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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9월 1일 양력 2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영빈에게 시호를 올리고 상호 도감을 설치하도록 하다

의정(議政),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예조 당상(禮曹堂上)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 궁내부 서리대신(宮內府署理大臣) 민영기(閔泳琦),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유승(李裕承), 겸장례(兼掌禮) 윤교영(尹喬榮)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궁(閟宮)을 추숭하는 예식은 지금 벌써 거행하였다. 묘호(廟號), 전호(殿號), 능호(陵號)를 이미 의논하여 정하였으니, 성대한 의식을 택일하여 곧 거행하라. 영빈(暎嬪)에게 칭호를 올리는 전례(典禮)도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이 문제를 의논하려고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백여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일을 이제 이미 거행하여 상하가 모두 경축하고 있으니,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선희궁(宣禧宮)에 시호(諡號)를 올리는 예도 즉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등록(謄錄)을 자세히 상고해 보니, 정빈(靖嬪) 연호궁(延祜宮)에게 시호를 올릴 때에도 시호를 의논하는 날에 입시(入侍)하여 의논해서 정하였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영빈에게 시호를 올리는 것은 도감(都監)을 설치하도록 조칙을 내리셨는데, 추숭도감(追崇都監)에 합쳐서 설치하여 거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의소 세손(懿昭世孫)과 군주(郡主)·현주(縣主)도 특별한 전례로 추봉(追封)하도록 하라. 양제(良娣)와 수칙(守則)도 일시에 봉작(封爵)해야 하는데, 귀인(貴人)과 빈(嬪)은 장차 어떻게 칭호해야 하겠는가? 반드시 등록을 자세히 상고해 보고 되도록 전례에 맞게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등록을 성상의 하교대로 자세히 상고해 보겠지만,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일은 끝내 신중하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명빈(明嬪) 때의 전례를 비서원 경(祕書院卿)이 혹시 자세히 상고해 보았다고 하던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상고해 본 것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숙종(肅宗) 때에 있었던 것인데 진종(眞宗)태묘(太廟)에 부향(祔享)할 때 함께 거행하였으니, 이번에도 이 규례대로 하라. 그 순서는 처음은 장종(莊宗), 다음은 정종(正宗), 다음은 영빈(暎嬪)으로 하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비록 동시에 합해서 거행한다고 하더라도 의식 절차에 있어서는 각각 거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례를 자세히 상고해보고 되도록 합당하게 해야 할 것이다. 경모궁(景慕宮)을 이안(移安)하기 전에 어진(御眞)을 먼저 이봉(移奉)해야 할 것이다."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10일에 임시로 이봉하고 망묘루(望廟樓)를 옮겨 지은 후에 봉안(奉安)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형세가 장차 그러할 것이다. 어진을 선희궁에 이봉한 후의 칭호는 ‘평락정(平樂亭)’이라고 하며 이봉할 때의 길은 정문(正門)으로 하도록 하라."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지당합니다. 어진을 이봉한 후에는 입직관(入直官)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래야 할 것 같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선희궁 묘소에는 정자각(丁字閣)이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전에는 없었으나 지금 새로 건설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날씨가 점점 차가워지니, 정자각 공사는 정말 시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응당 속히 건설해야 할 것이다. 소녕원(昭寧園)·휘경원(徽慶園)의 규례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현륭원(顯隆園)의 석의(石儀)는 지금 고쳐서 수리해야 되는데, 이것은 정묘조(正廟朝) 때 정성을 다하여 갖추어 놓은 것이어서 이제 고쳐 수리하는 것이 옛날보다 못할 것 같아 매우 송구스럽고 민망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원소(園所)에는 돌로 만든 양·말·범이 으레 한 쌍이고 능소(陵所)에는 두 쌍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새로 한 쌍을 만들어 석의를 갖추도록 하라."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지금 만약 한 쌍을 새로 만든다면 반드시 두 가지 색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럴 듯하다. 선희궁의 묘비(墓碑)도 고쳐 세워야 되겠으나 영조(英祖)의 어필(御筆)을 갈아버리고 고치는 것은 곤란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정말 그렇습니다. 또한 공사가 매우 방대하여 몹시 걱정됩니다. 석물(石物)은 더 설치하는 규례가 없으니, 이는 품정(稟定)하여 처분해야 할 것입니다. 도감에서 주본(奏本)을 올려 봉심(奉審)한 후에야 제기(祭器) 등의 의절도 모두 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묘조에 존호를 받지 않은 데에서 성상의 뜻을 우러러 헤아릴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이 여덟 글자를 더 올리는 것은 비록 훌륭한 덕의 만 분의 일도 찬양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아랫사람의 심정으로는 역시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백여 년 동안 미처 하지 못한 전례를 이제 비로소 추숭(追崇)하고 추상(追上)하게 되었으니, 저 어두컴컴한 세상에서 오르내리는 선왕(先王)의 신령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므로 진실로 더없이 칭송하게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묘조 당시에 마음을 썩이고 정성을 기울인 것이 이와 같은 데에서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현륭원의 지문(誌文)과 《한중만록(閒中漫錄)》에는 모두 깊은 뜻이 있는 것인데, 백여 년간 미처 하지 못한 일은 마치 오늘날을 기다린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조의 유교(遺敎) 가운데 갑자년(1804)을 기다린다는 어구가 있었는데, 갑자년은 곧 순조(純祖)의 나이가 15살 되던 해이다."

