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익현이 시행해야 할 사항을 갖추어 상소를 올리다
찬정(贊政)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10여 가지 조항을 갖추어 어람(御覽)하시도록 하니, 성명(聖明)께서는 헤아려 살피소서.
첫째, 경연(經筵)을 열어 성상의 학문을 도우소서. 신은 지난번 상소에서 이미 성상의 한 마음은 나라의 흥망성쇠의 근본이 되니 그것을 먼저 바로잡을 것을 청하였습니다. 또한 글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마음을 바로잡는 근본이 된다고 하여 《대학(大學)》과 《논어(論語)》를 강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우원하다고 신을 비웃을 것입니다. 그러나 옛날 제왕들이 치세(治世)를 이룩할 수 있었던 요점을 찾는다면 아마 이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말은 모두 주자(朱子)의 행궁 주차(行宮奏箚) 속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만약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들어와 강론하며 자세히 아뢰도록 한다면 그 요령을 터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 음식을 삼가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공자(公子)께서는 시장에서 사온 술과 말린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계강자(季康子)가 약을 드렸을 때에도 그 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감히 먹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대저 공자께서 어찌 시장 사람들의 음식은 사람에게 반드시 해롭고, 계강자가 주는 약은 반드시 몸에 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셨겠습니까? 그러나 공자께서 오히려 신중한 태도를 취했던 것은 먹고 살 걱정 때문에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경계를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지금 외국에서 만들어진 음식은 비록 산해진미(山海珍味)라고 하더라도 늘 올리던 물건이 아닌 만큼 맛은 이미 온전하지 않으며 또한 생산지도 같지 않아 위가 손상을 받게 됩니다. 성인의 일로 본다면 이 어찌 한 젓가락이라도 댈 수 있겠습니까? 이 뿐만이 아니라 근일에 김홍륙(金鴻陸)이 일으킨 변을 놓고 보더라도 저 도망가서 숨어있는 역적이 김홍륙 한 사람에 그치지 않습니다. 만의 하나 감히 역적의 마음을 품고서 잇따라 그 남은 음모를 행한다면 성상께서는 장차 어떻게 그것을 살피시겠습니까? 선왕(先王)들의 법을 보면 무릇 외부로부터 오는 음식물은 모두 임금에게 직접 올리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화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부터 무릇 음식물과 다과 중 외국으로부터 온 것은 일체 폐하께 올리지 못하게 하여 성상의 옥체를 보호하게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셋째, 사사로이 폐하를 만나는 자들을 물리치시어 궁궐 안의 출입에 대한 단속을 엄숙하게 하소서.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선왕의 제도에서는 비록 종척이나 가까운 신하라 하더라도 승정원(承政院)을 거치지 않고는 들어가 뵐 수 없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들어가 뵐 경우에는 사관(史官)과 간관(諫官)이 따라 들어가 상하 간의 언행을 모두 기록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군신 간에는 일절 사사로운 말이 없었고 공적인 원칙이 작용하여 조정의 체모가 높았습니다. 그런데 후세에는 사사로이 임금을 뵙는 사례가 점점 많아져서 사관이 따르지 않고 간관이 들어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청탁하는 것이 풍조가 되고 뇌물이 권력을 잡는 수단이 되었으며, 무당, 점쟁이, 지관(地官)의 무리들도 모두 들어와 입시한다는 말을 하고 둔전(屯田)과 우세(牛稅)를 감독하는 무리들까지도 모두 폐하의 조칙(詔勅)을 전합니다. 폐하의 위엄을 떨어뜨리고 국가의 체모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이보다 더 심한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심지어는 나라에 큰 일이 있어도 대신이 모르며 의정부(議政府)에서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 어찌 이웃 나라에 이런 소문이 들어가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일체 들어와 성상을 뵙는 사람들은 반드시 승정원을 거쳐서 알리도록 하며, 사관과 간관들로 하여금 그 뒤를 따르게 하여 진달하는 것이 원칙에 어긋나는 경우에는 간관이 반드시 탄핵하여 물리치며, 조칙이 의리에 합당치 않을 경우에는 승정원에서 다시 반대 의견을 올리도록 하여 간사한 소인이나 무뢰배들이 잡다하게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넷째, 인재를 가려서 등용하여 조정을 바로잡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임금이란 모두 치세(治世)를 좋아하고 난세(亂世)를 싫어하며 복리(福利)를 즐기고 화해(禍害)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쓰는 데서는 또한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가까이하며, 충직한 신하를 싫어하고 아첨하는 자를 좋아하니, 이 어찌 다른 까닭이 있겠습니까? 군자는 단지 나라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신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임금의 뜻을 거스르는 경우가 많고, 소인은 나라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단지 자기 자신이 있다는 것만 알기 때문에 임금의 뜻을 따르기에 힘씁니다. 