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위 전수를 태묘와 중국 경사에 알리다. 세자에게 친히 양위하는 교서를 내리다
영삼사사(領三司事) 심덕부(沈德符)에게 명하여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내가 착하지 못한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덕을 계승하여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나이 많으매 병이 발생하고, 여러가지 사무가 많고 복잡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려우므로, 빠뜨려진 것이 많을까 염려되나이다. 왕세자 이방과(李芳果)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처지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로서 나타났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았으므로, 이에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여 선대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감히 분명하게 고하나이다."
또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偰長壽)와 예조 전서(禮曹典書) 김을상(金乙祥)을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주(上奏)하였다.
"신(臣)이 젊을 때부터 군려(軍旅)에 노역하여 풍습병(風濕病)을 앓았는데, 지금 연기(年紀)가 쇠로(衰老)하여 일찍 늙게 되매, 여러가지 사무를 맡기가 어렵습니다. 장남(長男) 방과(芳果)는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근신하며, 의지와 행동은 단아(端雅)하고 정대(正大)하므로 뒷일을 부탁하여 동쪽 변방에서 있는 힘을 다할 만합니다. 삼가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세자에게 국사(國事)를 임시로 서리(署理)하게 하였으니, 삼가 황제의 명령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임금이 근시 내관(近侍內官)으로 하여금 부축해 일으키게 하고 세자를 부르니, 세자가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임금의 앞에 나아와서 땅에 엎드리었다. 임금이 친히 교서(敎書)를 주니, 세자가 받아 품속에 넣었는데, 그 교서에 이러하였다.
"왕은 말하노라.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조종(祖宗)의 음덕(蔭德)을 계승하고, 천자(天子)의 존엄(尊嚴)을 받들어 국가를 처음 세워 신민(臣民)을 통치한 지가 지금 7년이나 되었는데, 군려(軍旅)에 오래 있음으로 인하여 서리와 이슬을 범하여, 지금에 와서는 나이 많고 병이 발생하여 아침저녁으로 정사에 부지런하기가 어렵겠으므로, 여러가지 사무의 많고 번잡한 것을 빠뜨린 것이 많을까 염려된다. 다만 너 왕세자 방과(芳果)는 자신이 적장(嫡長)의 지위에 있어 일찍부터 인덕(仁德)과 효도를 나타냈으며, 또한 개국(開國)의 초기를 당하여 나를 보좌한 일이 많은 것은 온 나라 신민(臣民)들이 모두 이를 알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홍무(洪武) 31년 9월 초5일에 종묘(宗廟)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기를 명하니, 너는 전장(典章)을 따라 행하여 군자를 친근히 하고 소인을 멀리 하며, 보고 듣는 것은 자기 한 사람의 편사(偏私)를 없게 하고, 좋아하고 미워하는 것은 나라 사람들의 공론(公論)에 따라 감히 혹 폐기(廢棄)하지도 말며, 감히 혹 태만하지도 말아서, 그 지위를 영구히 편안하게 하여 후사(後嗣)를 번성(繁盛)하게 하라. 아아! 너 아버지는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비록 본받지 못할 것이지만, 선성(先聖)의 도(道)가 간책(簡冊)에 실려 있으니, 새벽에 일어나고 밤늦게 자서 너는 항상 공경할 것이다."
다음에는 좌정승과 우정승을 부르니, 또한 공복(公服)을 갖추어 입고 들어왔다.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지금 세자에게 왕위를 전해 주니, 경 등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도와서 큰 왕업(王業)을 퇴폐(頹廢)시키지 말게 하라."
이에 전국보(傳國寶)를 그들에게 주고, 다음에는 이문화에게 명하여 세자를 모시고 나오게 하였다. 좌정승과 우정승이 전국보(傳國寶)를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고 이문화가 세자를 모시고 근정전(勤政殿)에 이르렀다. 세자가 강사포(絳紗袍)와 원유관(遠遊冠)을 바꾸어 입고 왕위에 올라 백관(百官)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이름을 고쳐 경(曔)이라 하였다. 면복(冕服) 차림으로 백관(百官)들을 거느리고 부왕(父王)에게 존호(尊號)를 올려 상왕(上王)이라 하고는, 백관들을 거느리고 절하면서 치하(致賀)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의생활(衣生活)
○命領三司事沈德符, 告于太廟曰: "予以不穀, 承祖宗之德, 撫有臣庶, 于今七載, 年衰病作, 庶務叢劇, 難于宵旰, 恐多遺失。 王世子芳果, 身居嫡長, 夙著仁孝, 且當開國之初, 贊襄弘多。 爰命以位, 俾奉孝祀, 敢申昭告。" 又遣判三司事偰長壽、禮曹典書金乙祥, 如京師奏曰: "臣自少役於軍旅, 感患風濕疾證, 見今年紀衰老, 早暮難任庶事。 有長男芳果, 性資純謹, 志性端方, 堪托後事, 効力東陲。 謹於洪武三十一年九月初五日, 委令權署國事, 伏候明降。
上令近侍內官扶起, 召世子。 世子具公服, 詣上前伏地, 上親授敎書, 世子受納懷中。 其書曰:
王若曰, 余以否德, 承祖宗之蔭, 奉天子之靈, 肇造邦家, 撫有臣庶, 于今七年。 乃緣久於軍旅, 蒙犯霜露, 迨今年衰疾作, 難於宵旰, 庶務叢劇, 恐多遺失。 惟爾王世子芳果, 身居嫡長, 夙著仁孝, 且當開國之初, 贊襄弘多, 一國臣民, 咸共知之。 肆於洪武三十一年九月初五日, 告于宗廟, 乃命以位。 爾其率由典章, 親君子遠小人, 視聽無一己之偏, 好惡公國人之論, 無敢或荒, 無敢或怠, 永綏厥位, 以昌後嗣。 於戲! 爾父薄德, 雖不足效, 先聖之道, 布在方冊, 夙興夜寐, 爾尙敬哉!
次召左右政丞, 亦具公服以入。 上曰: "我今傳位于世子, 卿等戮力輔治, 毋墜大業。" 乃以傳國寶授之, 次命李文和, 陪世子以出。 左右政丞奉寶前導, 文和陪世子至勤政殿。 世子改服絳紗袍、遠遊冠, 卽王位, 受百官賀禮。 改諱曰曔。 以冕服率百官, 上父王尊號曰上王, 率百官拜賀。
- 【태백산사고본】 3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36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의생활(衣生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