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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2월 16일 양력 3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이완용 등 5명이 한일 의정서를 조인한 전후 사정을 아뢰고 사직을 청하다

의정부의정대신임시서리 학부대신(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 이완용(李完用),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내부 대신(內部大臣) 이지용(李址鎔), 농상공부 대신(農商工部大臣) 권중현(權重顯), 군부 대신(軍部大臣) 이근택(李根澤)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신들이 성조(聖朝)에 죄를 짓고 공손히 천토(天討)를 기다린 날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황상(皇上)께서 특별히 더 관대하게 우선 폐하의 위엄을 늦춘 것은 참으로 하해(河海)와 같은 도량으로 너그럽게 포용한 바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신들이 버젓이 묘당(廟堂)에 있는 것은 염치가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시국(時局)을 보건대 또한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요즘 상소들을 보았는데 거기에서 탄핵(彈劾)하고 논열(論列)한 것들은 신들이 스스로 폄하(貶下)한 것과 크게 다르니 어찌된 일입니까? 그들은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宗社)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민(人民)들은 노예로 되고 강토는 영지(領地)로 되었다고 인정하는데 이렇듯 이치에 어긋나는 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저 무리들이 과연 새 조약의 주지(主旨)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이것이 모두 어리석은 사람들이 흐리멍덩하게 하는 말이니 상대할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지만, 국가가 이미 망하고 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말하고 있으니 철저하게 힘껏 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 조약의 주지로 말하면, 독립(獨立)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帝國)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사는 안전하고 황실(皇室)은 존엄한데, 다만 외교에 대한 한 가지 문제만 잠깐 이웃 나라에 맡겼으니 우리나라가 부강해지면 도로 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오늘 처음으로 이루어진 조약이 아닙니다. 그 원인은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에 있고 이번 것은 다만 성취된 결과일 뿐입니다. 가령 국내에 진실로 저 무리들처럼 충성스럽고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자들이 있다면 마땅히 그 때에 쟁집(爭執)했어야 했고 쟁집해도 안 되면 들고 일어났어야 했으며, 들고 일어나도 안 되면 죽어버렸어야 했을 것인데 일찍이 이런 의거(義擧)를 한 자를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중대한 문제가 이미 결판난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갑자기 후회하면서 스스로 새 조약을 파기하고 옛날의 권리를 만회하겠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일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말할 것도 없고 나중에는 국교 문제에서 감정을 야기시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조약 체결의 전말에 대하여 말한다면, 일본 대사(日本大使)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올 때에 아이들과 어리석은 사람들까지도 모두 중대한 문제가 반드시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과연 11월 15일 두 번째로 폐하를 만나본 뒤에 심상치 않은 문제를 제출하니, 폐하께서는 즉시 윤허하지 않으시고 의정부(議政府)에 맡기셨습니다. 이튿날 16일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탁지부 대신(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법부 대신(法部大臣) 이하영(李夏榮) 및 신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이근택은 대사가 급박하게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이 우관(寓館)에 가서 모였고, 경리원 경(經理院卿) 심상훈(沈相薰)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박제순은 주둔한 공사(公使)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의 급박한 요청에 의하여 혼자서 이 주관(駐館)에 갔습니다. 그런데 모두 어제 제출한 문제를 가지고 문답을 반복하였으나 신들은 끝내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을 보였습니다. 밤이 되어 파하고 돌아와 폐하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뵙고 응답하였는데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아뢰었고 이어 아뢰기를, ‘내일 또 일본 대사관에 가서 모여야 하는데 만약 그들의 요구가 오늘의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라면 신들도 응당 오늘 대답한 것과 같이 물리쳐 버리겠습니다.’라고 하고는 물러나왔습니다.