명철한 임금은 언제나 살피고 판단해서 말이 거슬리면 그것이 도리에 맞는가를 반드시 따져 보며, 말이 순하면 그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가를 따져서 군자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는 항상 잘 다스려졌습니다. 어리석은 임금은 이와는 반대였으니 나라는 늘 어지러움을 면하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 기미를 살피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상께서 즉위하신 뒤로 모든 신하들을 차례로 꼽아볼 때 숨김없이 바른 말을 하여 임금을 도에 맞도록 이끈 사람은 누구이고, 성상의 뜻에 영합하여 지시를 다르기만 한 사람은 누구이며, 세금을 가혹하게 징수하여 무수히 갖다 바친 사람은 누구입니까? 신이 지금 군자는 누구이고 소인은 누구라고 감히 지적할 수는 없으나, 성상께서 또한 신의 말을 가지고 시험 삼아 가려보신다면 곧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대신 이하로 하여금 폐하의 잘못을 숨김없이 아뢰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한 충성스럽고 바르며 행실이 좋은 사람을 추천하도록 해서 진실로 나라를 돕고 백성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사람일 경우에는 모두 위에 보고하게 하소서. 또한 관찰사(觀察使)에게 신칙하여, 유생 중에서 재주와 덕, 학식이 있는 사람을 살펴서 추천하기를 마치 한(漢) 나라의 ‘효렴법(孝廉法)’과 같이 하도록 해서 등용함으로써 조정에는 바른 선비들이 많도록 하고 재야에는 버려진 인재가 없도록 한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다섯째, 백관(百官)을 감독하여 실질적인 일에 힘쓰도록 하소서.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지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선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왕들께서는 관직을 정하고 직임을 나누어 여러 가지 일을 다스려 나갈 때 각각 그 재주의 능한 바를 보아서 임명하였고 그 재주가 능하지 못한 것을 억지로 맡기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반드시 관직을 오래도록 맡겨서 일을 잘못한 사람은 내쫓고 잘한 사람은 승진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사람이 능한가 능하지 못한가는 살피지 않고 그 직임에 있은 지 오래되었는가 오래되지 않았는가는 묻지 않고서, 아침에 임명하였다가 저녁에는 교체하며 저 사람에게서 빼앗아 이 사람에게 줍니다. 그러므로 관리로 있는 자들도 관직을 잠시 머무는 여관집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탁지부(度支部)의 관원으로 있으면서 전곡(錢穀)이 출납되는 수량을 전혀 모르며, 법관(法官)된 자는 법률 조항을 살피지 않고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면서 구차하게 녹봉만 축내고 있습니다. 누군가 사무에 대해 묻기라도 하면 ‘나는 모른다.’고 대답하고, 또다시 따지기라도 하면 ‘나는 곧 체차될 것이다.’라고 합니다. 체차되어 가는 사람도 이와 같고 부임하여 오는 사람 역시 이와 같으니, 아! 이렇게 해서야 과연 그 직무가 잘 수행되고 정사가 잘 다스려질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옛날에 3년마다 성적을 고과(考課)하던 법을 시행하여 능하고 능하지 못한가를 전최(殿最)하고, 오랫동안 직임을 맡겨 성과를 거두도록 책임지우소서. 만일 쓸데없는 관리가 녹(祿)을 낭비하면서 실제 일에 보탬을 주지 못하는 자와 편안히 놀면서 세월을 보내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내쫓음으로써 정사의 기강을 진작시킨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여섯째, 법률(法律)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우소서. 신이 삼가 생각건대, 나라에 형률이 있는 것은 교화를 돕고 백성들이 규정대로 행동하도록 하자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법이 너무 너그러우면 백성들은 우습게 여겨 거행하지 않으며,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은 원망하면서 손발을 놀릴 수가 없습니다. 오직 너그럽고 엄격하며 강하고 부드러운 중간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야 은혜와 위엄이 병행되어 백성들이 시달리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요즘의 신법(新法)이 어떤가에 대해서는 모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데 형벌을 적용하지 않고 경한 죄와 중한 죄를 똑같이 처벌하는 것은 난을 초래하는 지름길입니다.
박영효(朴泳孝), 서광범(徐光範), 서재필(徐載弼)은 갑신년(1884)에 도망간 역적들로서 다시 나라에 돌아왔건만 정형(正刑)에 처하지 못했으며, 김윤식(金允植)은 을미년(1895) 국모 시해 사건에 관계된 역적인데 3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찬배(竄配)의 형전을 시행하였습니다.
안경수(安駉壽)는 갑오년(1894)에 변란을 일으킨 우두머리이고 또 나라의 근본을 뒤흔들어 놓으려는 불측한 마음을 품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大逆)으로 논죄해야 하는데도 단지 난을 일으키려고 꾀하였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나마 또한 도망쳐서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단지 그 패거리들만 잠깐 찬배하였으니 이것은 죄가 있는데도 형벌을 적용하지 않은 사례 중 큰 것입니다.
이유인(李裕寅)은 폐하의 조칙을 위조하였고 역적인 김홍륙은 폐하의 옥체를 해치려고 꾀한 만큼, 그 죄의 경중이 현격하게 다릅니다. 그런데 똑같은 형률을 적용하여 교수형에 처하기로 하였다가, 끝내 이유인은 사형에서 감면하고 역적인 김홍륙에게는 형률을 적용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는 죄의 경중에 따라 형률을 잘못 시행한 사례 중 큰 것입니다.
