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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6권, 고종 34년 1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1897년 대한 광무(光武) 1년

대행 황후의 지문의 어제 행록을 내리다

대행 황후(大行皇后) 지문(誌文)의 어제 행록(御製行錄)을 내렸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대행 황후의 성은 민씨(閔氏)이고 본 향은 여흥(驪興)이다. 시조는 칭도(稱道)인데 고려(高麗) 때 상의 봉어(尙衣奉御)를 지냈다. 3대(三代)는 영모(令謨)인데 벼슬은 집현전 대학사(集賢殿大學士) 상주국 대사(上柱國大師)이고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었다. 4대는 종유(宗儒)인데 벼슬은 중대광 찬성사(重大匡贊成事)이고 시호는 충순(忠順)이다. 문경충순은 고려사(高麗史)에 전한다.

본조(本朝)에 들어와서 심언(審言)은 개성 부유수(開城副留守)이고, 충원(沖源)은 은일로 집의(執義)를 하였다. 3대(三代)인 제인(齊仁)에 이르러 호(號)는 입암(立巖)이고 좌찬성(左贊成)이었다. 또 4대인 광훈(光勳)에 이르러 관찰사(觀察使)로서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

다음 유중(維重)은 호를 둔촌(屯村)이라고 하였는데 우리 인현 성모(仁顯聖母)를 낳았다. 여양 부원군(驪陽府院君)을 봉하였고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었다.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로서 사림(士林)의 모범이 되었으며 효종(孝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다.

진후(鎭厚)의 호는 지재(趾齋)인데 좌참찬(左參贊)이고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사려가 깊고 계책이 많아 나라의 충실한 신하가 되었다. 경종(景宗)의 사당에서 함께 제사지냈는데 이가 황후의 5대 조상이다.

고조(高祖) 익수(翼洙)는 은일로 장령(掌令)을 지냈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선비들에게 도를 강론하여 유림(儒林)의 종주(宗主)가 되었는데 학자(學者)는 숙야재(夙夜齋) 선생이라고 불렀다.

증조(曾祖) 백분(百奮)은 대사성(大司成)을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을 추증받았는데 강의하고 과감하여 바른 말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았다.

조부(祖父) 기현(耆顯)의 호는 이송(二松)인데 이조 참판(吏曹參判)을 지냈고 영의정을 추증 받았다. 효우(孝友)와 청검(淸儉)으로 당대에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 치록(致祿)은 호가 서하(棲霞)인데 첨정(僉正) 벼슬을 지냈으며 여성부원군(麗城府院君) 영의정을 추증 받았고 시호는 순간(純簡)이었다. 학식(學識)이 많고 연원(淵源)이 있었다.

원배(元配)인 해령부부인(海寧府夫人) 오씨(吳氏)는 은일로서 찬선(贊善)을 지내고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추증 받은 문원공(文元公) 희상(熙常)의 딸이었으며, 계배(繼配)인 한창부부인(韓昌府夫人) 이씨(李氏)는 이조 판서로 추증 받은 규년(圭年)의 딸인데 이조 판서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정공(忠貞公)으로서 호가 창곡(蒼谷)현영(顯英)의 후손이다.

한창부부인이 신해년(1851) 9월 25일 정축일(丁丑日) 자시(子時)에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락리(蟾樂里)의 사제(私第)에서 황후를 낳았다. 이 날 밤에 붉은 빛이 비치면서 이상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 찼었다.

황후는 성품이 단정하고 아름답고 총명하고 인자하여 어려서부터 행동하는 것이 떳떳하였으며 과격하게 말하거나 웃는 일이 없었다. 처녀들이 꽃을 꺾어서 벌레를 희롱하니 말리며 말하기를, ‘벌레들이 새끼를 부리고 숨쉬게 하고 잘 기르는 것은 너희 부모가 너희를 기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보통 사람들보다 일찍이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순간공에게서 글을 배웠는데 두세 번만 읽으면 곧 암송하였다. 심오한 뜻의 어려운 것도 분별해서 대답하였고 조목조목 통달하였다. 또 기억력이 비상하여 심상한 사물이라도 한 번만 듣거나 보면 빠짐없이 모두 알았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여 역대 정사에 대한 득실(得失)을 마치 손바닥을 보듯이 환히 알았으며, 국가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좋은 말과 아름다운 행실, 혹은 《사승(史乘)》이나 《보감(寶鑑)》에 실려 있지 않은 것까지도 황후는 능히 말하였는데 이것은 그 가정의 견문이 본래 있었기 때문이니 다른 집은 미칠 바가 못 되었다.

왕비(王妃)의 자리에 올라서 도운 것이 많은 것은 평상시에 공부한 힘이다. 9세 때 순간공의 초상을 당해 곡읍(哭泣)의 초상 범절은 마치 성인(成人)과 다름없었다. 염할 때에 집안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것을 생각하여 잠깐 피할 것을 권하자 정색하여 말하기를, ‘어째서 남의 지극한 인정을 빼앗으려 합니까?’라고 하였다. 양례(襄禮) 때에도 일을 끝마치고 곡을 실컷 한 다음에야 물러갔다. 부부인(府夫人)의 초상 때에도 장례와 관련한 모든 자재들을 집안에서 마련하였고 도가 넘도록 슬퍼하였으며 오빠인 민승호(閔升鎬)의 초상 때에도 마치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는 듯이 슬퍼하였다. 황후의 효성과 우애는 대체로 타고난 천성에서 나온 것이다.

을축년(1865)에 안국동(安國洞) 사제에서 꿈을 꾸었는데 인현 성모가 옥규(玉圭) 하나를 주면서 하교하기를, ‘너는 마땅히 내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주어 자손에게 미치게 하니 영원히 우리나라를 편안하게 하라.’고 하였다. 부부인의 꿈도 역시 같았다. 성모가 하교하기를, ‘이 아이를 잘 가르쳐야 할 것이다. 나는 나라를 위하여 크게 기대한다.’라고 하였다.

가묘(家廟) 앞에 소나무가 한 그루 쓰러져 있었는데 이 해에 묵은 뿌리에서 가지가 돋아났고 옥매화가 다시 피었다. 황후의 집은 바로 인현 성모의 집이다. 대청이 있었는데 감고당(感古堂)이라고 하였다. 옛날 우리 영조(英祖)가 여기에 와서 우러러보고 절한 다음 친필로 현판을 써서 성모가 일찍이 있던 곳에다 걸어놓았다. 덕 있는 가문에 경사가 나고 상서로움을 보여 그 자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물려줌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다.

병인년(1866)에 선발되어 별관에 있으면서 《소학(小學)》, 《효경(孝經)》, 《여훈(女訓)》등의 책을 공부하는데 밤이 깊도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천성(天性)이었다.

3월 20일 기묘일(己卯日)에 왕비로 책봉되고 다음 날에 가례(嘉禮)를 거행하였다. 왕후(王后)가 입궁하여 우리 신정 성모(神貞聖母)를 지성으로 섬겼고 크고 작은 일을 환히 알아서 반드시 먼저 문의한 다음 그 의견대로 하였다. 성모가 늘 말하기를, ‘곤전(坤殿)은 효성스럽다.’라고 하였다. 성모가 나이 많아지자 아침저녁으로 문안하는 것 외에도 일상생활과 접대하는 절차를 반드시 적절하게 하였다.

