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고종실록39권, 고종 36년 5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1899년 대한 광무(光武) 3년

봉심하고 온 궁내부 대신 이재순을 소견하다

봉심(奉審)하고 온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을 소견(召見)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신이 명을 받들고 전주(全州)에 있는 조경묘(肇慶廟)경기전(慶基殿)에 달려가 봉심하고, 이어 조경단(肇慶壇)에 나아가 단소(壇所)를 봉심하였는데 공사는 한창 진행되고 있으며 단(壇) 터를 수축하고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열성조(列聖朝)께서 미처 하지 못하신 일인데, 공사가 그렇게 빨리 진척되고 있으니 매우 다행이다. 봉역(封域)은 어떻게 하였는가?"

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신이 상지관(相地官)과 함께 주룡(主龍)을 타고 아래로 내려오니, 모래 언덕이 조금 높고 산세가 껴안는 듯한 형상이었으며, 아래에는 사초(莎草)가 비단을 펼쳐놓은 듯한 곳이 있었는데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곳이 바로 묘소의 터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목조 대왕(穆祖大王)의 유적은 상고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태조 대왕(太祖大王)운봉(雲峰)으로 개선할 때의 기적비(記蹟碑)는 있을 듯하다."

하였다. 이재순이 아뢰기를,

"자만동(滋滿洞)발이산(發李山) 오목대(梧木臺) 곁에 있는데, 여기가 바로 목조가 사셨던 곳입니다. 오목대에는 일찍이 사적을 기록한 돌 한 조각이 있었는데 동학(東學)의 변란 때 유실되어 지금은 상고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완산(完山)에도 기적비가 없다고 하니, 이번에는 기적비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완산은 곧 명산(名山)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그곳에 입장(入葬)을 하면 그때마다 가뭄이 들어 고을 안의 마시는 우물이 말라버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 백성들이 그런 징후가 있으면 무덤을 찾아내서 파버렸으므로 누구도 감히 속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기적비를 세우는 일은 오직 성상의 재가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완산건지산(乾止山)은 고을의 어느 쪽에 있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완산은 고을 남쪽에 있고 건지산은 고을 서쪽에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삼한(三韓) 때의 호적(戶籍)이 전해오는 것이 있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신도 생각이 있어서 문헌을 널리 찾아보았는데, 세대가 바뀐 지 오래되어 끝내 상고할 수 없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단소에서 완산까지의 거리는 얼마나 되며, 종성(宗姓) 사람 중에 이곳에 사는 자는 모두 몇 집이나 되는가?"

하니, 이재순이 아뢰기를,

"단(壇)에서 완산까지의 거리는 10리에 지나지 않으며, 종성인 사람은 많게는 1,000명이나 됩니다. 단 아래에 하나의 못이 있으며 못가에는 옛날의 정자 터가 있는데, 종성 사람들이 전에는 해마다 한 번씩 단소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므로 백성들이 추모의 정을 펼 길이 없어서, 정자를 짓고 못을 잘 소통시켜 못 속에 자라는 연밥을 따서 장차 변변치 않은 정성이나마 바치려고 재물을 모아 공사를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과 본 고을의 관원 또한 각각 20원(元)씩을 내서 보조해 주었습니다."

하였다.


  • 【원본】 43책 3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0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호구-호적(戶籍)

    二十七日。 召見奉審宮內大臣李載純載純曰: "臣承命馳詣全州 肇慶廟慶基殿奉審, 仍詣肇慶壇壇所奉審, 而工役方張, 修築壇基矣。" 上曰: "此是列聖朝未遑之事, 而工役若速就則萬幸也? 封域何以爲之也。" 載純曰: "臣與相地官, 自主龍而下, 則沙岡稍高, 山勢擁抱, 下有莎草如錦鋪處, 傳言此是墓所墓墟矣。" 上曰: "穆祖大王遺蹟, 或無可考, 而太祖大王 雲峰凱還時, 似有記蹟碑也。" 載純曰: "滋滿洞在於發李山 梧木臺傍, 而卽穆祖潛邸地也。 梧木臺曾有一片石記蹟, 而遺失於東擾, 今不可考矣。" 上曰: "完山亦無記碑云, 今番則不可無竪記也。" 載純曰: "完山卽名山也。 若有民人等入葬者, 輒天旱, 府中食井渴涸, 故居民有驗覓掘, 無或敢罔云。 至於竪碑事, 惟在聖裁矣。" 上曰: "完山乾止山, 在府之何方乎?" 載純曰: "完山在府南, 乾止山在府西矣。" 上曰: "三韓時戶籍, 有所傳來耶?" 載純曰: "臣亦有意博採文獻, 而世代浸遠, 終無可徵矣。" 上曰: "壇所距完山幾許, 而宗姓人居者凡幾家也?" 載純曰: "自壇距完山不過十里, 而宗姓人多至近千人矣。 壇下有一池, 池邊古有亭墟, 而宗姓人前者, 行歲一祀於壇所矣。 今則自國家享祀, 則下情無以追伸, 謀欲築亭疏池, 採池中蓮實, 將以倣獻芹之忱, 而鳩財營始云。 故臣與本官, 各出二十元補助矣。"


    • 【원본】 43책 39권 29장 B면【국편영인본】 3책 100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호구-호적(戶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