이튿날 17일 오전에 신 등 8인(人)이 함께 일본 대사관에 모였는데, 과연 이 안건을 가지고 쟁론한 것이 복잡하였습니다. 권중현은 ‘이 문제는 비록 대사가 폐하께 아뢰었고 공사가 외부(外部)에다 통지하였지만 우리들은 아직 외부에서 의정부에 제의한 것을 접수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당장 의결(議決)할 수 없으며 또 중추원(中樞院)의 새 규정이 이미 반포된 만큼 반드시 여론을 널리 수렴해야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공사는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 정치(專制政治)인데 어찌하여 입헌 정치(立憲政治)의 규례를 모방하여 대중의 의견을 수렴합니까? 나는 대황제(大皇帝)의 왕권이 무한하여 응당 한 마디 말로써 직접 결정하는 것이지 허다한 모면하려는 법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에게 전통(電通)을 하여 곧바로 폐하를 만나볼 것을 청하였으니, 여러 대신(大臣)은 함께 대궐로 나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여러모로 극력 반대하였으나 끝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먼저 의정부 내의 직소(直所)에 와서 기다렸으며, 일본 공사는 관원을 데리고 뒤따라와서 휴게소에서 기다렸습니다. 조금 있다가 신들이 입대(入對)하여 폐하께 각기 경위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폐하께서는 몹시 괴로워하시며 이후의 조처에 대해 여러 번 신중히 하문(下問)하셨으나, 신들은 다만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는 말로써 대답하였을 뿐입니다. 그러자 폐하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그렇지만 감정을 가지게 할 수는 없으니 우선 늦추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이에 이완용이 아뢰기를, ‘이 일은 나라의 체통과 관련되는데 폐하의 조정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누가 감히 허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겠습니까? 다만 군신(君臣)의 관계는 부자(父子)의 관계와 같으니 품고 있는 생각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진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 대사가 찾아온 것은 전적으로 이 때문이며 공사가 와서 기다리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안건의 발락(發落)하는 것이 눈앞에 닥쳤는데도 군신 간에 서로 묻고 대답하는데 다만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다 밀어치우니, 사체(事體)를 가지고 논한다면 합당하지 않음이 없겠지만 이 또한 형식상 처리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여덟 사람이 아래에서 막아내는 것이 과연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일본 대사가 폐하를 나아가 뵐 것을 굳이 청하는데 만약 폐하의 마음이 오직 한 가지로 흔들리지 않는다면 국사(國事)를 위하여 진실로 천만 다행일 것이지만, 만일 너그러운 도량으로 할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부분에 대하여 미리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폐하께서 하교하신 것은 없었으며 여러 대신도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완용이 또 아뢰기를, ‘신이 미리 대책을 강구하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만일 할 수 없이 허용하게 된다면 이 약관(約款) 가운데도 첨삭(添削)하거나 개정(改正)할 만한 매우 중대한 사항이 있으니, 가장 제때에 잘 헤아려야 할 것이며 결코 그 자리에서 구차스럽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토오 히로부미 대사도 말하기를, 이번 약관에 대해서 만일 문구를 첨삭하거나 고치려고 하면 응당 협상하는 길이 있을 것이지만, 완전히 거절하려고 하면 이웃 나라간의 좋은 관계를 아마 보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그 약관의 문구를 변통하는 것은 바랄 수도 있을 듯하니 학부 대신의 말이 매우 타당하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지금 이 학부 대신이 말한 것은 꼭 허락해 주겠다는 말이 아니라 한 번 질문할 말을 만들어서 여지를 준비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이런 것은 모두 의사(議事)의 규례이니 구애될 것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때 여러 대신이 아뢴 것이 모두 권중현이 아뢴 것과 비슷하였습니다.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면 이 조약 초고(草稿)는 어디 있으며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고치겠는가?’ 하셨습니다. 이하영이 품속에서 일본 대사가 준 조약문을 찾아내어 연석(筵席)에서 봉진(奉進)하였습니다. 이완용이 나아와 아뢰기를,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이 조약 제3조 통감(統監)의 아래에 외교라는 두 글자를 명백히 말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훗날 끝없는 우환거리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 외교권을 도로 찾는 것은 우리나라에 실지 힘의 유무(有無)와 조만(早晩)에 달렸다고 하였는데 지금 그 기간을 억지로 정할 수 없지만 모호하게 하고 지나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다. 짐(朕)도 고쳐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첫머리의 글 가운데서 「전연 자행(全然自行)」이라는 구절은 지워버려야 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권중현이 아뢰기를, ‘신이 외부에서 얻어 본 일본 황제의 친서 부본에는 우리 황실의 안녕과 존엄에 조금도 손상을 주지 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번 약관은 나라의 체통에 크게 관련되지만 일찍이 여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부득이해서 첨삭하거나 고치게 된다면 이것도 응당 따로 한 조목을 만들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건 과연 옳다. 농상공부 대신의 말이 참으로 좋다.’ 하셨습니다. 이에 여러 대신 가운데는 폐하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는 사람 이완용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 권중현의 주장을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 모두 찬성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연석에서 아뢰는 것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우리 여덟 사람이 똑같이 아뢰기를, ‘이상 아뢴 것은 실로 미리 대책을 강구하는 준비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이 물러나가 일본 대사를 만나서, 안 된다는 한 마디 말로 물리쳐야겠습니다.’ 하니, 폐하께서 하교하시기를, ‘그렇기는 하지만 조금 전에 이미 짐의 뜻을 말하였으니 잘 조처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한규설박제순이 아뢰기를, ‘신들은 한 사람은 수석 대신이고 한 사람은 주임 대신으로서 폐하의 하교를 받들어 따르는 데 불과합니다.’ 하였습니다.

