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소 문제로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등을 소견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장례원(掌禮院)의 당상(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우리 동궁 전하께서 극진한 효성으로 폐하를 감동시키시어 이미 기사(耆社) 문제에 대해서는 윤유(允兪)를 받았으니 신 등의 기쁨과 축하하는 마음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절차가 있으면 반드시 진연(進宴)하는 절차가 있는 것은 원래 움직일 수 없는 규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비답(批答)에서 허락하지 않으셨으니 어찌 우리 동궁 전하만이 정성을 펼 수 없어서 실망하시겠습니까? 대소신료(大小臣僚)들이 일치한 목소리로 억울해 하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다시 거듭 생각해 보소서."
하였고,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의 상주(上奏)도 대략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과 같이 노성한 견해로는 또한 짐작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이 어찌 큰 연회를 벌일 때인가? 51세에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것은 우리 영조(英祖)가 이미 시행한 규례로써 종친(宗親)들이 상소문을 올리고 대신들이 연석에서 거듭 아뢰었지만 짐은 선뜻 허락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동궁이 간절하게 청하여 두터운 효성을 더욱 볼 수 있었기에 마지못해 그 청을 따랐으니 이것은 옛 규례를 이어가는 일이다."
하였다. 장례원 경(掌禮院卿) 심상훈(沈相薰)이 아뢰기를,
"이번에 황상(皇上)께서 기사(耆社)에 들어가실 때 영수각(靈壽閣)에 친림(親臨)하시어 봉심하실 길일을 언제쯤으로 받아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음력 3월 20일 후로 받아서 들여오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상훈(沈相薰)이 아뢰기를,
"고묘(告廟), 반조(頒詔), 진하(陳賀)의 절차는 응당 차례로 마련하여야 하겠는데 삼가 영조(英祖) 갑자년(1744)의 등록(謄錄)을 상고하여 보니 기사(耆社)에 들어가는 날 새벽에 먼저 고묘를 거행하고 다음날 반조와 진하를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이대로 마련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심상훈(沈相薰)이 아뢰기를,
"안석과 지팡이〔几杖〕는 갑자년(1744) 규례대로 상의사(尙衣司)에서 만들어 들여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첩(御帖)은 짐이 직접 써야겠는데 존호 아래에다 무엇이라고 쓰는 것이 좋겠는가?"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첩은 숙종(肅宗)이 기사에 들어갈 때 경종(景宗)이 명을 받고 대신 쓴 것으로써 지금 감히 고쳐 써서 봉안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우리 폐하의 어첩에는 응당 황제라고 쓰는 것이 규례에 맞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윤용선의 상주도 같았다. 상이 이르기를,
"사리(事理)는 정말 경들의 말과 같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신들이 번거롭게 굴면서 감히 청하는 것은 더없이 외람된 일이지만 진연하는 이 한 가지 절차를 거행하지 않으면 천 년에도 보기 드문 훌륭한 일을 장식할 수 없을 것이며, 기쁨 속에 애타게 바라는 대소신료와 백성들의 간절한 소망이 맺힌 채 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굽어 살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말을 짐이 어찌 이해하지 못하겠는가마는 단지 지금은 할 수 없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기로소(耆老所)가 지금 폐지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옛 일로 되어 버린 셈이니 우선 봉심하고 족자 표구를 고치게 하되 옛날에는 반드시 홍색(紅色)으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황색(黃色)으로 개수(改修)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지금 천자의 의식을 시행하는 데서 황색을 숭상하는 만큼 이렇게 고치는 것이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제 관제(官制)를 개정하자면 아무래도 변통(變通)하여야 하겠는데 우선 《통편(通編)》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조금 변통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들어갈 만한 사람이 얼마쯤 되며 김 봉조하(金奉朝賀)와 송 봉조하(宋奉朝賀)가 다 들어가지 못했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지금 16인입니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두 봉조하는 당시 병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였고 또 여러 대신(大臣)들도 들어가지 못했습니다만 이제 장차 기사에 함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은 예로부터 보기 드문 대단한 일이고 이보다 더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70세 이상 된 문관(文官)이라야 들어갈 수 있고 그 밖의 여러 대신들은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70세 된 문관으로서 품계가 정경(正卿)이라야 들어가고 음관(蔭官)이나 무관(武官)은 들어가지 못한다는 규례가 전부터 있다."
하였다.
- 【원본】 46책 4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召見時原任大臣、禮堂。 領敦寧院事沈舜澤曰: "惟我東宮殿下, 睿孝篤摯, 仰格天心, 耆社之節, 旣蒙允兪。 臣等懽忭慶祝, 曷有其極? 而竊伏以‘有是擧, 而必有進宴之節, 自是典式之不易者也。’ 聖批靳許, 豈徒我東宮殿下, 以不獲伸忱, 爲缺望哉? 小大臣庶, 同聲菀抑矣。 伏願陛下更加三思焉。" 議政府議政尹容善所奏, 略同。 上曰: "卿等, 以老成之見, 亦宜有斟量者矣。 此豈可爲張大豐豫之時乎? 望六之年入耆社, 粤有我英廟已行之例也。 宗臣之疏、大臣筵奏, 申複勤請, 而朕未可遽許, 東宮之陳懇, 益見誠孝之篤, 勉從其請, 此乃紹述之事也。" 掌禮院卿沈相薰曰: "今此皇上入耆社時, 親臨靈壽閣奉審吉日。 以何間推擇乎?" 上曰: "陰曆三月念後擇入可也。" 相薰曰: "告廟、頒詔、陳賀之節, 當爲次第磨鍊。 而謹稽英廟朝甲子謄錄。 則入耆社日曉頭, 先行告廟, 翌日頒詔, 陳賀矣。 今亦依此磨鍊乎?" 允之。 相薰曰: "几杖, 謹依甲子年例, 自尙衣司造入何如?" 允之。 上曰: "御帖, 朕將親書, 而尊號下, 何以書之爲可乎?" 舜澤曰: "太祖高皇帝御帖, 肅廟入耆社時, 景廟承命代寫也。 今不敢改書奉安, 而今我陛下御帖, 當書以皇帝, 恐合典式矣。" 容善所奏, 亦同。 上曰: "事理, 誠如卿等之言矣。" 舜澤曰: "臣等冒煩敢請, 極涉猥屑, 而進宴一節, 苟無是焉, 則不足飾千載晠擧。 而小大臣庶之加額顒望於歡聲協氣之中者, 菀結而不得伸。 伏願陛下俯垂察焉。" 上曰: "卿等之言, 朕豈不諒? 而惟今時則不可矣。" 仍敎曰: "耆老所, 今雖不廢, 已屬古事, 則先爲奉審, 俾改粧𨋀粧潢, 而昔必以紅色爲之, 則今以黃色改修爲宜也。" 舜澤曰: "今行天子之禮, 色尙黃, 當如是改之。 甚合宜矣。" 上曰: "今爲官制改定, 則從當變通, 而先以通編施行爲可也。" 容善曰: "稍爲變通, 亦似可矣。" 上曰: "現今可入之人幾許, 而金奉朝賀奉朝賀、宋奉朝賀奉朝賀, 皆未入云耶?" 容善曰: "今爲十六人矣。" 舜澤曰: "兩奉朝賀, 其時以病癃, 未得入之。 且諸大臣亦未入。 而今將俱入耆社, 自古罕有之晠擧, 莫此爲勝。 是以文官年七十以上, 乃可入, 而其他諸大臣, 不能入之矣。" 上曰: "人是文官年七十, 階是正卿, 乃入而已。 有蔭武不與焉之例矣。"
- 【원본】 46책 4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책 246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