경인년(1890) 환후(患候) 때에도 황후가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으면서 아픈 부위를 손으로 안마하였다. 성모가 그의 수고를 생각하여 그만두고 돌아가 쉬라고 말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았다. 침전(寢殿)의 탕제(湯劑)와 수라(水剌)를 황후가 권하고 올리는 것이 아니면 들지 않았다. 때문에 올리는 시간을 감히 어기지 않았다. 하루는 성모가 손을 잡고 하교하기를, ‘나는 늙고 또 병이 심하다. 그렇지만 한 가지 생각은 오직 백성들과 나라의 바깥일에 대해서는 임금이 있고 안의 일에 대해서는 곤전에게 부탁했으니 내가 다시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성모의 초상을 당하자 장례와 관련한 모든 일을 반드시 효성스럽게 하였고 궤전(饋奠)을 반드시 공경스럽게 하였다. 또한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을 더없이 정결하게 하기 위하여 힘썼다. 일찍이 성모가 좋아하는 것을 얻었을 때에는 반드시 효모전(孝慕殿)에 올렸다. 부묘(祔廟) 때에 휘장도 황후 자신이 손수 만들었다.

늙은 궁인(宮人)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눈앞에 부딪히는 것은 모두가 슬프다.’라고 하였다. 황후는 성모를 종신토록 사모하였다. 묘궁(廟宮)과 능원(陵園), 여러 산천(山川)에 제기(祭器)가 모자라고 제수(祭需)가 넉넉하지 않으면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것을 내서 보충하였다. 기신제(忌辰祭)에도 반드시 성복(盛服)을 갖추고 밤을 지새웠으며 개인 제사에도 그렇게 하였다.

매해 음력 2월 달에는 북원(北苑)에서 친잠(親蠶)한 것을 제명(齊明)하여 바쳤다. 북원에 과일이 처음 익으면 햇것을 먼저 올려 제사에 쓰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후가 선조를 추모하고 근본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친척들을 사랑하니 멀고 가까움이 없이 모두 다 기뻐하였다. 혹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 있으면 경계하여 말하기를, ‘항상 억제하라. 그만해도 오히려 교만하고 사치할까봐 우려되는데 더구나 깃을 빌려주겠는가?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해치는 것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황후가 화목할 것을 숭상한 것이다.

계유년(1873)에 황후가 꿈을 꾸었는데 하늘이 자시에 열리더니 오색구름이 영롱하였다. 하늘에서 글을 내려 보내서 말하기를, ‘만년토록 태평하라.’고 하므로 황후는 절하고 받았다. 다음해 황태자(皇太子)가 태어났다. 황후는 황태자에게 온정과 사랑을 부지런히 베풀면서 옳은 방도로 가르치는 것이 엄하기가 스승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말을 잘 하였기 때문에 책을 주었고 글을 터득할 나이가 되어서는 날마다 서연(書筵)을 열었다. 황후는 매번 강론한 문의(文義)를 물었으며 날마다 통상으로 행하는 일로써 비유를 설정하여 그 뜻을 명백히 깨닫게 하였다. 반드시 이해하고 분석하게 할 때에는 다시 그와 관련된 뜻을 더 찾아 토론하게 해서 되도록 자세히 알고 공고히 기억하기에 힘썼다. 오늘 훌륭한 학문을 성취하게 된 것은 황후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자녀를 사랑하고 궁중을 인도하는 데 있어서 화목하고 임금을 도와주는 그 덕화는 애애하기가 봄날의 화기와 같았다. 자기 소생이 있게 되자 은혜가 갖추어져 더 지극하였다.

온 나라에 수재와 한재의 재변이 있을 때마다 얼굴에는 근심스러운 기색을 띠고 너그럽게 돌봐주기에 힘썼고, 무더운 여름과 혹한의 겨울에는 수도의 빈궁한 백성들을 돌봐주는 것을 해마다 떳떳한 일로 여겼다. 빈한하여 혼례(婚禮)와 상례(喪禮)를 치르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후하게 돌봐주었다.

병자년(1876)에 큰 흉년이 들자 조세를 감면해 주었고 경비가 궁색하면 돈과 곡식을 내주어 보충하도록 하였다. 호위 군사들이 고통을 겪고 밖에 나가 있는 군사들이 한지에서 지낼 때에는 특별히 호궤(犒饋)하여 수고로움을 위문하였는데, 사자(使者)가 연이으니 군사들이 모두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으며 사람들은 저마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였다.

여러 번 화재를 겪었기 때문에 늘 액례(掖隷)들에게 불을 조심하게 하였으며 진기한 물품이 없어져도 한 번도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진전(眞殿)과 남전(南殿) 은그릇을 잃어버렸는데도 곧 안에서 주조해 주도록 하고 사람들을 따져서 신문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무고한 사람이 걸려들까봐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아랫사람들을 통제하는 데는 관대하면서도 엄하여 은혜와 위엄을 같이 보이니 궁중에서 감화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이 황후의 인자하고 두터운 혜택이 사람들에게 깊이 젖어 있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집안에서 대대로 의리를 강론하니 황후가 어려서부터 배운 점이 있어서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었는데,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는 타고난 천성이어서 기미를 아는 것이 귀신같았다. 어려운 때를 만난 다음부터는 더욱 살뜰히 도왔으므로 짐의 기분이 언짢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아침까지 기다리고 앉아 있었으며 짐이 근심하고 경계하는 것이 있으면 대책을 세워 풀어 주었다. 심지어 교섭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는 짐을 권해서 먼 곳을 안정시키도록 하니 각 국에서 돌아온 사신들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 사람들이 모두 감복한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짐을 도와서 말한 것이 있는데 근년에 지내면서 보니 모두 황후가 일찍이 말한 것이 일마다 다 징험되어 딱딱 들어맞았다. 심원한 생각으로 미래에 대한 일을 잘 요량하는 황후의 통달한 지식은 고금에 따를 사람이 없으며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때 황후는 온화한 태도로 임시방편을 써서 그의 목숨을 보존하였다. 환어(還御)하자 혹자가 아뢰기를 군란을 일으킨 군사에 대해서는 깡그리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하였을 때 황후가 이르기를, ‘내가 덕이 없고 또한 운수에 관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찌 그 무리들이 한 짓이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크게 포용하면 덕은 끝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황후의 덕이 그러한 것이다.

갑신년(1884) 적신(賊臣)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가 난리를 일으켜 변란이 일어났다 거짓말을 하여 전궁(殿宮)이 파천(播遷)하고 나라 형편이 위급하기가 호흡 사이에 있었다. 이보다 먼저 황후가 역적 박영효를 타일러 그 음모를 좌절시켰는데 그 세력이 확대되자 여러 역적들이 각자 서로 서로 의심하며 도망쳤으므로 난리가 곧 평정되었다. 황후는 성의 동쪽에 피해 있으면서 자성(慈聖)을 호위하고 세자(世子)를 보호하였는데 황급한 와중에도 시종한 사람들이 한 명도 흩어져 떠나지 않았다. 이것은 황후가 평상시 은혜로 돌봐 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때를 당해서도 용감한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갑오년(1894)에 외국 군사가 대궐에 들어오므로 짐이 황후와 태자에게 건청궁(乾淸宮)으로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도로 함화당(咸和堂)에 돌아와 말하기를, ‘한 궁궐 안에서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차라리 여기 있으면서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안정시키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칼자루를 잃어서 이미 역적의 머리를 베지 못할 바에야 우선 포용해서 그 흉악한 칼날을 늦추어 놓는 것이 낫습니다.’라고 하였다.

