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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44권, 고종 41년 3월 15일 양력 2번째기사 1904년 대한 광무(光武) 8년

명헌 태후의 행장

행장(行狀)은 다음과 같다.

"대행 태후(大行太后)의 성(姓)은 홍씨(洪氏)이다. 고려(高麗)의 공신(功臣)인 삼중태사(三重太師) 홍은열(洪殷悅)이 처음으로 남양(南陽)에 적(籍)을 두었는데 대대로 내려가며 계속 벼슬을 지냈다. 그러다가 본조(本朝)에 이르러 홍춘경(洪春卿)이 관찰사(觀察使)를 지내니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된 남녕 부원군(南寧府院君)이다. 3대(代)가 지나서 홍명원(洪命元)이 관찰사를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찬성(贊成)이 홍처후(洪處厚)를 낳으니, 관찰사를 지냈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장(忠莊)이다. 모두 문장과 절의(節義)가 세상에 뛰어났다. 충장공(忠莊公)의 증손(曾孫)은 이름이 홍계적(洪啓迪)이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니, 충숙공(忠肅公) 이만성(李晩成), 충민공(忠愍公) 김운택(金雲澤)과 함께 임인년(1722)에 화를 입어 세상에서 3재신(三宰臣)으로 불린다. 이는 태후(太后)에게 5대 조상이 된다. 고조부(高祖父)는 이름이 홍주영(洪疇泳)이며 주부(注簿)를 지냈고 좨주(祭酒)에 추증되었다. 증조부(曾祖父)는 이름이 홍병채(洪秉寀)이며 현감(縣監)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조부(祖父)는 이름이 홍기섭(洪耆燮)이며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헌간(獻簡)이다. 아버지는 이름이 홍재룡(洪在龍)이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익풍 부원군(益豐府院君)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배필은 연창 부부인(延昌府夫人) 죽산(竹山) 안씨(安氏)이니 판서(判書) 안광직(安光直)의 딸이다.

