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군 권공의 졸기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이 졸(卒)하였다. 권공의 자(字)는 경부(敬夫)이니, 강계 절제사(江界節制使) 권복(權復)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후궁(後宮) 김씨(金氏)의 딸 숙근 옹주(淑謹翁主)와 결혼하였으므로 화천군(花川君)으로 봉(封)하였다. 을묘년258) 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갔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다가 통주(通州)에 이르렀는데, 황제(皇帝)가 부마(駙馬)임을 알고는 소환(召還)하여 보고, 관대(冠帶)와 옷 1습(襲)을 내려 주고, 백은(白銀)·채단(綵段)·보초(寶鈔)259) 를 주어 보냈다. 뒤에 〈외방에〉 나가서 경상우도 절제사가 되었고 얼마 있다가 화천위(花川尉)로 고쳐서 봉(封)하였다. 을해년260) 에 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었고, 성상이 즉위함에 좌익 공신(佐翼功臣)에 참여하여 다시 화천군(花川君)으로 봉하였다. 이에 이르러 병으로 졸(卒)하니, 2일 동안 철조(輟朝)하고,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50석을 내려 주었다. 권공은 젊어서 무술[弓馬]을 업(業)으로 삼아 도진무(都鎭撫)가 된 것이 10여 년 동안이었다. 수수(蒐狩)261) 하고 열무(閱武)할 적마다 자주 명하여 대장(大將)으로 삼았는데, 사졸(士卒)은 모두 그를 사랑하였다. 성품이 활달(豁達)하여 집은 가난하였어도 안연하였으며, 공사(公事)를 받들 때에는 편하고 험(險)한 것을 피하지 않았다. 부음(訃音)을 듣고 임금이 도승지(都承旨) 홍응(洪應)에게 이르기를,
"내가 젊었을 때에 화천군(花川君)의 집에 이르니, 나를 맞이하여 방으로 들어갔는데, 4벽(四壁)이 소연(簫然)262) 하였다. 내가 탁주(濁酒) 두어 잔을 마시고 나왔다. 평생에 산업을 경영하지 않았고, 또한 비단옷을 입는 습관이 없었으며, 그 마음이 바르고 진실하였고 일을 시키면 싫어하는 기색(氣色)이 없었다. 국가에 공로가 있으니 다른 부마(駙馬)에 비할 바가 아니다."
하고, 시호(諡號)를 내려 양효(襄孝)라 하였으니, 갑주(甲胄)에 공로가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자혜(慈惠)하고 사랑으로 어버이를 섬긴 것을 효(孝)라 한다. 아들이 1이니, 권팽(權彭)이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2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註 258]을묘년 : 1435 세종 17년.
- [註 259]
보초(寶鈔) : 당시의 화폐(貨幣) 이름.- [註 260]
○己卯/花川君 權恭卒。 恭字敬夫, 江界節制使復之子。 尙太宗後宮金氏女淑謹翁主, 封花川君。 歲乙卯, 以謝恩使如大明竣事, 還至通州, 帝知爲駙馬, 召還賜見, 賜冠帶及衣一襲, 白銀、綵段、寶鈔遣之, 後出爲慶尙右道都節制使, 尋改花川尉, 乙亥又以謝恩使如大明, 上卽位與佐翼功臣復封花川君。 至是以病卒, 輟朝二日, 賜賻米豆幷五十石。 恭少業弓馬, 爲都鎭撫十餘年, 每蒐狩閱武, 數命爲大將, 士卒皆愛之。 性豁達, 家貧晏如也, 奉公不避夷險。 訃聞, 上謂都承旨洪應曰: "予少時到花川家, 迎我入室, 四壁蕭然。 飮予濁酒數杯而出。 平生不營産業, 亦無紈綺習, 其心直實, 命之事則無難色。 於國家有勞, 非他駙馬比也。" 贈諡襄孝, 甲胄有勞 ‘襄’, 慈惠愛親 ‘孝’。 一子彭。
- 【태백산사고본】 10책 28권 9장 B면【국편영인본】 7책 529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註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