우리들 8인(人)이 일제히 물러나 나오는데 한규설박제순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도로 들어가서 비밀리에 봉칙(奉勅)하고 잠시 후에 다시 나와 모두 휴게소에 모이니, 일본 공사가 어전(御前)에서 회의한 것이 어떻게 결정되었는가를 물었습니다. 한규설이 대답하기를, ‘우리 황상 폐하(皇上陛下)께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뜻으로 하교하셨으나, 우리들 8인은 모두 반대하는 뜻으로 복주(覆奏)하였습니다.’ 하니, 공사가 말하기를, ‘귀국(貴國)은 전제국(專制國)이니 황상 폐하의 대권(大權)으로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하교가 있었다면 나는 이 조약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으로 알지만 여러 대신은 정부(政府)의 책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여 한결같이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을 주로 삼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이러한 대신들은 결코 묘당(廟堂)에 두어서는 안 되며 참정대신(參政大臣)과 외부 대신(外部大臣)은 더욱 체차(遞差)해야 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하기를, ‘공사가 이미 이렇게 말한 이상 나는 태연스럽게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하니, 여러 대신이 만류하면서 해명하기를, ‘공사의 한 마디 말을 가지고 참정대신이 자리를 피한다면 그것은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규설이 다시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조금 뒤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대사가 군사령관(軍司令官) 하세가와〔長谷川〕와 함께 급히 도착하였고, 헌병 사령관(憲兵司令官)과 군사령부 부관(軍司令部副官)이 뒤따라 왔습니다. 일본 공사가 대사에게 전후 사연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대사가 궁내부 대신(宮內部大臣) 이재극(李載克)에게 폐하의 접견을 주청(奏請)한다는 것을 전해 주도록 여러 번이나 계속 요구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돌아와서 ‘짐(朕)이 이미 각 대신에게 협상하여 잘 처리할 것을 허락하였고, 또 짐이 지금 목구멍에 탈이 생겨 접견할 수 없으니 모쪼록 잘 협상하라.’는 성지(聖旨)를 전하였습니다. 이재극이 또 참정대신 이하 각 대신에게 성지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대사가 곧 참정대신에게 토의를 시작하자고 요청하니, 한규설이 여러 대신에게 각기 자기의 의견을 말하라고 하였습니다. 대사가 먼저 참정대신을 향하여 말하기를, ‘각 대신들은 어전 회의의 경과만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내가 한 번 듣고자 합니다. 참정대신은 무엇이라고 아뢰었습니까.’ 하였습니다. 한규설이 말하기를, ‘나는 다만 반대한다고만 상주(上奏)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묻기를, ‘무엇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하였는지 설명하여야 하겠습니다.’ 하니, 한규설이 말하기를, ‘설명할 만한 것이 없지만 반대일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외부 대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물으니 박제순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명령이 아니라 바로 교섭(交涉)이니 찬성과 반대가 없을 수 없습니다. 내가 현재 외부 대신의 직임을 맡고 있으면서 외교권(外交權)이 넘어가는 것을 어찌 감히 찬성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미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명령이 있었으니 어찌 칙령(勅令)이 아니겠습니까? 외부 대신은 찬성하는 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민영기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반대입니다.’ 하였습니다. 대사가 묻기를, ‘절대 반대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탁지부 대신은 반대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하영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지금의 세계 대세와 동양의 형편 그리고 대사가 이번에 온 의도를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외교를 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귀국이 이처럼 요구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우리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미 지난해에 이루어진 의정서(議定書)와 협정서(協定書)가 있는데 이제 또 하필 외교권을 넘기라고 합니까? 