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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5권, 고종 42년 1월 7일 양력 3번째기사 1905년 대한 광무(光武) 9년

곽종석이 비의 상사에 임금이 입는 상복에 대해 상소를 올리다

재야(在野)의 신하 곽종석(郭鍾錫)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작년 겨울에 삼가 예원(禮院)에서 품정(稟定)한 복단(服單)을 보니 우리 폐하가 태후를 위해서 기년복(朞年服)을 입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옳다고 생각합니다마는 국조(國朝)의 전례(前例)에는 들어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황수(皇嫂)는 모후(母后)와 구별이 있는 이상 사왕(嗣王)에게는 신하의 도리가 있으므로 왕후(王后)를 위하여 자최〔齊衰〕기년복을 입는다는 고경(古經)의 규정을 따르더라도 예법을 제정한 성인의 뜻에 배치되지 않습니다.

지금 비궁(妃宮)의 상사에 폐하께서 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고 황태자가 아내를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 것은 본래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명백한 규정으로서 다른 말을 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백관(百官)이 비궁을 위하여 자최 기년복을 입고 사서인(士庶人)들이 백의(白衣)와 백립(白笠) 차림으로 기년복 기간을 마치는 것은 고경에 비추어보아도 근거가 없는 것이고 국조(國朝)에 비추어보아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의례(儀禮)》〈자최 기년장(齊衰朞年章)〉에 이르기를, ‘임금의 아버지, 어머니, 아내를 위해서 입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전(傳)에 이르기를, ‘어째서 기년복을 입는가? 복(服)을 따라 입기 때문이다. 부모를 위해서 임금은 참최(斬衰)를 입는다. 아내는 소군(小君)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도식(圖式)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처음에 임금의 맏며느리를 위해서 상복을 입는 규정을 제정한 것은 없습니다. 주공(周公)이 일단 소군을 위해서 기년복을 입고 또 세자빈을 위해서도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면 왜 그것이 두 명을 다 높이는 것으로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황태자의 비가 비록 높기는 하지만 아직 세상에 황후로는 나서지 못했고 신하와 백성들에게 황후로서의 교지도 내리지 못하였는데 어째서 실정을 뛰어넘어 복을 제정하여 한갓 두 명을 다 높인다는 혐의나 받겠습니까?

이로 하여 우리 영조(英祖)《상례보편(喪禮補編)》을 편찬하여 뚜렷한 제도로 정했었는데 거기에는 ‘세자빈의 상사에 문무백관은 초종(初終) 및 성복(成服) 때 천담복(淺淡服)을 입는다. 세자궁의 관리는 소복(素服)을 하며 30일 만에 지내는 졸곡제(卒哭祭) 이전에 입직할 때에는 천담복을 입고 대조(大朝)에 입시할 때와 밖으로 나갈 때에는 상복을 입으며 기년(朞年) 내에 배제(陪祭)할 때에는 천담복(淺淡服)을 입는다. 생원(生員), 진사(進士), 생도(生徒)는 초종 및 성복 때 백의(白衣)로 회곡(會哭)하고, 갑사(甲士), 서인(庶人), 조례(皂隸)는 모두 복을 입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다 천리(天理)에 맞춘 동시에 인정까지 참작한 것으로서 우리 만 대의 훌륭한 제도로 남겨준 것입니다.

《시(詩)》에는 이르기를, ‘잘못을 범하지 않고 잊어버리지도 않는 것은 옛법을 따르기 때문이다.〔不愆不忘率由舊章〕’라고 하였으며, 《맹자(孟子)》에는 이르기를, ‘선왕의 법을 따르고서 잘못을 범하는 사람은 있어본 적이 없다.〔遵先王之法而過者未之有也〕’라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천명(天命)을 타고나 존엄스럽게도 황제가 되셨으므로 예의를 제정할 권한이 폐하께 있으나 천리에 바탕을 둔 규정을 어겨서는 안 되거니와, 선왕이 제정한 규정도 경솔하게 함부로 고쳐서는 안 되니 응당 변경시킴이 없이 정성껏 따름으로써 한 세상을 결함 없는 경지에 올려놓아야 할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제 내린 명을 빨리 거두고 온 나라에 다시 반포하여 공경 대부와 사서인(士庶人)이 모두 예법에 준해서 하게 하여 두 명을 높인다는 혐의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하리라고 봅니다.

