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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29일 乙亥 1번째기사 1449년 명 정통(正統) 14년

성비 원씨가 졸함에 상례에 대해 의논하다

성비(誠妃) 원씨(元氏)가 졸(卒)하니, 임금이 예조 판서 허후(許詡) 및 승정원에 이르기를,

"옛날 태조(太祖)께서 행행(行幸)하실 때, 성비가 남복(男服)을 하고 시종(侍從)하였었다. 첩으로서 처(妻)를 삼지 말라 함은 분명히 예문(禮文)에 있으나, 한(漢)나라·당(唐)나라 이래로 궁인(宮人)으로 황후(皇后)가 된 사람이 자못 많이 있었다. 성비가 일찍이 모후(母后)의 궁(宮)에 왕래하였는데 그때 좌차(座次)를 여러 대신에게 의논하였더니, 이직(李稷)이 말하기를, ‘성비는 남향하고 모후는 서향하게 하옵소서.’ 하고, 하윤(河崙)·성석린(成石璘)은 말하기를, ‘태조께서 애초부터 성비를 계실(繼室)이라 칭하지 않으셨으니, 좌차를 이같이 함은 불가하옵니다.’ 하여 곧 성비로서 서향하게 하고, 모후로서 남향하도록 정하였다. 그 뒤 김익정(金益精)이 지신사가 되었을 때에도 이 의논이 있었으나, 태조께서 비(妃)를 봉한 것은 단지 전조의 습관을 따라 하였을 뿐, 정후(正后)로서 논할 수 없는 것이라 했으니, 정조(停朝)·거애(擧哀)·복제(服制)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상의하여 아뢰라."

하니, 허후가 말하기를,

"범인(凡人)이 처와 첩을 대할 때 만약 첩이면 혹 남복으로서 솔행(率行)하옵지만 정적(正嫡)은 그렇게 하지 아니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태조께서 성비를 대접한 뜻을 알 수 있고, 하윤성석린의 의논을 신 등도 이미 들었습니다. 신이 어제 성비의 병이 심하다는 것을 듣고 정원(政院)으로 가서 여러가지 예문(禮文)을 상고하여 보았지만 정조(停朝)와 복제(服制)에 대한 것은 없사오니, 단지 염습(歛襲)과 의금(衣衾)만을 특별히 관(官)으로 하여금 갖추게 함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 이사철(李思哲)은 말하기를,

"대신(大臣)이 졸(卒)하여도 오히려 조회를 정지하거늘, 하물며 성비태조의 비가 아니옵니까. 복제는 예문(禮文)에 없는 것이라 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조회를 정지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예장(禮葬)은 마땅히 대군(大君)의 예(例)에 따라야 하지만, 조회를 정지하는 것으로 말하면 천자(天子)가 붕(崩)하면 7일 동안 항시(巷市)093) 하고, 제후(諸侯)가 훙(薨)하면 5일 동안 항시한다. 하지만 궁첩(宮妾)이 졸(卒)하여 조회를 정지하는 예[停朝之禮]는 있지 아니하니, 다시 정부와 이를 의논하라."

하였다. 허후가 이를 정부에 의논하니, 정부의 의논도 허후와 같았으므로, 드디어 상례(喪禮)를 정하여 아뢰기를,

"관곽(棺槨)·의금(衣衾)·제향(祭享)은 모두 관(官)에서 갖추게 하되, 종친으로 품질(品秩)이 낮은 사람을 상주(喪主)로 삼고, 장례는 종친의 상등(上等)의 예(例)를 쓰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라, 드디어 죽청감(竹靑監) 중규(仲規)에게 명하여 그 상사를 주관하게 하고, 또 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 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칠칠(七七)094) 과 백일(百日)·대상(大祥)·소상(小祥)·수륙재(水陸齋)를 나누어 베풀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5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전사(前史) / 사상-불교(佛敎)

  • [註 093]
    항시(巷市) : 교역하는 물건을 항(巷)으로 옮기는 것.
  • [註 094]
    칠칠(七七) : 사십구일 제.

○乙亥/誠妃 元氏卒。 上謂禮曹判書許詡及承政院曰: "昔太祖行幸時, 誠妃男服侍從, 勿以妾爲妻, 明有禮文。 然以來, 以宮人爲后者, 頗多有之。 誠妃嘗往來母后宮, 其時議座次於諸大臣, 李稷曰: ‘誠妃向南, 母后向西。’ 河崙成石璘曰: ‘太祖初不以誠妃稱爲繼室, 坐次不可如此。’ 乃定以誠妃向西, 母后向南。 厥後金益精爲知申事, 亦有此議。 太祖封妃者, 但因前朝之習而爲之耳, 不可以正后論也。 停朝擧哀服制, 何以爲之? 商議以聞。"

曰: "凡人待妻妾, 若妾則或以男服率行, 正嫡則不爾。 以此觀之, 太祖誠妃之意可知, 而河崙成石璘之議, 臣等亦已聞之矣。 臣於昨日, 聞誠妃病劇, 到政院, 考諸禮文, 無停朝服制, 但襲斂衣衾, 特令官備爲便。" 都承旨李思哲曰: "大臣卒, 猶且停朝, 況誠妃, 太祖之妃乎! 服制, 禮文所無, 不可行也, 若停朝則不可不爲也。" 上曰: "禮葬當依大君例, 停朝則天子崩, 巷市七日; 諸侯薨, 巷市五日, 未有宮妾卒而停朝之禮也, 更與政府議之。" 議諸政府, 政府之議, 與同。 遂定喪禮, 啓曰: "棺槨衣衾祭享, 皆令官備, 以宗親秩卑者爲喪主, 葬用宗親上等例。" 從之, 遂命竹靑仲規主其喪, 又令仁順ㆍ仁壽府、內資ㆍ內贍ㆍ禮賓寺, 分設七七及百日大小祥、水陸齋。

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百二十六終


  • 【태백산사고본】 39책 126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5책 154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역사-전사(前史) / 사상-불교(佛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