우리나라의 체통에 관계되는 중대한 문제이니 승낙할 수 없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지만 이미 대세와 형편을 안다고 하니,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완용에게 물으니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기를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하교에 대하여 이미 참정대신의 통고가 있었으니 이 안건의 요지가 이미 판결된 셈이다.’라고 하고서 대답하기를, ‘나는 조금 전 연석(筵席)에서 여차여차하게 아뢴 바가 있을 뿐이고 끝내 찬성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고칠 만한 곳은 고치면 그만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권중현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연석에서 면대하였을 때에 대체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딴 의견은 바로 황실(皇室)의 존엄과 안녕에 대한 문구였습니다. 그러나 찬성과 반대 사이에서 충신과 역적이 즉시 판별되기 때문에 참정대신이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반대한다는 한 마디로 잘라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황실의 존엄과 안녕 등에 대한 문구는 실로 더 보태야 할 문구이니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심근택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도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으나 의견을 수렴하는 마당에서는 충신과 역적이 갈라지기 때문에 농상공부 대신과 같은 뜻으로 말하였습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이지용에게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 또한 연석에서 학부 대신과 같은 뜻이었습니다. 또 내가 일찍이 작년 봄에 하야시 곤노스께〔林權助〕 공사(公使)와 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의 약관 중 독립을 공고히 하고 황실을 편안히 하며 강토를 보전한다는 등의 명백한 문구가 있으니, 애당초 이 사안에 대하여 가부를 물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하니, 대사가 말하기를, ‘이 또한 찬성하는 편입니다.’ 하였습니다. 곧 이재극에게 다음과 같이 전달해 달라고 요구하며 말하기를, ‘이미 삼가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폐하의 칙령을 받들었기 때문에 각 대신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들의 논의가 같지는 않지만 그 실제를 따져보면 반대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가운데서 반대한다고 확실히 말한 사람은 오직 참정대신과 탁지부 대신 뿐입니다. 주무대신(主務大臣)에게 성지를 내리시어 속히 조인(調印)하기 바랍니다.’ 하였습니다. 이때 한규설이 의자에 앉아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 모양을 지으니 대사가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울려고 합니까?’ 하였습니다. 한참 있다가 이재극이 돌아와서 폐하의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협상 문제에 관계된다면 지리하고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셨습니다.’ 하고, 이어 또 이하영에게 칙령을 전하여 말하기를, ‘「약관 중에 첨삭할 곳은 법부 대신이 반드시 일본 대사, 공사와 교섭해서 바르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하였습니다. 각 대신 중 오직 한규설박제순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지용, 권중현, 이완용, 심근택 및 민영기, 이하영은 모두 자구(字句)를 첨삭하는 마당에서 변론하는 것이 있었으나 이때 한규설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에 갓도 쓰지 않고 지밀(至密)한 곳으로 뛰어들었다가 외국인에게 발각되어 곧 되돌아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때 양편에 분분하던 의견이 조금 진정되어 대사가 직접 붓을 들고 신들이 말하는 대로 조약 초고를 개정하고 곧 폐하께 바쳐서 보고하도록 하여 모두 통촉을 받았습니다. 또 우리나라가 부강해진 다음에는 이 조약이 당연히 무효로 되어야 하니 이러한 뜻의 문구를 따로 첨부하지 않을 수 없다는 문제에 대하여 다시 폐하의 칙령을 전하니 대사가 또 직접 붓을 들어 더 적어 넣어서 다시 폐하께서 보도록 하였으며, 결국 조인하는 데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의 사실은 단지 이것뿐입니다. 