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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9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1901년 대한 광무(光武) 5년

천만리에 대한 시호 제수를 청하다

의관(議官) 이봉래(李鳳來) 등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명(明) 나라 수위사 겸 총독장(守衛使兼總督將) 천만리(千萬里)만력(萬曆) 임진년(1592)에 조병영양사(調兵領糧使)로서 철기(鐵騎) 2만 명과 아들 천상(千祥)을 거느리고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곽산(郭山)에서 첫 싸움을 하여 이긴 다음 평양(平壤)으로 진군하여 주둔하고 있는 적을 포위하였습니다. 제독이 천만리와 함께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했는데, 대포로 문짝을 부수고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가 승세(勝勢)를 타고 싸운 결과 1,280여 급(級)을 참획(斬獲)하였습니다. 계속 싸우면서 동래(東萊)에까지 이르는 동안 연전연승함으로써 적의 예봉을 꺾어놓았습니다.

정유년(1597)에는 또 중사마(中司馬)로서 와서 일본 군사와 직산(稷山)에서 싸웠는데, 매복하였다가 들이치자 적들은 풀대 쓰러지듯 하였으며 울산(蔚山)까지 도망치는 적을 승세를 타서 곧바로 무찔러 버리고 그 공로를 서생진(西生鎭)의 층암절벽에 새겼습니다. 명나라 군사가 돌아가게 되자 그대로 왕경(王京)에 머무르면서 금강산(金剛山)에 세 번 가보고 두류산(頭流山)에 두 번 올랐는데, 이르는 곳마다 시를 읊어 감회를 털어놓았습니다. 대체로 그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억누르고 이국 땅의 고신(孤臣)이 된 것은 명나라가 마지막 운수에 들어서고 중국이 오랑캐 땅으로 되리라는 것을 환히 알아서 후손들이 오랑캐 땅에 들어가지 않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선묘(宣廟)화산군(花山君)으로 봉하고 토지 30결을 주었으며, 숙묘(肅廟)대보단(大報壇)에 종향(從享)하도록 명하였고, 순묘(純廟)는 정해년(1827)에 신주(神主)를 부조(不祧)008) 하도록 하였습니다. 열성조(列聖朝)에서 예우(禮遇)한 은전(恩典)이 극진하였다고 이를 만하지만 아직 역명(易名 : 賜諡)의 은전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금년 봄에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 김영목(金永穆)이 시장(諡狀)을 장례원(掌禮院)에 올렸건만 방치하고 보고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조정의 흠전(欠典)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절혜(節惠)를 베풀어 풍속을 바로 세우고 공로를 장려하는 수단으로 삼으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소사(疏辭)를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 【원본】 45책 41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2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외교-일본(日本)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풍속-풍속(風俗)

  • [註 008]
    부조(不祧) : 나라에 큰 공훈(功勳)이 있는 자의 신주(神主)를 영구히 사당(祠堂)에 모셔 제사 지내게 하는 특전(特典).

議官李鳳來等疏略:

大明守衛使兼總督將千萬里, 萬曆壬辰, 以調兵領糧使, 率鐵騎二萬與其子, 從提督李如松渡江, 初戰郭山勝之, 進軍平壤, 圍住屯敵。 提督與萬里, 攻七星門, 用大砲, 撞碎門板, 整軍而入, 乘勝爭戰, 斬獲一千二百八十餘級。 轉鬪至東萊, 連捷挫銳。 丁酉又以中司馬來, 與兵, 戰于稷山, 伏兵擊之, 敵披靡而走, 至蔚山, 乘勝直擣而磔之。 勒功于西生鎭層巖巓。 及師還, 仍住王京, 三入金剛, 再陟頭流, 隨處感吟, 以寫其懷。 蓋其抑鄕國之戀, 作孤臣於殊方者, 的知朝末運, 中國變夷, 欲使遺裔不入於左袵之域也。 宣廟花山君, 賜復三十結, 肅廟命從享于大報壇, 純廟丁亥, 令立主不祧。 列聖朝禮遇之典, 可謂備盡, 而尙未蒙易名之恩。 今春, 弘文學士金永穆上諡狀於禮院, 寢而無聞, 此豈非朝家之欠典? 伏願特施節惠, 以爲樹風聲奬勳業之地。

批曰: "疏辭, 令政府稟處。"


  • 【원본】 45책 41권 5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225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군사-전쟁(戰爭)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기(軍器) / 외교-일본(日本)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인사-관리(管理) / 풍속-풍속(風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