대개 형벌의 경중은 그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서 논할 뿐이며, 좋아하고 미워하는 데 의하여 형벌이 높아지고 낮아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黥), 의(劓), 비(剕), 궁(宮)은 죽이지 않는 형벌로서 경중이 있으며, 사사(賜死), 교수(絞首), 효수(梟首), 요참(腰斬), 거열(車裂), 노륙(孥戮)은 죽이는 형벌로서 역시 경중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형률은 그렇지 아니하여, 죄가 큰가 작은가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일체 다 교수형에 처하여 더 가감이 없으며, 도(盜), 음(淫), 살인(殺人), 모반(謀叛), 시역(弑逆)을 뒤섞어서 동일한 죄안으로 처리하고 더는 차등이 없습니다. 어찌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를 일반 백성들이 서로 죽인 것과 같이 보는 것을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죄인의 처자를 죽이지 않는 것은 진실로 문왕(文王)의 선정(善政)이지만, 역시 극악무도한 죄인을 다스리는 방법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상서(尙書)》에 이르기를, ‘너의 처자까지 죽이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이 새 도읍에 후손을 퍼뜨리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모조리 죽여 없애서 남은 후손이 없도록 하겠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난번 역적 김홍륙을 의율(擬律)할 때에 듣자니, 두세 명의 신료들이 상소를 올려 형(刑)을 가하자고 청한 것은 바로 죄의 경중에 따라 형벌의 대소를 적용하자고 하는 논의에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민당(民黨)’에 의해 저지되었다고 하니, 신은 실로 통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만일 이와 같이 한다면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을 징계할 수 없을 것이며, 간사하고 충성스럽지 못한 무리들이 연이어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니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며, 또한 어떻게 천만 가지로 각이한 백성들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율문(律文)을 거듭 밝히고 과조(科條)를 엄격히 세워 무릇 악역(惡逆)과 대고(大故)에 관계되는 사람들은 모두 옛 법대로 처리하여, 참수(斬首)해야 할 자는 참수하고 노륙(孥戮)해야 할 자는 노륙함으로써 기강을 한결같이 하고 미련한 자들을 격려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일곱째, ‘민당’을 혁파하여 변란의 발판을 막으소서. 신은 삼가 생각건대, 옛날에는 비방하는 것을 써놓는 나무와 진언(進言)할 때 치는 북이 있었으며, 본조(本朝)에 이르러서도 또한 유생들이 대궐문에 엎드리고 성균관(成均館) 유생들이 시위(示威)의 표시로 성균관을 비우고 나가버린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백성들로 하여금 말을 하지 못하게 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두 한계가 있고 절제가 있어서, 차라리 정사에 대해 비방은 할지언정 대신을 협박해서 내쫓는 일은 없었으며, 차라리 소장을 올려 호소는 했을지언정 임금을 위협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오늘 이른바 ‘민당’이라는 것은 시정(市井)의 무식한 무리들을 불러 모은 것으로서, 구차하게 패거리를 규합하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는 명분을 빌려서 대신(大臣)들을 멋대로 명하여 오라 가라 하고 임금을 지적하여 탓하며 나라의 정승을 능욕하였습니다. 밤낮으로 저들끼리 결탁하여 고함을 지르며 위엄을 보이고 생색을 내는 것이 굉장하여 그 기세가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이로부터 정사에 관한 권한과 권세가 모두 백성들에게 옮겨가 앞으로 조정에서는 한 마디의 말과 한 가지의 일도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가의(賈誼)가 말한 바, ‘발이 도리어 위에 있고 머리가 도리어 아래에 있다.’고 한 것과 불행하게도 비슷합니다. 이와 같은데도 금지하지 않는다면 나라에 어찌 법과 기강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외국에는 이른바 자유 의원(自由議員)과 민권(民權)을 주장하는 당(黨)이 있고, 심지어는 직접 선거하는 민주(民主)의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오늘 이 무리들이 이미 대신을 협박해서 쫓아낸 것이 여러 번 되는 만큼, 비록 여기서 한층 더한 일인들 또한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설령 이 무리들이 진심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도리를 놓고 생각해볼 때, 그런 징조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듣건대, 성상께서 분발하시고 큰 결단을 내리시어 모두 제거하신다고 하니, 진실로 더할 나위 없는 다행입니다. 그러나 그 뒤를 잘 처리하지 못하여 여러 사람의 마음을 복종시키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덕음(德音)을 내리시어 허물을 자신에게서 찾고 지극한 정성과 측은한 마음으로 충분히 생각을 고칠 뜻을 보이시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친구 간에 신임하며 임금을 공경하고 윗사람을 친근하게 대하는 도리로써 깨우쳐 그들을 감복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런 후에 더욱 심한 자 몇 사람을 다스리고 나머지는 법사(法司)로 하여금 해산시켜 보내도록 하며, 서둘러 정사와 형벌을 밝히고 교화를 힘껏 시행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임금이 과연 우리를 속이지 않고 진실한 마음과 실질적인 정사로 시종여일하는구나.’라고 분명히 알게 한다면, 무엇 때문에 백성들이 안정되지 않을까 근심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함께 불복하는 마음을 품고서 도리어 윗사람을 원망하는 뜻을 쌓게 될 것입니다. 갑자기 그들을 꺾자고 한다면 화(禍)의 기미를 촉발하게 되고 내버려둔 채 따지지 않고자 한다면 교만이 자라날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모두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말하기를, ‘백성은 물과 같고 임금은 배와 같으니,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으며, 또한 배를 뒤집어엎을 수도 있다.’고 하였으니, 이 말은 매우 절절하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이것을 보고서 속히 도모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여덟째, 기복(起復)을 금지하여 풍속을 바로잡으소서. 신은 생각건대, 주(周) 나라 시(詩)에 이르기를,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그 은혜를 갚고자 하나 드넓은 하늘처럼 끝이 없어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자식의 삶은 부모의 막대한 은혜를 받았기에 비록 살아계실 때 날마다 세 가지 고기반찬으로 봉양하고 돌아가신 뒤 종신토록 상복을 입는다 해도 오히려 그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선왕의 제도에서 거상 기간을 3년으로 정하고 그 기간이 지나면 상복을 벗도록 한 것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대체로 슬퍼하는 마음은 한량이 없지만 기한을 정하여 절제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은 오래 머물러 있게 할 수 없고 선왕들이 제정한 법은 감히 그 한도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효자들의 애통한 심정은 끝이 없으며 비록 많은 녹봉을 받는 경상(卿相)들도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지 구차하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이자는 것은 아닙니다.
신은 들으니, 요즘 관청에서 이른바 복기(復期)라는 것이 있어서 부모의 상사를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상복을 벗어버리고 버젓이 벼슬에 나오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다고 합니다. 인심이 잘못에 빠지는 것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입니까?
나라에 큰 일이 있어서 부득이 기복하더라도 군자는 오히려 그르다고 여기는데,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무리들도 부모의 사랑을 받기는 받았습니까?
