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홍이 두 개의 수도에 대하여 건의하다
【음력 임인년(壬寅年) 3월 24일】
특진관(特進官) 김규홍(金奎弘)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 세상을 다스리는 이들은 모두 두 개의 수도를 세웠으니 그것은 하늘과 땅에 충만된 화기(和氣)를 받들고 천하의 명승지를 타고 앉으며 만대의 장구한 계책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주(周) 나라와 한(漢) 나라, 당(唐) 나라가 모두 그러했고 명(明) 나라에 이르러서는 관청을 세우고 나누어 다스려 그 제도가 더욱 완비되었습니다. 지금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 중에 두 수도를 두는 제도를 시행하지 않는 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웠는데도 중간에 다시 개성(開城)으로 수도를 옮겼던 일은 두 개의 수도를 두자는 뜻이었지만 송경(松京)을 폐지한 지 이제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우리 황제 폐하는 하늘의 명에 크게 응하여 황극(皇極)을 세우시고 크나큰 계책으로 전대의 업적을 빛내고 후손들을 위한 모책(謨策)을 열었으며 중흥(中興)의 업을 세워 만대의 터전을 닦으셨습니다. 크고 원대한 규모는 옛날보다 뛰어나건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는 제도만은 아직까지도 시행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라 안의 형세를 보자면 평양(平壤)은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인문(人文)이 열린 고장으로서 세 성인(聖人)이 연이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다스린 지가 모두 천여 년이며 지금도 인물(人物)이 번성하고 고을이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그리고 땅이 연경(燕京), 계주(薊州)와 이어져서 풍속과 기질이 굳세고 질박하며 뱃길로 등주(登州), 내주(萊州)와 교류하므로 물화(物貨)가 폭주합니다. 고려(高麗)의 태조(太祖)는 일찍이 말하기를,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으로 우리나라의 명맥을 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장락궁(長樂宮), 대화궁(大和宮)이라는 것은 모두 전 왕조 때의 행궁(行宮)이고 영숭전(永崇殿)은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행궁이었습니다. 선조(宣祖) 때에 명(明) 나라 사람 이문통(李文通)은 이르기를, ‘평양(平壤)은 만년 왕기(王氣)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풍수 보는 사람의 말이기는 하지만 읍지(邑誌)에 전해지고 있으니 역시 거짓은 아닙니다. 또한 이 고장의 사람들은 평소 의기(義氣)를 숭상하며 위급한 시기에 쓸 만하기 때문에 중신(重臣) 권근(權近)은 주(周) 나라의 기(岐) 땅과 풍(豐)땅에 견주었으니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이제 서경(西京)을 두고 이궁(離宮)을 새로 짓고 군사를 증설하여 지키게 함으로써 나라의 위엄을 장엄하게 만들고 터전을 공고하게 한다면 그 고장이 더욱 중해지고 백성은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할 것이니 단지 보기에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멀리 주(周) 나라, 한(漢) 나라, 당(唐) 나라, 명(明) 나라를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이런 것이 있었으며 가까이로 고려와 동서양의 여러 나라들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당당한 황제의 나라로서 어찌 유독 두 개의 수도를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이 조치는 평양(平壤) 관리들과 백성들이 기꺼이 따르는 일이니 모든 기강(紀綱)이 장차 얼마 안가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터인데 조정에서 무엇을 망설이고 처분을 내리지 않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신의 이 글을 의정부(議政府)에 내려 보내어 널리 물어보고 재결하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천년 고도(古都)의 사적(事跡)이 묘연한데 이제 경(卿)이 옛 사적을 자세히 진술한 것이 모두 확실한 근거가 있으니 마땅히 조처해야 할 것이다. 별도로 편의 여부를 물어서 처분을 내리겠다."
하였다.
- 【원본】 46책 4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8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
一日。 【陰曆壬寅三月二十四日】 特進官金奎弘疏略: "竊伏念, 古之有天下者, 皆建置兩京, 所以承天地之沖和也, 所以據天下之形勝也, 所以爲萬世長遠之慮也。 周、漢及唐, 罔不皆然, 而至於皇明, 建官分治, 制度尤備。 目今東西各國, 孰不有兩京之制乎? 粤我太祖高皇帝, 旣定鼎于漢陽, 間復還都開城者, 亦存兩京之意, 而松京之廢, 今已久矣。 惟我皇上陛下, 誕膺峻命, 肇建皇極, 鴻猷光前, 燕謨啓後, 創中興之業, 垂萬代之基。 宏規遠模, 允邁古昔, 而獨於兩京之制, 尙未之遑矣。 第以國中之形勝觀之, 平壤爲我東首開人文之地, 而三聖繼都, 享國, 俱千餘年, 至于今人物繁衍、邑居壯麗。 壤接燕、薊, 風氣勁質, 港交登、萊, 物貨輻湊。 高麗太祖嘗曰: ‘西京水德, 調我國脈。’ 所謂長樂宮、大和宮, 皆前朝時行宮也, 永崇殿, 卽我太祖高皇帝之行朝也。 在宣廟時, 華人李文通, 謂: ‘平壤有萬年王氣’。 此雖形家之言, 而邑誌所傳, 亦非誣也。 且是邦人士, 素尙義氣, 緩急可用, 故重臣權近, 擬之岐、豐之地, 豈不信哉? 今若建置西京, 營繕離宮, 增設隊伍, 爲之守衛, 以壯國威, 以鞏基圖, 則地愈增重, 人思效忠, 非直爲觀瞻之美也。 遠溯周、漢、唐、明, 旣有是矣。 近稽麗代及東西各國, 又如彼矣。 今以堂堂萬乘之國, 獨不可以建兩京之制乎? 況是擧也, 尤西州士民之所樂而趨之者, 則凡百經紀, 將見不日其成矣。 朝家何所持難, 而不爲之處分乎? 伏願皇上淵然深省, 下臣此章于政府, 廣詢而裁處焉。" 批曰: "千年古都, 事蹟䵝昧, 今卿詳陳古事, 皆有的據, 宜其有措處。 另探便宜, 當下處分矣。"
- 【원본】 46책 42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8면
- 【분류】역사-고사(故事)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