만일 이미 복을 입고 있어서 갑자기 그만둘 수가 없다 하더라도 손익을 참작하기도 하고 현행 제도에 알맞게 정하기도 해서 졸곡제까지 종길(從吉)하게 한다면 대성인이 임시방편으로 써서 만든 법에도 해를 주지 않을 것이고 알맞게 낮추는 예의의 뜻에도 그다지 해롭지는 않을 것입니다.

경빈(慶嬪)으로 말한다면,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첩이 임금의 친척을 위해서 복을 입는 경우에는 정실과 같이한다.〔妾爲君之黨服得其女君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명헌 태후(明憲太后)가 오늘날에 존재한다면 비궁을 위하여 종자부(從子婦)로 쳐서 대공복(大功服)을 입어야 하겠습니까? 임금은 방계 친척에 대해서 높이가 같지 않으면 기년복 이하는 끊어버리고 복을 입지 않는 법이니 계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쳐서 손부(孫婦)의 규례에 의거하여 소공복(小功服)을 입어야 하겠습니까?

《보편》에 제정되어 있는 규정에, ‘왕대비는 소내상(小內喪)에 소공복을 입는다.’고 하였으니 경빈은 오늘날에 응당 명헌 태후가 입는 복에 따라서 입어야 할 것입니다. 《보편》에서 ‘빈(嬪) 이하는 소내상에 기년복을 입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금왕(今王)의 빈이 금왕을 따라서 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지 결코 선왕의 빈이 여군(女君)을 따르지 않고 금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경빈이 기년복을 입는 것으로 정한 것은 예관(禮官)이 창황하고 비통한 심정에 휩싸여 제대로 살피지 못해서 상고를 잘못한 것 같습니다. 바라건대, 역시 이것도 온 나라에 의논을 물어서 실정과 예법에 옳은 규례를 찾아내 적절히 제정한다면 인륜을 위하여 더없는 다행으로 될 것이고 국법을 위해서도 더욱 다행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보다 세밀히 살펴 주소서.

대체로 예라는 것은 의심스러운 것을 결정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고 상하를 구별하여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으로서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만국이 주시하므로 일거일동을 더더욱 경솔히 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예로 마음을 다잡고 예로 몸을 다스리게 되면 사사로운 생각이 싹트지 않아 모든 행동거지가 사리에 맞게 됩니다. 예로 집안을 꾸리게 되면 아버지와 아들, 형과 아우, 남편과 아내, 처와 첩이 각기 자기의 분수를 지켜 윤리와 기강이 문란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예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보살피게 되면 조정이 존엄스러워져 사람들이 위를 존경할 줄 알게 되며 예로 천하를 통솔하게 되면 천하가 공경하고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되어 사람들 상호간에 예가 아닌 행동을 감히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예가 세상의 나라와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이처럼 큰 것이니 어찌 제멋대로 마구 행동하며 임의대로 분별없이 굴겠습니까?

신은 병든 몸으로 궁벽한 산골에 있는 만큼 무릇 예절에 관한 규정이 정해져도 거의 제일 늦게야 들으므로 제때에 건백(建白)하지 못합니다. 그저 변함없는 충성의 일념으로 폐하의 모든 처사가 꼭 예에 맞게 되어서 만백성의 마음을 감복시킬 뿐만 아니라 천하 만대의 공의(公議)에도 비난을 받는 일이 없게 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이에 감히 외람됨을 무릅쓰고 암매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씀드리는 것이니 폐하께서는 망녕된 것을 가려내어 분수에 넘치는 것을 죄를 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이번에 기어서라도 올라오려던 뜻을 펴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병 때문이기는 하지만, 정리와 예절상 섭섭함이 있다. 상복에 관한 제도로 말하면 경자년(1900)에 옛 제도를 복구한 이후에 처음으로 있는 일로서 역대의 전례(典禮)는 사실의 근거가 명백하여 상고할 수 있는데 어째서 상고해보지 않고 경솔하게 말하여 소홀함을 면치 못하는가? 그리 알라."

하였다.