그런즉 신들이 정부의 벼슬을 지내면서 나라의 체통이 손상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죽음으로 극력 간쟁하지 않았으니 신하의 본분에 비추어볼 때 어찌 감히 스스로 변명할 바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탄핵하는 사람들이 이 조약의 이면을 따지지 않고 그날 밤의 사정도 모르면서 대뜸 신 등 5인(人)을 ‘나라를 팔아먹은 역적’이요, ‘나라를 그르친 역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만일 이 조약에 대한 죄를 정부에다 돌린다면 8인에게 모두 책임이 있는 것이지 어찌 꼭 5인만이 전적으로 그 죄를 져야 한단 말입니까? 한규설로 말하면 수석 대신이었습니다. 만일 거센 물살을 견디는 지주(砥柱)와 같은 위의와 명망, 하늘을 덮을 만한 수단이 있었다면 비록 자기 혼자서라도 앞장서 밤새도록 굳게 틀어쥐고 갖은 희롱을 막는 등 술수가 없는 것을 근심할 것이 없겠지만, 연석에서 면대할 때에는 전적으로 상(上)의 재가(裁可)만 청했고 외국의 대사와 문답하는 자리에서는 ‘협상하여 잘 처리하라.’는 말이 성지였다는 것을 성대하게 말함으로써 전제(專制)하는 데 구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여러 대신의 숱한 말들이 무력한 지경에 똑같이 귀결되게 하고 빈 말로 반대한다고 하면서도 울고 싶고 도망치고 싶다고 하며 거짓으로 명예를 꾀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대의(大議)가 이미 결정됨에 미쳐서 조약 초고를 찢어 버리거나 인신(印信)을 물리칠 수 없었으니 신 등 5인과는 애당초 같다 다르다 말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또 외국 대사가 일을 끝내고 돌아간 후 정부에 물러가 앉아서는 정해진 규례도 준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상소하여 신들에게 죄를 떠넘김으로써 허실(虛實)이 뒤섞이게 하였습니다. 그의 본심을 따져보면 다만 죄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도모한 것에 불과합니다. 시험 삼아 한규설의 잘못을 논해 보면 응당 우리들 5인의 아래에 놓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밖에 반대한다고 말한 대신들로 말하면, 처음에는 비록 반대한다고 말하였지만 끝내는 개정하는 일에 진력(盡力)하였으니, 또한 신 등 5인과 고심한 것이 동일하며 별로 경중의 구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걸핏하면 5인을 들어 실제가 없는 죄명을 신들로 하여금 천지(天地)간에 몸 둘 곳이 없게 하는 것입니까? 신 등 5인은 스스로 목숨을 돌볼 겨를이 없이 하였건만 당당한 제국의 허다한 백성들 속에 깨닫고 분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마치 한 마리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가 따라 짖듯이 소란을 피워 안정되는 날이 없으니 이 어찌 한심한 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탄핵하는 글로 말하면 반드시 증거를 확실하게 쥐고서야 바야흐로 등철(登徹)할 수 있는데 저 무리들에게 과연 잡은 증거가 있습니까? 사실을 날조하여 남에게 죽을죄를 씌운 자에게는 의당 반좌율(反坐律)이 있는 것이 실로 조종(祖宗)의 옛 법입니다.

무릇 위 항목의 일들은 폐하께서 환히 알기 때문에 곡진하게 관대히 용서하고 차마 신들에게 죄를 더 주지 않았으며, 파면시켜 줄 것을 아뢸 때에는 사임하지 말라고 권했고, 스스로 인책할 때에는 인책하지 말라고 칙유하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신들의 몸이 진토가 되어도 기어이 보답하여야 할 기회이건만 저 무리들은 폐하께서 어떤 뜻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날로 더욱 떠들어대면서 치안(治安)에 해를 주고, 정령(政令)이 지체된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입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나라의 체통을 깊이 진념하시고 속히 법사(法司)의 신하에게 엄한 명을 내리시어 이런 혼란스런 무리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구함(構陷)하는 경우를 만나게 되면 모두 죄의 경중을 나누어 형률을 적용하여 징계함으로써 신들이 실제로 범한 것이 없음을 밝혀 주신다면 이것이 어찌 신 등 5인에게만 다행한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기를,

"나라를 위해서 정성을 다하고 국사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신하라면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마는, 혹 부득이한 상황으로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여론이 당사자에게 책임을 돌리고 또한 해명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처럼 위태로운 때에는 오직 다같이 힘을 합쳐서 해나가야 될 것이니, 그렇게 한다면 위태로움을 안정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경들은 각기 한층 더 노력함으로써 속히 타개할 계책을 도모하라."

하였다.


