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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26권, 세종 6년 10월 17일 戊午 2번째기사 1424년 명 영락(永樂) 22년

중국에 뽑혀간 한씨 등이 대행 황제에게 순사함을 사신이 말하다

사신이 말하기를,

"전후로 〈중국에〉 뽑혀 들어간 〈우리 나라 여자〉 한씨(韓氏) 등이 모두 대행 황제(大行皇帝)에게 순사(殉死)하였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상인(商人)의 딸 여씨(呂氏)가 황제의 궁중에 들어와 본국의 여씨(呂氏)와 동성이라 하여 좋게 지내려고 하였으나, 여씨가 들어주지 아니하므로, 상인의 딸 여씨가 감정을 품고, 권비(權妃)가 졸(卒)하게 되자, 여씨가 독약을 차에 타서 주었다고 무고하였다. 황제가 성을 내어 여씨와 궁인 환관 수백여 명을 죽였다. 그 뒤 상인의 딸 여씨가 궁인 어씨(魚氏)와 함께 환자(宦者)와 간통하였는데, 황제가 알면서도 두 사람을 총애하는 정리로 발설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스스로 두려워하여 목을 매어 죽었다. 황제가 성이 나서 사건이 상인의 딸 여씨에게서 났다 하고, 여씨의 시비(侍婢)를 국문하니, 다 무복(誣服)하여 시역(弑逆)을 행하고자 하였다 하므로, 그 일에 연좌(連坐)된 자가 2천 8백 인인데, 모두 친히 나서서 죽였다. 어떤 이는 황제의 면전에서 욕하기를,

"자기의 양기가 쇠하여 젊은 내시와 간통한 것인데, 누구를 허물하느냐."

고까지 하였다. 뒤에 황제가 화공을 시켜 여씨와 젊은 환관과 서로 포옹하고 있는 형상을 그려서 후세에 보이려고 하였으나, 어씨(魚氏)를 생각하여 그러지 못하고 수릉(壽陵) 곁에 묻었는데, 인종이 즉위하자 파내어 버렸다. 이 난이 처음 일어날 때, 본국의 임씨(任氏)·정씨(鄭氏)는 목을 매어 자살하고, 황씨(黃氏)·이씨(李氏)는 국문을 받아 참형을 당하였다. 황씨는 다른 사람을 많이 끌어 넣었으나, 이씨는 말하기를,

"죽기는 마찬가지라, 어찌 다른 사람을 끌어 넣을까. 나 혼자 죽겠다."

하면서, 끝까지 한 사람도 무고하지 아니하고 죽었다. 이에 본국의 여러 여자가 모두 죽었는데, 홀로 최씨(崔氏)는 일찍이 남경에 있었다. 황제가 남경에 있는 궁녀를 부를 때, 최씨는 병으로 오지 못하고, 난이 일어나 궁인을 거의 다 죽인 뒤에 올라왔으므로,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한씨(韓氏)는 난이 일어났을 때 빈 방에 가두어 두고 여러 날 동안 음식도 주지 아니하였는데, 문을 지키던 환자가 불쌍히 여겨 때때로 먹을 것을 문안에 넣어 주었으므로 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몸종은 모두 잡혀서 죽고, 유모 김흑(金黑)도 옥에 들어갔는데, 사건이 끝난 뒤 특사되었다. 처음에 황씨북경에 가기 전에 형부 김덕장(金德章)황씨의 거처하는 방 창문 밖에 앉아 있었다. 황엄(黃儼)이 이것을 보고 크게 성을 내어 꾸짖었다. 북경에 들어갈 때 도중에서 복통이 일어났는데, 의원이 여러가지 약을 써도 아무 효험이 없고, 김치국을 먹고 싶다고 하므로, 원민생(元閔生)에게 그것이 무슨 물건이냐고 물었다. 민생이 담가 만드는 법을 자세히 말하니, 이 얼굴빛을 변하면서 이르기를,

"사람의 살을 먹고 싶다고 한다면 내가 다리를 베어서라도 바치겠으나, 이러한 황무지에서 어떻게 그런 물건을 얻을 수 있느냐."

하였다. 황씨의 복통은 낫지 아니하여 밤마다 몸종의 손으로 그 배를 문지르게 하였는데, 어느날 밤에 소변할 때에 음부에서 한 물건이 나왔는데, 크기가 가지만한 가죽으로 싼 살덩이였다. 몸종이 칙간에 버렸으나, 일행의 여러 여비가 모두 알고 소문을 냈다. 또 황씨의 몸종이 비밀히 말하기를,

"당초떠날 때에 덕장이 나무 빗 한 개를 준 일이 있다."