여러 역적들이 이어 헌장(憲章)과 제도를 고치고 크고 작은 제사도 다 줄였다. 황후가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줄이거나 늘일 수 있는 일이겠는가? 역적들은 이미 하늘과 귀신에게 죄를 지었으니 죄가 가득하다.’고 하면서 진전(眞殿)에 제사지내는 물품을 한결같이 옛 규례대로 하였는데 황후가 액례를 신칙하여 여러 역적들이 알지 못하게 하였다.

황후가 일찍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을 언급하여 거듭 신칙하면서 말하기를, ‘국가가 잘 다스려지고 어지러워지는 것과 편안하고 위험에 처하는 것은 오직 인재를 잘 쓰는가 못쓰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그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전적으로 임명하여 의심하지 말아야 하며 그가 어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면 마땅히 빨리 제거해야 한다. 대체로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하는 것 같으므로 이 때문에 요(堯) 순(舜)도 사람을 아는 것을 어려워하였으며 심지어 그 간사한 것을 의심하면서도 우선 임용(任用)하게 되면 이것은 화를 빚어내는 원인이다.’라고 하였다.

짐이 일찍이 황후의 말이 정확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일찍 용단을 내려 김홍집(金弘集),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정병하(鄭秉夏) 네 역적을 제때에 처형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외국 군사를 몰래 불러들이게 하였으며 훈련대를 남모르게 사주하여 을미년(1895)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큰 변란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아! 짐(朕)이 황후를 저버렸다. 황후는 짐에게 간절한 일념(一念)으로 받들었다. 비록 문안하는 것과 같은 절차에 대해서도 오직 빠짐이 있을까봐 근심하여 성실하게 하였으나 짐은 황후의 몸을 궁금(宮禁)에서 잘 보존하지 못하였다. 아! 내가 황후를 저버린 것이다. 지금 슬퍼하고 추모한들 후회와 여한을 어찌 그칠 수 있겠는가?

황후는 경복궁(景福宮)곤녕합(坤寧閤)에서 8월 20일 무자일(戊子日) 묘시(卯時)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45세이다. 이 날 새벽에 짐과 황후가 곤녕합 북쪽의 소헌(小軒)에 있을 때 흉악한 역적들이 대궐 안에 난입하여 소란을 피우니 황후가 개연히 짐에게 권하기를, ‘원컨대 종묘 사직(宗廟社稷)의 중대함을 잊지 말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위급한 중에도 종묘 사직을 돌보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조금 후에 황후를 다시 볼 수 없었으니 오직 이 한 마디 말을 남기고 드디어 천고에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다. 아! 슬프다.

이번 장례와 관련하여 의복을 비롯한 여러 가지 기물과 휘장 등속은 대내(大內)에서 마련하여 쓰고 탁지부(度支部)의 재물을 번거롭게 하지 말아서 황후가 그 전에 나라의 계책을 생각하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도록 한 지극한 뜻을 체득하게 하라.

김홍집정병하 두 역적은 사형(死刑)을 하였으나 유길준조희연 두 역적은 다 도망쳐서 아직까지 체포하지 못하였으니 황태자가 복수하려는 심정이 참으로 보기 안타깝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명(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성(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명성(明成)’이라 하였고, 능호(陵號)는 ‘홍릉(洪陵)’이라고 하였으며, 전호(殿號)는 ‘경효(景孝)’라고 하였다.

무덤 자리는 양주(楊州) 천장산(天藏山) 아래 간방(艮方)의 언덕에 정하고 광무 원년(光武元年) 정유년(1897) 10월 28일 갑신일(甲申日) 진시(辰時)에 장례를 지냈다. 석물을 세우는 공사는 우선 오른쪽을 비워 놓는 제도를 쓰지 않았지만 짐의 의도가 있어서 한 것이다. 재궁(梓宮) 위의 글자는 황태자가 공경히 썼고 하현궁 명정(銘旌)은 짐이 직접 썼다. 이렇게 해서 효성스런 생각을 펴고 슬픔을 다소나마 풀 수 있을 것이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조신(朝臣)들이 존호(尊號)를 올려 ‘효자(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존호(尊號)를 더 올려 ‘원성 정화 합천(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에는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명(明) 나라 이후에 천하의 예악(禮樂)이 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관리들과 선비들, 백성들과 군사들, 저자 사람들이 일치한 말과 같은 목소리로 수십 통의 상소를 올리기에 짐이 사양을 여러 차례 하였으나 더 할 수가 없어서 바로 9월 계묘일(癸卯日)에 하늘땅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서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하였다. 이 해를 광무 원년으로 삼아 사직(社稷)을 태사 태직(太社太稷)으로 고쳐 쓰고 금보(金寶)와 금책문에 왕후(王后)를 황후로,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로, 왕태자비(王太子妃)를 황태자비(皇太子妃)로 쓰도록 명(命)하였다.

대체 황후가 훌륭한 공덕으로 짐의 곁에서 잘 도와주었기 때문에 내가 정사를 잘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런데 짐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으나 황후는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네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는데 황태자는 둘째 아들이다. 좌찬성으로서 영의정을 추증 받은 충문공 민태호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맏아들과 셋째 대군(大君), 넷째 대군, 그리고 딸 하나 공주(公主)는 모두 일찍 죽었다. 완화군 선(完和君瑄)은 장가도 못 들고 죽었고, 의화군 강(義和君堈)은 지금 군수(郡守) 김사준(金思濬)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옹주(翁主) 둘이 있었으나 다 죽었다.

아! 황후가 대궐에 있으면서 정사를 도와준 것이 30년인데 실로 순리에 처하지 못하고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한 관계로 도리어 간고하고 험난한 일만 하더니 제 명을 살지 못하고 중년 나이에 죽었다. 이것이 어찌 하늘 탓이겠는가? 보좌가 서로 이루어지고 안에서 다스리는 것이 어질고 밝아서 만대(萬代)에 훈계로 삼을 만한 것이 진실로 한두 가지가 아니었건만 곤란한 일이 많고 지극히 비통한 와중이라 대체로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또 황태자가 지은 행록(行錄)이 있는데 거기에 자세히 쓰여 있으니 백대(百代)를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는가?

아! 황후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였더라면 숨은 공로와 부드러운 덕화가 나라를 빛나게 하여 책에 기록할 것이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이에 대해서 짐이 하늘의 이치를 의심하는 것이고 유감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아! 슬프다."

하였다.

황태자가 행록(行錄)을 지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슬프고 슬프다. 사람으로서 누군들 부모가 없으며 부모로서 누군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는가마는 지극히 자애로운 은정은 어머니가 소자에게 베푼 것 만한 것이 없으며 지극히 비통한 슬픔은 소자가 어머니에 대한 것 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소자가 이미 성장하였으나 여전히 어루만져 주는 것은 마치 젖먹이 어린아이처럼 하였다. 주리거나 배부르거나 춥거나 덥거나 할 때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어머니가 반드시 먼저 알았으며, 병이 있으면 음식을 들고 잠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소자가 극심한 통증이 아니면 억지로 밥을 먹였으며 밤에는 풋잠을 자면서도 나의 근심어린 마음을 풀어주려고 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몰래 살펴보면 밤에도 방 안의 불빛이 환희 비쳤고 말소리가 낭랑하였다.