태후는 순조(純祖) 신묘년(1831) 정월(正月) 22일 사시(巳時)에 조부 헌간공(獻簡公)의 임소(任所) 함열(咸悅)에서 탄생하였다. 이보다 앞서 헌간공이 일찍이 꿈을 꾸었는데, 현원로군(玄元老君)이라는 신인(神人)이 집에 내려와서 말하기를, ‘이 집에 마땅히 상서(祥瑞)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더니, 얼마 후에 태후가 태어났다. 태후는 나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럽고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덕스러운 품성은 천성(天成)이었다. 어려서부터 예의를 스스로 차릴 줄 알았고 행동거지가 어른처럼 의젓하였다. 부모를 섬기고 웃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모두 규범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집안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덕선(德選)에 응한 다음에야 《소학(小學)》을 주었는데 보자마자 단번에 외웠을 뿐 아니라 한 부(部)를 써서 깊숙이 간직해 두기까지 하고서도 전혀 모르는 체하였기 때문에 아는 사람이 적었다. 그러나 태후가 평생 가슴에 새겨 넣은 것은 대체로 여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두 자전(慈殿)을 받들어 섬기는 데 성의와 효성을 다하여서 안부를 묻고 봉양하는 일을 더없이 공경스럽게 하고서도 늘 다하지 못한 것같이 하였으며 아무리 두렵고 난처한 마당에서도 한결같이 극진한 정성을 가지고 쾌히 받들었다. 정축년(1877) 여름 신정 황후(神貞皇后)가 설사를 만나 오래 누웠을 때 시탕(侍湯)하여 올리고 음식을 맛보는 일을 반드시 직접 하면서 남을 시키지 않았으며 달포가 지나도록 옷도 벗지 않고 눈도 붙이지 않았다. 동조(東朝)께서는 그의 수고를 걱정하여 물러가라고 분부하니, 비록 할 수 없이 억지로 침소(寢所)에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감히 편안히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였고, 궁인(宮人)들을 시켜 황후(皇后)의 동정(動靜)이 어떤가를 알아보는 것이 대궐의 섬돌 위에 계속 이어졌다. 황후가 전처럼 음식을 든 다음에야 그도 원래대로 돌아갔으며 안색과 말마디에 절절한 기쁨이 차 넘치고 축원의 마음이 지극하여 궁중에서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정사년(1857) 순원 성모(純元聖母)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예의에 지나칠 정도로 가슴을 치며 울었다. 경인년(1890) 대상(大喪) 때 태후의 나이가 이미 만 60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상하고 원기가 상하도록 슬퍼하였으며 넉달을 하루와 같이 직접 빈전(殯殿)의 제전(祭奠)에 나오지 않은 적이 없었고 36년 동안 애도의 마음이 한결같았다. 태후를 곁에서 모시는 사람들은 처음에 거상(居喪) 기간이니까 그러려니 하였다. 하지만 거상 기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하였으며 종신토록 슬퍼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도 누구나 감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선대(先代)를 받드는 데 더더욱 지성을 다하였으며 진전(眞殿)에 올리는 음식을 3년 동안 주관하면서 반드시 직접 제물을 다루었고 언제 한 번이라도 남을 시켜 대신하게 한 적이 없었다. 경자년(1900)에 진전이 불탔을 때 태후는 몹시 놀라고 슬퍼하면서 여러 날 동안 침선(寢膳)을 잊고서도 계속 그러하였으며 황제(皇帝)가 애써 강경한 위로를 해서야 안정되었다. 태후는 기유년(1849) 대상(大喪) 후부터 근심과 걱정에 싸여 얼굴에 슬픈 기색이 돌았고 그 이후로는 말과 웃음이 없었다. 더구나 아랫사람들에게 은혜를 잘 베풀었는데 경빈(慶嬪)이 본궁(本宮)에 나가서 살 때나 혹은 대궐에 들어와 살다가 하직할 때에는 그리운 심정을 금치 못하여 눈물을 뿌리면서 보냈었고 아무리 하찮은 과일이나 음식이라도 매번 나눠 보내서 먹였다. 선왕(先王)에게서 은총을 받은 궁인은 더욱더 남달리 사랑하는 동시에 남겨 두고 보살폈으니, 대체로 전대(前代)의 후비(后妃)들에게서는 드문 것이었다. 처음 경빈이 입궁(入宮)하여 조현례(朝見禮)를 할 때 태후는 얼굴에 온화한 기운이 넘쳐 좌우 사람들에게 조용히 이르기를, ‘경빈의 자태와 거동이 그윽하고 덕스러운 얼굴에 아름다움이 차 넘치니 나라에 왕자가 많아지고 후손이 번성할 것이다. 내가 더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는가?’라고 하니, 순원 성모가 듣고서 극구 칭찬하기를, ‘어질고 어진 중궁(中宮)이로다. 태사(太姒)라도 이보다 더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경인년(1890) 이후 우리 황상(皇上)께서 의지할 곳이 없어지고 효성을 바칠 수 없게 되자 태후는 종묘 사직(宗廟社稷)과 백성들이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가지고 거듭 너그러이 비유하면서 애써 위로하였는데 그 내용이 간절하였다. 밤마다 시자(侍者)를 보내서 반드시 주상(主上)의 기후(氣候)가 어떠한가를 알아보았으며, 만일 조금이라도 성체(聖體)가 불편하다는 말을 들으면 잠 못 이루고 걱정하면서 올리는 상선(常膳)의 가짓수를 줄였다가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기뻐하였다. 황상 또한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섬기던 성의를 가지고 태후를 섬겼는데 태후를 공경히 받드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여 극진히 하였으므로 태후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역대의 제왕들이 종통(宗統)을 중히 여겼지만 형수를 존대하는 데서는 황상보다 더 극진한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다. 명성 황후(明成皇后)도 우리 황상이 섬기는 것처럼 섬기면서 한 마음으로 게을리한 적이 없었다. 태후는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모실 때마다 그의 현숙한 덕과 아름다운 범절을 찬양하면서 훌륭한 덕행을 본받으리라 생각하였는데 성모(聖母)는 때때로 귀를 기울이고 머리를 끄덕이곤 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뵈러 오면 그가 총명한 자질이 일찍 성취되고 행동이 예의에 맞는 것을 보고는 반드시 진심어린 말을 하곤 하였으며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어렸다. 늘 친척들이 좋은 벼슬을 지내는 것을 걱정하면서 명덕 마후(明德馬后)002) 가 본가 친척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지 말아 달라고 한 말을 외우곤 하며 경계하기를, ‘내가 심히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임오년(1882)과 갑신년(1884) 이래로 여러 번 변란을 겪으면서 위태롭고 갑작스러운 판국에 처해서도 예법을 엄격히 준수하였으며 본가(本家)의 사람이라 해도 당친(堂親)이 아닌 사람은 만나 주지 않았다.

