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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1월 28일 甲申 1번째기사 1468년 명 성화(成化) 4년

천전을 베풀고, 축시에 현궁을 내리고, 입주전과 우제를 베풀다

천전(遷奠)을 베풀고, 축시(丑時)에 현궁(玄宮)을 내리고, 입주전(立主奠)을 베풀고, 우제(虞祭)를 영창전(永昌殿)에서 베풀었다. 그 천전 의주(遷奠儀注)는 이러하였다.

"전(前) 1일에 전설사(典設司)에서 길유궁(吉帷宮)을 영장전(靈帳殿)의 서쪽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장전(帳殿)을 베풀고, 남쪽에 유문(帷門)을 설치한다. 그날 전의(典儀)가 내제군(內諸君)의 자리를 영악전(靈幄殿) 장문(帳門) 안의 동쪽에 남쪽에 가까이 서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이 위가 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의 자리를 유문(帷門) 밖에 남쪽 가까이 설치하는데, 문반(文班)은 동쪽에 있고, 무반(武班)이 서쪽에 있고 모두 매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하고 북향하여 서로 마주하여 머리가 된다. 【종친(宗親)은 매 품등마다 반두(班頭)는 따로 자리를 설치한다.】 감찰(監察)의 자리 둘은 문무반(文武班)의 뒤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전의(典儀)·인의(引儀)의 자리를 백관(百官)의 북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또 전의(典儀)·인의(引儀)의 자리를 무반(武班)의 북쪽에 동향하여 설치하되, 모두 북쪽이 위가 된다. 전의(典儀)가 또 내제군(內諸君)의 하직을 드릴 자리를 연도(羨道)의 동쪽에 남쪽 가까이 설치하되, 북쪽이 위가 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의 자리를 그 남쪽에 설치하는데, 문반(文班)이 북쪽에 있고, 무반(武班)이 남쪽에 있되, 모두 매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하고 서향하여 북쪽이 위가 된다. 종친(宗親)은 따로 자리를 설치하기를 위와 같이 한다. 감찰(監察)의 자리 둘을 문무반(文武班)의 뒤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전의(典儀)·인의(引儀)의 자리를 백관(百官)의 서쪽에 남쪽 가까이 북향하여 설치하되, 동쪽이 위가 된다. 전설사(典設司)에서 재궁(梓宮)을 안치할 장막[幄]을 현궁(玄宮)의 문밖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유사(攸司)가 욕석(褥席)을 장막[幄] 안에 설치하는데, 둘레에는 휘장[幄]을 설치한다. 전의(典儀)가 영의정(領議政)의 옥백(玉帛)을 올릴 자리를 장막[幄]의 동쪽에 북쪽 가까이 서향하여 설치하고, 애책(哀冊)과 옥백(玉帛)을 받들 관원의 자리를 그 남쪽에 조금 물려서 서향하여 설치하되, 북쪽이 위가 된다. 또 영장전(靈帳殿) 유문(帷門) 밖에 길흉 거여(吉凶車輿)와 의장(儀仗)·명기(明器)를 발인의(發引儀)와 같이 진설한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올리면, 【찬품(饌品)은 견전(遣奠)과 같다.】 내시(內侍)가 전하여 받들고 들어가서 영좌(靈座) 앞에 설치하고, 향로(香爐)·향합(香合)과 초[燭]를 그 앞에 설치하며, 축문(祝文)을 영좌의 왼쪽에 드리고, 준(尊)을 영장전(靈帳殿)의 동남쪽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잔(盞) 3개를 준소(尊所)에 둔다. 방상씨(方相氏)가 먼저 이르러서 현궁(玄宮)에 들어가서 창[戈]으로 사방 모퉁이를 치고, 명기(明器)를 현궁(玄宮) 옆쪽을 진설한다.

감찰(監察)·전의(典儀)·인의(引儀)가 먼저 들어가서 자리로 나아가고, 인의(引儀)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을 나누어 인도하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가고, 다음에 내제군(內諸君)을 인도하는데, 지팡이[杖]를 버리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궤(跪)·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꿇어앉아 부복(俯伏)하여 곡을 하고,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지(哭止)·흥(興)·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고,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궤(跪)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꿇어앉는다. 대전관(代奠官)이 손을 씻고, 【관세(盥洗)는 유문(帷門) 밖에 설치한다.】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하고, 술을 따루어 영좌(靈座) 앞에 드리고, 【연달아 3잔(盞)을 드린다.】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대축(大祝)이 영좌(靈座)의 왼쪽에 나아가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고, 이를 끝마친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곡을 하여 진애(盡哀)한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지(哭止)·흥(興)·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편다.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을 인도하여 나가서 막차(幕次)로 나아가고, 또 인의(引儀)가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을 나누어 인도하여 나간다. 유사(攸司)가 찬(饌)을 거두고 축문(祝文)을 구덩이에 묻는다. 【정자각(丁字閣) 북쪽의 예감(瘞坎)에 묻는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아가서 영좌(靈座)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물러간다. 내시(內侍)가 고명(誥命)·평시책보(平時冊寶)와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어 각각 요여(腰輿)에 안치(安置)하고, 향로(香爐)·향합(香合)을 받들어 충찬위(忠贊衛)에게 주어서 향정(香亭)에 안치(安置)하게 한다. 대축(大祝)이 혼백함(魂帛函)을 받들어 여(輿)에 안치(安置)하고, 우주궤(虞主匱)는 그 뒤에 두며, 받들어 길유궁(吉帷宮)으로 나아가서 영좌(靈座)에 안치하고, 우주궤(虞主匱)를 그 뒤에 두며, 고명(誥命)·평시보책(平時寶冊)과 시책(諡冊)·시보(諡寶)·향로(香爐)·향합(香合)은 영좌(靈座) 앞에 두기를 의식과 같이 한다. 길장(吉仗)은 길유궁(吉帷宮) 문밖에 좌우(左右)로 진설한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아가서 재궁(梓宮)의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순(輴)에 올라서 현궁(玄宮)에 나아가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난다. 내시(內侍)가 애책함(哀冊函)을 받들어 집사자(執事者)에게 주어 요여(腰輿)에 안치(安置)하고, 순(輴) 앞에 선다. 【연도(羨道)의 남쪽에 이르면 애책(哀冊)을 받드는 관원이 전해 받는다.】 집건자(執巾者)가 수건을 올리면, 우의정(右議政)이 수건을 받들고 나아가서 재궁(梓宮)을 닦고 아울러 관의(棺衣)를 턴다. 충의위에서 명정(銘旌)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좌의정이 여재궁관(舁梓宮官) 등을 거느리고 재궁(梓宮)을 받들어 순(輴)에 올린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재궁(梓宮)을 인도하고, 충의위(忠義衛)에서 삽(翣)으로써 재궁(梓宮)을 가리고, 여사(輿士)가 순(輴)을 받들어서 왼쪽으로 돌아서 북쪽이 머리가 되게 한다. 장차 현궁(玄宮)에 나가려 하면, 궁인(宮人)이 모두 곡(哭)을 한다. 【재궁(梓宮)이 연도(羨道)에 이르면, 궁인(宮人)들은 먼저 돌아간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종(哭從)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모두 곡하면서 따라가 하직을 드릴 자리에 이른다. 순(輴)이 현궁(玄宮) 문밖에 이르면, 【좌의정(左議政)이 그 재궁(梓宮)의 상하(上下)를 살핀다.】 관의(棺衣)를 덮고 명정(銘旌)을 취(取)하여 대[杠]를 버리고 그 위에 놓는다. 인의(引儀)가 영의정(領議政)을 인도하여 옥백(玉帛)을 바칠 자리에 나아가고, 애책(哀冊)을 받드는 관원과 옥백(玉帛)을 받드는 관원이 이를 따른다. 좌의정(左議政)이 여재궁관(舁梓宮官)을 거느리고 윤여(輪輿)로써 재궁(梓宮)을 받들어 연도(羨道)로부터 들어가서 현궁(玄宮) 안에 안치(安置)하되, 북쪽이 머리가 된다. 우의정(右議政)이 다시 관의(棺衣)와 명정(銘旌)을 정리하여 평정(平正)하게 한다. 영의정(領議政)이 애책(哀冊)을 가지고 들어가서 꿇어앉아 재궁(梓宮)의 서쪽에 드리고, 다음에 증옥(贈玉)과 증백함(贈帛函)을 꿇어앉아 애책(哀冊)의 남쪽에 드린다.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가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명기(明器)·복완(服玩)·궤자(櫃子)와 보삽(黼翣)·화삽(畫翣) 등을 받들어 각각 차례대로 난간(欄干) 안에 좌우(左右)와 전면(前面)에 묻는다. 처음에 재궁(梓宮)이 현궁(玄宮)에 들어갈 때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궤(跪)·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꿇어앉아 부복하여 곡을 하고,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지(哭止)·흥(興)·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편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궤(跪)·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꿇어앉아 부복(俯伏)하고 곡을 한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지(哭止)·흥(興)·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펴고 하직을 드린다.

이를 끝마치면,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을 거느리고 막차(幕次)로 돌아가고, 또 인의(引儀)가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을 인도하여 나간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가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수문(隧門)을 닫기를 의식과 같이 한다. 영의정(領議政)이 이를 감독하고, 우의정(右議政)이 흙을 9삽(鍤) 덮는다.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가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잇달아 일을 마치고, 지석(誌石)을 내린다. 【능(陵)의 남쪽에 가까운 땅, 곧 석상(石床) 북쪽에 묻는다.】 땅을 현궁(玄宮)의 왼쪽에 파고 관상감(觀象監)에서 후토신(后土神)에게 제사지내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대여(大輿)와 순(輴)의 등속은 백성(栢城) 안의 경지(庚地)에서 불태우고 그 인신(人臣)에 통용(通用)될 것은 불태우지 않는다."

