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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3권, 고종 32년 3월 22일 계사 3번째기사 1895년 대한 개국(開國) 504년

정석오가 백성들의 살림을 마련해 주는 방책에 대하여 상소를 올리다

전 부정자(前副正字) 정석오(鄭錫五)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듣건대 백성들은 나라의 근본으로서 근본이 든든해야 나라가 편안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근본을 든든히 하고 나라를 편안히 할 방책으로는 백성들의 살림을 마련해 주는 것만한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겸병(兼竝)이 시작되면 백성들이 생업을 잃게 되는 것은 이치상 당연한 것입니다. 또 백성들에게 일정한 살림이 없으면 방자하고 요사한 짓을 못하는 것이 없게 됩니다. 지난 번 낭묘(廊廟)의 여러 신하와 방백(方伯), 수령(守令)들이 보답할 책임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제 배만 불릴 욕심을 부리면서 무겁게 거둬들이고 포악한 짓을 계속하여 원칙에 어긋나게 빼앗고 명색 없는 형벌을 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넉넉한 사람은 스스로 보존하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떠돌아 다니지 않을 수 없게 한 결과 우리 조종(祖宗)들이 500여 년 간 길러온 백성들로 하여금 위를 그르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동도(東徒)에 이름을 걸기도 하고 남학(南學)이라고 거짓으로 부르기도 하면서 한 사나이가 떨쳐나서 부르짖으면 만 사람이 일제히 호응하니 어찌 위태롭지 않으며 어찌 통분하지 않겠습니까? 이에 군사를 동원하여 남쪽으로 치고 동쪽으로 토벌한 지 겨우 수십 일도 채 못 되어 해서(海西)의 비류(匪類)들이 다시 들고 일어났습니다. 만일 이렇게 계속된다면 전란이 잇대고 화(禍)가 이루어지는 것을 막아낼 수 없어서 그 형세는 백성들이 없어지는 지경에 이를 것이 뻔 한데 백성이 없고서야 나라가 어찌 나라 구실을 하겠습니까? 나라가 유지되는가 망하는가 하는 위급한 징조가 눈앞에 닥쳐왔으니 바로잡을 방도를 정말 한 시각도 늦출 수 없겠습니다. 일전에 내린 칙지(勅旨)를 보건대 호서(湖西)에 재해(災害)에 따라 조세를 감해 준 면적이 7,000여 결(結)이고 전란 피해를 특히 심하게 입은 마을들의 호포(戶布)와 같은 명색(名色)을 모두 면제시켜 주었으니 아! 훌륭합니다. 백성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큰 성인의 훌륭한 덕과 지극한 뜻이 여느 경우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목숨을 가진 모든 사람들로서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는 남다른 은혜를 특별히 입었으니 누군들 감동되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오늘의 급선무는 백성들의 살림을 마련해 주는 것보다 급한 것이 없고 백성들의 살림을 마련해 주는 데서 급선무는 농사에 힘쓰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토지를 겸병하는 폐단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이미 토지가 없는 데다 식량마저 부족합니다. 그래서 놀고 먹는 길로 내달리면서 떨쳐 일어나지 못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토지가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백성들과 토지가 있어 스스로 농사짓는 백성들로 하여금 호(戶)별로 사람수를 계산하도록 하고 토지를 많이 겸병한 사람들로 하여금 토지를 나누어 골고루 분배하도록 하여 각기 농사에 힘쓰도록 한다면 생업을 잃고 놀고먹는 사람들이 농사짓게 되어 모두 다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니 도대체 무슨 딴 꿍꿍이를 감히 하겠습니까?

아! 저 동학(東學)과 남학(南學)의 무리들이 어찌 본성(本性)으로부터 나온 것이겠습니까? 사실은 생업을 잃고 놀고먹는 데로부터 나온 것이며, 또 관리들이 못살게 구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고통에 몰려서 한 오리의 목숨도 아낌없이 선뜻 물과 불 속에 뛰어들어 이런 고약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 죄를 따져보면 용서할 수 없으나 그 진상을 캐어 보면 역시 측은합니다. 이제 백성들의 살림을 마련해 준 후에 잘못을 뉘우치고 교화되어 어진 백성으로 되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역시 용서해 주고 허락한다면 비도(匪徒)들은 스스로 숙어들고 도적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변란을 크게 겪은 나머지 경상도(慶尙道) 대구(大邱) 등 17개 읍(邑)과 전라도(全羅道), 해서(海西), 관서(關西) 등 도(道)에서 농민들을 구제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는데 나라에 저축한 곡식이 없으니 앞으로 무엇으로 구제하겠습니까?