평생 검소하게 지내는 것을 편히 여기고 늘 옷감으로는 우리나라에서 나는 명주와 비단을 썼을 뿐이었다. 비록 써야 할 물건일지라도 반드시 절약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턱없이 낭비하여 나라의 비용에 손해를 주지 않도록 하라.’고 하였으며, 흉년이 들면 백성들의 식량난을 걱정하면서 음식의 가짓수를 줄였다. 태후는 또한 너그럽고 아량이 있어 늙고 젊은 궁인들과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모시는 궁인들에게 한 번도 큰소리로 욕을 하지 않았고 성난 기색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직 언제나 옳은 것만을 보여 주었다. 겨울날 위사(衛士)가 추위에 떨고 있으면 매번 죽을 먹였다. 개구리나 개미와 같은 미물이 혹 지게문을 넘어 들어와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경계하였고, 봄날이 한창일 때 혹 참새 새끼가 처마 끝에서 떨어지면 시아(侍娥)를 시켜 잘 보살피고 먹이고 길들여 깃이 다 자란 다음에야 날려보내도록 하였다. 한 포기의 풀, 한 떨기의 꽃도 함부로 꺾지 말도록 하였으며 화분의 꽃과 뜨락의 나무들은 제 마음대로 무성하게 자라도록 두었고 물을 주고 북돋아 주면서 생장하는 이치를 관찰했으니, 이것은 그의 어진 마음이 밖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건강이 나빠져 오랫동안 앓을 때에도 평소처럼 날마다 머리 단장을 하고 세수를 하였으며 속옷 바람으로 사람을 맞은 적이 없었다. 승하(昇遐)하시던 날에는 궁인에게 명하여 침상에 부축하여 앉히도록 했는데, 그 침상은 바로 황상이 올린 것이다. 다른 요 자리는 다 치우고 꼭 이 침상에서 정히 생을 마쳤으니 태후의 그윽한 뜻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예의의 발현이다. 겨울에 황상이 명년(明年)이 대행 태후가 간택(揀擇)된 구갑(舊甲)이기 때문에 국조(國朝)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존호(尊號)를 올리겠다는 것을 청하였으나 태후는 겸손하게 굳이 사양하였다. 명년 정월 초하룻날 온 나라에 선포하고 축하하려고 했는데, 태후가 월초부터 조금 앓기 시작하여 열흘이 지나 점점 심해져 11월 15일 을미일에 경운궁(慶運宮)수인당(壽仁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춘추(春秋)는 73세이다.

뭇 신하들이 효정(孝定)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니, 5종(五宗)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뜻에서 효(孝)라 하고 순수한 덕행을 잃지 않았다는 뜻에서 정(定)이라고 하였다. 휘호(徽號)는 ‘자온 공안(慈溫恭安)’이며 전호(殿號)는 ‘효혜(孝惠)’이다. 명년 갑진년(1904) 정월 29일 무신일에 경릉(景陵)에 합장(合葬)하여 한 능에 따로 안치한다.

우리 황상 폐하께서 이에 직접 지은 행록(行錄)을 내려 보내면서 신에게 행장(行狀)을 지으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행록의 순차에 따라 위와 같이 지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비(妃)의 도리 또한 한 마디로 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니, 곤괘(坤卦)의 육이(六二)에, ‘곧고 방정하다.’라고 하였고, 문언(文言)에는, ‘곧은 것은 바른 것이고 방정한 것은 의로운 것이다. 군자(君子)는 공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의로움으로써 밖을 방정하게 하는 것이니 공경과 의로움이 이루어져야 덕이 원만하여진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태후의 순결한 덕을 형상하면 아마 알 것입니다. 두 자전(慈殿)이 지극히 자애롭게 보살핀 것은 태후의 천성에 뿌리를 둔 것인 만큼 신은 이것을 가지고 태후가 성의와 공경을 다하였다는 것을 삼가 알았습니다. 신이 또 순원 성모가 태후를 태사(太姒)에 비겨 극구 찬양한 것을 미루어 태후가 만물을 아낀 것도 의로움을 알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을 새와 벌레와 초목과 꽃에까지 널리 베풀었고 명령과 경계가 대궐 안뜰을 넘어서지 않았으며 사가(私家)에 은혜를 베풀지 않았으니 이른바 덕이 성대하여 근본이 있었습니다. 아! 아름답습니다."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학진(金鶴鎭)이 지었다.】