하였으나, 황제의 사신은 모두 모르는 일이었다. 황제가 황씨의 처녀 아님을 힐문하니, 그제야 이르기를,

"일찍이 형부 김덕장의 이웃에 있는 조예(皂隷)와 간통하였다."

하였다. 황제가 성을 내어 우리 나라를 문책하려고 칙서까지 작성하였는데,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궁인 양씨(楊氏)가 이 사실을 알고 한씨에게 그 연고를 말하였다. 한씨가 울면서 황제에게 애걸하기를,

"황씨는 집에 있는 사사 사람인데, 우리 임금이 어떻게 그것을 알리오."

하니, 황제가 감동하여 한씨에게 명하여 벌을 주게 하였는데, 한씨황씨의 뺨을 때렸다. 이듬해 태종 18년에 황제가 보낸 선재(善才)가 우리 태종에게 말하기를,

"황씨는 성질이 험하고 온화한 빛이 없어, 꼭 전생에 몹쓸 짓을 한 숙채(宿債)를 지고 태어난 여자 같다."

하였고, 세종 5년에 나온 사신 해수(海壽)는 임금에게 이르기를,

"황씨가 도중에서 복통이 심할 때, 우리들이 보면 조선말로 배가 아프다 하고 부끄러운 빛을 뚜렷이 띠우고 안으로 들어갔다."

하였다. 황제가 죽자 궁인(宮人)으로 순장(殉葬)된 자가 30여 인이었다. 죽는 날 모두 뜰에서 음식을 먹이고, 음식이 끝난 다음 함께 마루에 끌어 올리니, 곡성이 전각을 진동시켰다. 마루 위에 나무로 만든 작은 평상을 놓아 그 위에 서게 하고, 그 위에 올가미를 만들어 머리를 그 속에 넣게 하고 평상을 떼어 버리니, 모두 목이 매어져 죽게 되었다. 한씨가 죽을 때 김흑(金黑)에게 이르기를,

"엄마 나는 간다. 엄마 나는 간다."

고 하였는데, 말을 마치기 전에 곁에 있던 환자가 걸상을 빼내므로 최씨와 함께 죽었다. 여러 죽는 자가 처음 마루에 올라갈 때, 인종(仁宗)이 친히 들어와 고별하자, 한씨가 울면서 인종에게 이르기를,

"우리 어미가 노령이니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하니, 인종이 분명히 허락하고, 한씨가 죽은 다음 인종김흑을 돌려보내려고 하였으나, 궁중의 여러 여수재(女秀才)들이 이르기를,

"근일 어(魚)·여(呂)의 난은 옛날에도 없던 큰 일이다. 조선국은 임금이 어질어서 중국 다음갈 만하고, 또 옛 서적에 있는 말인데, 처음에 불교가 여러 나라에 퍼질 때 조선이 거의 중화(中華)가 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작기 때문에 중화가 되지 못하였으며, 또 요동 이동이 옛날에 조선에 속하였는데, 이제 만일 요동을 얻는다면 중국도 항거하지 못할 것이 틀림 없는 일이다. 이러한 난을 그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인종윤봉(尹鳳)을 불러 묻기를,

"김흑을 돌려보내고자 하나, 근일의 사건을 누설할 염려가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니,

"사람마다 제각기 마음이 있는 것인데, 소인이 어찌 감히 알겠습니까."

하였다. 김흑을 돌려보내지 아니하고 특히 공인(恭人)으로 봉하였다. 처음에 황제가 왕씨(王氏)를 총애하여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왕씨가 죽게 되자, 황제가 크게 슬퍼하고 상심하여, 그 후의 처사가 모두 빗나가, 형을 집행함이 참혹하였다. 어(魚)·여(呂)의 난을 한참 처리할 때, 벼락이 봉천(奉天)·화개(華蓋)·근신(謹身) 세 전(殿)에 떨어져 모두 타버렸는데,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기를,

"황제가 반드시 천변을 두려워하여 주륙(誅戮)을 그치리라."

