蓋)〔益〕 高。 轀涼隱轅, 原野逶迤。 靑門永隔, 紫闔長欹。 嗚呼哀哉! 因山旣卜, 吉日載涓。 威儀夙列, 羞醴潔蠲。 鄙禹穴之不殉兮, 遵鮒隅以同阡。 梧桐敷兮菶菶, 凰鳳鳴兮𡄸𡄸。 厭塵世之汚濁兮, 娛壽原之鬱葱。 嗚呼哀哉! 理有屈伸, 數亦終始。 茫茫堪輿, 誰能久視? 唯至德之不朽兮, 尙有賴於圖、史。 我聖后之懿美兮, 宜同符於。 與鴻祚以無疆兮, 流芳聲於萬禩。 嗚呼哀哉!"

其誌文曰:

謹按大行王后尹氏, 坡平世家, 遠祖諱, 相高麗 睿宗, 位太保門下侍郞, 恢拓邊疆, 功烈蓋世, 諡文敬, 世濟其美。 皇曾祖諱, 純誠保理功臣重大匡鈴平君, 皇祖諱承禮, 贈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 皇考諱, 贈純忠積德補祚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領議政府事鈴平府院君, 諡貞靖。 皇妣李氏, 亦仁川著姓, 封興寧府大夫人, 正憲大夫參贊議政府事諡恭度公 文和之(禮)〔女〕 , 以永樂戊戌十一月丁亥, 生太后于洪川之公衙。 太后生而淑婉, 稟資異常。 宣德戊申, 世祖大王初出閤, 世宗大王(妙)〔抄〕 擇賢配, 太后以德容門望, 被選來嬪, 封樂浪府大夫人。 奉事兩宮, 夙夜匪懈, 凡膳羞、衣襨, 必自省視乃進, 克盡誠孝。 由是兩宮寵愛, 在諸婦之右, 宮中事, 皆委之(大)〔太〕 后。 每當免娠, 兩宮必親臨護視, 時有出覲父母, 特命司饔設供具。 在本邸, 若有喜慶, 當辦亦如之, 其見眷遇之隆如此。 世祖自在潛邸, 有經世大志, 留神書史, 不屑細務, 太后恭儉勤勞, 以修內職。 景泰壬申, 文宗上賓, 幼沖在位, 宗戚權奸, 表裏盤結, 國勢帖危。 癸酉, 世祖(炳)〔柄〕 幾靖難, 太后協策贊襄, 以濟大事。 乙亥, 世祖踐祚, 冊爲妃。 丙子, 帝遣使賜冠服, 自是累受欽賜綵段。 天順丁丑, 群臣上尊號曰: "慈聖王妃。" 太后自正位以來, 益自謙畏, 雖宮中日用纖細事, 必啓稟乃行。 世祖爲造《內敎寶如意圖書》, 使取〔覽〕 便焉, 然猶不敢擅而行之。 成化戊子, 世廟賓天, 太后哀慕羹墻, 几遇世廟平時嗜進之味, 不忍嘗之, 雖蔬菜, 若在可薦, 必薦文昭殿, 而後乃敢嘗之, 其誠心篤敬, 久而不怠焉。 睿宗尊爲王大妃, 加上欽仁景德宣烈明順元淑徽愼惠懿之號。 己丑, 睿廟陟遐, 繼嗣未定, 太后以我主上殿下有德有望, 天命、人心之所歸, 俾承大統。 殿下請太后聽政, 太后固讓, 力請乃許。 惟軍政重事, 纔令稟決而已, 未幾還政。 殿下尊爲大王大妃, 加上神憲之號。 國家連遭大戚, 庶事艱殷, 太后保護聖躬, 留神政務, 未嘗暇逸。 慈仁煦嫗, 與物爲春, 數年之間, 朝野寧謐。 我殿下天性至孝, 日三視膳問安, 奉養克備。 凡有國家大計, 必稟懿旨乃行。 太后, 自戊子在疚以來, 過於悲傷, 節宣稍違。 宸衷軫慮, 親調藥餌, 溫凊無違, 庶幾勿藥。 壬寅春, 太后移御景福宮, 居間調攝, 遊神沖漠, 殿下夔栗祗懼, 益虔孝養。 癸卯春, 太后幸溫陽離宮, 疾大漸。 三月壬戌薨, 春秋六十有六。 訃至, 殿下號慟輟膳, 內而六宮, 外而大小臣僚, 下及僕隷, 莫不悲痛。 殿下服喪, 行三年之制, 以太后功德最盛, 下旨有司, 庇喪務, 從隆厚, 凡奉葬之儀, 同於大王焉。 唯斂用之具, 則以太后嘗自言: "我無功於國, 我死勿以厚葬。" 凡衣稱預爲准造, 皆用綿布, 不以段綺華麗之物。 至是從遣敎, 不敢違焉。 五月二十五日丙辰, 上諡曰: "貞熹王后", 六月十二日癸酉, 安厝于光陵之東丑坐未向之原, 禮也。 太后生稟聖德, 作配世廟, 化家爲國, 以主內治。 身服瀚濯, 斥去華靡, 禮接嬪嬙, 恩深逮下。 雖至女隷之賤, 必加敬愛, 好生之德, 出於天性。 人有罪過, 務加恩貸, 不欲置之於法, 而又處心至公, 不爲親戚私惠, 修齊治平之化, 覃及遐邇, 陶鑄至治, 垂三十年。 雖古 之盛, 何以加諸? 其尤卓然者, 能決定大策, 付托得聖, 式至今休。 吁盛矣哉! 意必永享長樂, 保乂神孫, 而遽聞末命。 嗚呼痛哉! 太后誕二男一女, 長德宗, 初封桃源君, 乙亥封世子, 早薨。 上卽位, 上諡曰: "懿敬大王, 甲午帝賜諡曰: "懷簡大王。" 次卽睿宗, 女曰: "懿淑公主。" 德宗韓氏, 議政府左議政之女, 今封仁粹王大妃睿宗初配韓氏, 上黨府院君 明澮之女, 早薨諡曰: "章順王后。" 後配韓氏, 議政府左議政伯倫之女, 今封仁惠王大妃懿淑下嫁河城府院君 鄭顯祖, 先卒。 德宗, 二男一女, 我殿下, 於次爲季。 長曰: "", 封月山大君, 女曰: "明淑公主。" 殿下初配韓氏, 亦明澮之女, 早薨, 諡曰: "恭惠王后。" 次配廢妃尹氏, 生男諱, 封爲世子。 次配鈴原府院君 之女, 生女, 幼。 淑儀金氏生一女, 嚴氏生一女, 淑容鄭氏生二男一女, 淑媛洪氏生三男一女, 宮人河氏生一男, 金氏生一女, 沈氏生一女, 皆幼。 月山平陽君 朴仲善之女, 明淑下嫁儀賓洪常, 先卒, 生一男, 幼。 睿宗後配韓氏, 生一男一女, 男曰: "琄", 封齊安大君, 女曰: "顯肅公主", 下嫁儀賓任光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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