  • 【원본】 48책 44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20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

    [註 002] 명덕 마후(明德馬后) :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황후. 명덕은 시호. 덕이 궁중에서 으뜸이었고, 친정(親庭) 일을 조정에 바라는 법이 없었다. 《후한서(後漢書)》 권10.

行狀:

大行太后姓洪氏高麗功臣三重太師殷悅, 始籍南陽, 簪組蟬聯不絶。 及本朝, 有曰春卿, 觀察使贈領議政南寧府院君。 三傳而諱命元, 觀察使贈左贊成。 贊成生諱處厚, 觀察使贈領議政, 諡忠莊。 俱以文章、節義著於世。 忠莊之曾孫諱啓迪, 大司憲贈吏曹判書, 諡忠簡, 與李忠肅晩成金忠愍雲澤, 同壬寅禍, 世稱三宰臣, 於后爲五世祖。 高祖諱疇泳, 主簿贈祭酒; 曾祖諱秉寀, 縣監贈左贊成; 祖諱耆燮, 輔國贈領議政, 諡獻簡。 考諱在龍, 領敦寧府事益豐府院君贈領議政, 諡翼獻。 配延昌府夫人 竹山 安氏, 判書光直女。 后以純祖辛卯正月二十二日巳時, 誕生于祖考獻簡公 咸悅任所。 先是, 獻簡公嘗夢, 神人稱玄元老君, 降于第曰: "是家當有禎祥。" 已而后誕焉。 后生而仁孝聰睿, 德性天成, 自在髫齔, 亦知以禮自持, 儼若成人, 事親敬長, 動合規度, 家人咸異之。 及膺德選, 始授《小學》, 覽輒成誦, 又手寫一部而深藏之, 退然若無能者, 知者鮮矣。 然后之一生所服膺者, 則蓋根柢於此。 承事兩慈殿, 誠孝兩盡, 問寢執養, 洞洞屬屬, 常若不勝。 雖當恐懼艱處之際, 一以至誠委曲, 承奉愉愉如也。 丁丑夏, 神貞皇后患泄痢彌留, 侍湯、嘗膳必親, 無使不解帶、不交睫者, 浹月。 東朝念其焦勞, 命之退, 雖不得已黽勉還寢所, 然猶彷徨佇立, 未敢安坐。 所使宮人問知動靜者, 相續於殿陛。 及復膳然後亦復初, 慶忭之悃, 溢於色辭, 不勝歡祝, 宮中莫不感歎。 逮夫丁巳, 純元聖母賓天, 后號擗踰禮。 及遭庚寅巨創, 后已滿六旬, 哀毁隕絶, 筋力澟然, 而殯殿祭奠, 罕不親臨, 四朔如一日, 三年之內, 哀慕如一。 侍側者初謂制中適然, 旣而制盡猶然, 終身慟靡逮, 宮中又莫不感歎。 尤盡誠於奉先, 管饋食于眞殿者, 垂三紀, 必躬執蘋藻, 終不一令人代之。 庚子, 眞殿災, 后大驚慟, 寢膳俱廢, 歷累日不能自釋, 皇上力勉强慰, 始得安。 后自己酉大喪後, 煢煢銜恤, 其容有戚, 時然後言笑不見。 矧惟覃逮下之恩, 慶嬪出居本宮時, 或入闕起居, 及其辭退, 不禁依戀之懷, 揮涕而送之, 雖果饌之微, 每分而送饋。 宮人之承恩先王者, 尤眷愛而拊存之, 蓋前代后妃之所罕有也。 初, 慶嬪之入宮朝見也, 后顔色愈和, 從容謂左右曰: "慶嬪姿儀幽閒, 德容充美, 使國家螽斯繩繩, 本支繁衍, 吾復何憂?" 純元聖母聞而亟稱之曰: "賢哉, 中宮也! 賢哉, 中宮也! 太姒無以加之。" 