하였으나, 황제는 강계하지 아니하고 마음대로 주륙을 행하기를 평일과 다름이 없었다. 뒤에 윤봉이 사신으로 와서 대강 줄거리를 전하고, 김흑이 돌아온 뒤 그 자상한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32면
  • 【분류】
    외교-명(明)

○使臣言: "前後選獻韓氏等女, 皆殉大行皇帝。" 先是, 賈人子呂氏入皇帝宮中, 與本國呂氏以同姓, 欲結好, 呂氏不從, 賈蓄憾。 及權妃卒, 誣告呂氏點毒藥於茶進之, 帝怒, 誅呂氏及宮人宦官數百餘人。 後賈與宮人魚氏私宦者, 帝頗覺, 然寵二人不發, 二人自懼縊死。 帝怒, 事起賈, 鞫賈侍婢, 皆誣服云: "欲行弑逆。" 凡連坐者二千八百人, 皆親臨剮之, 或有面詬帝曰: "自家陽衰, 故私年少寺人, 何咎之有?" 後帝命畫工圖, 賈與小宦相抱之狀, 欲令後世見之, 然思魚氏不置, 令藏於壽陵之側。 及仁宗卽位, 掘棄之。 亂之初起, 本國任氏鄭氏自經而死, 黃氏李氏被鞫處斬。 黃氏援引他人甚多, 李氏曰: "等死耳, 何引他人爲? 我當獨死。" 終不誣一人而死。 於是, 本國諸女皆被誅, 獨崔氏曾在南京, 帝召宮女之在南京者, 崔氏以病未至, 及亂作, 殺宮人殆盡, 以後至獲免。 韓氏當亂, 幽閉空室, 不給飮食者累日, 守門宦者哀之, 或時置食於門內, 故得不死。 然其從婢皆逮死, 乳媪金黑亦繫獄, 事定乃特赦之。 初, 黃氏之未赴京也, 兄夫金德章坐於所在房窓外, 黃儼見之大怒, 責之, 及其入朝, 在道得腹痛之疾, 醫用諸藥, 皆無效, 思食汁菹。 元閔生曰: "此何物耶?" 閔生備言沈造之方, 變色曰: "欲食人肉, 吾可割股而進, 如此草地, 何得此物?" 黃氏腹痛不已, 每夜使從婢以手磨動其腹, 到一夜小便時, 陰出一物, 大如茄子許, 皮裹肉塊也。 婢棄諸廁中, 一行衆婢, 皆知而喧說。 又黃氏婢潛說: "初出行也, 德章贈一木梳。" 欽差皆不知之。 帝以黃氏非處女詰之, 乃云: "曾與姊夫金德章、隣人皂隷通焉。" 帝怒, 將責本國, 勑已成, 有宮人楊氏者方寵, 知之, 語韓氏其故, 韓氏泣乞哀于帝曰: "黃氏在家私人, 豈我王之所知也?" 帝感悟, 遂命韓氏罰之, 韓氏乃批黃氏之頰。 明年戊戌, 欽差善才謂我太宗曰: "黃氏性險無溫色, 正類負債之女。" 歲癸卯, 欽差海壽謂上曰: "黃氏行路之時, 腹痛至甚, 吾等見則以鄕言言腹痛, 必慙而入內。" 及帝之崩, 宮人殉葬者, 三十餘人, 當死之日, 皆餉之於庭。 餉輟, 俱引升堂, 哭聲震殿閣。 堂上置木小床, 使立其上, 掛繩圍於其上, 以頭納其中, 遂去其床, 皆雉經而死。 韓氏臨死, 顧謂金黑曰: "娘吾去! 娘吾去!" 語未竟, 旁有宦者去床, 乃與崔氏俱死。 諸死者之初升堂也, 仁宗親入辭訣, 韓氏泣謂仁宗曰: "吾母年老, 願歸本國。" 仁宗許之丁寧, 及韓氏旣死, 仁宗欲送還金黑, 宮中諸女秀才曰: "近日之亂, 曠古所無。 朝鮮國大君賢, 中國亞匹也。 且古書有之, 初佛之排布諸國也, 朝鮮幾爲中華, 以一小故, 不得爲中華。 又遼東以東, 前世屬朝鮮, 今若得之, 中國不得抗衡必矣。 如此之亂, 不可使知之。" 仁宗尹鳳問曰: "欲還金黑, 恐洩近日事也, 如何?" 曰: "人各有心, 奴何敢知之?" 遂不送金黑, 特封爲恭人。 初, 帝寵王氏, 欲立以爲后, 及王氏薨, 帝甚痛悼, 遂病風喪心, 自後處事錯謬, 用刑慘酷。 之亂方殷, 雷震奉天華蓋謹身三殿俱燼。 宮中皆喜以爲: "帝必懼天變, 止誅戮。" 帝不以爲戒, 恣行誅戮, 無異平日。 後尹鳳奉使而來, 粗傳梗槪, 金黑之還, 乃得其詳。


  • 【태백산사고본】 9책 26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32면
  • 【분류】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