옛날에는 거상(居喪) 중에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자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진실로 풍속에 손상을 준다고 하여 나라의 먼 끝 변방으로 내쫓아서 중국을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청하였는데, 만일 애초에 거상하지 않은 사람을 본다면 다시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아! 이렇게 사학(邪學)이 충만한 때를 당해서는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떳떳한 윤리를 두터이 하고 예의를 밝혀서 백성들을 이끌더라도 오히려 교화를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더구나 인륜을 무시하고 오상(五常)을 해치는 법을 만들어 오랑캐와 금수의 지경에 스스로 달려 나가는 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무릇 중앙과 지방의 관리로서 기복하여 벼슬에 나오는 자들은 모두 내쫓고 복기의 규례를 영원히 혁파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아홉째, 쓸데없는 낭비를 절약함으로써 국가의 재용을 넉넉하게 하소서. 신은 생각건대, 국가에 있어서 재용은 사람에게 혈기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혈기가 다 마르면 사람이 죽고 재용이 떨어지면 나라가 피폐해지는 것은 불변의 이치입니다.
우리나라의 재정은 오직 부세(賦稅)뿐인데, 부세는 모두 농민들에게서 나옵니다. 대저 농민들은 일년 내내 부지런히 일하지만 두서너 식구의 일년 분 식량도 대줄 수가 없는데 그나마 그 절반을 팔아서 부세로 바칩니다. 진실로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생각한다면 비록 한 알의 낟알과 한 푼의 돈이라도 어찌 절약하지 않고 남용할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요즘 탁지부(度支部)에 쌓아놓은 것이 늘 부족하여 심지어는 외국에서 차관(借款)까지 한다고 합니다. 대저 올해에 부족해서 차관을 도입하면 내년에 또다시 부족해서 차관을 도입하게 되어, 차관을 미처 갚기도 전에 나라의 재용은 오히려 쪼들려서 마침내는 땅을 떼어주게 될 것이고, 땅을 떼어주고도 부족하면 또 다시 나라를 통째로 줄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급하지 않은 공사는 중지하고, 공로가 없는 상(賞)은 주지 말며, 사치한 마음을 제거하고, 기호품을 끊으며, 경상 지출 이외에는 털끝만큼도 들여가지 말게 하며, 나라의 창고를 개인의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째, 군법(軍法)을 바로 세워 군사와 관련한 준비를 철저하게 하소서. 신이 가만히 생각건대, 나라에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는데 우리나라에는 군사가 없으며, 군사는 장차 쓰려고 해서인데 우리나라 군사는 쓸모가 없습니다.
대개 군사들은 병영(兵營)에서는 장수를 위해서 죽고 싸움터에 나가서는 적들과 싸우다 죽는 것이 그들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군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두 친위대(親衛隊), 시위대(侍衛隊)라는 명칭을 달았으며 임금으로부터 세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원수(都元帥), 원수(元帥)라는 칭호가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군사들은 모두 거만해져서 자기의 장수를 보며 말하기를, ‘저 역시 대장이 아니다.’라고 하고, 죄가 있어서 태형(笞刑)을 치면 반드시 말하기를 ‘나의 몸에는 ‘친(親)’자와 ‘시(侍)’자가 있는데 어째서 감히 나에게 태형을 치는가?’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자들이 장수에게 목숨을 맡기겠습니까? 장수에게 목숨을 맡기려고 하지 않는 자가 적들과 싸우다 죽을 수 있겠습니까?
반드시 상과 벌을 명백히 하고 은혜와 위엄을 병행해서, 팔이 손가락을 부리듯 하고 입이 혀를 놀리는 것과 같이 해야만 비로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옛날의 5영(營)과 절도사(節度使)를 두던 제도를 회복하고 친위대와 시위대, 원수의 명칭을 없애어 장수들로 하여금 그 군사를 거느리도록 하고, 그들에게 생살(生殺)의 권한을 부여하며 무예를 가르치고 충성과 의리를 권장하여 위급할 때 쓰도록 한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한째, 원수와 역적을 토죄하여 대의(大義)를 밝히소서.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임금과 아버지의 원수는 만세의 신하들과 자식들이 꼭 갚아야 하며 잊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춘추(春秋)》의 법에는 임금을 시해한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장사 지냈다고 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원수를 갚는 대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장사를 지내는 상례(常禮)를 가볍게 여겨 만세의 신하와 자식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한 후에야 그 임금과 부모를 장사 지낸다는 것을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을 지극히 후하게 하더라도 실은 시체를 구덩이에 내버려 여우와 승냥이가 파먹게 하고 파리와 구더기가 그것을 빨아 먹도록 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아! 신은 일찍이 이것을 읽으면서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신하들의 죄는 너무나 커서 천지에 용납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을미년(1895) 8월의 변고는 그 원통함이 어떠했고 또한 뼈에 사무친 깊은 원수가 어떠했습니까? 그러나 3년이 되도록 원수를 갚기 위해 하나의 계책을 실시하고 하나의 조치를 취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부자간의 윤리와 군신간의 의리가 이로부터 영원히 땅바닥에 떨어지게 되어 사람은 짐승과 다름없게 되었고 살아 있는 것이 빨리 죽는 것만 못하게 되었다고 봅니다. 평범한 사람인 경우에도 다른 사람의 손에 죽게 되면 그 자식들은 모두 그 원수를 갚으려고 생각하는데, 하물며 우리나라 500년간의 선왕의 종부(宗婦)이시고 삼천리강토 백성들의 자애로운 어머니로서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하였는데도, 평범한 사람들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과 같이 하지도 못한단 말입니까?