  • 【원본】 50책 46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14면
  • 【분류】
    외교-일본(日本) / 정론-정론(政論) / 인사-임면(任免)

議政府議政大臣臨時署理學部大臣李完用、參政大臣朴齊純、內部大臣李址鎔、農商工部大臣權重顯、軍部大臣李根澤等疏略:

伏念臣等負累聖朝, 恭俟天討者, 蓋亦有日矣, 而皇上特加寬貸, 姑緩雷霆之威者, 誠以河海之量, 有所包荒而然也。 臣等之偃然盤踞于廟堂之上者, 非無恥也。 竊觀時局, 亦有所不得不爾者也。 臣等取見近日章疏, 其所彈劾論列, 大與臣等之所自貶者, 不同, 何也? 彼等則認之以國家已亡, 宗社無存, 人民爲奴隷, 疆土爲領地, 凡此等非理之言, 不一而足, 彼輩果能解得新約之歸趣否。 臣等以爲, 是皆愚蚩之人糊塗之說, 有不足相較。 然至云國家已亡, 宗社無存, 則不得不到底力辨矣。 以言乎新約主旨, 則獨立之稱, 不改, 帝國之名, 依舊, 宗社安寧, 皇室尊嚴, 但以外交一事, 暫寄於隣邦, 而待我富强, 索還有日。 況此非今日創成之約也。 其原因則在於昨年所成之議定書及協定書, 而今番則特成就之結果之而已也。 假使國內, 苟有忠肝義膽如彼輩者, 則當於其時爭執之, 爭執之不足, 騷擾之; 騷擾之不足, 死亡之, 而曾未見一個人作此義擧者。 何乃今日猛然省悟於大事已去之後, 自以爲新約可以破裂, 而舊權可以挽回歟? 事之不濟, 猶不足暇論, 而其終也, 在國交上不能無憾情之惹動, 豈不可念乎? 以言乎締約之顚末, 則日本國大使伊藤博文之來京也, 兒童走卒, 皆知其必有一大問題矣。 果於十一月十五日, 再次陛見之後, 提出非常事案, 陛下不卽裁斷, 委之于政府。 翌十六日, 參政大臣臣韓圭卨、度支部大臣臣閔泳綺、法部大臣臣李夏榮及臣址鎔、臣重顯、臣完用、臣根澤, 因大使亟請, 來會于該寓館, 而經理院卿臣沈相薰亦在座焉, 臣齊純, 因駐使林權助亟請, 獨往該駐館。 俱以昨日提出之件, 反覆問答, 臣等畢竟示之以斷不可許之意。 侵夜罷歸, 承召進對, 詳奏問答之辭, 仍奏曰: "明日則又當往會于館, 若其所求, 繼續今日之談, 則臣等亦當如今日之所答而却之而已。" 遂退出。 翌十七日上午, 臣等八人齊會于館, 果以該案件, 爭論不一。 而臣重顯則以爲: "此事, 雖有大使之奏稟于天陛及公使之照會于外部, 然吾儕則尙未接外部之提議于政府者, 今不必直行議決, 且樞院新規已頒, 必廣收物議, 始可取決也。" 使厲聲曰: "貴國是專制政治也, 何乃模倣立憲之規而收議大衆歟? 吾知大皇帝君權無限, 當一言而親裁, 不必用許多捱過法也。 我已電通于宮內大臣, 直請陛見, 諸大臣, 偕進宮中可也。 臣等萬端力拒, 終始不從, 故不得已先期來待于政府內直所矣。 使率館員, 踵後來待于休憩所。 少焉, 臣等入對, 各陳所經。 于斯時也, 宸褋煩惱, 以向後措處, 屢勤詢問, 臣等但以斷不可許等語仰答而已。" 聖敎若曰: "雖然, 不使有憾情, 姑緩之可也。" 於是, 臣完用奏曰: "此事有關國體, 凡北面於陛下之廷者, 孰敢曰可許乎? 第惟臣之於君, 猶子之於父, 苟有所懷, 當悉陳無隱。 今大使之來聘, 全爲是也, 公使之來待, 亦爲是也。 此案發落, 迫在眉睫, 而君臣之間, 上下問對, 但以不可二字, 一言蔽之, 以事體論之, 則非不得當, 是亦免不得形式上做去也, 臣等八個人之自下防塞, 果係容易之事, 然見今日使, 固請進見, 若聖心廓斷無二, 則爲國事, 誠是萬幸, 若或以寬弘之量, 不得已而至於容許, 則奈之何哉? 此等處, 不得不預先講究也。" 是時, 陛下無所下敎, 諸大臣亦含默無言。 臣完用又奏曰: "臣所謂預先講究者, 非他。 若不得已而至於容許, 則就該約款中, 亦有可以增刪改正者, 莫非大關係之事項, 最宜趁早商量, 決不可臨埸苟且也。" 聖敎若曰: "伊藤大使, 亦言: ‘今此約款, 若欲添改句語, 則當有協商之道, 而如欲全然拒絶, 則隣誼恐不可保。’ 