소자가 천연두를 앓을 때에 어머니가 밤에 꼭꼭 밖에 나가 하늘에 빌었으므로 이내 다시 회복되었으며, 소자가 일찍이 옆구리의 담핵(痰核)으로 고통을 겪을 때 몹시 아프지는 않았지만 음식을 먹는 데에 방해되자 어머니는 오래되면 혹 종기가 터질 까 늘 걱정하면서 침을 바르라고 가르쳐 주어 딱딱했던 것이 가라앉아 마침내 평상시와 같이 되었으나 어머니는 보지 못하였다. 소자가 겨우 젖니를 갈 때 어린 궁인(宮人)과 뜰에서 놀이를 하는데 어머니가 이르기를, ‘너는 이 놀이를 즐기는가?’라고 하고는 또 ‘이보다 즐거운 것이 있다.’라고 하면서 문득 글자를 써서 입으로 외우고 손으로 쓰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공부할 나이가 된 후부터 서연(書筵)에서 강론한 것을 어머니가 매번 그 문의(文義)를 찾아서 풀어 주었으며, 비근한 일을 들어 반복 비유하여 쉽게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깨달아서 마음으로 기뻐할 때 비로소 다음에 배울 단계로 넘어 갔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또 나라의 전고(典故)와 열성조(列聖朝)의 정교(政敎)와 모훈(謀訓)을 가르쳐 주기에 힘썼으므로 지금까지 귀에 쟁쟁하여 곁에서 듣는 것 같다.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잘 꾸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편안하게 하는 요령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대체로 몸에 배고 골수에 젖어 몸소 체득하여 실행하기에 절실하였으며 더욱이 운수를 찾는데 힘을 써서 터득하였다. 어머니는 천성적으로 효성스러워서 선조를 받드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외조부 순간공(純簡公)의 묘지를 옮길 때에 상지관(相地官)들이 아뢰기를, ‘아무 곳에 좋은 묘(墓) 자리가 있는데 남의 무덤을 옮겨야 합니다.’고 말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부모를 위하는 마음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같은데 어찌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서 남을 해하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좋은 묘(墓) 자리를 보령(保寧)에 정했을 때 길이 너무 멀어서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도 타산하지 않고 모두 내탕고(內帑庫)의 재력을 내서 마련하였으며 공물(公物)과 백성들의 노력은 하나도 참여시키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안의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영구가 지나가는 길의 논밭 곡식이 손상되는 것과 조각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반드시 다 해당한 값을 넉넉히 주었으니, 백성들의 생계를 돌보는 어머니의 훌륭한 생각은 어디에나 미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어머니가 일찍이 소자에게 가르치기를, ‘나라가 있는 것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어찌 나라를 영위하겠는가? 그러므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라고 말한다. 근본이 굳어야 나라가 편안하다. 혹시 위에서 백성을 돌보지 못한 관계로 곤궁해져서 살아갈 수 없다면 그 백성은 우리의 백성이 아니니 비록 백성이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이다. 종묘 사직(宗廟社稷)을 너에게 부탁하니, 너는 이것을 깊이 생각하고 오직 백성에 대한 문제로 마음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가 어릴 때여서 그 뜻을 깨닫지 못했으나 그래도 가르친 말은 잊지 않았다. 지금 이 훈계를 더욱 깨닫게 되니 만대(萬代)의 귀감으로 여길 만하다.

어머니의 공로와 덕은 천지(天地)처럼 이름할 수 없으니 책봉하는 글로 찬양하고 성대한 의식을 빌려 기뻐하는 것은 우리 왕실의 떳떳한 법이다. 소자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간곡히 청하였고 심지어 조정의 관리들을 인솔하고 삼가 요청하였으나 매번 백성들이 현재 곤궁하기 때문에 이런 예식을 거행하는 것이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윤허하지 않았었다. 겸손한 그 덕은 공경히 우러르게 되고 칭송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 자식으로서 이 예식을 거행하지 못한 여한은 일생토록 끝이 없을 것이다. 늙은이를 봉양하는 것은 옛 규례이다. 소자가 일찍이 안에서 여러 차례 간곡하게 청하여 대체로 장수한 사람을 데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년 장수를 빌었다.

계사년(1893)에 영조(英祖)가 이미 실행한 전례를 따라 내외에 잔치를 차리고 노인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춤을 추며 만수를 축원하였다. 그 때 이 잔치에 참가한 사람들은 지금도 모두 넓고 큰 은택을 입고 살아있는데 오직 우리 어머니만이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아! 슬프다.

임오년(1882) 6월에 군졸들이 변란을 일으켜 창황한 가운데 행차가 길을 잃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지 한 달이 되었으나 의심과 위험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아서 감히 이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봉상시 정(奉常寺正) 서상조(徐相祖)가 상소를 올려 아뢰기를, ‘누추한 곳에 숨어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충주(忠州) 장후원(長厚院)에 있는 충문공(忠文公) 민영위(閔泳緯)의 집에 가서 맞이하여 8월 1일에 환어(還御)하였다.

갑신년(1884) 역적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의 무리들이 변란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니 거가(車駕)가 파천(播遷)하고 위기를 예측할 수 없었다. 소자가 신정 왕후(神貞王后)와 우리 어머니를 모시고 동성(東城) 밖으로 피난 갔는데 어머니가 소자에게 이르기를, ‘나는 진실로 이 무리들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의심한다. 이 무리들을 죽이면 저절로 무사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윽고 역적이 과연 평정되었다.

갑오년(1894)에 여러 흉적들이 조정을 뒤엎고 조종(祖宗)들이 이루어놓은 법을 다시 남겨두지 않았으며 크고 작은 제사에 이르기까지 모두 줄였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때에 따라서 가감하는 것은 시대에 적절하게 하려는 것이며 일부러 바꾸어서 전과 다르게 하자는 것은 아닌데 지금 일체 변역하였으니 어찌 모두 실행하겠는가? 또한 제사는 천지(天地)와 조종을 섬기는 것이다. 흉악한 무리들의 악행이 이미 가득 찼다. 원통하고 원통하다.’라고 하였다.

을미년(1895) 8월 20일 사변은 만고천하(萬古天下)에 없었던 것이다. 아! 저 김홍집(金弘集)은 실로 우두머리 군흉(群凶)이며 유길준(兪吉濬), 정병하(鄭秉夏), 조희연(趙羲淵)은 한 패거리로서 결탁하여 흉악한 음모를 비밀리에 꾸몄는데 형적(形跡)이 상세히 폭로되었다. 어머니가 급히 피하려고 하니, 정병하가 길을 막으며 피하지 말 것을 주청하였다. 외국의 군대가 대궐에 난입하였는데 정병하가 이렇게 주청한 것은 우리의 난군(亂軍)을 중지시키려 한 것뿐이었다. 아! 네 흉적의 심보는 모두 한결같지만 그 중에서도 정병하는 더욱 극히 흉악하고 참혹한 자이다. 외국 군대가 와서 호위했다는 거짓 조서(詔書)를 22일에 자기가 써서 임금에게 강제로 반포하게 하였으니 조서는 다 네 역적이 만든 것이다. 네 역적의 죄는 그 잔당을 남김없이 씨를 말린다 한들 어찌 소자의 끝없는 통한을 조금이나마 씻을 수 있겠는가? 김홍집정병하는 이미 처단하여 형률을 바로 적용하였지만 유길준조희연은 법망에서 새어나갔다. 내가 거상 중에 있으면서 군사와 나라를 위하여 흉적을 처단하지 못했으니 감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다 같이 이에 종사하기를 원하고 있으니 만약 혈기있는 사람이라면 그 의리도 같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우리 황제 폐하의 높은 공훈과 훌륭한 덕은 하늘의 운수와 배합되어 능히 대업(大業)을 넓혔고 자주권(自主權)을 행사하였다. 모든 백관(白官)과 군민(軍民)들이 한 목소리로 황제 폐하에 오르기를 우러러 청하였는데 굳이 사양하다가 사람들의 여정을 막을 수 없어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빈전(殯殿)의 의장과 기물은 다 황색을 써서 법도대로 하였으나 황후 폐하 자신이 직접 볼 수가 없으니, 끝없는 나의 비통함은 더욱 망극함이 간절하다.