현재 사형을 당한 자는 겨우 김홍집(金弘集)과 정병하(鄭秉夏) 두 역적뿐인데 아직도 소급하여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장박(張博), 우범선(禹範善)의 무리들은 비록 도망쳐서 잡지는 못하였지만 오히려 그 부형과 처자가 있는데, 이에 한결같이 역적들의 가족을 연좌시키지 않는 법을 준수하여 곡진히 보호하고 보전하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김윤식(金允植)은 역적의 우두머리인데도 능지처참(凌遲處斬)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께서는 슬픈 생각을 거두지 못하여 상식(上食)하는 시기가 지났는데도 차마 그만두지 못하고, 능의 의장도 옛날에 비해 더욱 성대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끝없이 극악한 원수에 대해서는 이미 털끝만치도 복수를 하지 못하였으니, 주자의 말에 입각해 볼 때 이 허례허식(虛禮虛飾)은 이웃 나라의 웃음을 자아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또한 하늘에 계신 왕후의 혼령도 필시 이런 허례를 가지고는 그 원한의 마음을 조금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찌 한 가지 정사라도 부지런히 하고 한 가지 은혜라도 베풀어서 백성들과 함께 마음을 가다듬고, 차라리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어도 원수를 갚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으며 차라리 자신이 망하는 한이 있어도 원수를 갚지 못하면 살지 않는 것을 업으로 삼는 것보다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나라의 큰 원수를 잊어버리고서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정사가 안 되고 백성들이 흩어져도 구원할 줄을 모르며, 외부의 우환은 이루 헤아릴 수 없고 내란도 날로 심해 가건만 태연이 일이 없는 듯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은 차라리 죽어버리고 모든 것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은 또 할 말이 있습니다. 을미년(1895)에 동쪽과 남쪽에서 일어난 백성들로 조직된 군사를 당시 비도(匪徒)라고 말하였습니다. 삼가 《춘추》의 의리를 생각건대, 난신적자는 누구나 토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 책의(翟義)가 왕망(王莽)을 죽이고 관동에서 동탁(蕫卓)을 죽었습니다. 그래서 《강목(綱目)》에는 모두 대서특필하여 알렸는데 이 뜻을 헤아려 추구한 것입니다.
나라에 난신적자가 있는데도 대군(大君)이 죽이지 못하고 관찰사(觀察使)가 죽이지 못할 경우에는 벼슬이 없는 미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또한 죽이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지금 역적이 조정을 세력의 기반으로 삼고 있어 성상의 옥체 또한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그러니 더구나 무슨 겨를에 복수하는 거사를 벌이겠으며, 관찰사는 모두 역적의 앞잡이가 되어 물건을 바치기에 여념이 없는데 하물며 기꺼이 복수할 마음이 있겠습니까?
다행히 하늘의 이치와 백성들의 양심이 전부 땅바닥에 떨어지지는 않아서 동쪽과 남쪽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또한 한두 명의 관리들이 그 사이에서 일어나 성상의 권위가 다시 빛나도록 하였고 후세 사람들이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도리를 알도록 하였습니다.
아! 천지가 어둡고 막힌 이때 만약 이들의 호령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천하에 대고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단지 미천한 무리들의 침략을 보고서 마침내 비도라고 하면서 전혀 분별하지 않으니, 이것을 통해서 또다시 사람들의 마음이 심하게 거칠어졌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성상께서 근심스러이 홀로 생각하시고 이미 외국에 가 있는 신하들을 도로 불러들이셨으며, 그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차례로 용서해주셨으니 이것은 진실로 뛰어난 덕입니다. 그러나 이미 불러다놓고는 그 말을 채용하지 않으시고 이리저리 유리 방황하도록 내버려 둔 채 돌보지 않으시니, 이는 덕을 끝까지 베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사망한 여러 사람들은 비록 초야의 미천한 선비들이지만 역시 모두 의롭고 장렬하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이니, 조정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배양하는 방도로 볼 때에 역시 표창하고 구휼(救恤)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충성과 의리를 격려하는 것은 후일에 원수를 갚는 기초가 될 것이니, 오직 밝으신 성상께서 재결하신다면 천만다행일 것입니다.
열두째,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구분을 하여 큰 한계를 세우소서. 아! 명(明) 나라가 멸망하고부터 만주 사람들이 중국을 더럽힌 지 오늘까지 이미 200여 년이 되었으니, 천하에 비색한 운수가 이보다 심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만은 유독 중국의 옛 법을 보존하여 박괘(剝卦)의 상구 효(上九爻)에서의 큰 과일의 형상과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외국 사람들이 기회를 틈타 괴이한 짓을 하면서 온 천하를 동등하게 하려고 하였는데, 지금까지 일을 주관한 신하들은 깊은 식견과 원대한 생각이 없어서 이미 문호를 개방하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조약을 분명히 결정하지도 않아 저들로 하여금 종교를 넓히고 학문을 전달하는 계책을 제멋대로 행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변란이 연이어 일어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왕후를 죽이고 머리를 깎는 극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을미년(1895) 12월 28일 조칙에서 애통한 마음을 보이시고 다시 머리를 기르도록 하셨으며, 의복에 있어서도 편의대로 하라고 명하셨으며, 그 후에는 또다시 머리를 깎는 일과 관련하여 내린 위조된 조칙을 도로 거두어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군인들과 학도들은 종전대로 머리를 깎았으니, 이것은 누가 시킨 것입니까? 소매가 넓은 옷은 영원히 폐지하였으니 이것은 또 누가 금지하도록 하였습니까? 온 나라의 신하들은 폐하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는데, 저 군인들과 학도들만이 유독 한 임금의 신하가 아니란 말입니까?
신은 바라건대, 오늘부터 조령을 널리 선포하시어 무릇 군인과 학도들 중에서 머리를 깎은 자는 모두 망건을 쓰도록 하고, 또한 소매가 넓은 옷을 입도록 하는 명령을 거듭 내리심으로써 땅바닥에 떨어진 제도를 부지시키소서.