以此推之, 則條款之內, 句語變通, 似有其望, 學部大臣所奏, 甚當也。" 臣重顯奏曰: "今此學部大臣所奏, 非曰必欲許之後已也, 要不過作一設問之辭, 準備餘地而已也。" 聖敎若曰: "是皆議事之規, 無所拘礙也。" 於是, 諸大臣所奏, 皆與臣重顯所奏, 略相彷彿。 聖敎若曰: "然則該約草稿在何處? 就中何者可改乎? 李夏榮, 自懷中探出使所授之約章, 奉進于筵中。" 臣完用進奏曰: "以臣愚見, 該約第三條統監之下, 不明言外交二字, 是爲後日無窮之慮。 且外交權之索還, 在於我國實力之有無, 早晩也, 則今不可强定年限, 然不當模糊過去矣。" 聖敎若曰: "然矣。 朕亦有可改處, 乃頭題中‘全然自行’四箇字, 此句, 宜抹去也。" 臣重顯奏曰: "臣在外部得見日本皇帝親書副本, 有曰毫無損於皇室之安寧尊嚴, 今此約款, 大關國體, 而曾無一句及此。 臣以爲不得已而若至添改, 則此亦當另作一條也。" 聖敎若曰: "是果然也。 農商工部大臣之言, 誠好矣。" 於是, 諸大臣中, 或有以聖敎爲至當者, 或有贊成完用之議者, 或有贊成重顯之議者, 又或有一竝贊成者。 而及筵奏將終, 臣等八人, 一齊奏曰: "以上所奏, 實不過講究準備而已。 然臣等退對使, 當以不可二字, 却之矣。" 聖敎若曰: "雖然, 儀者已喩朕志, 好樣措處可也。" 韓圭卨及臣齊純兩人奏曰: "臣等一是首席, 一是主任, 不過奉遵聖敎矣。" 臣等八人一齊退出, 韓圭卨及臣齊純則承命還入, 有所祕密奉勅者, 而須臾復出, 俱會于休憩所, 使問御前會議, 何以歸決。 韓圭卨答曰: "我皇上陛下, 以協商妥辦之意有敎, 而我等八人則皆以不可之意, 覆奏矣。" 公使曰: "貴國是專制國也, 以皇上陛下大權, 有協商妥辦之敎, 則吾知此約之順成, 而諸大臣全昧政府之責任, 一以逆君命爲主, 何也? 此等大臣, 決不可置之于廟堂之上, 而參政與外部大臣, 尤爲遞免。" 韓圭卨起身曰: "公使旣出此言, 吾不可晏然參席也。" 諸大臣挽解曰: "以公使之一言, 而參政避席, 則其在事體, 萬萬未穩也。" 韓圭卨仍復就座。 有頃, 伊藤大使, 與長谷川軍司令官馳到, 而憲兵司令官及軍司令部副官從之。 使對大使, 詳說前後事狀, 大使要宮內大臣李載克, 轉奏請陛見, 數次不已。 李載克回傳聖旨曰: "朕已許各大臣協商妥辦, 且朕方患咽喉, 不可接見, 須好樣協商也。" 李載克, 又向參政以下各大臣, 傳布聖旨。 大使仍請參政開議, 韓圭卨對諸大臣, 請各述己意。 大使先向參政曰: "各大臣但述御前會議景況可也。 我願一聞也。 參政則有何所奏?" 韓圭卨曰: "我但以否字, 上奏也。" 大使問曰: "何故言否。 不可無說明。" 韓圭卨曰: "無可說明, 而只是不可而已。" 次問外部大臣之何如。 臣齊純答曰: "此非命令也, 乃是交涉, 則不可無可否。 而我見帶外交之任, 外交移去, 豈敢曰可?" 大使曰: "旣有協商妥辦之聖勅, 則豈非命令乎? 外部大臣則可邊也。" 次問閔泳綺。 答曰: "我則否也。" 問曰: "絶對否耶?" 曰: "然也。" 曰: "然則度支部大臣否也。" 次問李夏榮。 答曰: "現今宇內大勢, 東洋形便及大使之此次來意, 非不知也。 我國不能善於外交, 故貴國有此干求, 是乃我國之所自取。 然而旣有昨年所成之議定書、協定書, 今何必更欲移去外交之權哉? 在我國體, 大有關係, 不可以承諾也。" 大使曰: "雖然旣知大勢形便, 則是亦可邊也。" 次問臣完用。 臣暗自思量曰協商妥辦之聖敎, 已有參政之聲明, 則此案之頭腦, 已判矣, 乃答曰: "我則俄於筵中有所奏達, 如是如是而已, 而終不言可矣。" 大使曰: "可改處, 改之則已矣, 是亦可邊也。" 次問臣重顯。 答曰: "吾則筵對時, 略與學部大臣同意。 又有一端另議者, 乃皇室尊嚴安寧句語也。 然而可否二字之間, 忠逆立判, 故參政收議之場, 但以一否字, 斷之也。" 