하였다. 윤용선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의 사적을 상고해 보니 임성(任珹)윤숙(尹塾)이 수립한 바가 뛰어났었다. 그런데 조중회(趙重晦)는 어째서 홀로 시호가 없는가?"

하니, 윤용선이 아뢰기를,

"조중희의 정성과 충성도 말할 만한 것이 있는데 시호가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신이 미처 자세히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민영기가 아뢰기를,

"비궁에 대한 성대한 의식은 이미 거행하였습니다. 왕후(王后)의 부모에 대해서도 봉작하는 규례가 있으니, 고(故) 상신(相臣) 홍봉한(洪鳳漢)부원군(府院君)으로 봉하고 그 부인은 부부인(府夫人)으로 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43책 39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1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전사(前史)

引見議政、宮內大臣及禮堂 【議政尹容善、宮內府署理大臣閔泳琦、掌禮卿李裕承、兼掌禮尹喬榮】 。 上曰: "閟宮追崇之禮, 今已行之。 廟、殿、陵號, 已爲議定, 縟儀誕擧, 擇日卽行矣。 暎嬪上號之典, 亦不可無, 故欲議此事也。 卿等之見何如?" 容善曰: "百餘年未遑之事, 今已行之, 上下慶祝, 無容仰達, 而宣禧宮上諡之禮, 亦當卽行矣。" 上曰: "昭考謄錄, 則在靖嬪延祜宮上諡時, 亦以議號之日, 入侍議定矣。" 容善曰: "暎嬪上諡, 設都監事, 勅下矣。 追崇都監, 合設擧行何如?" 允之。 仍敎曰: "懿昭世孫及郡、縣主, 亦以殊典追封可也。 良娣、守則, 亦當一時封爵, 而貴人若嬪, 將何以稱之? 須詳考謄錄, 務合典禮也。" 容善曰: "謄錄謹依聖敎, 當詳考, 而世子冊封事, 終涉難愼矣。" 上曰: "明嬪時典禮, 祕書卿, 間或詳考云耶?" 容善曰: "無所可考云矣。" 上曰: "此是肅宗朝時, 而眞宗太廟時, 一同爲之。 今, 亦依此例爲之。 其序次則先莊宗正宗暎嬪可也。" 容善曰: "雖合行於一時, 至於儀節, 各其行之, 恐好矣。" 上曰: "昭考典禮, 務要正當也。 景慕宮移安前, 御眞當先爲移奉矣。" 容善曰: "初十日當權次移奉, 而移建望廟褸後, 可以奉安矣。" 上曰: "勢將然矣, 而御眞移奉于宣禧宮後, 稱號以‘平樂亭’爲之, 移奉時門路, 以正門爲之可也。" 容善曰: "聖敎至當, 而御眞移奉後, 當有入直官矣。" 上曰: "似然矣。" 容善曰: "宣禧宮墓所, 有丁字閣乎?" 上曰: "曾前則無, 今當新建矣。" 容善曰: "日氣漸涼, 丁字閣役事, 正爲時急矣。" 上曰: "固當斯速擧行, 而依昭寧園徽慶園例爲之, 可也。 顯隆園石儀, 今當改修, 而此是正廟朝殫誠備儀, 則今此改修, 似不若昔時, 甚爲悚閟也。" 容善曰: "園所則羊馬石、虎石, 例是一雙, 陵所則二雙矣。" 上曰: "然則新造一雙, 以備儀可也。" 容善曰: "今若新造一雙, 則必爲二色矣。" 上曰: "似然矣。 宣禧墓碑, 亦當改竪, 而英廟御筆, 難爲磨改也。" 容善曰: "誠然矣。 且役事甚張大, 極爲悶慮矣。 石物則無加設之例, 此則當稟定處分, 自都監奏本奉審後, 祭器等節, 皆可稟定矣。" 上曰: "正廟朝不受尊號, 可以仰揣聖意, 而今此八字加上, 雖不足以揄揚聖德之萬一, 在下情, 亦爲慶幸也。" 容善曰: "百餘年未遑之典, 今始追崇追上, 冥冥之中, 庶慰先王陟降之靈, 誠萬萬欽誦矣。" 上曰: "正廟朝當日苦心血誠, 似不外乎如是矣。" 容善曰: "顯隆園誌文及《閒中漫錄》, 皆有精義存焉, 而百餘年未遑, 似有待於今日矣。" 上曰: "正廟遺敎中, 有待甲子之句語, 甲子卽純祖寶齡十五歲之年矣。" 容善曰: "然矣。" 上曰: "考見其時事蹟, 則任珹尹塾所樹立卓然, 而趙重晦何獨無諡乎?" 容善曰: "趙重晦誠忠, 亦可有辭, 而無諡之由, 臣未能詳揣矣。" 泳琦曰: "閟宮縟儀已擧矣。 王后父母, 有封爵之例, 故相臣洪鳳漢封府院君, 其夫人封府夫人何如?" 允之。


  • 【원본】 43책 39권 61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16면
  • 【분류】
    왕실-사급(賜給)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