신이 출처(出處)의 도리와 거취(去就)의 마땅함을 깊이 헤아려 보았으나 벼슬에 나아갈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 다행히 현직을 체차하시어 신으로 하여금 편안히 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해 주기 바랍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논의한 내용은 진실로 충성스러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니, 짐이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는 바이다. 시행할 방법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원본】 42책 38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78면
- 【분류】군사-중앙군(中央軍) / 풍속-풍속(風俗) /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인사-선발(選拔)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향촌-사회조직(社會組織) / 재정-전세(田稅) / 재정-국용(國用) / 군사-군정(軍政) / 변란-정변(政變) / 사법-행형(行刑)
贊政崔益鉉疏略:
"謹以十數條, 庸備乙覽, 惟聖明裁察焉。 ‘其一曰, 請開經筵以補聖學。’ 臣於前疏, 旣以聖明之一心爲國家興亡盛衰之本, 而請先正之矣。 又以讀書窮理爲正心之本, 而請講《大學》、《論語》矣。 彼不知者, 必笑臣以爲迂。 然求古帝王致治之要, 蓋莫有先於此者矣。 其爲說, 具在於朱子行宮奏箚之中矣。 若命儒臣入講詳達, 可得其法。 ‘其二曰, 請愼飮食以保聖躬。’ 臣竊觀孔子, 沽酒市脯不食, 康子饋藥, 謂其未達而不敢嘗。 夫孔子豈嘗謂市人之食必害于人、康子之藥必害于己? 然孔子猶愼之者, 不以口腹之累, 忘輕生之戒也。 夫外國所具之需, 雖珍味美饌, 旣非常膳所進之物, 而味旣不正。 且土産不同, 胃氣受損。 以聖人之事觀之, 是豈可或下一箸耶? 不寧惟是, 以近日鴻陸之變觀之, 彼在連之賊, 不止一鴻陸。 萬有一敢懷凶逆, 踵行其餘謀, 則聖明將何以察之也? 先朝之法, 凡飮食之自外至者, 皆不得進御, 所以防未然之禍也。 顧自今日始, 凡飮食茶果之自外國來者, 一切不御, 以保聖躬, 千萬幸甚。 ‘其三曰, 請屛私侍以肅宮禁。’ 臣竊觀先王之制, 雖宗戚近臣, 不由政院, 不得入覲。 其入覲則史官隨之, 諫官從之。 凡上下之動作言語, 皆得以記之。 是以君臣之間, 皆無私言, 公道行而朝體尊矣。 後世私覿之例漸繁, 而史官不從, 諫官不入。 於是乎干謁成風, 賄賂爲柄。 巫卜、風水之徒, 皆稱入侍, 屯監牛稅之類, 皆傳詔勅, 其屈尊主威, 墮損國體, 莫有甚於此者。 乃至國有大事, 大臣不知, 政府不聞者。 嗚呼! 是豈可使聞於隣國乎? 臣願自今日始, 凡有入覲者, 必由喉院知之, 而令史官諫臣得從其後, 其陳達不以道者, 諫臣必彈去之, 詔勅之不合意者, 許令喉院覆逆, 其奸細無賴之輩, 勿令雜進, 千萬幸甚。 ‘其四曰, 請審用捨以正朝廷。’ 臣竊惟人君皆莫不好治而惡亂、樂福利而厭禍害。 至其用人, 則又遠君子而新小人, 厭忠直而好諛侫, 是豈有他哉? 君子只知有國, 不知有身, 故多逆人君之意; 小人不知有國, 只知有身, 故務循人君之意。 明君嘗察而辨之, 言之逆者, 必求諸道, 言之遜者, 必求諸非道, 新君子而遠小人, 故國常治。 暗君反是, 則國常不免於亂。 其幾可不審歟? 聖明自卽位以來, 歷數諸臣, 其能直言無諱引君當道者, 誰哉? 迎合上意頤指聽從者, 誰哉? 聚斂掊克奉獻無數者, 誰哉? 今臣不敢指誰爲君子、指誰爲小人, 而聖明亦以臣言試擇之, 乃可得也。 臣願自今日始, 令大臣以下, 極陳過失, 無有所隱。 又令各擧忠直敦行之人, 苟可以輔國安民者, 率聞以上。 又飭道臣, 察擧儒生之有才德、文章者, 如漢孝廉法, 以爲需用, 使朝多正士、野無遺賢, 千萬幸甚。 ‘其五曰, 請董百官以務實事。’ 臣竊惟爲官擇人, 不爲人擇官。 先王建官分職, 以理衆事, 各視其才之所能而任之, 不强以其所不能。 又必久任其官, 以黜陟幽明。 今也不然。 不察其人之能否, 不問其任之久近, 朝授暮遞, 奪彼與此。 爲官者, 亦視官爲逆旅。 爲度支, 則漫不省錢穀出入之數; 爲法官, 則又不省法律科條之文, 因循翫愒, 苟竊料廩。 人有問之則曰: ‘吾不知也’, 又詰之則曰: ‘吾將遞矣。’ 去者如是, 來者復如是。 噫! 如是而職果擧乎? 政果理乎? 