황제 폐하가 친히 지은 행록에서 지극하고 극진하니, 내가 다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그러나 어머니의 지극한 자애로움과 소자의 지극히 비통함을 더 자세히 써야 할 것이 있기 때문에 중복됨을 구태여 피하지 않았다. 또한 귀와 눈으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역시 감히 그만둘 수 없었다. 생각건대, 우리 어머니의 아름다운 말과 선행이 어찌 여기에 그치겠는가? 아! 슬프고 슬프다."

하였다.

묘지문의 행록(行錄)에,

"신 민영소(閔泳韶)는 삼가 대행 황후 지문 제술관(大行皇后誌文製述官)으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신이 어찌 감히 이 임무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황공하고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가 조지(詔旨)를 받드니, 이르기를, ‘행록을 짓고 이어 지문을 짓는 것은 명릉(明陵)은 신사년(1881), 홍릉(弘陵)은 정축년(1877)의 전례에 이미 있다. 지금 행록을 내려 보내니, 지문에는 동궁(東宮)이 몹시 슬퍼하는 것을 쓰겠지만, 또 다 기록하지 못한 것을 거두어 모아 더욱 상세하게 쓸 것이다. 백대(百代) 후에 가서도 반드시 그 뜻을 슬퍼하고 그 효성을 탄복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 일체를 지문의 뒤에다 새기도록 하고 역시 제술관을 시켜서 그 사실을 밑에다 첨부하여 자세히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히 받아 읽어보고 칭송하고 감탄하기를 마지않았으며 계속하여 눈물이 흘러 두 볼을 적셨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황제 폐하가 간곡히 돌보며 슬퍼하는 생각은 장례까지 극진하게 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나며 심지어 광중에 들여 놓는 글에서까지 해와 별처럼 밝게 비쳐 주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황태자의 효성은 타고난 천성으로서 끝없는 비통한 생각을 품고 원통함을 생각하면서 격려하는 뜻이 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아! 이미 짓고 또 지었으니 그 훌륭한 글이 간결하면서도 실속이 있어 마치 천지가 포용하지 않은 것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가까운 시일에 친밀하게 명령을 받은 것과 수십 년 동안 훌륭한 덕과 아름다운 모범이 장차 역사에 기록되고 내세에 명령이 될 것에 의하여 귀와 눈으로 직접 본 것만 해도 그 만 분의 일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때문에 신은 한 자(字) 한 구(句)가 친절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감탄합니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큰 덕은 반드시 얻는다.〔大德必得者〕’라고 한 것은 반드시 이러한 이치가 있기 때문에 성현(聖賢)이 정확하게 말한 것입니다.

대체로 우리 황후의 인자하고 착한 공로와 덕은 마땅히 하늘이 도와주어 영원히 늙지 않도록 복을 줄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그 복록과 은택을 영원히 받게 해야 할 것인데 이어 위험한 구렁텅이에 빠져 간고한 시련과 위험한 고비를 겪더니 심지어 만고천하(萬古天下)에 듣지도 보지도 못한 더없이 흉악한 참변까지 있었습니다. 대체로 이치라고 말하는 것은 이 마당에서 더 말할 수 없습니다. 이치란 바로 하늘인데 하늘 역시 때에 따라서 비운과 암흑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체 세상의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 재앙과 복을주재하지 못하고 괴이하고 간사한 것을 반드시 쳐 없애지 못하니 하늘도 과연 믿을 수 없습니다.

아! 슬픕니다. 예로부터 흉악한 역적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을미년(1895)의 여러 역적들과 같은 큰 역적이 있었겠습니까? 을미년의 변란은 갑신년에서 시작한 것으로서 구차하게 그럭저럭 살아가다보니 능히 같은 목소리로 일제히 성토하여 남김없이 처단하지 못한 까닭에 마침내 가장 흉악하고 포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조정의 반열에 있으면서 서로 은밀히 결탁하여 선왕(先王)들의 법도를 변경시켜 하나의 큰 사변을 무르익게 하였습니다.

무릇 신하된 사람치고 누가 감히 그 죄에서 빠져 나가겠습니까? 두 역적은 이미 처단했지만 절대로 나라의 법을 통쾌하게 적용하고 귀신과 사람의 울분을 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괴수가 법의 그물에서 빠져 나가 아직도 천지간에 숨 쉬고 있으므로 온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살점을 씹어 먹고 그의 피를 마시기를 원하는 것은 먼 데나 가까운 사람이 구별이 없고 낮은 사람이건 높은 사람이건 오직 한결같습니다. 그런데 원한을 참고 견디면서 저 푸른 하늘을 함께 이고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치는 이미 없어졌고 의리도 또한 없어질 것입니다. 《춘추(春秋)》의 의리로 나라를 위하여 무시로 일을 하는 사람이 나라의 원수를 보복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나라의 규칙이 무너진 것이고 형벌에 관한 정사가 폐지된 것입니다. 설사 나라가 없다고 말해도 옳을 것입니다.

황태자가 일찍이 조정에서 신하들을 면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나라를 나라라고 하겠는가?’라고 하니 뜰에 가득 찼던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고 땀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몸 둘 바를 몰라 감히 우러러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루 동안에 그 소문이 구역에 두루 퍼져서 거리의 아이들까지 무시로 일을 따르는 의리를 알게 되었으며 역시 《춘추》의 법을 능히 말하였습니다. 신은 반드시 여러 역적들을 앞으로 나라에서 처단하여 그 죄를 똑바로 밝히고 큰 의리를 천하에 펼 날이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나라의 큰일이며 황태자가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남긴 뜻입니다.

생각건대, 우리 대행 황후는 평상시에 좋은 계책과 좋은 훈계로 충효(忠孝)를 숭상하여 가까운 곳으로부터 먼 곳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마음과 골수에 젖어 있으니, 우리나라 만대의 왕업에 기본이 되어 있습니다. 황제는 용맹과 지략은 하늘이 내놓은 것으로서 큰 국난을 평정하고 비로소 자주권을 세웠으므로 높고 낮은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왕위를 높이고 존호(尊號)를 올렸습니다. 황후는 실로 보배로운 존호를 받았으니 이것은 큰 덕을 지닌 분에게 하늘이 보답한 것입니다.

신이 이에 대해서 감히 글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고 또 감히 외람되다고 해서 스스로 막고 나서면서 빠질 수도 없습니다. 신이 편벽되게 은혜를 입어 친필로 ‘한 마음으로 폐하(陛下)를 섬기라.’는 글을 써 주는 것을 받았습니다. 은총을 많이 입었으나 우러러 생각할 때 조금도 보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 훌륭합니다. 아! 슬픕니다."

