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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4권, 고종 33년 10월 31일 양력 2번째기사 1896년 대한 건양(建陽) 1년

청목재에 나아가 총호사와 의정 이하를 소견하다

청목재(淸穆齋)에 나아가 총호사(總護使)와 의정(議政)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총호사 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김병시(金炳始), 특진관(特進官) 정범조(鄭範朝), 궁내부 대신(宮內府大臣) 이재순(李載純),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희로(李僖魯)이다.】 상(上)이 이르기를,

"산릉(山陵)에 관한 여러 사람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다시 상지관(相地官)을 여러 곳에 보내 간심(看審)하고 오도록 하려고 한다. 그래서 경들을 불러서 만나보는 것이다."

하니, 김병시가 아뢰기를,

"인봉(因封) 기일이 지나 중앙과 지방에서 근심하고 초조해 하고 있는데, 지금 하교를 받들어 보니 더욱더 답답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방도로는 좋은 자리를 다시 잡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이전에 봉표(封標)한 곳이 몇 군데나 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몇 군데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모든 술업(術業)은 정통한 사람이 드물고, 풍수 보는 법은 땅 속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언제나 다른 의견이 많습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이미 서로 다른 논의가 있는 이상 다시 여러 곳을 잘 간심하여 좋은 자리를 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전날 연석(筵席)에서 이미 하교를 받들었습니다. 이제 갑절 더 잘 살피어 좋은 자리를 잡은 다음 인봉하는 것이 하루가 급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전(眞殿)과 빈전(殯殿)을 이미 이봉(移奉)한 만큼 짐(朕)도 이제 경운궁(慶運宮)으로 이어(移御)할 것이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먼저 경운궁으로 이어하시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입니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애타게 바라는 것은 바로 환어(還御)하시는 한 가지 문제인데, 지금 하교를 받들고 보니 너무도 기뻐서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단지 빨리 수리하고 좋은 날을 받아서 이어하시기를 더없이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환어하시는 것을 지금까지 미루어 왔으므로 중앙과 지방의 여러 사람들이 매우 걱정하고 답답해하였는데 이제 이어하신다는 조칙(詔勅)을 내린 후에는 안타깝게 바라던 마음을 아마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각(殿閣)이 완공되면 이어하겠지만, 진전의 처소가 좁아서 매우 송구스럽고 답답하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만약 전각이 완공되면 진전을 새로 세운 처소에 옮기고, 시어소(時御所)는 즉조당(卽祚堂)으로 정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터가 매우 좁아서 불편한 점이 많다."

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요즘 예절이란 없고 단지 제례(祭禮)만 있을 뿐이다."

하니, 조병세가 아뢰기를,

"예법이란 나라가 있으면 있고 집이 있으면 있는 법이니, 어찌 예법을 없애버린 나라와 집이 있겠습니까? 신이 마음속으로 몹시 의심스럽고 괴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복(起復)입니다. 고약한 무리들과 상천(常賤)들도 모두 부모상(父母喪)에 27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제도를 아는데, 지금은 기복을 항식(恒式)으로 여겨 벼슬길에 나서는 길로 삼으니, 어찌 효성을 미루어 충성을 다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런 습관을 빨리 없애 윤리를 바로잡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옳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형정(刑政)을 가지고 말하면 연좌(緣坐)시키는 형률은 나라의 큰 법인데 지금은 연좌법을 적용하지 않으므로, 반역 음모가 드러난 역적들도 단지 몸이나 피할 궁리를 하고 그 지속(支屬)들도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편안히 지내게 하니 난신 적자(亂臣賊子)들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에 대해서도 역시 옛 법을 거듭 밝히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옳다."

하였다. 조병세가 아뢰기를,

"국한문(國漢文)을 섞어 쓰는 규정을 신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신이 맡고 있는 모든 보고는 마땅히 옛 규정대로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하였다. 정범조가 아뢰기를,

"근래에 지방에서 장계나 첩보로 계문(啓聞)하는 일이 없는 것은 나라가 생긴 이래로 들어보지 못한 일입니다. 계문하는 일이 없으면 백성들의 고통과 어려움, 수재(水災)와 한재(旱災), 기근(饑饉)에 대해서 어떻게 환히 알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형편이 위에 알려지지 않으면 그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더구나 어떠하겠습니까? 계문하는 일은 없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그렇다. 지방의 형편을 전혀 모른다는 것은 사체상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병시가 아뢰기를,

"이어와 인봉에 대하여 이미 명령이 있었는데, 심하게 추워지기 전에 빨리 했으면 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 밖의 문제에 대하여는 신이 모두 잘 알지 못하므로 지금 연석에서 위아래가 서로 주고받은 말이 많지만 하나도 귀담아 듣지 못했으니 더없이 황송합니다. 옛날에, 말하기는 쉬워도 해내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는데 또한 밝게 살펴야 합니다."