그 애책문(哀冊文)에 이르기를,

"유 성화(成化) 4년231) 세차(歲次) 무자 9월 정사삭(丁巳朔) 초8일 갑자에 세조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 대왕(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께서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시고, 이해 동(冬) 11월 28일 갑신에 광릉(光陵)으로 옮겨 모시니, 예(禮)입니다. 용순(龍輴)232) 을 경계하여 이끄니, 신로(蜃輅)233) 가 구르기 시작합니다. 상설(象設)을 원침(園寢)에 베푸니, 허위(虛衛)를 엄연하게 함은 지발(池綍)234) 입니다. 억조(億兆)의 서민(庶民)들은 거리에서 눈물을 비오듯이 흘리고 만령(萬靈)들은 요확(寥廓)에서 바람이 불듯이 부르짖습니다. 효자인 사왕(嗣王)께서 땅을 치면서 어찌할 줄 모르시니 종천지통(終天之痛)235) 이 어찌나 지극한지요? 닭이 울면 문안(問安)을 드리던 일을 길이 어기게 됨을 슬퍼하고, 봉어(鳳馭)를 휘어잡아도 미치지 못하옵니다. 윤음(綸音)을 난전(鸞殿)에 내려서 휘유(徽猷)를 옥첩(玉牒)에 찬술(撰述)합니다."

하고, 그 사(辭)에 이르기를,

"선리(仙李)236) 가 뿌리를 서리어 복조(福祚)를 전하여 왕업을 번성하게 하였고,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중희(重熙)가 여러 번 흡족합니다. 태평한 국운(國運)이 중간에 희소하여져 위험한 운수를 마침내 만나니, 그 사이에 얼아(孽牙)가 일어나서 신기(神器)를 엿보았습니다. 세조(世祖)께서 잠저(潛邸)에 계셨으나, 종사(宗社)가 이에 의지하였으며, 지극히 기미(幾微)를 밝게 아시어 큰 용맹으로 번개같이 제압하였습니다. 천보(天步)가 다시 편안하여지고 역수(歷數)가 매인 바 되니, 굳이 사양하여도 얻지 못하고, 대통(大統)을 들어가서 계승하였습니다. 여러 영웅을 가어(駕馭)하였고, 한 세상을 고무(鼓舞)하였으며, 서정(庶政)을 새롭게 하고, 옛날의 쌓인 폐단을 고쳤습니다.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시고, 묘도(妙道)가 묵묵히 맞았으며, 지난 것을 심전(心傳)으로 계승하고 구결(口訣)을 정하여 바꾸었습니다. 숙유(宿儒)를 불러 모아서 전석(前席)에서 강론(講論)하였고, 때로 훈사(訓辭)를 저술하시고, 날마다 세자의 덕(德)을 성취시켰으며, 남교(南郊)에서 제천(祭天)하였고, 선비를 대학(大學)에서 책문(策問)하였습니다. 완의(浣衣)237) 로 검박함을 밝히고, 화식(華飾)을 물리치기를 힘썼으며, 초곤(椒壼)238) 의 의절(儀節)이 정제하고, 체악(棣萼)239) 의 은혜를 넓혔습니다. 5형(五刑)240) 을 오직 흠휼(欽恤)히 여겨 태(笞) 하나라도 왕형(枉刑)을 경계하였습니다. 원망하는 백성을 덮어두지 않고 늙은 자들은 잘 봉양(奉養)하였습니다. 큰 일은 군사(軍事)에 있으므로 뜻을 기울여 군사를 사열(査閱)하시고 위부장(衛部將)을 임명하고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였습니다. 선전(宣傳)의 관(官)을 설치하고, 병장(兵將)의 설(設)을 저술하였으며, 군정(軍丁)은 호패(號牌)로 모으니, 군적(軍籍)을 증액(增額)하였습니다. 동쪽·남쪽으로 순수(巡狩)하시니, 백성이 편안하고 만물이 부성(阜盛)하였습니다. 정사(政事)는 농사(農事)와 양잠(養蠶)을 먼저 하시니, 창유(倉庾)에 곡식이 많이 쌓였습니다. 조과(條科)를 참작하여, 전장(典章)을 정돈하여 이루었고, 진교(眞敎)를 여사(餘事)로 여기어 도량(道場)에 경건히 예(禮)하였습니다. 천화(天花)241) 가 대낮에 내리고 감로(甘露)242) 가 밤에 적시었습니다. 협화(協和)하는 기운이 널리 올라서 상서로운 부절[符]이 여러 차례 나타났습니다. 백록(白鹿)이 와서 길들여지고 청학(靑鶴)이 날개를 폈습니다. 위풍(威風)이 북쪽을 진동시키니, 북쪽 삭정(朔庭)이 드디어 텅 비게 되었으며, 신화(神化)가 동쪽을 적시니, 바다를 건너 와서 동맹(同盟)하였고, 앵무새[隴禽]를 입공(入貢)하고, 무소[木兕]를 납석(納錫)하였습니다. 지극한 정치(政治)의 형상은 오직 덕(德)이고 물건뿐이었습니다. 도적(盜賊)이 공험(公險)에 웅거하여 군사를 황지(潢池)에서 농락하였고, 감히 살육(殺戮)을 멋대로 하고, 스스로 정휘(旌麾)를 꼈습니다. 장수(將帥)에게 명하여 기(旗)를 빼앗고 썩은 것을 무너뜨리고 병의 물을 쏟듯이 하였습니다. 호로(胡虜)가 변경에 침범하여, 천자(天子)가 군사를 징발(徵發)하니, 만군(萬軍)이 일제히 향하여 가니, 여러 추류(醜類)들이 이에 굴복하였고, 삼위(三衛)를 쳐부수고, 부로(俘虜)를 구궐(九闕)243) 에 바쳤습니다. 황제(皇帝)가 큰 공적을 가상히 여기어 황제의 권애(眷愛)가 더욱 우악(優渥)하였습니다. 성대한 덕(德)과 신묘한 공(功)은 전에는 빛났으나 뒤에는 끊어졌습니다. 억년의 장수(長壽)를 누리어 만백성의 부모(父母)가 되기를 빌었더니, 무엇에 의지하여 점쳤겠습니까? 재앙의 기운이 홀궁(忽宮)에 고(告)하여, 수레가 천천히 나가니, 아아! 슬프도다.

성상(聖上)께서는 본래 나면서 아시었고 예기(藝技)가 많고, 또 재주가 많았으며, 전대(前代)를 널리 보시고, 큰 도량은 더욱 넓어서 구우(區宇)를 확청(廓淸)하였고, 두 번 요에(妖曀)를 소탕하시니, 공훈(功勳) 높은 충신(忠臣)과 큰 재보(宰輔)가 띠[帶] 같고 숫돌[礪]과 같았습니다. 밤 늦도록 정성을 가다듬고, 연익(燕翼)에 모유(謀猷)를 끼쳤습니다. 태평(太平)에 이르기를 도모하니, 15년 동안 융성함에 짝하였습니다. 능히 그 왕위를 어렵게 여기신 지 14년 중에 절선(節宣)함에 어긋남이 있었고, 우로(憂勞)가 오래 쌓여서 대점(大漸)에 이르지도 아니하시고, 드디어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한가하게 거(居)하시어 이양(怡養)하시기를 바라고, 길이 경사(慶事)와 복조(福祚)를 누리도록 바랐더니, 아아! 금방(金方)과 양약(良藥)이 효험이 없어서 어찌 옥궤(玉几)에 말명(末命)을 잠깐 사이에 이르십니까? 아아! 슬프도다. 해가 문득 빠지니, 창[戈]를 휘둘러도 멈추지 못하겠고, 하늘이 무너지니, 연석(鍊石)으로 누가 보충하겠습니까? 정호(鼎湖)244) 에 활을 버리시고, 교산(橋山)에 신발[舃]을 남기시었습니다. 상고(喪考)를 슬퍼하여 수레를 부여잡고 울부짖으며, 유곡(孺哭)을 애통하여, 목이 메입니다. 아아! 슬프도다. 백운(白雲)을 타고 제향(帝鄕)으로 가십니까? 청오(靑烏)를 점쳐서 수원(壽原)으로 가십니까? 밤에 전(奠)드리니, 경가(瓊斝)의 술잔이요, 새벽에 출발을 하니 금근(金根)의 수레입니다. 기성(綺城)의 애장(哀仗)을 진열(陳列)하고 자고(滋槁)의 도헌(度幰)을 이끕니다. 바람 소리가 처초(悽楚)하니, 검은 명정(銘旌)이 펄럭거리고, 달빛이 참담(慘淡)하니, 괴로운 만가(挽歌)를 부릅니다. 선유(仙遊)를 우러러보니 너무나 아득하고, 야대(夜臺)를 닫으니, 적막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큰 덕도 반드시 수(壽)를 하지 못하니, 교묘한 역수(歷數)도 능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요명(窅冥)한 이수(理數)에 맡기고, 높디 높은 공렬(功烈)을 올립니다. 검은 땅을 뒤로 하시어 존재할 것이며, 푸른 하늘에 높이 올라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아! 슬프도다."

하였다. 그 지문(誌文)은 이러하였다.

"크게 생각건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의 성한 덕(德)과 큰 업(業)은 외외탕탕(巍巍蕩蕩)하고 혁혁탁탁(赫赫濯濯)하여 다 이름하여 말할 수 없으므로, 이제 줄여서 대강을 서술하여 현궁(玄宮)에 기록한다. 삼가 살피건대, 대왕(大王)은 세종(世宗)의 둘째 아들이시니, 소헌 왕후(昭憲王后) 심씨(沈氏)영락(永樂) 15년 정유245) 9월 병자에 왕을 낳으셨다. 왕께서 어려서 영민(英敏)하고 어질었으며, 배우기를 좋아하여 게으르지 아니하므로 양궁(兩宮)께서 기특하게 여기어 사랑하였다. 진양 대군(晉陽大君)에 봉(封)하였다가, 뒤에 수양 대군(首陽大君)으로 고쳤다. 정통(正統) 11년 병인246)소헌 왕후(昭憲王后)께서 훙(薨)하시고, 경태(景泰) 1년 경오247)세종(世宗)께서 훙(薨)하시니, 왕께서 애훼(哀毁)하시고 예(禮)를 다하시어 보는 사람들이 슬퍼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임신248)문종(文宗)이 훙(薨)하시니, 천자(天子)께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시호(諡號)와 제사(祭祀)를 내려 주시고 또 사왕(嗣王)에게 고명(誥命)을 주었는데, 사왕께서 왕(王)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북경[京師]에 가서 감사함을 진달(陳達)하였다. 계유249) 에 간신(姦臣)들이 정사(政事)를 마음대로 하고 여러 불령(不逞)한 사람을 모아서 변(變)을 도모하므로, 왕께서 사왕(嗣王)에게 고하고 주멸(誅滅)하였다. 그 공훈(功勳)으로써 분충 장의 광국 보조 정책 정난 공신(奮忠仗義匡國輔祚定策靖難功臣)을 봉하니,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정사(政事)를 도왔으며, 중외(中外)의 병마 제군(兵馬諸軍)을 모두 통솔하였다.