하였다.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민영소(閔泳韶)가 지어 올린 것이다.】


  • 【원본】 40책 36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8면
  •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

大行皇后誌文御製行錄曰:

大行皇后姓閔氏, 世籍驪興, 肇祖曰稱道, 仕高麗爲尙衣奉御。 三世而有曰令謨, 官集賢殿大學士上柱國大師, 諡文景。 四世而曰宗儒, 官重大匡贊成事, 諡忠順文景忠順, 史有傳入。 本朝曰審言, 開城副留守, 曰沖源, 逸執義。 三世而至齊仁。 號立巖左贊成, 又四世而至光勳觀察使, 贈領議政。 曰維重屯村誕我仁顯聖母, 封驪陽府院君, 贈領議政, 諡文貞。 柱石王國, 楷範士林, 追腏孝宗廟庭。 曰鎭厚趾齋, 左參贊, 諡忠文。 沈機弘猷, 爲國蓋臣。 從享景宗廟庭, 寔后五世祖也。 高祖翼洙, 逸掌令, 贈吏曹判書, 諡文忠。 講道林樊, 爲儒之宗。 學者稱夙夜齋先生。 曾祖百奮, 行大司成, 贈左贊成。 剛果敢言, 直而不撓。 祖耆顯。 號二松, 吏曹參判, 贈領議政。 孝友淸儉, 聞望當世。 考致祿棲霞, 僉正, 贈驪城府院君領議政, 諡純簡。 學識淹博, 淵源有自。 元配海寧府夫人吳氏, 逸贊善贈吏曹判書文元公 熙常女。 繼配韓昌府夫人李氏, 贈吏曹判書圭年女, 吏曹判書贈領議政忠貞公蒼谷 顯英之後也。 韓昌, 以辛亥九月二十五日丁丑子時, 誕后于驪州近東面蟾樂里私第。 是夜紅光照耀, 異香滿室。 后性端莊齊遬、聰明仁愛, 自幼動止有常, 未嘗有劇言笑。 見童媛折花挑蟲爲戲, 止之曰: ‘長養喙息, 與汝同耳’, 其仁物之心, 夙異於凡。 受學于純簡公, 讀數三過, 輒成誦。 難其奧旨, 辦對條鬯, 又强記識, 雖尋常事物, 一經耳目, 悉無遺。 喜閱書, 歷代治亂得失, 若視諸掌。 國家典故及列聖朝嘉言、善行或史乘與寶鑑所未載者, 后能言之。 此, 其家庭見聞有素有, 非他家所能及。 至正位坤極, 所助者深, 平日所學之力也。 九歲喪純簡公, 哭泣持制, 如成人。 襲斂時, 家人念后沖齡勸少避, 后正色曰: ‘何欲奪人至情乎?’ 及襄禮時, 至事畢哭盡哀, 然後乃退。 及其喪府夫人也, 愼終凡具, 皆自內取辦, 哀毁踰度。 后兄升鎬之喪, 悲悼如不自勝。 后之孝友, 蓋根於天也。 歲乙丑, 后於安國洞私第, 夢仁顯聖母錫玉圭一, 敎曰: ‘汝當坐吾座。 錫爾祚胤, 永綏我邦國萬億年無疆之福。’ 府夫人夢, 亦如之, 聖母敎曰: ‘善敎此兒, 吾爲宗國厚望也。’ 家廟前有松偃蓋, 是歲古根抽枝, 玉梅再榮。 后私第卽仁顯聖母私第也。 有堂曰‘感古,’昔我英祖瞻拜于是, 而御筆揭扁聖母嘗御之所也。 德門毓慶, 符瑞炳靈, 詒厥孫謨者, 有如此矣。 丙寅膺德選, 其在別館, 以《小學》《孝經》《女訓》等書, 至夜分不釋卷。 好學亦天性也。 三月二十日己卯, 冊爲王妃, 越翌日, 行嘉禮。 后入宮, 事我神貞聖母, 至誠洞屬, 志物克備。 鉅細必稟, 先意將順。 聖母常曰: ‘孝哉, 坤殿也。’ 聖母春秋彌隆, 晨昏之外, 密候起居, 供奉之節, 必得適宜。 庚寅患候時, 后宵衣不離側, 以手按摩所患部位。 聖母念其勞瘁, 命歸休, 猶不退處。 燕寢湯劑水剌, 非后勸進, 則不爲進御。 以故不敢晷刻違也。 一日, 聖母執手, 敎曰: ‘吾耋且病憊矣。 一念惟是民國, 外事有主上在, 內事托付坤殿, 吾復何憾?’ 及鉅創, 終事必恔, 饋奠必敬。 凡百應用, 務極精潔。 遇有所嘗嗜好, 必薦于孝慕殿。 祔廟時, 紬帳, 后手親裁。 每對老宮人, 輒泫然曰: ‘掁觸悲感。’ 后, 於聖母, 終身慕之矣。 廟、宮、陵、園、諸山川祭器有缺, 享需未裕, 悉出內帑, 補葺增置。 忌辰, 必盛服達曙, 私忌亦然。 每歲仲春, 親蠶北苑, 以供齊明。 苑果初熟, 先薦嘗之, 此后之追先重本也。 撫懷戚聯, 疏近咸得其懽。 或有干恩, 誡之曰: ‘常裁抑之。 猶慮其驕侈, 況假之羽乎? 非所以愛之, 反所以害之。’ 此后之尙敦睦也。 癸酉, 后夢‘天開於子, 五雲玲瓏。 有書自天而降曰「太平萬歲」, 后拜而受。’ 越明年, 皇太子誕焉。 后, 於皇太子, 恩愛雖勤, 其義方之敎, 嚴若師道。 自甫能言語, 授之以書, 及齒學而日開書筵。 后每問所講文義, 以日用常行之事, 設爲譬喩, 曉明其意。 必使理會分晳, 時復尋溫討論, 務要知之詳而記得牢。 今日溫文成就, 后之力也。 撫子女御宮中, 雍睦關睢之化, 藹若春和。 