大使曰: "皇室尊嚴安寧等字, 果係當添之句語, 是亦可邊也。" 次問臣根澤。 答曰: "我亦於筵中, 與學部大臣同意, 而及其收議之場, 則以忠逆之分爲言, 一如農商大臣之意也。" 大使曰: "然則是亦可邊也。" 次問臣址鎔。 答曰: "我亦於筵中, 與學部大臣同意也。 且我曾於昨春, 與林公使, 締結議定書, 而該條款中, 載有‘獨立鞏固、皇室安寧、疆土保全’等明文, 則初不必對此案問可否也。" 大使曰: "是亦可邊也。" 仍要李載克轉奏。 曰: "旣伏承協商妥辦之聖勅, 故取議于各大臣, 則其所言論不一, 而究其實際, 則不可以否字斷之。 就中純言否字者, 惟參政大臣及度支部大臣而已。 乞降聖旨于主務大臣, 作速調印焉。" 是時, 韓圭卨坐在椅子, 雙手掩面, 作啼號之狀。 大使止之曰: "安用泣爲哉?" 良久, 李載克回傳聖勅曰: "旣係協商, 則不必支煩也。" 仍又傳勅于李夏榮曰: "約款中增刪處, 法部大臣, 須與大使、公使, 交涉歸正可也。" 於各大臣中, 惟韓圭卨及臣齊純, 緘默不言。 臣址鎔、臣重顯、臣完用、臣根澤閔泳綺李夏榮俱有所辨論于字句增刪之場, 而是時, 韓圭卨, 爲避身, 頭不及冠, 躍入于至密之地, 爲外人所覺, 旋復還入。 適其時, 彼我兩邊, 紛議稍定, 大使躬自執筆, 依臣等所言, 改正約稿, 仍使之進呈乙覽, 竝蒙洞燭。 且本國富强之後, 此約定當歸無效, 不可不以此意, 另添句語事, 更傳聖勅, 大使又自執筆添記, 再經乙覽, 竟至調印矣。 當場事實, 只此而已。 則臣等職居政府, 罔念國體之損失, 不能以死力爭, 揆以臣分, 豈敢有所自解乎? 然而彈劾之人, 不問該約之裏許, 不識當夜之事狀, 輒稱臣等五人曰賣國賊, 曰誤國賊, 是未免大誤也。 若以該約歸罪於政府, 則八箇人當俱有其責, 何必五箇人專擔之哉? 以韓圭卨言之, 則身處首任。 苟有砥柱之儀, 望補天之手段, 則雖自家一人, 挺身獨當, 終夜堅執, 百般沮戲, 不患無術, 而筵對之時, 專請上裁, 外使問答之席, 以協商妥辦四箇字, 盛述聖旨, 以致藉口於專制。 而諸大臣之千言萬語, 同歸於無力之地, 空言稱否, 欲泣欲逃, 無非釣名之計。 而及其大議之已決, 不能扯碎約稿, 叱退印信, 則與臣等五箇人, 初無同異之可言。 且於外使罷歸之後, 退坐于政府, 不遵成規, 獨自草奏, 諉罪臣等, 虛實相蒙。 究其本心, 直不過自圖免罪。 試論韓圭卨之所失, 不當居臣等五箇人之下。 其外言否之大臣, 始雖言否, 終乃盡力於改正之事, 則亦與臣等五箇人, 同一苦心, 別無輕重之區別。 緣何以動擧五人, 加之以無實之罪名, 使臣等無所容措於覆載之間乎? 縱臣等五箇人之身命, 不遑自恤, 而堂堂帝國, 許多民衆, 無一人悟解分析者, 一犬吠影, 萬犬吠聲, 擾擾攘攘, 底定無日, 是豈非寒心處乎? 且彈劾之章, 必須證據確鑿, 方可登徹, 彼輩果有所執證者乎? 構人死罪, 自有反律, 寔祖宗舊典也。 凡上項事, 由陛下所深燭, 故曲加寬貸, 不忍加罪于臣等, 有所辭免, 則勉之以勿辭, 有所自引, 則諭之以勿引。 此誠臣等涓埃圖報之秋也, 而彼輩則不知聖意攸在, 日益喧聒, 不顧治安之妨害、政令之壅滯, 是誠何心? 伏願陛下深軫國體, 亟下嚴令于法司之臣, 遇有此等亂類, 群起而構陷者, 一竝分輕重按律懲勵, 以明臣等之無實犯。 是豈獨臣等五箇人之幸也哉?

批曰: "爲國殫竭, 乃心王事。 凡百臣隣, 夫孰不然? 其或因時措之有非獲已, 而物議之歸責當事, 亦不容爲解矣。 目今岌嶪之形, 惟在於同寅戮力。 庶幾轉危回安, 卿等其各猛加勉勵, 亟圖開濟之策。"


  • 【원본】 50책 46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4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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