을해250) 후 6월에 사왕께서 어리고 또 병이 있기 때문에 왕에게 선위(禪位)하니, 왕이 이에 왕위(王位)에 임하여 아침부터 밤까지 우근(憂勤)하여 항상 농사(農事)를 권하고 학교(學校)를 일으키고 어진이를 구하고 병자를 기르기를 선무(先務)로 삼고, 교서(敎書)를 내려 백성들을 기르기를 돈독하게 권하였다. 7월에 적자(嫡子) 이장(李暲)을 세워 세자(世子)로 삼았다. 병자251) 에 왕께서 반교(頒敎)하여 한위(捍衛)한 공로를 생각하여 좌익 공신(佐翼功臣) 43인을 봉(封)하였다. 천순(天順) 원년 정축252) 에 군신(群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서 ‘승천 체도 열문 영무(承天體道烈文英武)’라고 하였다. 9월에 세자(世子) 이장(李暲)이 병으로 졸(卒)하니, 시호를 ‘의경(懿敬)’이라 내려 주고, 금상(今上)을 세워 세자로 삼았다.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치주례(齒胄禮)253) 를 행하였다. 왕께서 매양 일을 만나면 반드시 원인(援引)하여 비유하고 세자(世子)를 가르쳤다. 또 훈사(訓辭) 한 편(篇)을 친히 저술하여 항덕(恒德)·경신(敬神)·납간(納諫)·두참(杜讒)·용인(用人)·물치(勿侈)·사환(使宦)·신형(愼刑)·문무(文武)·선술(善述)의 열 가지 일을 조목으로 만들어 항상 외우도록 하였다. 문신(文臣)에게 명하여 선조(先祖)의 가모 선정(嘉謀善政)을 편찬하여 이름짓기를, 《국조보감(國朝寶鑑)》이라 하고, 또 《동국통감(東國通監)》을 찬술하였는데 모두 품지(稟旨)하여 왕이 결단하였다. 무인254) 에 호패(號牌)의 법을 세우고, 기묘255) 에 국학(國學)에 행행(行幸)하여 성인(聖人)을 알현하고 선비들을 책문(策問)하였다. 왕께서 학자들이 사수(師授)256) 가 밝지 아니하고,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음을 걱정하여 모든 유생(儒生)을 모아 《오경(五經)》의 같음과 다름을 논란(論難)하게 하고, 친히 스스로 결정하여 여러 의심을 얼음과 같이 풀어 주었다. 또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를 저술하여 학자들을 깨우쳐 주었다.

경진257) 에 왕께서 이르시기를, ‘한(漢)나라의 광무제(光武帝)는 천하(天下)가 큰데도 오히려 이직(吏職)을 감손시켜 10분의 1을 두었으니, 나라는 적은데 관리(官吏)가 많아서 먹는 것이 일보다 많다면 어찌 천록(天祿)을 중히 여기는 뜻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용관(冗官) 1백 명을 도태(陶汰)시켰다. 동여진(東女眞) 낭복아합(浪卜兒哈)이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伏誅)되었더니, 그 아들 아비거(阿比車)가 당류(黨類)를 불러 모아 변어(邊圉)를 침범하여 소요(騷擾)하므로, 왕께서 군사를 징발하여 토평(討平)하였다. 겨울에 왕께서 서쪽으로 순수(巡狩)하시어 평양(平壤)에 이르러, 선비를 책문(策問)하시고 늙은 부로(父老)들을 뜰에서 잔치하고, 지나가는 고을의 전조(田租)를 감면하였다. 신사258) 에 명하여 여러 도(道)의 군적(軍籍)을 닦게 하니, 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의 두 도가 백성들의 거주함이 희활(稀闊)하므로, 백성을 모아 옮기고 10년 동안 급복(給復)하였다. 계미259) 에 교서(敎書)를 내려 장수(將帥)를 구(求)하였는데, 비천(卑賤)하거나 현달(顯達)하거나, 친척이거나 인아(姻婭)인 것을 구애하지 말고 재주와 행실을 기록하여 아뢰게 하였다. 왕께서 군사의 일에 뜻을 기울여서 달마다 두 차례씩 진(陣)을 사열(査閱)하였고, 봄·가을로 강무(講武)하였으며, 스스로 병장(兵將) 등의 설(說)을 지어서 여러 장수(將帥)들에게 훈려(訓勵)하였다. 매양 장사(將士)들에게 말씀드리기를, ‘무인(武人)으로 학문(學文)이 없으면 장수가 아니다.’고 하시고, 드디어 돈독히 권하기를 더하였으므로, 무릇 항오(行伍)의 사이에 있는 군인으로서 글을 읽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성화(成化) 원년 을유260) 가을에 남쪽으로 순행(巡幸)하다가 온양(溫陽)에 이르러서 선비를 책문(策問)하고 늙은이들을 무양(撫養)하기를 서쪽에서 하던 예(禮)와 같이 하였다. 병술261) 에 왕께서 여러 조정에서 입법(立法)한 조과(條科)가 너무 번잡하다고 하여, 상각(商搉)하고 손익(損益)하여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정하고, 또 경비(經費)가 근거가 없고 공부(貢賦)가 고르지 못하다고 하여 규식(規式)을 상세히 정하니, 이에 관리(官吏)들이 봉행(奉行)하기가 쉽고 민폐(民弊)가 모두 없어졌다. 동쪽으로 순수(巡狩)하여 강릉(江陵)에 이르러 선비를 책문(策問)하여 포흠(逋欠)을 면제하고 전조(田租)를 감면하여 주었다. 정해262)함길도(咸吉道)의 사람 이시애(李施愛)가 절도사(節度使) 등을 교살(矯殺)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서 반역(反逆)하니,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討伐)하였다. 군사들이 돌아오니, 장사(將士)에게 상(賞)을 차등 있게 주었고, 적개 공신(敵愾功臣) 45인을 봉(封)하였다. 8월에 황제께서 사신(使臣)을 보내어 군사를 청(請)하여, 건주삼위(建州三衛)의 여러 오랑캐를 치는 것을 도왔는데, 왕께서 장수에게 명하여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파저강(婆瀦江) 올미부(兀彌府)의 여러 요새(要塞)를 격파하게 하였고, 사신을 보내어 부로(俘虜)를 바쳤다. 황제께서 중사(中使)를 보내어 포장(褒奬)하고 상(賞)을 주심이 넉넉하고 후하였으며, 여러 장수에게도 또한 각각 상을 주었다. 무자263) 9월 갑자에 왕께서 병으로 수강궁(壽康宮)의 정침(正寢)에서 훙(薨)하시니, 향년(享年)이 52세이며, 재위(在位)하신 지 14년이었다.

왕께서 예지(睿智)롭고 영의(英毅)하시며, 관간(寬簡)하고 인검(仁儉)하시며, 용력(勇力)이 세상을 덮고 학문이 융회 관통(融會貫通)하시어, 내전(內典)과 백가(百家)를 궁연(窮硏)하지 아니하심이 없었고, 처사(處事)가 정대(正大)하시어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간격이 있는 것이 없었다. 제부(諸父)264) 를 공경히 섬기고, 여러 동생을 우애하여 모두 환심(懽心)을 다하였다. 규문(閨門)이 화목(和睦)하고 명분(名分)이 정숙(整肅)하였고, 돈독한 소박(素朴)을 백성들보다 먼저 행하여 몸에는 세탁(洗濯)한 옷을 입었으며, 궁인(宮人)은 다만 쇄소(灑掃)하는 데만 대비하게 하고 그 나머지는 모조리 풀어서 보내었다. 날마다 대신(大臣)을 인견(引見)하여 정치의 방도를 물어 보았고, 간혹 유아(儒雅)를 연빙(延聘)하여, 역대의 치란(治亂)의 장취를 상론(尙論)하였고, 도학(道學)의 오묘함을 강론(講論)하시어 끈기 있게 피로를 잊고, 혹은 한밤중이 되어서야 이에 파(罷)하였다. 정사(政事)에 임하여 정성을 가다듬고 하루 하루 더욱 삼가하였고, 공(功)을 높이고 어진이를 상주며, 사특(邪慝)한 자를 물리치고 아첨하는 자를 멀리 하며, 상(賞)을 미덥게 하고 벌(罰)을 밝게 하며, 백성에게 축적(畜積)하기를 권하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렴(賦斂)을 적게 하며, 쓸데없는 비용을 도태하여 버리고 재용(財用)을 절약하시니, 수년 사이가 되지 못하여 부고(府庫)가 충실하고, 민물(民物)이 부성(阜盛)해졌다. 매양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거듭 경계하고, 혹은 사자(使者)를 보내어 염문(廉問)하게 하고, 조신(朝臣)으로 외직(外職)에 보임(補任)되는 자는 모두 폐사(陛辭)하기를 허락하고, 분우(分憂)의 뜻을 대면하여 유시(諭示)하여 효과를 이룩하도록 책임지웠다. 다스리는 데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직질(職秩)을 더하여 넉넉히 포장(褒奬)하였으나, 혹은 백성들을 침탈(侵奪)하거나 남형(濫刑)한 자가 있으면 비록 조그마한 것이라도 용서하지 않았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찾아서 망라(網羅)하니, 선비가 한 가지 재예(才藝)에 조금이라도 잘하는 점이 있으면 모두 다 등용하여 쓰니, 왕왕 불차(不次)로 탁용(擢用)하였으며, 선비를 만나 한 번 낯빛을 보시면 그 폐부(肺腑)를 꿰뚫어 보았고 뒤에 그 좋고 나쁜 점을 말하면 맞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생기 없는 환과(鰥寡)에게 은혜를 베풀고, 널리 묻고 넓게 찾아서 백성의 숨은 폐단을 구제하기에 힘쓰니, 전리(田里)에 원망을 품은 자가 없었다. 14년 사이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들에게 부지런한 것이 한결같은 지성(至誠)에서 나왔다. 사대(事大) 교린(交隣)에도 모두 그 도리를 다하니, 도이(島夷)와 산융(山戎)이 진귀한 물건을 받들고 충성을 바치기를 길이 멀다 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동방의 정치(政治)가 이에 성하였다. 백성들은 대소(大小)를 가리지 않고 길이 향국(享國)하시기를 크게 바라지 않음이 없었는데, 호천(昊天)께서 부조(不弔)하시어 팔음(八音)을 문득 그치게 하시니, 그 애통함을 이길 수가 있겠는가? 안석[几]에 의지하여 전(前) 2일에 왕께서 옥새[璽]를 금상 전하(今上殿下)께 전(傳)하여 주시고 뒷일을 유명(遺命)하시되, 모두 검약(儉約)을 좇으라고 하였다. 금상(今上)께서 양암(亮闇)에 거하면서 예(禮)를 다하시고,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시호를 올려 이르기를, ‘승천 체도 열문 영무 지덕 융공 성신 명예 흠숙 인효[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세조(世祖)’라고 하였다. 11월 갑신에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풍양현(豊壤縣) 직동(直洞)의 언덕에 장사지내고 호(號)를 ‘광릉(光陵)’이라 하였다. 아아! 《서경(書經)》의 성신 문무(聖神文武)와 《주역(周易)》의 강건 수정(剛健粹精)과 《시경(詩經)》의 명류 장군(明類長君)은 우리 세조 대왕(世祖大王)께서 실로 겸전하셨도다.