臣願自今日始, 行古三載考績之法, 殿最能否, 久任責成。 如有冗官費廩無益實事者及遊戲度日不修職事者, 竝皆汰斥, 以振政綱, 千萬幸甚。 ‘其六曰, 請正法律以立紀綱。’ 臣竊維國之有刑律, 所以弼敎而納民於軌範者也。 太緩則民玩而不行, 太甚則民怨而無所措其手足。 惟得於緩急剛柔之中, 然後恩威竝行而民不頗矣。 臣未知近日新法之何如, 而惟有罪不刑, 輕重同罰, 卽其致亂之道也。 泳孝、光範、載弼, 甲申之逋逆也, 還入于國而不能正法。 允植, 乙未之弑逆也, 三年之後, 僅行竄配。 駉壽, 甲午造亂之魁, 而又欲動搖國本, 包藏不測, 是宜論以大逆, 而只曰謀作亂。 且逃不受勘, 而薄竄其黨與。 此有罪不刑之大者也。 李裕寅僞造詔勅, 賊陸謀害聖躬, 其輕重懸殊, 而處絞同律。 畢竟裕寅減死, 而賊陸無加律。 此其輕重失律之大者也。 蓋嘗論之刑罰之輕重, 隨其罪之大小耳, 非有好惡而高下之也。 故黥劓、剕宮者, 不殺之刑, 而有輕重者; 賜死、處絞、梟首、腰斬、車裂、孥戮者, 殺之之刑, 而有輕重者也。 今之律則不然。 勿問罪之大小, 盡一於絞而不能加, 盜淫、殺人、謀叛、弑逆, 滾成一案而更無差等。 安有視君父之讎, 與庶人相殺者同, 而謂之公平者乎? 夫罪人不孥, 固文王之善政也。 然亦非所以治極逆大憝者也。 此何以知之? 《書》曰: ‘孥戮汝’, 又曰: ‘無俾易種于玆新邑’, 又曰: ‘殪殄滅之無遺育。’ 其不信然乎? 向者賊陸擬律之時, 聞有二三臣寮之疏, 請加刑政, 合輕重大小之論, 而旋爲民黨所沮云, 臣實痛之。 苟如此, 則亂臣賊子, 無所知懲, 而姦回不忠之徒, 接踵而起矣。 其將何以爲國? 亦將何以治有萬不齊之衆乎? 臣願自今日始, 申明律文, 嚴立科條, 凡係惡逆大故者, 竝以舊法從事, 合斬首者斬之, 合收孥者收之, 以一紀綱, 以勵頑頹, 千萬幸甚。 ‘其七曰, 請罷民黨以遏亂階。’ 臣竊惟古者, 有誹謗之木、進言之鼓。 至於本朝, 亦有儒生之伏閤、太學之捲堂, 固未嘗使民無言也。 然皆有防限, 皆有節制。 寧誹謗政事, 而無迫逐大臣之擧; 寧封章呼籲, 而無脅制君上之事矣。 今之所謂民黨者, 則嘯聚市井無識之輩, 苟合徒衆, 借名忠愛, 頤指大臣, 呼來呼去, 指斥君父, 凌辱國相。 晝夜蚓結, 喁呵作聲, 廣張威福, 氣焰可畏。 嗚呼! 自此而政權、勢權, 皆移於民, 朝廷將不得出一言、行一事矣。 賈誼所謂‘足反居上, 首顧居下’者, 不幸而近之矣。 如此不禁, 則國安有法綱哉? 臣聞‘外國有所謂自由議員民權之黨, 至有自選民主之例’云。 今此黨人, 旣已迫逐大臣者屢矣, 則雖爲此進一層之事, 亦何憚而不行乎? 假令此輩眞箇是忠君愛國, 揆以道理, 漸不可長。 今聞聖上奮發乾斷, 方皆鋤治, 誠莫大之幸也。 然不善其後, 恐無以厭服衆心。 且莫若渙降德音, 罪己責躬, 示以至誠惻怛, 十分改圖之意, 諭以孝悌、忠信、敬君、親上之道, 使彼感服。 然後治其尤甚者幾人, 餘令法司罷遣, 而急須明其政刑, 力行敎化, 使民曉然知上之果不我欺。 而實心實政, 終始如一, 則夫何患於民之不靖乎? 如或不然, 則彼至愚之民, 共懷不服之心, 反蓄怨上之意。 欲遽加摧折, 則挑發禍機; 欲置而勿問, 則養成驕傲。 二者之間, 皆足亡國矣。 唐 太宗之言曰: ‘民猶水也, 君猶舟也。 水能載舟, 亦能覆舟。’ 此言深切有味。 臣願聖明監此亟圖焉, 則千萬幸甚。 ‘其八曰, 請禁起復以正風俗。’ 臣竊惟周詩曰: ‘父兮生我, 母兮鞠我, 欲報之德, 昊天罔極。’ 蓋人子之生, 受父母莫大之恩, 雖生而日奉三牲, 沒以服喪終身, 猶不可報其萬分之一。 然先王之制, 喪不過三年而除之者, 非謂如是而足。 蓋取無限之中, 節之以有限也。 然日月不可久住, 而先王制禮, 不敢過焉, 則孝子哀痛之情, 當無有極, 雖萬鍾之卿相, 有不暇念者矣。 此寔出於天理人情之自然, 非苟爲是戚戚之貌也。 臣聞近日官府, 有所謂復期者, 親喪未幾, 卽脫衰麻, 靦然出仕, 無復愧容。 噫! 人心之陷溺, 乃至此耶? 國有大事, 不得已起復, 君子猶非之。 未知此輩亦有父母之恩者耶? 古之時, 居喪飮酒食肉者, 人固以爲傷風敗俗, 請擯諸四裔, 無令汙染華夏。 如見初不居喪者, 當復謂何哉? 嗚呼! 當此邪學充滿之時, 爲人上者, 雖惇彝倫、明禮義, 以導率百姓, 猶不能正敎化。 況爲之滅倫悖常之法, 以自趨於夷狄禽獸之域乎? 臣願自今日始, 凡內外官職起復出仕者, 竝皆斥退之, 永革其復期之例, 千萬幸甚。 ‘其九曰, 請節浮費以紓國用。’ 臣竊惟財用之於國家, 猶人之有血氣。 血氣竭則人死, 財用匱則國弊, 此不易之理也。 我國財政, 惟有賦稅, 而賦稅之出, 皆由農民。 夫農民終歲勤若, 而不給數口一年之食, 猶賣其半, 以供賦稅。 苟思其艱, 雖一粒穀、一文錢, 豈可濫用無節耶? 臣聞近日度支之積, 常有不足, 以至借款外國。 夫今年不足而借款, 明年又不足而借款, 借未暇報而國用猶絀, 畢竟割地而與之矣。 割地不足, 則又將擧其國而與之矣。 