庚寅以後, 惟我皇上, 瞻依無所, 孝思靡至, 后諄諄然, 以宗社生民之託, 寬譬而慰勉之, 辭意懇摯。 每蚤夜送侍者, 必探知上候安否何如, 若聞聖體微愆天和, 則耿耿憂念, 進膳爲減, 至聞復常節, 然後乃喜。 皇上亦以所事神貞聖母之誠移于后, 凡所以致其敬奉者, 無所不用其極, 眷眷篤至。 后每感歎曰: "歷代帝王能重統緖, 而尊其嫂, 未有盛於皇上也。" 明成皇后, 亦以我皇上所以事之者事之, 一心靡懈。 后每侍神貞聖母, 輒稱揚其淑德懿行, 思媚嗣徽, 聖母時時傾聽而頷之。 皇太子來謁, 則見其睿質夙就動止循禮, 必接語款款, 喜形于色。 常以親屬之榮顯爲懼, 每誦明德馬后 濯龍之語而戒之曰: "吾甚愧此矣。" 自壬甲以來, 屢經變亂, 雖在顚沛急遽之際, 嚴於禮法, 本屬之非堂親者, 未嘗賜對。 平生安於儉約, 常時衣襨, 惟土産紬帛而已。 雖應用之物, 必使撙節曰: "無使濫費致損國用。" 値歲不熟, 則軫民生之艱食, 爲之減膳。 后又寬裕有容, 宮人之自少至老, 朝夕昵侍者, 未嘗聆訶叱之辭, 亦未嘗覩恚慍之色, 惟其以時發見者, 皆當其可。 冬月衛士之呼寒者, 每餰之。 雖螻蟻微物, 或有入戶者, 戒勿妄害; 方春, 雀雛或墜簷端, 使侍娥護飼馴養, 待羽翮旣成, 然後放之; 一草一花之類, 勿令妄折, 盆花庭柯, 一任其叢茂, 培之漑之, 以觀發生之理: 此其仁端之發於外者也。 及夫違豫沈綿之中, 猶日梳洗如常, 未嘗以褻衣接人。 至昇遐之日, 命宮人扶坐于臥床, 床卽皇上所獻也。 捨他褥席, 必正終于是床, 有足以仰揣后之微意也: 此其發於禮義者也。 冬, 皇上以明年卽后膺揀舊甲, 援國朝故事, 請進尊號, 后撝謙固辭。 乃於明年月正元日, 將行告布稱賀。 而后自月初, 微有不豫, 彌旬漸㞃, 至十一月十五日乙未, 禮陟于慶運宮壽仁堂。 春秋七十有三。 群臣上諡號曰孝定: 五宗安之曰‘孝’, 純行不爽曰‘定’。 徽號曰慈溫恭安, 殿號曰孝惠。 用明年甲辰正月二十九日戊申, 祔于景陵, 同塋異封。 我皇上陛下, 爰降御製行錄, 命臣以狀德之文。 臣惶懼不敢辭, 則謹就行錄纂次, 而敍之如右。 竊伏念坤道亦可以一言而盡也, 則坤之六二曰"直方"。 大文言曰: "直, 其正也; 方, 其義也。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 以是狀后之德之純, 其或庶幾乎! 兩慈殿止慈之眷, 由於后根天之賦, 則臣以是恭知后之盡於誠敬也。 臣又以純元聖母擬后於太姒而亟稱之者仰推, 則后之利物以知義者, 亦可以見矣。 好生之德, 普洽於禽蟲草卉, 而命戒不出於內廷, 恩澤不及於私家, 則所謂"德盛逢原"者也。 嗚呼媺哉!

【弘文館學士金鶴鎭製。】


  • 【원본】 48책 44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3책 320면
  • 【분류】
    인물(人物) / 왕실-비빈(妃嬪) / 역사-편사(編史)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