태비(太妃) 윤씨(尹氏)파평(坡平)의 세가(世家)이요, 증 좌의정 윤번(尹璠)의 따님이시다. 성인(聖人)을 짝하시어 덕(德)을 기르시고, 2남(男)과 1녀(女)가 탄생하였으니, 맏아드님은 의경 세자(懿敬世子)이고 그 다음은 우리 전하(殿下)이시며, 딸은 의숙 공주(懿淑公主)이시다. 세조께서 당초에 전하를 위하여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의 딸을 취(娶)하여 빈(嬪)으로 삼아 1남(男)을 낳았으나, 빈(嬪)과 그 아드님은 모두 먼저 죽었다. 또 청천군(淸川君) 한백륜(韓伯倫)의 딸을 취하여 2남과 2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고 1남은 먼저 죽었고, 세조(世祖)께서 이미 위(位)를 전하에게 전하시고, 명하고 봉하여 비(妃)로 삼았다. 의경 세자는 처음에 도원군(桃源君)에 봉(封)해졌고 우의정 한확(韓確)의 딸을 취하여 2남을 낳았는데, 맏아드님은 이정(李婷)이라 하고 월산군(月山君)에 봉(封)해져 병조 판서(兵曹判書) 박중선(朴仲善)의 딸을 취하였고, 다음은 금상(今上)265) 의 휘(諱)이다.】 이라 하고 자을산군(者乙山君)에 봉(封)해져 한명회의 차녀(次女)를 취하였고, 딸은 승빈(承賓) 홍상(洪常)에게 시집갔다. 의숙 공주(懿淑公主)하성군(河城君) 정현조(鄭顯祖)에게 하가(下嫁)하였다. 귀인(貴人) 박씨(朴氏)가 2남을 낳았는데, 맏아드님은 이서(李曙)라 하여 덕원군(德源君)에 봉(封)해졌고, 그 다음은 이성(李晟)이라 하여 창원군(昌原君)에 봉(封)해졌다. 덕원군(德源君)은 사직(司直) 김종직(金從直)의 딸을 취하여 2남과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입주전 의주(立主奠儀注)는 이러하였다.

"현궁(玄宮)이 닫히기를 기다려 장차 끝나려 하면, 전의(典儀)가 내제군(內諸君)의 자리를 길유궁(吉帷宮) 문안의 동쪽에 남쪽 가까이 서향하여 설치하는데 북쪽이 위가 된다.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의 자리를 길유궁(吉帷宮)의 문밖에 남쪽 가까이 설치하되, 문반(文班)은 동쪽, 무반(武班)은 서쪽에 있게 하고, 모두 매 품등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향하게 하며, 서로 마주보고 머리가 되게 한다. 【종친(宗親)은 따로 자리를 설치하기를 보통 때와 같이 한다.】 감찰(監察)의 자리 둘을 문무반(文武班) 뒤에 북향하여 설치하고, 전의(典儀)·제주관(題主官)·인의(引儀)의 자리를 문관(文官)의 북쪽에 서향하여 설치하고, 또 전의(典儀)·인의(引儀)의 자리를 무관(武官)의 북쪽에 동향하여 설치하는데, 모두 북쪽을 위로 한다. 봉상시(奉常寺)의 관원이 탁(卓) 3개를 영좌(靈座)의 동남쪽에 서향하여 설치하는데, 【제주탁(題主卓)은 북쪽에 있고 다음에 필연탁(筆硯卓)이 있고, 다음에 반이탁(槃匜卓)이 있다.】 붓[筆]·벼루[硯]·먹[墨]·반(槃)·이(匜) 【향탕(香湯)을 갖춘다.】 ·수건[巾] 【세저포(細苧布)를 쓴다.】 을 갖춘다.

감찰(監察)·전의(典儀)·제주관(題主官)·전의(典儀)·인의(引儀)가 먼저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 인의(引儀)가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 다음에 내제관(內諸官)을 인도하여 지팡이[杖]을 버리고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 대축(大祝)이 손을 씻고, 【관세(盥洗)는 유문(帷門) 밖에 설치한다.】 올라가서 영좌(靈座)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서 탁(卓)에 놓고, 궤(匱)를 열어 상주(桑主)를 받들어 내어서 향탕(香湯)으로 신주(神主)를 목욕시키고, 수건으로 닦아서 탁(卓)에 눕혀 둔다.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을 인도하여 올라가서 탁(卓) 앞에 나아가서 북향하여 서고, 【자리[席]를 설치한다.】 제주관(題主官)이 손을 씻고 올라가서 탁(卓) 앞에 나아가서 서향하여 선다. 신주의 전면(前面)에 제(題)하여 쓰기를, ‘아무 호 대왕[某號大王]’이라 하여, 먹으로 쓰기를 끝마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어서 궤(匱)에다 들여놓고 뚜껑을 덮어서 영좌(靈座)에 안치(安置)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둔다.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을 인도하여 나와서 막차(幕次)로 나아간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영좌(靈座) 앞에 설치하고, 【찬품(饌品)은 천전(遷奠)과 같다.】 향로(香爐)·향합(香合)과 초[燭]를 그 앞에 설치한다. 축문(祝文)을 영좌(靈座) 앞에 드리고, 준(尊)을 자리에 설치하여 백저건(白苧巾)으로 덮고, 궤(几)를 뒤에 설치한다.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을 인도하여 들어가서 자리에 나아간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궤(跪)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꿇어앉는다. 대전관(代奠官)이 손을 씻고, 향안(香案) 앞에 나아가서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하고, 술을 따루어 영좌(靈座)의 앞에 드리고, 【연달아 3잔(盞)을 드린다.】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대축(大祝)이 영좌(靈座)의 왼쪽에 나가서 서향하여 꿇어앉아, 축문(祝文)을 읽기를 끝마친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부복(俯伏)·곡(哭)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부복(俯伏)하고 곡을 하여 진애(盡哀)한다.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곡지(哭止)·흥(興)·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곡을 그치고 일어나 네 번 절하고 일어나서 몸을 편다. 대축(大祝)이 우주(虞主)를 받들어 궤(匱)에 들여놓는다. 인의(引儀)가 내제군(內諸君)을 인도하여 나가서 막차(幕次)로 나아가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을 인도하여 나간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거두고, 축문(祝文)을 받들어 구덩이[坎]에 묻는다. 【정자각(丁字閣) 북쪽의 예감(瘞坎)이다.】

집사관(執事官)은 제주관(題主官), 【문신 3품(三品)이다.】 대전관(代奠官), 【종친(宗親) 2품(二品) 이상이다.】 대축(大祝), 【내제(內制)·외제(外制)이다.】 향(香)을 받들고 술을 드리는 집사자(執事者) 6인, 【참외(參外)이다.】 좌통례(左通禮), 전의(典儀)·인의(引儀)이다."

반우 의주(返虞儀注)는 이러하였다.

"유사(攸司)가 길장(吉仗)을 유문(帷門) 밖의 좌우(左右)에 진열(陳列)하고, 섭사복 정(攝司僕正)이 반우연(返虞輦)을 문밖에 남향하여 바치고, 또 요여(腰輿)와 향정(香亭)을 길유궁(吉帷宮) 앞에 바치기를 의주(儀注)와 같이 한다. 입주전(立主奠)이 끝나기를 기다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아가서 길유궁(吉帷宮)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영좌(靈座)에서 내려서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난다. 집사자(執事者)가 고명(誥命)·평시책보(平時冊寶)와 시책보(諡冊寶)를 받들어 각각 요여(腰輿)에 둔다. 충찬위(忠贊衛)에서 향로(香爐)·향합(香合)을 받들어 향정(香亭)에 두고,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여(輿)에 안치(安置)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둔다. 내시(內侍)가 여(輿)를 받들고, 섭좌통례가 앞에서 인도하여 유문(帷門) 밖에 이른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아가서 여(輿)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서 연(輦)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난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연에 안치하고, 혼백함은 그 뒤에 둔다. 섭좌통례가 나아가서 연(輦)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연가(輦駕)가 진발(進發)하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우주연(虞主輦)이 움직이면 의장(儀仗)이 차례로 앞에서 인도하고, 내제군(內諸君)과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차례로 시종(侍從)하기를 처음과 같이 한다. 우주연(虞主輦)이 주정소(晝停所)의 유문(帷門) 밖에 정지하면,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아가서 연(輦)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서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난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여(輿)에 안치(安置)하고, 내시(內侍)가 여(輿)를 받들고, 섭좌통례(攝左通禮)가 앞에서 인도한다. 장전(帳殿) 앞에 이르면,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서 영좌(靈座)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俯伏)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영좌(靈座)에 안치(安置)하고, 의장(儀仗)은 유문(帷門) 밖의 좌우(左右)에 진열한다. 내제군(內諸君)이 말[馬]에서 내려서 막차(幕次)로 들어가고, 종친(宗親)과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각각 말에서 내려 막차(幕次)로 나아간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바치고 행례(行禮)하기를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하여 끝마친다. 섭좌통례(攝左通禮)가 연·여(輦輿)에서 오르내리고 진발(進發)하기를 계청(啓請)하고, 인도하고 따르기를 모두 처음과 같이 한다.