此必然之勢也。 臣願自今日始, 停不急之役, 杜無功之賞, 去奢侈之心, 絶玩好之物, 經用之外, 一毫不入, 勿以國庫爲私藏, 千萬幸甚。 ‘其十曰, 請正軍法以修武備。’ 臣竊惟國不可無兵也, 而我國無兵; 兵將以有用也, 而我兵無用。 蓋兵在營則死於將, 臨陣則死於敵, 是其職也。 今之兵則不然。 皆以親衛、侍衛爲名, 而自上及東宮, 皆有都元帥、元帥之稱。 是以軍士皆慢視其將也曰: ‘彼亦非大將也’, 有罪而笞則必曰: ‘吾之身有親字侍字, 安敢笞我哉?’ 如是者能制命於將乎? 不肯制命於將者, 其能致死於敵乎? 必須賞罰分明, 恩威竝行, 如臂之使指、口之使舌, 然後乃可用也。 臣願自今日始, 復古五營、節度之制, 去親衛、侍衛、元帥之名, 使將各領其軍, 專任生殺, 以敎技藝, 以勸忠義, 使緩急有用, 千萬幸甚。 ‘其十一曰, 請討讎逆以明大義。’ 臣竊惟朱子曰: ‘君父之讎, 萬世臣子之所必報而不忘者。’ 又曰: ‘《春秋》之法, 君弑賊不討, 則不書葬者。’ 正以復讎之大義爲重, 而掩葬之常禮爲輕, 以示萬世臣子遭此非常之變, 則必能復讎討賊, 然後爲有以葬其君親者。 不則雖棺槨衣衾, 極其隆厚, 實與委之於壑, 爲狐狸所食、蠅蚋所嘬, 無異。 嗚呼! 臣嘗讀此, 未嘗不痛哭流涕。 以爲今日臣子之罪, 可謂上通于天, 而無所容於覆載之間也。 夫乙未八月之變, 其至冤極痛何如? 其血怨骨讎又何如? 而星霜三週, 尙未聞施一計策, 行一擧措, 以討復爲言者。 臣以爲父子之倫, 君臣之義, 自此永墜, 而人類無異於禽獸矣, 含生不如於速死矣。 夫匹婦匹夫, 爲人所殺, 爲其子者, 皆欲思報其仇。 況我五百年先王之宗婦, 三千里民生之慈母, 遭此罔極之變, 而曾不若匹夫匹婦之猶能償命者耶? 今所殺者, 僅得弘、夏二賊, 而尙不明正其罪。 吉濬、羲淵、博、範善輩, 雖逃未獲, 而猶有其父兄妻子, 乃一遵逆輩自全之法, 曲護而保全之。 至以允植之渠魁凶逆, 不能萬剮凌遲。 見今聖明悼念不已, 饋奠過期不忍撤, 陵儀比古致如隆。 然極天之讎, 旣未絲毫所復, 則以朱子之言觀之, 凡此虛文過禮, 適足爲隣人之所笑, 而抑聖后在天之靈, 必不以此少慰其冤恨之心矣。 且孰若勤一政事, 施一恩惠, 與百姓誓心矢志, 寧以國破, 不復讎則不已, 寧以身亡, 不復讎則不生, 爲務也哉? 今也則不然。 忘國大讎, 而不知恥; 政壞民散, 而不知捄。 外患不測, 內漬日甚, 而恬若無事, 熟睡不醒。 此臣所以寧欲溘然而無知者也。 且臣又有所言者, 乙未東南之民兵, 時之所謂匪徒也。 謹按《春秋》之義, 亂臣賊子, 人人得以誅之。 故漢 翟義之討王莾, 關東之討董卓也。 《綱目》皆大書而與之, 推此義也。 國有亂賊, 大君不能討, 方伯不能討, 則雖布衣之賤, 亦無不可討之義。 方逆賊之盤據朝廷也, 聖明之身, 亦且朝夕不得保。 況暇爲討復之擧乎? 方伯之臣, 皆爲賊爪牙, 奉供如不及。 況肯有討復之心者乎? 幸而天理、民彝之賴不全墜, 而東南儒生之輩, 興擧義旅。 又有一二縉紳之起其間者, 使日月生色, 而後生之人, 得有以知三綱五常之道。 噫! 方天地晦塞之秋, 若無此輩之號令, 吾東庶幾無辭於天下矣。 世之人徒見其下流之侵掠, 遂謂之匪徒, 而漫不分別, 此又可見人心陷溺之甚也。 何幸聖上惕然獨念, 旣召還越境之臣, 其餘亦皆次第赦罪, 誠聖德也。 旣召而不能用其言, 任其顚沛流離, 而不之顧, 則爲德之不終也。 又其死亡諸人, 雖皆草茅賤儒, 亦皆義烈殉國者也。 其在朝廷培養民彝之道, 亦當有褒恤之典矣。 所以激勸忠義, 以爲異日復讎之基者也。 惟聖明裁之, 則千萬幸甚。 ‘其十二曰, 請嚴華夷以立大防。’ 嗚呼! 自皇明屋社, 滿人之汙穢中原, 今已二百有餘年矣。 天下極否之運, 莫有甚於此者, 而我東獨保華夏之舊章, 不啻如剝九碩果之象矣。 不幸外人乘時騁怪, 欲大同宇內, 而向來主事之臣, 無深識遠慮, 旣已開門而納之矣。 又不能明定約條, 使恣行其廣敎傳學之計, 畢竟變故層生, 至於弑后剃髮而極矣。 乙未十二月二十八日之詔勅, 示哀痛之意, 更令長髮, 而至於衣服, 亦有從便之敎。 後又繳銷剃髮時僞勅。 然而軍人、學徒之依舊剃髮, 是又誰之所使哉? 闊袖衣之永廢, 是又誰之所禁哉? 率土之濱, 莫非王臣, 彼軍人、學徒, 獨非一王之臣乎? 臣願自今日始, 渙發詔令, 凡軍人、學徒之剃髮者, 竝令皆如巾櫛。 又申衣制闊袖之令, 以扶地底之微陽焉。 至如臣出處之道、去就之義, 量之已熟, 萬無前進之望。 幸乞遞見職, 使之安意就盡焉。"
批曰: "所論亶出於忠赤, 朕庸嘉歎。 當圖敷施矣。"
- 【원본】 42책 38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책 7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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