하였다.


  • 【원본】 38책 3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05면
  • 【분류】
    의생활-예복(禮服) /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왕실-행행(行幸) / 사법-재판(裁判) / 왕실-의식(儀式)

淸穆齋。 召見總護使議政以下。 【總護使趙秉世、議政金炳始、持進官鄭範朝、宮內府大臣李載純、掌禮院卿李僖魯】 上曰: "山陵衆論岐異, 將欲更送相地官於各處, 看審以來。 故召接卿等矣。" 炳始曰: "因封過期, 中外憂遑, 今伏承下敎, 尤不勝悶迫。 爲今之道, 更卜吉地, 一日爲急矣。 曾有封標幾處乎?" 上曰: "有幾處矣。" 炳始曰: "凡術業鮮有精明, 而堪輿之術, 地中難知, 故每多甲乙之論矣。" 秉世曰: "旣有岐異之論, 則不得不更爲看審諸處, 以卜吉地矣。" 範朝曰: "向日筵中, 已有承聆下敎者矣。 到今倍加審愼, 擇占吉岡, 卽行因封, 一日爲急矣。" 上曰: "眞殿、殯殿旣爲移奉, 朕亦將移御于慶運宮矣。" 炳始曰: "先爲移御于慶運宮, 猶爲幸矣。" 秉世曰: "一國臣民之所顒望者, 卽還御一事。 而今承下敎, 欣歡之忱, 無以仰達。 惟從速修繕, 擇吉移御, 千萬伏祝矣。" 範朝曰: "還御之尙今遷就, 中外群情, 擧切憂悶, 今此移御詔勅之後, 庶慰顒望之情矣。" 上曰: "殿閣造成則當移御, 而眞殿處所狹窄, 極爲悚悶矣。" 秉世曰: "若成殿閣, 則眞殿移安于新建處所, 時御所卽祚堂爲好矣。" 上曰: "基地甚狹, 多有難便。" 仍敎曰: "近無禮節, 只有祭禮矣。" 秉世曰: "禮者, 有國則有禮, 有家則有禮, 豈有廢禮之家國乎? 臣之滿心疑怪者, 起復也。 悖類常賤, 皆知父母之喪二十七月之制, 而今則起復, 視以恒式, 以作出仕之路, 豈有推孝盡忠之理乎? 亟袪此習, 以正倫常焉。" 上曰: "果然矣。" 秉世曰: "以刑政言之, 緣坐之律, 國家之大典。 而今則不施坐律。 謀逆現露之賊, 只圖避身, 使支屬晏若無事, 亂臣賊子, 何懼之有乎? 此又不可不申明舊典矣。" 上曰: "然矣。" 秉世曰: "國漢文交書之式, 臣誠莫曉矣。 臣之所掌凡奏, 當以舊規擧行矣。" 上曰: "如是爲之也。" 範朝曰: "近無外道狀牒啓聞者, 有國以來未聞者也。 無啓聞則民生之疾苦艱難, 水旱饑饉, 其何以洞燭乎? 民情不得上達, 則其所冤鬱, 尤當如何乎? 啓聞不可無者矣。" 上曰: "果然矣。 外道事狀漠然不知, 事體不當如是矣。" 炳始曰: "移御與因封, 旣有成命, 未甚寒前速成, 是所顒祝。 餘外事, 臣都茫昧, 今筵中多有上下酬酌, 而一不諦聽, 極悚極悚。 古有: ‘說時容易, 做時難之’語, 亦惟在澄省矣。"


  • 【원본】 38책 34권 58장 B면【국편영인본】 2책 605면
  • 【분류】
    의생활-예복(禮服) / 왕실-국왕(國王) / 사법-치안(治安) / 왕실-행행(行幸) / 사법-재판(裁判)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