이보다 앞서 유사(攸司)가 영좌(靈座)를 영창전(永昌殿) 북쪽 벽(壁)에 남면(南面)하여 설치한다. 도성(都城)에 남았던 문무(文武)의 여러 신하는 성문(城門) 밖으로 나가서, 우주연(虞主輦)이 장차 이르기를 기다리면서 길 옆에 나누어 선다. 우주연(虞主輦)이 이르면, 전의(典儀)가 창(唱)하기를, ‘국궁(鞠躬)·사배(四拜)·흥(興)·평신(平身)하라.’ 하면, 여러 관원이 국궁(鞠躬)하였다가 네 번 절하고 일어나 몸을 펴고 이를 끝마치면 모두 말을 탄다. 문반(文班)은 왼쪽에 있고 무반(武班)은 오른쪽에 있으면서 앞에서 인도하여 종묘(宗廟) 앞 길에 이르면 말에서 내린다. 【지나가면 도로 말을 탄다.】 우주연(虞主輦)이 종묘(宗廟) 앞 길에 이르면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가서 연(輦) 앞에 당(當)하여 부복(俯伏)하였다가 꿇어앉아, 연(輦)이 잠시 머물기를 계청(啓請)한다. 여사(輿士)가 연(輦)을 북향하여 돌려서 욕석(褥席) 남쪽에 정지시킨다. 【유사(攸司)가 먼저 욕석(褥席)을 북향하여 설치한다.】 조금 있다가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부복하였다가 꿇어앉아, 연가(輦駕)가 진발(進發)하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여사(輿士)가 연(輦)을 서향하여 돌리고 진발(進發)한다. 내제군(內諸君)가 종친(宗親)·백관(百官)들이 말에서 내리고, 지나가면 함께 말에 오른다. 우주연(虞主輦)이 장차 광화문(光化門) 밖에 이르면 앞에서 인도하던 여러 관원들은 말에서 내려 서립(序立)한다. 우주연(虞主輦)이 이르면 국궁(鞠躬)하고, 지나가면 몸을 바로 편다. 우주연(虞主輦)이 전문(殿門) 밖에 이르면,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나가서 연(輦) 앞에 당(當)하여 부복하였다가 꿇어앉아, 연(輦)에서 내려서 여(輿)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난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여(輿)에 안치(安置)하고, 내시가 여(輿)를 받들고, 섭좌통례(攝左通禮)가 앞에서 인도하고 전(殿)의 계단 위에 이르면, 섭좌통례(攝左通禮)가 부복하였다가 꿇어앉아, 여(輿)에서 내려서 영좌(靈座)에 오르기를 계청(啓請)하고, 부복하였다가 일어나서 물러간다. 대축(大祝)이 우주궤(虞主匱)를 받들어 영좌(靈座)에 안치(安置)하고, 혼백함(魂帛函)은 그 뒤에 둔다. 집사자(執事者)가 고명(誥命)·평시책보(平時冊寶)와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받들어 영좌(靈座) 앞의 조금 동쪽에 놓고, 【고명안(誥命案)은 북쪽에 놓고, 시책보안(諡冊寶案)은 그 다음에 놓는다.】 전사(殿司)가 봉선(鳳扇)·작선(雀扇) 각각 1개와 청개(靑蓋)·홍개(紅蓋) 각각 1개씩을 좌우(左右)로 설치하는데, 부(趺)가 있다. 【선(扇)은 북쪽에 있고, 개(蓋)는 그 다음에 있다.】 내제군(內諸君)이 재실(齋室)로 나아가고 종친(宗親)과 백관(百官)들이 각각 막차(幕次)로 간다."

그 반차 의주(班次儀注)는 이러하였다.

"연(輦) 앞의 시위 군사(侍衛軍士)는 병조(兵曹)에서 진열(陳列)하기를 옛 의식과 같이 한다. 【연(輦) 뒤도 이와 같다.】 홍문대기(紅門大旗) 2개가 좌우(左右)로 나누어 서고, 【무릇 대기(大旗)는 1인이 잡고 2인이 인도하고 2인이 따르며, 중기(中旗)는 1인이 잡고 2인이 인도하고, 소기(小旗)는 1인이 잡고 1인이 인도하는데, 모두 청의(靑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한다.】 홍개(紅蓋)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각각 1인이 잡는데, 청의(靑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한다. 무릇 산개(繖蓋)와 청선(靑扇)을 잡는 사람도 이와 같다.】 다음에 주작기(朱雀旗)·청룡기(靑龍旗) 각각 1개가 왼쪽에 있고, 백호기(白虎旗)·현무기(玄武旗) 각각 1개가 오른쪽에 있으며, 황룡기(黃龍旗)가 가운데 있고, 금고(金鼓)가 가운데 있다. 【고(鼓)는 왼쪽 2인이 잡고 금(金)은 오른쪽 1인이 잡는데, 모두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와 같다.】 다음에 육정기(六丁旗)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주작기(朱雀旗)가 가운데 있고, 다음에 백택기(白澤旗)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삼각기(三角旗)·각단기(角端旗)·용마기(龍馬旗) 각 2개가 나누어 서고, 천하태평기(天下太平旗)가 가운데 있고, 다음에 현학기(玄鶴旗) 1개가 왼쪽에 있고, 백학기(白鶴旗) 1개가 오른쪽에 있다. 다음에 취각(吹角) 6인이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2인이 대각(大角)을 잡고 먼저 가고, 다음에 중각(中角)을 2인이 잡고, 다음에 소각(小角)을 2인이 잡는다, 뒤에도 이와 같다.】 어마(御馬) 2필이 안장(鞍粧)을 갖추고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각각 2인이 끄는데, 청의(靑衣)에 종색립(椶色笠)·운혜(雲鞋)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와 같다.】 다음에 표골 타자(豹骨朶子) 6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각각 1인이 잡는데,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한다. 무릇 과부(瓜斧)·필한(罼罕)·등도(鐙刀)·정절(旌節)·당봉(幢捧)·작자(斫子)·용봉작선(龍鳳雀扇)을 잡는 사람도 이와 같다.】 금고(金鼓)가 가운데 있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다음에 웅골 타자(熊骨朶子) 6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영자기(令字旗)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잡는 사람은 홍의(紅衣)에 피모자(皮帽子)를 착용하고, 금고(金鼓)와 자기(字旗)를 잡는 사람도 이와 같다.】 가귀선인기(駕龜仙人旗) 2개가 가운데 있어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고자기(鼓字旗) 1개가 오른쪽에 있고, 금자기(金字旗) 1개가 왼쪽에 있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다음에 가서봉(哥舒捧)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벽봉기(碧鳳旗)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다음에 금등(金鐙)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군왕천세기(君王千歲旗)가 가운데 있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은장도(銀粧刀)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은교의(銀交倚)가 가운데 있고, 각답(脚踏)이 이를 따른다. 【1인이 교의(交倚)를 받들고, 1인이 각답(脚踏)을 잡는데, 자의(紫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한다. 우관(盂罐)을 잡는 사람도 이와 같다.】 다음에 금장도(金粧刀)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주작당(朱雀幢)·청룡당(靑龍幢) 각각 1개가 왼쪽에 있고, 백호당(白虎幢)·현무당(玄武幢) 각각 1개가 오른쪽에 있고, 은관자(銀罐子)·은우(銀盂) 각각 1개가 가운데 있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다음에 은립과(銀立瓜) 4개와 금립과(金立瓜) 2개가 서로 사이하여 좌우로 나누어 서고, 금고(金鼓)가 가운데 있고, 어마(御馬) 2필이 선다. 다음에 은횡과(銀橫瓜) 4개와 금횡과(金橫瓜) 2개가 서로 사이하여 좌우로 나누어 서고, 은교의(銀交倚)가 가운데 있고, 각답이 이를 따르고 어마 2필이 선다. 다음에 은작자(銀斫子)·금작자(金斫子) 각각 4개가 서로 사이하여 좌우로 나누어 서고, 주칠 교의(朱漆交倚)가 가운데 있고 각답(脚踏)이 이를 따른다. 청양산(靑陽繖)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소여(小輿)가 가운데 있다. 【여사(輿士) 30인은 자의(紫衣)에 흑건(黑巾)을 착용한다.】 한(罕) 1개가 왼쪽에 있고 필(罼) 1개가 오른쪽에 있고, 다음에 모절(旄節) 4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정(旌) 4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소여(小輿)가 가운데 있다. 【여사(輿士) 40인은 자의(紫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한다.】 은월부(銀鉞斧)·금월부(金鉞斧) 각각 4개가 서로 사이하여 좌우로 나누어 서고, 금고(金鼓)가 가운데 있고, 어마 2필이 선다. 다음에 봉선(鳳扇) 8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청개(靑蓋)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작선(雀扇) 10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홍개(紅蓋)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용선(龍扇)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전부 고취(前部鼓吹)가 있다. 【진열하지만 연주하지 아니한다.】

고명(誥命)·평시책보(平時冊寶)의 요여(腰輿)가 가운데 있는데, 상서관(尙瑞官) 1인이 이를 따르고, 시책보 요여(諡冊寶腰輿)가 가운데 있어 차례대로 행진하는데, 【매 1요여(腰輿)마다 여사(輿士)는 보충한 숫자까지 아울러 15인인데, 모두 자의(紫衣)에 흑건(黑巾)·학창(鶴氅)·홍대(紅帶)·청행등(靑行謄)·운혜(雲鞋)를 착용한다.】 국장 도감(國葬都監) 관원 2인이 이를 따른다. 【상복(常服)에 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수정장(水精杖)·금월부(金鉞斧) 각각 1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선다. 【장(杖)은 왼쪽에 있고 부(斧)는 오른쪽에 있는데, 각각 1인이 잡고, 청의(靑衣)에 자건(紫巾)을 착용한다.】 홍촉롱(紅燭籠)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충찬위(忠贊衛)에서 받들어 드는데, 상복(常服)에 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뒤에도 이와 같다.】 반우 요여(返虞腰輿)가 가운데 있다. 【여사(輿士)는 보충한 숫자까지 아울러 30명인데, 자의(紫衣)에 흑건(黑巾)을 착용한다.】 청촉롱(靑燭籠)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홍양산(紅陽繖)이 가운데 있다. 【충의위(忠義衛)에서 받들어 드는데, 상복(常服)에 흑각대(黑角帶)를 착용한다.】 백촉롱(白燭籠)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향정(香亭)이 가운데 있다. 【봉담인(捧擔人)은 보충한 숫자까지 아울러 15명인데, 자의(紫衣)에 흑건(黑巾)을 착용한다.】 마궤(馬机) 1개가 가운데 있고, 【1인이 잡는데, 청의(靑衣)에 흑립(黑笠)을 착용한다.】 반우연(返虞輦)이 있고, 【만사(挽士)는 보충한 숫자까지 아울러 2백 20명인데, 자의(紫衣)에 흑건(黑巾)을 착용한다.】 내시(內侍)가 이를 따른다. 청선(靑扇) 2개가 가운데 있어서 좌우로 나누어 서고, 현무기(玄武旗)가 가운데 있다. 후부 고취(後部鼓吹)가 있다.