及有所生, 恩斯備至。 每有四方水旱災異, 后憂形于色, 務加優侐。 溽暑祁寒, 賙恤都下窮蔀, 歲以爲常。 貧不能辦婚喪者, 厚賜予。 丙子, 歲大侵, 蠲減租稅, 經費窘跲, 捐金穀以補缺。 衛卒之艱苦, 出兵之暴露, 別令犒饋。 勞問使者相續, 士皆感淚, 人各爲用。 屢經鬱攸, 每截禁掖隷, 毋得近火撲滅, 愛玩珍奇, 一無所問。 眞殿、南殿銀器閪失, 卽自內鑄進, 勿令究問。 慮有無辜橫罹。 御下, 寬而嚴, 恩威交濟, 宮中感化, 相戒毋岡‘此后深仁厚澤之浹冾于人也。’ 家世講義理, 后自幼沖, 厥有所受, 辨淑慝明是非, 如斬釘截鐵, 叡智天縱, 知幾如神。 自遭艱會, 尤有所密勿贊助。 朕有愆和, 必待朝而坐, 朕有虞戒, 則籌劃而紓之。 至於交涉之際, 勸朕以綏遠, 使价之自各國還者, 言異國人皆感服云。 后嘗有勖朕以言, 比年所歷, 皆后所嘗爲言者, 而事事皆驗, 若合符契。 后之達識遠慮料事於未來者, 卓越古今, 非人之所可及。 壬午軍變, 后雍容處權, 不隕厥問。 及還御, 或言亂卒當鋤治, 后曰: ‘由予否德, 且有關氣數, 此豈若輩所爲也?’ 《易》曰: ‘含弘光大, 德合無疆。’ 后德以之矣。 甲申, 賊臣玉均泳孝英植泳敎作亂, 詐言有變, 殿宮播遷, 國勢危在呼吸。 先是, 后洞諭孝賊賊, 折其陰謀, 及其猖獗, 諸賊自相疑沮, 各自逃命, 亂尋平。 方后避于城東, 奉衛慈聖, 庇護東宮, 蒼皇扈從者, 一不散去。 后平日恤下以恩, 臨難有勇夫矣。 甲午外兵入闕, 朕勸后與東宮避于乾淸宮, 俄而還御于咸和堂, 曰: ‘一宮之內, 去將安之? 毋寧在此以鎭群情耳。 且今失太阿之柄矣, 旣不能斷諸賊之首, 不如姑且包容以緩其凶鋒矣。’ 諸賊乃變革憲章制度, 大小享祀, 亦皆裁省。 后太息曰: ‘是豈可損益者耶? 諸賊獲罪神天, 貫已盈矣。’ 眞殿祭品, 壹遵舊章。 后飭掖隷, 勿令諸賊知之。 后嘗語及用人, 每申複不已曰: ‘國家治亂安危, 惟在於用人之得失與否。 知其賢乎, 則當專任而勿貳, 知其不賢乎則宜亟去之。 夫大奸若忠, 所以知人之難。 而至於疑其奸而姑且任用, 則此所以釀成禍患也。’ 朕未嘗不以后言爲確論, 而不克勇斷亟斬弘集吉濬羲淵秉夏四賊, 遂使潛招外兵, 陰嗾訓隊, 至有乙未天下萬古所未有之大變。 嗚呼! 朕負后矣。 后於朕懇拳一念。 雖於寒暄節嗇之方, 惟慮有闕失慥慥然如不及, 而朕不能保后躬於宮禁之內。 嗚呼! 朕負后矣。 悲今追曩, 悔恨曷已? 后崩于景福宮坤寧閤, 八月二十日戊子卯時也。 春秋四十有五。 其日曉, 朕曁后, 彷徨于坤寧閤之北小軒, 方兇逆攔入, 闕中騷動, 后慨然勉朕曰: ‘願毋忘宗祀之重。’ 雖於危棘之際, 眷眷宗祀者如此。 已而不復見后, 惟此一語, 遂作千古永訣。 慟矣! 今番複褶諸具帷帳等屬, 自內備用, 不煩度支, 所以體后疇昔念國計省民力之至意也。 兩賊, 旣斯得正罪, 兩賊, 竝逋亡, 迄未就獲。 東宮枕戈之恩儘可哀憫矣。 群臣考古諡法, 照臨四方曰‘明’, 禮樂明具曰‘成’, 冊諡曰明成。 陵號曰洪陵, 殿號曰景孝。 卜兆于楊州 天藏山下艮坐之原, 將以光武元年丁酉十月二十八日甲申辰時而葬焉。 石儀之設, 雖姑不用, 虛右之制, 朕志有在矣。 梓宮上字, 東宮敬寫, 下玄宮銘旌, 朕所親書。 庶可以伸孝思而寓悼懷焉。 后屢膺顯冊。 癸酉, 廷臣上尊號曰‘孝慈’, 戊子、庚寅、壬辰, 皇太子加上尊號曰‘元聖’, 曰‘正化’, 曰‘合天’。 丁酉, 大小臣民, 以國家違獨立之基, 行自主之權, 而自大明以後, 天下禮樂, 盡在東方, 宜嗣帝統。 搢紳、士庶、軍伍、市井, 一辭同聲, 章數十至, 朕揖讓者屢, 無以辭, 乃於九月癸卯, 告祭于天地, 卽皇帝位, 定有天下之號曰‘大韓’, 以是年爲光武元年, 改題太社太稷, 以金寶金冊, 命后爲皇后, 王太子爲皇太子, 王太子妃爲皇太子妃。 夫以后功德之盛, 所以左右朕以治。 朕有今日, 而后未之及見, 噫矣! 誕四男一女, 皇太子, 序居第二。 聘左贊成贈領議政忠文公 閔台鎬女爲妃。 一男元子, 三男太君, 四男大君, 一女公主, 皆早夭。 完和君, 未娶而夭。 義和君, 娶今郡守金思濬女。 二翁主竝夭。 嗚呼! 后御中壼而贊至理, 凡三十載, 不克處順而履常, 乃反艱難之險阻之, 未及中身而崩殂。 是豈天乎? 其輔佐相成而內治仁明, 可垂爲謨訓於萬世者, 固非一二可旣, 多難至慟之中, 槪不得記省。 然又有東宮所製行錄, 該而備焉, 可徵百世。 朕何言哉? 嗚呼! 使后而克享永年, 陰功柔化之有光宗國而可書之策者, 又何限? 此, 朕所以疑於天理而不能無憾焉者矣。 嗚呼! 哀哉!