  • 【원본】 49책 4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60면
  • 【분류】
    의생활-예복(禮服) / 정론-정론(政論)

在野臣郭鍾錫疏略: "臣於昨冬, 伏見禮院稟定服單, 我陛下爲太后制朞矣。 私以爲是, 或未準于國朝已例。 然皇嫂之於母后, 旣有別, 則嗣王有臣道焉。 而遵古經爲王后齊衰朞之文, 亦足不背於聖人制禮之意。 今於妃宮之喪, 陛下之爲適婦朞, 東宮之爲妻而朞, 自是《大典》明文, 無容更議。 但百官之爲妃宮齊衰朞, 士庶人之白衣笠以終朞, 則質之古經而靡據, 稽之邦制而不合。 《儀禮》喪服齊衰朞年章曰: ‘爲君之父、母、妻。’, 傳曰: ‘何以朞也? 從服父母君服斬。 妻則小君也。’ 其圖式亦然。 初無爲君之適子婦制服之文。 周公之意, 豈不曰旣爲小君朞, 又爲世子婦服, 則是二尊也? 且儲壼雖尊, 猶未母臨乎天下, 陰敎未施于臣民, 寧可越情制服, 徒犯二尊之嫌爾云乎? 是以我英廟時, 纂定《補編》, 著爲典例, 而‘其於小內喪, 則文武百官, 初終及成服時, 淺淡服。 宮官素服, 三十日卒哭前入直時, 淺淡服。 大朝入侍時及出外, 常服, 朞年內陪祭時, 淺淡服。 生進、生徒初終及成服時, 白衣會哭, 甲士、庶人、皂隸皆無服。’ 是皆品節乎天秩, 參酌乎人情, 以貽我萬世懿典者也。 《詩》云‘不愆不忘, 率由舊章。’, 孟子曰: ‘遵先王之法而過者, 未之有也。’ 陛下誕膺景命, 尊爲天子, 制禮之權, 縱由聖裁。 而天理之節文, 終有不可得以違越, 先王之定制, 亦不可以造次而擅改, 固當恪遵無變, 躋一世於無過之域矣。 臣愚以爲今宜亟施反汗, 頒示中外, 令公卿大夫士庶, 皆得以典禮爲準, 而毋涉於二尊之嫌。 如以爲服已成, 不可遽罷, 則亦當斟酌損益, 因時制宜, 限卒哭而從吉。 則猶不害爲大聖人達權之制, 而庶不至甚妨於降殺以節之禮意也。 以慶嬪言之, 《禮》曰: ‘妾爲君之黨服, 得其女君同。’ 然則明憲太后而在今日者, 其爲妃宮, 抑以從子婦而爲之大功乎? 王者之於旁親, 尊不同則自朞而下, 絶而不服矣。 將以統系傳承, 而倣照孫婦之例, 爲之小功乎? 《補編》定式, 王大妃爲小內喪小功, 則慶嬪今日, 固當一視於明憲太后之服而從之矣。 《補編》之嬪以下爲小內喪服朞者, 則是當爲今王之嬪, 從今王而爲之服, 非必謂先王之嬪, 不從其女君而從於今王也。 今, 慶嬪定爲朞年, 竊恐禮官之或有不及審於倉卒悲遑之際, 而失之參考也。 亦望以此, 收議于朝野, 務求情文之宜而爲節制, 則人彝幸甚, 邦典幸甚。 伏乞聖明另加詳察。 夫禮也者, 所以決嫌疑、立人紀、辨上下、定民志, 過之不得, 不及亦不得。 況今萬國環瞻, 一擧一措, 尤不宜自輕禮以制心。 禮以治身, 則私意不作, 而百度乃理矣; 禮以齊家, 則父子、兄弟、夫婦、妻妾, 各得其分, 而倫紀不紊矣; 禮以治國臨民, 則朝廷尊而人知敬上矣; 禮以御天下, 則天下知所敬畏, 而不敢以非禮相加矣。 禮之於天下國家, 身心其大如是者, 是豈可徑情而直行, 率意而無章者哉? 臣病伏窮山, 凡有儀注文字, 率皆承聞之最晩, 不能以時建白。 惟是斷斷赤忱, 冀陛下之一動, 必於禮有以服萬姓之心, 而毋取譏於天下萬世之公議也。 玆敢不避煩猥, 冒昧仰陳, 惟陛下之擇其狂而罪其僭踰焉。" 批曰: "今番不得伸匍匐之義, 雖因美恙之難强, 在於情禮, 宜其缺然。 至於服制, 庚子復舊後初有之事, 歷代典禮, 班班可據, 何不考稽而率爾言之, 未免疎忽? 爾其諒之。"


  • 【원본】 49책 45권 8장 A면【국편영인본】 3책 360면
  • 【분류】
    의생활-예복(禮服)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