다음에 후전대기(後殿大旗) 2개가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사금(司禁) 【오원(五員)으로 충당한다.】 4인이 기복(器服)을 갖추고 주장(朱杖)을 잡고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국장 도감(國葬都監)·빈전 도감(殯殿都監)의 관원이 서는데, 차비 별감(差備別監)이 수행(隨行)한다. 다음에 내제군(內諸君)이 서고, 다음에 도총관(都摠管)·위장(衛將)이 모두 기복(器服)을 갖추고 가운데 있고, 다음에 병조 당상(兵曹堂上)이 서고, 다음에 승지(承旨)·주서(注書)가 서고, 다음에 예조(禮曹)·병조(兵曹)의 낭관(郞官) 각각 1인이 이를 따르고 다음에 종친(宗親)·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서고, 다음에 감찰(監察) 2인이 좌우로 나누어 서고, 다음에 의금부 낭관(義禁府郞官) 2인이 좌우로 나누어 선다."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04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註 231]
    성화(成化) 4년 : 1468 세조 14년.
  • [註 232]
    용순(龍輴) : 상여.
  • [註 233]
    신로(蜃輅) : 상여.
  • [註 234]
    지발(池綍) : 지(池)는 관(棺)을 꾸미는 것이고, 발(綍)은 영구(靈柩)를 이끄는 그물임.
  • [註 235]
    종천지통(終天之痛) : 세상에 다시 없을 슬픔.
  • [註 236]
    선리(仙李) : 원래 노자(老子)를 말하나, 여기서는 이씨 왕조(李氏王朝)의 조상을 말함.
  • [註 237]
    완의(浣衣) : 옷을 빨아서 입음.
  • [註 238]
    초곤(椒壼) : 후비(后妃).
  • [註 239]
    체악(棣萼) : 형제(兄弟).
  • [註 240]
    5형(五刑) : 주대(周代) 이래에 사용한, 죄인을 벌하는 다섯 종류의 형벌. 즉 얼굴에 먹물을 넣는 묵형(墨刑), 코를 베는 의형(劓刑), 발꿈치를 잘라내는 월형(刖刑), 생식기를 거세하는 궁형(宮刑), 사형을 시키는 대벽(大辟)을 말함.
  • [註 241]
    천화(天花) : 하늘이 감동할 때 내리는 꽃비를 말함.
  • [註 242]
    감로(甘露) : 임금이 선정(善政)을 하여 천하가 태평하면 하늘이 상서(祥瑞)로 내리는 것이라 함.
  • [註 243]
    구궐(九闕) : 중국 황제의 궁궐.
  • [註 244]
    정호(鼎湖) : 황제(黃帝)가 용(龍)을 타고 하늘에 오른 곳을 정호(鼎湖)라고 하며, 황제가 하늘에 오를 때 활[弓]을 떨어뜨렸고, 그 장사지낸 교산(橋山)에서는 빈 관(棺)에 신발[舃]만 있었다는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로서, 임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뜻함.
  • [註 245]
    영락(永樂) 15년 정유 : 1417 태종 17년.
  • [註 246]
    정통(正統) 11년 병인 : 1446 세종 28년.
  • [註 247]
    경태(景泰) 1년 경오 : 1450 세종 32년.
  • [註 248]
    임신 : 1452 문종 2년.
  • [註 249]
    계유 : 1453 단종 원년.
  • [註 250]
    을해 : 1455 단종 3년.
  • [註 251]
    병자 : 1456 세조 2년.
  • [註 252]
    천순(天順) 원년 정축 : 1457 세조 3년.
  • [註 253]
    치주례(齒胄禮) : 세자(世子)가 학교(學校)에 있어서, 신분(身分)에 따르지 않고, 나이에 따라서 다른 학생 사이에 자리를 정하는 예식.
  • [註 254]
    무인 : 1458 세조 4년.
  • [註 255]
    기묘 : 1459 세조 5년.
  • [註 256]
    사수(師授) :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음.
  • [註 257]
    경진 : 1460 세조 6년.
  • [註 258]
    신사 : 1461 세조 7년.
  • [註 259]
    계미 : 1463 세조 9년.
  • [註 260]
    성화(成化) 원년 을유 : 1465 세조 11년.
  • [註 261]
    병술 : 1466 세조 12년.
  • [註 262]
    정해 : 1467 세조 13년.
  • [註 263]
    무자 : 1468 세조 14년.
  • [註 264]
    제부(諸父) : 백숙부.
  • [註 265]
    금상(今上) : 성종.

○甲申/設遷奠, 丑時下玄宮, 設立主奠, 設虞祭於永昌殿。 其遷奠儀曰:

前一日, 典設司設吉帷宮於靈帳殿之西南向, 施屛帳, 南置帷門。 其日, 典儀設內諸君位於靈幄殿帳門內之東近南, 西向北上。 宗親及文武百官位於帷門外近南, 文東武西, 俱每等異位重行, 北向相對爲首。 【宗親每品班頭別設位。】 監察位二於文武班後北向, 設典儀、引儀位於百官之北西向, 又典儀、引儀位於武班之北東向, 俱北上。 典儀又設內諸君奉辭位於羡道東近南北上。 宗親及文武百官位於其南, 文班在北, 武班在南, 俱每等異位重行, 西向北上。 宗親別設位如上。 監察位二於文武班後西向, 設典儀、引儀位於百官之西近南, 北向東上。 典設司設安梓宮幄於玄宮門外南向, 攸司設褥位於幄內, 周回設帷。 典儀設領議政進玉帛位於幄東, 近北西向, 捧哀冊及玉帛官位於其南差退, 西向北上。 又於靈帳殿帷門外, 陳吉凶車轝及儀仗、明器, 如發引儀。 攸司進禮饌, 【饌品與遣奠同。】 內侍傳捧, 入設於靈座前, 設香爐、香合幷燭於其前, 奠祝文於靈座之左, 設尊於靈帳殿東南北向, 置盞三於尊所。 方相氏先至入玄宮, 以戈擊四隅, 明器陳於玄宮外旁側。 監察、典儀、引儀先入就位, 引儀分引宗親及文武百官入就位, 次引內諸君去杖入就位。 典儀唱: "跪、俯伏、哭。" 內諸君及宗親百官, 跪俯伏哭。 典儀唱: "哭止、興、四拜、興、平身。" 典儀唱: "跪。" 內諸君及宗親百官跪。 代奠官盥手, 【盥洗設於帷門外。】 詣香案前跪, 三上香, 酌酒奠于靈座前, 【連奠三盞。】 俯伏興退。 大祝進靈座之左, 西向跪, 讀祝文訖。 典儀唱: "俯伏、哭。" 內諸君及宗親百官, 俯伏哭盡哀。 典儀唱: "哭止、興、四拜、興、平身。" 宗親百官, 止哭興四拜興平身。 引儀引內諸君出就次, 又引儀分引宗親百官出。 攸司撤饌, 祝文瘞於坎。 【丁字閣北瘞坎】 攝左通禮進當靈座前, 俯伏跪啓請升轝, 俯伏興退。 內侍捧誥命、平時寶冊及諡冊、諡寶, 授執事者, 各安於腰轝, 奉香爐、香合授忠贊衛, 置於香亭。 大祝奉魂帛函, 安於轝, 虞主匱置其後, 捧詣吉帷宮, 安於靈座, 虞主匱置其後, 誥命、平時冊寶及諡冊、諡寶、香爐、香合, 置於靈座前如儀。 吉仗陳於吉帷宮門外左右。 攝左通禮進當梓宮前, 俯伏跪啓請升輴卽玄宮, 俯伏興。 內侍捧哀冊函, 授執事者, 安於腰轝, 立於輴前。 【至羨道南, 奉哀冊官專捧。】 執巾者以巾進, 右議政奉巾, 進拭梓宮, 幷拂棺衣。忠義衛捧銘旌導前, 左議政率舁梓宮官等, 捧梓宮升輴。 攝左通禮導梓宮, 忠義衛以翣障梓宮, 轝士奉輴, 左廻北首。 將卽玄宮, 宮人皆哭。 【梓宮至羨道, 宮人先還。】 典儀唱: "哭。" 從內諸君及宗親、百官皆哭從, 至奉辭位。 輴至玄宮門外幄次, 【左議政察其梓宮上下。】 覆以棺衣, 取銘旌去杠, 置於其上。 引儀引領議政, 就進玉帛位, 奉哀冊、奉玉帛官隨之。 左議政帥舁梓宮官等, 以輪轝捧梓宮, 入自羨道, 安於玄宮內北首。 右議政再整棺衣銘旌, 令平正。 領議政以哀冊入, 跪奠於梓宮之西, 次以贈玉及贈帛函, 跪奠於哀冊之南。 國葬都監提調帥其屬, 捧明器、服玩、櫃子及黼翣、畫翣等, 各以次埋於欄干內左右及前面。 初梓宮入玄宮, 典儀唱: "跪、俯伏、哭。" 內諸君及宗親、百官, 跪俯伏哭。 典儀唱: "哭止、興、四拜、興、平身。" 內諸君及宗親、百官, 止哭興四拜興平身。 典儀唱: "跪、俯伏、哭。" 諸君及宗親、百官, 跪俯伏哭。 典儀唱: "哭止、興、四拜、興、平身。" 內諸君及宗親、百官, 止哭興四拜興平身。 奉辭訖, 引儀引內諸君還次, 又引儀分引宗親及文武百官出。 山陵都監提調帥其屬, 閉隧門如儀。 領議政監之, 右議政覆土九鍤。 山陵都監提調帥工匠, 續以終事, 下誌石。 【埋於陵南近地, 卽石床之北。】 除地於玄宮之左, 觀象監祀后土如初。 大轝及輴之屬, 於栢城內庚地焚之, 其通人臣用者則不焚。