睿製行錄曰:

慟哭慟哭。 人孰無父母, 父母孰不愛其子, 而至慈之情, 宜無如聖母之於小子矣; 至慟之哀, 宜無如小子之於聖母矣。 小子旣壯, 而猶撫之若乳孩。 飢飽寒煖, 意有所欲, 聖母必先知之, 有疾恙, 則進御寢睡, 爲之減損。 小子苟非劇痛, 則强飮啖, 夜或假寐, 欲以少釋惟憂之念。 而密候兩殿起居, 則綺疏燈光靑熒, 玉音猶琅然矣。 小子之遘痘也, 聖母夜必露禱于天, 乃克平順, 小子嘗苦脥中痰核, 雖非刺痛, 及妨咀嚼, 聖母常慮久或腫發, 敎塗以不語涎, 令硬者以輭, 遂如平昔, 而聖母未及見焉。 小子纔齠齔時, 與小宮娃嬉于庭, 聖母敎曰: ‘汝樂此乎? 又有樂於此者矣。’ 輒敎以字書口誦而手模。 及自齒學, 書筵所講, 聖母每令尋繹文義, 引近事反覆爲譬, 務令易曉。 到得心悅時, 方及下段以故知無不精。 又以國家典故、列聖朝政敎謨訓, 亹亹誨之, 至今丁寧若辟咡承聆。 而修齊治平之要, 不外乎是。 蓋淪肌浹髓, 切於體行, 尤有力於尋數而得之者矣。 聖母孝思根天, 凡於奉先, 靡不用極。 外祖父純簡公墓所緬奉也, 術者言‘某地佳而有冡當移者’, 則聖母曰: ‘爲其親, 達于上下, 豈有欲利己而害人耶?’ 占吉于保寧, 程里逾遠, 費甚鉅而不之較, 悉出內帑取辦, 公物及民力, 一不與焉。 局內民戶之撤移, 紼路所經田稼之毁損及片石簣土, 必諧價優給, 字恤民生之聖念, 無微不燭矣。 聖母嘗敎小子曰: ‘有國者, 以有民也。 無民, 國何以爲國? 故曰「民惟邦本, 本固邦寧。」 其或上不恤, 民至於困窮而不能聊生, 則民非吾有也, 雖謂之無民可也。 宗祀之托在爾, 爾其念玆在玆, 惟以民事爲心。’ 小子方幼時, 未喩其意, 而猶不忘辭敎。 今愈覺慈訓之可以爲萬世龜鑑矣。 聖母之功之德, 如天地無能名, 顯冊揄揚, 鴻徽屢進, 豐豫飾喜, 自有我家彝典。 小子累牘申懇, 至率廷僚勤請, 每以民方困瘁, 不宜有是擧而靳許。 謙挹之盛德, 欽仰攢頌, 而今則爲小子終天無窮之恨矣。 養老, 古禮也。 小子嘗自內屢懇, 蓋以率壽域之人, 用祈兩聖人無疆之壽。 癸巳, 遵英祖已行之例, 設內外宴, 戴白黃耉傴僂舞蹈, 齊獻千萬歲壽。 預是宴者, 今皆涵泳於仁天雨露, 而惟我皇后陛下不可得以復覿, 慟矣! 壬午六月亂卒作變, 蒼皇中翟駕失行在旣月, 而疑危猶未靖, 莫敢有言之者。 奉常正徐相祖上疏言‘潛御陋地。’ 於是奉迎于忠州長厚院忠文公 閔泳緯第, 八月一日還御。 甲申, 賊臣泳孝玉均英植泳敎輩, 詐言有變, 車駕播遷, 危機不測。 小子奉神貞后曁我聖母, 避于東城外, 聖母敎小子曰: ‘吾固疑此輩有詐。 但殺此輩, 自可無事。’ 已而賊果平。 甲午, 群凶變更朝廷, 祖宗成憲, 無復存焉, 至大小享祀, 亦皆裁省。 聖母流涕, 曰: ‘因時損益者, 要適於時也。 非故易之求異於前, 今一切易之, 豈盡可行者耶? 且祭祀, 所以事天地祖宗也。 凶徒惡已盈矣。 慟矣慟矣。’ 乙未八月二十日之變, 天下萬古之所未有也。 噫! 彼弘集實首群凶, 吉濬秉夏羲淵綢繆和應, 凶謀陰密, 形跡頗露。 聖母急欲避之, 秉夏遮路, 奏請無避。 外兵攔入, 秉夏奏此, 欲戢我亂軍耳。 噫! 四賊, 同一心腸, 而秉夏, 尤極凶極慘矣。 外兵來衛之僞詔, 二十二日自書勒頒之詔, 皆四賊所爲也。 四賊之罪, 雖殪殄其類, 無使遺育, 豈足以少洩小子窮天極地之至慟至恨哉? 弘集秉夏, 旣就戮刑律已正, 吉濬羲淵, 脫漏天網矣。 小子寢苫枕戈, 凶賊未殲, 不敢戴天。 凡我臣庶, 咸願從事, 苟有血氣之倫, 宜其同一義理矣。 惟我父皇陛下, 巍勳盛德, 媲隆三五, 克恢大業, 行自主之權。 百官、軍、民, 合辭仰請, 皇帝陛下, 揖讓未遑, 而群情莫遏, 遂卽皇帝位。 殯殿儀仗器物, 皆用黃色如制。 而皇后陛下, 未及身親見之, 小子靡逮之慟, 尤切罔極矣。 父皇陛下, 親撰行錄, 至矣盡矣。 小子復何容贅焉? 而其於母后止慈之愛、小子之所至慟者, 有可以加詳焉者, 則不敢避申複。 又有耳目所逮者, 亦不敢遂已矣。 惟我聖母嘉言善行, 夫豈止是哉? 嗚呼, 慟矣! 嗚呼, 慟矣!

"臣泳韶。 伏奉大行皇后誌文製述官之命。 臣何敢當是任? 惶恐戰慄, 無以爲辭。 又伏奉詔旨, 若曰: ‘行錄之仍作誌文, 厥有明陵辛巳, 弘陵丁丑已例。 今下行錄, 以誌文入用東宮至慟, 又綴拾所未盡載, 而尤致詳焉。 百世之下, 必有悲其志而嘆其孝者, 一體入刻於誌文之後, 亦令製述官詳載其事, 附記于下。’ 臣拜手稽首, 祗受而敬讀, 欽頌讚嘆, 繼以涕淚交頤。 洪惟我皇帝陛下, 懇拳悲悼之聖念, 其欲極盡於終事者, 至於納隧之文, 昭如日星。 亦惟我皇太子殿下, 以根天之孝, 抱罔涯之慟, 慕冤激勵之意, 溢於文字之外。 嗚呼! 旣作之又述之, 渾渾噩噩典誥之文, 詞簡而實備, 如乾坤之無不包含矣。 臣依近日月密邇承事者、數十年徽德懿範之將垂竹帛而詔來許者, 耳目所逮, 亦可云萬一。 臣以是益嘆一字一句之無不襯切矣。 傳曰: ‘大德必得者’, 其必有是理, 故聖賢丁寧言之。 夫以我皇后陛下之仁之聖之功之德, 宜其天必祐之永錫難老, 使我環東億兆蒼生, 蒙其福澤於悠久。 而乃履習坎而歷艱危, 至有天下萬古所未聞所未有之至凶極變。 夫所謂理, 於是乎不可復言矣。 理卽天也, 而天亦有時否晦。 一切世間修短災福, 不能主宰, 怪沴邪慝, 未必轟擊, 則天果不可諶矣。 嗚呼! 慟矣。 自古凶賊, 何代無之, 而豈有如乙未諸賊之大逆大懟乎? 乙未之變, 始於甲申, 而文恬武嬉, 苟且姑息, 未克同聲齊討, 殲殄無遺, 遂使梟獍豺狼之徒, 容處於朝廷之間, 綢繆盤結, 變更先王法度, 而釀成一大變。 凡爲臣子者, 孰敢逃其罪乎? 兩賊雖已就戮, 未可曰‘夬伸王章, 一洩神人之憤矣。’ 鯨鯢之漏網, 猶且喙息於覆載之間, 帀域臣民之欲噉其肉而歃其血者, 遐邇無別, 小大惟均。 而含恨隱忍, 共戴彼蒼, 以至於今日, 理旣滅矣, 義又將滅矣。 《春秋》之義, 寢苫枕戈, 無時從事者, 謂國讎未復, 則國(網)〔綱〕 壞矣, 刑政廢矣。 雖謂之無國, 可矣。 皇太子殿下, 嘗朝而對群臣, 垂淚而勉之, 曰: ‘國讎未報, 國其可爲國乎?’, 盈庭之臣, 無不涕泣慙汗, 無地措躬, 無敢仰對。 一日而遍于區域, 街章走卒, 亦皆知無時從事之義, 而亦能言《春秋》之法。 臣必謂諸賊行將顯戮于社, 獻䤋于廟, 明正其罪, 伸大義於天下有日矣。 此國家大事也, 皇太子殿下不忍畢辭之餘意也。 惟我大行皇后陛下, 平日嘉謨美訓, 敦尙忠孝, 自近及遠, 浹人肌髓, 基本我宗祊萬世之業。 而皇帝陛下, 勇智天縱, 勘定大難, 創立自主之權, 大小臣民, 咸願推尊位號。 皇后陛下, 誕膺寶號, 此天之所以報大德也。 臣於是役, 旣不敢以不文辭文, 不敢以僭猥自沮而闕略焉。 臣偏荷恩渥, 至蒙賜親書‘一心事君’四字。 龍光昭回, 仰瞻寓慕, 竟未有分寸之效。 嗚呼! 猗矣。 嗚呼! 慟矣。

【宮內府特進官閔泳韶製進】


  • 【원본】 40책 36권 35장 A면【국편영인본】 3책 18면
  • 【분류】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왕실-비빈(妃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