其哀冊文曰:

成化四年歲次戊子九月丁巳朔初八日甲子, 世祖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薨于正寢。 是年冬十一月二十八日甲申, 遷座于光陵, 禮也。 龍輴警引, 蜃輅啓轍。 陳象設於園寢, 儼虛衛兮池綍。 兆庶雨泣於街郊, 萬靈風號於寥廓。 孝子嗣王擗地無容, 終天何極? 悼雞寢之永違, 攀鳳馭兮莫及。 降綸音於鸞殿, 撰徽猷於玉牒。 其辭曰: "仙李盤根, 傳祚奕業, 聖繼神承, 重熙累洽。 泰道中微, 屯運適値, 孽牙其間, 睥睨神器。 世祖在邸, 宗社是衛, 至明炳幾, 大勇電掣。 天步復安, 歷數攸繫, 牢讓不獲, 大統入繼。 駕馭群雄, 皷舞一世, 鼎新庶政, 革古積弊。 聖學高明, 道妙默契, 繼往心傳, 定《易》口訣。 招延宿儒, 講論前席, 時著訓辭, 日就儲德。 祭天南郊, 策士大學。 昭儉浣衣, 務斥華飾, 椒壼儀整, 棣萼恩廣。 五刑惟恤, 一笞戒枉。 冤民無蓋, 老者善養。 大事在戎, 注意閱武, 命衛部將, 置摠管府。 宣傳設官, 兵將著說, 丁括號牌, 額增軍籍。 東狩南巡, 民安物阜。 政先農蠶, 富積倉庾。 參酌條科, 勒成典章, 餘事眞敎, 虔禮道場。 天花晝雨, 甘露宵瀼。 協氣旁騰, 禎符屢彰。 白鹿來馴, 靑鶴飛翔。 威風震北, 朔庭遂空, 神化漸東, 航海來同, 隴禽入貢, 水兕納錫。 至治之象, 惟德繄物。 盜據公險, 弄兵潢池, 敢肆虔劉, 自擁旌麾。 命將搴旗, 拉朽建瓴。 胡虜犯邊, 天子徵兵。 萬軍齊向, 群醜此屈, 穴擣三衛, 俘獻九闕。 帝嘉丕績, 睿眷彌渥。 盛德神功, 光前絶後。 祝億載壽, 爲萬民父, 胡馮相之? 祲告忽宮。 車兮晏出, 嗚呼哀哉! 聖本生知, 藝又多材。 前代博觀, 大度益恢, 廓淸區宇, 再掃妖曀。 勳忠碩輔, 如帶如礪。 勵精乙夜, 貽謀燕翼。 圖臻大平, 三五媲隆。 克艱厥位, 十四年中。 節宣有乖, 憂勞積久, 未至大漸, 遂釋重負。 冀居閑以怡養, 庶永享於慶祚。 嗟! 金方良藥之不効, 奈玉几末命之乍道? 嗚呼哀哉! 日遽淪兮, 揮戈莫駐, 天之崩兮, 鍊石誰補? 鼎湖兮棄弓, 橋山兮留舃。 哀喪考兮攀號, 痛孺哭兮嗚咽。 嗚呼哀哉! 乘白雲兮帝鄕, 卜靑鳥兮壽原, 宵奠兮瓊斝, 曉發兮金根。 列綺城之哀仗, 引滋槁之度幰。 風悽楚兮颺酸旐, 月慘淡兮喝苦挽。 抑仙遊兮縹緲, 扃夜臺兮閴寂。 嗚呼哀哉! 大德之未必壽兮, 巧曆之莫能測。 諉窅冥之理數兮, 揭巍蕩之功烈。 後玄壤以長存, 冠蒼穹而罔極。 嗚呼哀哉。"

其誌文曰:

洪惟我世祖大王盛德大業, 巍蕩赫濯, 莫罄名言, 今略敍梗槪, 用識于玄宮。 謹按大王, 世宗第二子, 昭憲王后 沈氏, 以永樂十五年丁酉九月丙子誕王。 王少英睿, 好學不倦, 爲兩宮奇愛。 封晋陽大君, 後改首陽正統十一年丙寅, 昭憲王后薨, 景泰元年庚午, 世宗薨, 王哀毁盡禮, 觀者罔不悲感。 壬申文宗薨, 帝遣使賜諡祭, 又錫嗣王誥命, 嗣王遣王奉表如京師陳謝。 癸酉姦臣顓政, 聚群不逞謀變, 王告嗣王誅之。 以勳封奮忠仗義匡國補祚定策靖難功臣, 摠百官輔政, 都統中外兵馬諸軍。 乙亥後六月, 嗣王以幼沖且疾, 禪位于王。 王旣莅祚, 蚤夜憂勤, 常以劭農、興學、求賢、養病爲先務, 下敎敦勸長民者。 七月立嫡子爲世子。 丙子王念捍衛之勞, 敎封佐翼功臣四十三人。 天順元年丁丑, 群臣上尊號曰, ‘承天體道烈文英武’ 秋九月世子病卒, 賜諡懿敬, 立今上爲世子。 謁先聖行齒冑禮。 王每遇事, 必援引譬喩, 以誨世子。 又親著訓辭一篇, 以恒德、敬神、納諫、杜讒、用人、勿侈、使宦、愼刑、文武、善述十事爲目, 常令誦之。 命文臣纂先朝嘉謀善政, 名曰《國朝寶鑑》, 又撰《東國通鑑》, 皆稟睿斷。 戊寅立號牌之法, 己卯幸國學謁聖策士。 王患學者師授不明, 人各有見, 會諸儒, 論難《五經》同異, 親自決定, 群疑氷釋。 又著《易學啓蒙要解》, 以牖學者。 庚辰王曰: " 光武以天下之大, 尙減損吏職, 十置其一, 國小官多, 食浮於事, 豈重天祿之意也?" 遂汰冗官一百員。 秋, 東女眞 浪卜兒哈謀亂伏誅, 其子阿比車嘯聚黨類, 侵擾邊圉, 王發兵討平之。 冬, 王西巡至平壤, 策士、宴耆艾於庭, 減所過田租。 辛巳命修諸道軍籍, 平安黃海二道, 民居稀闊, 募民徙之, 給復十年。 癸未下敎求將, 令不拘卑顯親姻, 錄才行以聞。 王銳意戎事, 月再閱陣, 春秋講武, 自製兵將等說, 訓勵諸將。 每語將士曰: ‘武而不文, 非將也。’ 遂加敦勸, 凡在行間, 莫不讀書。 成化元年乙酉秋, 南巡至溫陽, 策士、養老如西禮。 丙戌王以累朝立法條科寔繁, 商搉損益, 定爲《經國大典》, 又以經費無據, 貢賦不均, 詳定規式, 於是吏易奉行, 民弊悉祛。 東巡至江陵, 策士, 蠲逋欠, 減田祖。 丁亥咸吉道之人李施愛, 矯殺節度使等, 誘民以反, 命將討之。 師還班賞將士有差, 封敵愾功臣四十五人。 秋八月, 帝遣使請兵, 助攻建州三衛諸虜, 王命將領兵一萬, 擊破婆瀦江 兀彌府諸塞, 遣使獻俘。 帝遣中使褒奬, 賞賚優厚, 諸將亦各有賜。 戊子秋九月甲子, 王以病薨于壽康宮之正寢, 享年五十有二, 在位十有四年。 王睿智英毅, 寬簡仁儉, 勇力蓋世, 學問融貫, 內典百家, 亦莫不窮硏, 處事正大, 一言一動, 無間然者。 敬事諸父, 友愛諸弟, 皆盡懽心。 閨闈雍睦, 名分整肅, 敦朴先民, 身衣浣濯, 宮人只備灑掃, 餘悉放出。 日引大臣, 咨訪治道, 間延儒雅, 尙論歷代冶亂之迹, 講明道學之奧, 娓娓忘疲, 或至夜分乃罷。 臨政勵精, 日愼一日, 崇功賞賢, 黜邪遠侫, 信賞明罰, 勸民積畜, 輕徭薄斂, 汰去浮費, 以節財用。 不數年間, 府庫充物, 民物阜殷。 每申儆監司守令, 或遣使廉問, 朝臣外補者, 皆許陛辭, 面諭分憂之意, 責以成效。 治有異等者, 增秩優褒, 或有漁奪濫刑者, 雖細不貸。 搜羅雋異, 士有小善一藝, 率皆甄錄, 往往擢以不次。 遇士一見顔色, 洞照肺腑, 後言臧否, 無一不中。 惠鮮鰥寡, 廣詢博訪, 務求民隱, 田里無銜冤者。 十四年間, 敬天勤民, 一出至誠, 事大交隣, 皆盡其道。 島夷山戎, 奉珍納款, 無遠不至, 東方之治, 於斯爲盛。 民罔不小大, 顒望永享, 不弔昊天, 八音遽遏, 可勝慟哉! 憑几前二日, 王以璽傳于今上殿下, 遺命後事, 悉從儉約。 今上亮闇盡禮, 率群臣上諡曰, ‘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 廟號世祖。 十一月甲申, 葬于楊州治東豐壤縣 直洞之原, 號曰光陵。 噫! 《書》之聖神文武, 《易》之剛健粹精, 《詩》之明類長君, 我世祖大王實兼之矣。 太妃尹氏, 坡平世家, 贈左議政之女也。 配聖毓德, 誕二男一女, 長則懿敬世子, 次我殿下, 女懿淑公主世祖初爲殿下, 娶上黨君 韓明澮之女爲嬪, 生一男。 嬪與男皆先亡。 又娶淸川君 韓伯倫之女, 生二男二女皆幼, 一男先亡。 世祖旣傳位于殿下, 命封爲妃。 懿敬世子, 初封挑源君, 娶右議政韓確之女, 生二男。 長曰, 封月山君, 娶兵曹判書朴仲善之女; 次曰 【今上諱】 , 封者乙山君, 娶韓明澮之次女。 女適承賓洪常懿淑下嫁河城君 鄭顯祖。 貴人朴氏生二男, 長曰, 封德源君, 次曰, 封昌原君德源娶司直金從直之女, 生二男一女皆幼。

立主奠儀曰:

俟閉玄宮將畢, 典儀設內諸君位於吉帷宮門內東近南, 西向北上; 設宗親及文武百官位於吉帷宮門外近南, 文東武西; 俱每等異位重行, 北向相對爲首。 【宗親別設位如常。】 監察位二於文武班後北向, 典儀、題主官、引儀位於文官之北西向, 又典儀、引儀位於武官之北東向, 俱北上。 奉常寺官設卓三於靈座東南西向, 【題主卓在北, 次筆硯卓, 次槃匜卓。】 俱筆、硯、墨、槃、匜 【具香湯】 巾。 【用細苧布】 監察、典儀、題主官、典儀、引儀先入就位。 引儀分引宗親及百官入就位, 次引內諸君去杖入就位。 大祝盥手, 【盥洗設於帷門外。】 升詣靈座前跪, 捧虞主匱, 置於卓, 開匱捧出桑主, 以香湯浴主, 拭以巾, 臥置于卓。 引儀引內諸君, 升詣卓前北向立, 【設席】 題主官盥手, 幷詣卓前西向立。 題前面云: ‘某號大王。’ 墨書訖, 俯伏興退。 大祝捧虞主, 納于匱加蓋, 安於靈座, 魂帛函置其後。 引儀引內諸君出就次。 攸司設禮饌於靈座前, 【饌品與遷奠同】 設香爐、香合幷燭於其前。 奠祝文於靈座之前, 設尊於座, 覆以白苧巾, 設几於後。 引儀引內諸君及宗親百官入就位。 典儀唱: "跪。" 內諸君及宗親百官跪。 代奠官盥手, 詣香案前跪, 三上香, 酌酒奠于靈座前, 【連奠三盞。】 俯伏興退。 大祝進靈座之左西向跪, 讀祝文訖。 典儀唱: "俯伏、哭。" 內諸君及宗親百官, 俯伏哭盡哀。 典儀唱: "哭止、興、四拜、興、平身。" 內諸君及宗親百官, 止哭興四拜興平身。 大祝捧虞主, 納于匱。 引儀引內諸君出就次, 引宗親及文武百官出。 攸司徹禮饌, 捧祝文瘞於坎。 【丁字閣北瘞坎】 執事官題主官、 【文臣三品。】 代奠官、 【宗親二品以上。】 大祝、 【內、外制。】 捧香奠酒執事者六、 【參外。】 左通禮、典儀、引儀。

返虞儀曰:

攸司陳吉仗於帷門外左右, 攝司僕正進返虞輦於門外南向, 又進腰轝及香亭於吉帷宮前如儀。 竢立主奠畢, 攝左通禮進當吉帷宮前, 俯伏跪啓請降座升轝, 俯伏興。 執事者捧誥命、平時冊寶及諡冊寶, 各置於腰轝。 忠贊衛捧香爐、香合, 置於香亭, 大祝捧虞主匱, 安於轝, 魂帛函置其後。 內侍捧轝, 攝左通禮前導, 至帷門外。 攝左通禮進當轝前, 俯伏跪啓請降轝升輦, 俯伏興。 大祝捧虞主匱, 安於輦, 魂帛函置其後。 攝左通禮進當輦前, 俯伏跪啓請輦駕進發, 俯伏興退。 虞主輦動, 儀仗以次前引, 內諸君及宗親百官以次侍從如初。 虞主輦止晝停所帷門外, 攝左通禮進當輦前, 俯伏跪啓請降輦升轝, 俯伏興。 大祝捧虞主匱, 安於轝, 內侍捧轝, 攝左通禮前導。 至帳殿前, 俯伏跪啓請降轝升座, 俯伏興退。 大祝捧虞主匱, 安於靈座, 儀仗列於帷門外左右。 內諸君下馬入次, 宗親及文武百官下馬各就次。 攸司進禮饌行禮, 竝如朝夕奠畢。 攝左通禮, 啓請輦轝升降進發及導從, 皆如初。 先是, 攸司設靈座于永昌殿北壁南面。 留都文武群臣, 出城門外, 以竢虞主輦將至, 分立道旁。 虞主輦至, 典儀唱: "鞠躬、四拜、興、平身。" 群官鞠躬四拜興平身訖, 俱乘馬。 文左武右前導, 至宗廟前路下馬。 【過則還上馬。】 虞主輦至宗廟前路, 攝左通禮進當輦前, 俯伏跪啓請輦小駐。 轝士回輦北向, 停於褥席南。 【攸司先設褥席北向。】 少頃, 攝左通禮俯伏跪啓請輦駕進發, 俯伏興退。 轝士回輦西向進發。 內諸君及宗親百官下馬, 過行俱上馬。 虞主輦將至光化門外, 前導群官下馬序立。 虞主輦至鞠躬, 過則平身。 虞主輦至殿門外, 攝左通禮進當輦前, 俯伏跪啓請降輦升轝, 俯伏興。 大祝捧虞主匱, 安於轝, 內侍捧轝, 攝左通禮前導。 至殿階上, 攝左通禮俯伏跪啓請降轝升座, 俯伏興退。 大祝捧虞主匱, 安於靈座, 魂帛函置其後。 執事者捧誥命、平時冊寶及諡冊、諡寶, 置於靈座前稍東, 【誥命案在北, 諡冊寶案次之。】 殿司設鳳扇、雀扇各一, 靑、紅蓋各一於左右有趺。 【扇在北, 蓋次之。】 內諸君就齋室, 宗親及百官各之次。

其班次儀曰:

輦前侍衛軍士, 兵曹陳列如舊儀。 【輦後倣此。】 紅門大旗二, 分左右, 【凡大旗一人執, 二人引, 二人夾; 中旗一人執, 二人引; 小旗一人執, 一人引, 皆著靑衣皮帽子。】 紅蓋二, 居中分左右, 【各一人執, 著靑衣紫巾。 凡執繖蓋靑扇人同。】 次朱雀、靑龍旗各一在左, 白虎、玄武旗各一在右, 黃龍旗居中, 金皷居中。 【鼓左二人執, 金右一人執, 皆著紅衣皮帽子。 後同。】 次六丁旗分左右, 朱雀旗居中, 次白澤旗二分左右, 次三角、角端、龍馬旗各二, 分左右, 天下太平旗居中, 次玄鶴旗一在左, 白鶴旗一在右。 次吹角六人, 居中分左右, 【二人執大角先行, 次中角二人, 次小角二人。 後倣此。】 御馬二匹具鞍粧, 居中分左右, 【各二人牽, 著靑衣椶色笠、雲鞋。 後倣此。】 次豹骨朶子六, 分左右, 【各一人執, 著紅衣皮帽子。 凡執瓜斧、罼罕、登刀、旌節、幢捧、斫子、龍鳳雀扇人同。】 金皷居中, 御馬二匹。 次熊骨朶子六, 分左右, 次令字旗二, 分左右, 【執人著紅衣皮帽子, 執金鼓字旗人同。】 駕龜仙人旗二, 居中分左右, 次皷字旗一在右, 金字旗一在左, 御馬二匹。 次哥舒捧十, 分左右, 碧鳳旗二, 居中分左右, 御馬二匹。 次金鐙十, 分左右, 君王千歲旗居中, 御馬二匹。 銀粧刀二, 分左右, 銀交倚居中, 脚踏隨之。 【一人捧交倚, 一人執脚踏, 著紫衣紫巾。 執盂罐人同。】 次金粧刀二, 分左右, 次朱雀、靑龍幢各一在左, 白虎、玄武幢各一在右, 銀罐子、銀盂各一居中, 御馬二匹。 次銀立瓜四, 金立瓜二, 相間分左右, 金鼓居中, 御馬二匹。 次銀橫瓜四, 金橫瓜二, 相間分左右, 銀交倚居中, 脚踏隨之, 御馬二匹。 次銀斫子、金斫子各四, 相間分左右, 朱漆交倚居中, 脚踏隨之。 靑陽繖二, 居中分左右, 小轝居中。 【轝士三十, 著紫衣黑巾。】 罕一在左, 罼一在右, 次旄節四, 分左右, 次旌四分左右, 小轝居中。 【轝士四十, 著紫衣紫巾。】 銀鉞斧、金鉞斧各四, 相間分左右, 金皷居中, 御馬二匹。 次鳳扇八, 分左右, 靑蓋二, 居中分左右, 次雀扇十, 分左右, 紅蓋二, 居中分左右, 次龍扇二, 分左右, 前部皷吹。 【陳而不作。】 誥命、平時冊寶腰轝居中, 尙瑞官一人隨之, 諡冊寶腰轝居中, 以次而行, 【每一腰轝, 轝士幷補數十五, 皆著紫衣、黑巾、鶴氅、紅帶、靑行縢、雲鞋。】 國葬都監官員二人隨之。 【著常服黑角帶】 水精杖、金鉞斧各一, 居中分左右。 【杖左斧右, 各一人執, 著靑衣紫巾。】 紅燭籠二, 居中分左右, 【忠贊衛捧持, 著常服、黑角帶。 後倣此。】 返虞腰轝居中。 【轝士幷補數三十, 著紫衣、黑巾。】 靑燭籠二, 居中分左右, 紅陽繖居中。 【忠義衛擎執, 著常服黑角帶。】 白燭籠二, 居中分左右, 香亭居中。 【捧擔人幷補數十五, 紫衣黑巾。】 馬机一居中, 【一人執, 著靑衣黑笠。】 返虞輦, 【挽土幷補數二百二十, 著紫衣黑巾。】 內侍隨之。 靑扇二, 居中分左右, 玄武旗居中。 後部皷吹。 次後殿大旗二, 分左右, 次司禁 【五員差充。】 四人, 具器服執朱杖, 分左右, 次國葬、殯殿都監官員, 差備別監隨行。 次內諸君, 次都摠管、衛將, 皆具器服居中, 次兵曹堂上, 次承旨、注書, 次禮曹、兵曹郞官各一人隨之, 次宗親及文武百官, 次監察二人, 分左右, 次義禁府郞官二人, 分左右。


  •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8책 3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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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