신이 어리석은 생각으로 헤아려 보건대 충청도(忠淸道)는 이미 전에 없던 은전을 입은 만큼 구제할 필요가 없겠습니다.황해도(黃海道)와 평안도(平安道)는 비록 변란을 겪었다고는 하지만 일본 군사들의 도움을 많이 받아 부유한 백성들이 저축한 곡식은 별로 손해를 입지 않은 만큼 각 방(坊)과 각 면(面)들에서 농량(農糧)이 없는 빈민들을 따져보고 호별로 성책(成冊)한 다음 요민(饒民)들이 먹고 남는 곡식을 뽑아내어 해읍(該邑)로 하여금 분배해서 획급(劃給)하게 함으로써 햇보리가 날 때까지 지탱하게 하고 가을에 가서 원곡식으로 도로 그 임자에게 갚게 하되 이자를 받는 폐단을 아예 금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넉넉한 사람은 구차한 형편을 구제한 은혜를 베푼 것으로 되고 가난한 사람은 은혜를 입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 가난한 사람과 넉넉한 사람이 마음을 합치고 위아래가 화목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경상도대구 등 17개 을과 전라도는 변란 피해를 특별히 심하게 입어 넉넉한 사람들조차 스스로 지탱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가난한 사람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특별히 대궐 창고의 돈 몇 백 만 냥을 낸다면 이 백성들을 구제할 수 있고 또한 올해의 농사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대궐 창고에 저축이 없다는 것은 백성들도 다 같이 알고 있는 것이니 무엇으로 구제하겠습니까?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농사짓는 사람이 없으면 군자(君子)를 먹여 살릴 수 없고 군자가 없으면 농사짓는 사람을 다스릴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변란을 겪은 뒤끝에 죽음에 닥친 이 백성들은 바로 그전에 군자들을 먹여 살리던 어진 백성인데 그들을 돌보아 주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어찌 살아나가겠습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부득불 많은 자금을 마련해 내야만 이 큰 정사를 해낼 수 있는데 여기에도 방책이 있습니다.

근년에 팔도(八道)의 각읍에서 탐관 오리들이 탐오한 돈을 하나하나 채근하여 받아낸다면 거액의 돈을 얻을 수 있어 여유작작하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독촉하여 거두어들이는 과정에는 시일을 지체시키기가 쉬우나 그렇게 해서야 눈앞에 닥친 급한 형편을 어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탐오한 돈을 거두어들이기 전에 중앙에서는 조정에 있는 백관(百官)들과 지방에서는 방백과 수령들이 각각 한 달분의 봉급을 바쳐서 우선 탐오한 돈의 액수를 채우고 탐오한 돈을 거두어들인 뒤에 액수대로 계산해 준다면 한때의 임시방편으로 될 것 같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여 넉넉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 사람이 한 숟갈씩 밥을 나누어 주는 이 은혜로 저 수백만의 백성들을 살린다면 어찌 훌륭하고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먹을 것을 쳐다보는 오도의 백성들이 온전하게 살아나는 은혜를 입게 되어 훌륭한 덕을 노래할 것이니, 임금의 덕으로 살아났다는 노래를 오늘에 와서 다시 듣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비류들이 없어지고 도적 무리들이 숙어드는 것을 날을 찍어 놓고 기다릴 수 있을 것이고 살 곳을 얻지 못한 사나이가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호구가 해마다 늘어나고 저축이 날마다 넉넉해지며 늙은이는 비단옷에 고기를 먹고 백성은 굶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된 다음에야 군사를 길러서 스스로 든든해질 수 있으며 또한 동양(東洋)에서 자주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도 잘 다스려지고 편안하지 않은 적이라곤 없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陛下)는 깊이 살피고 원대하게 생각하면서 사람이 변변치 못하다고 그 의견까지 덮어버리지 말고 빨리 유사(有司)에 명하여 방책을 충분히 의논해 가지고 즉시 시행하게 함으로써 농사철을 놓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하였다.


  • 【원본】 37책 33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4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사상-동학(東學) / 농업-권농(勸農)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

    前副正字鄭錫五疏略: "臣竊伏聞, 民惟邦本, 本固邦寧。 顧今固本安邦之策, 莫若制民之産。 夫兼竝作而小民失業, 理之固也。 且民無恒産, 放辟邪侈, 無不爲矣。 而向者廊廟諸臣、方伯、守宰, 不思報答之責, 專肆肥己之慾, 加以重斂, 繼以暴虐, 奪之非義, 刑之無名。 富者不能自保, 貧者未免流離。 使我祖宗朝五百餘年培養之赤子, 有非上之心, 無生世之樂。 於是乎或託名‘東徒’, 或假稱‘南學’, 一夫奮呼, 萬人同聲, 豈不危哉, 豈不痛哉? 爰興師旅, 南征東討, 纔未數旬, 海西之匪類復起。 苟如此不已, 兵連禍結, 莫可止遏, 勢必至無民, 無民而國何以爲國乎? 危急存亡之漸, 迫在燃眉, 矯救之方, 實不可晷刻少緩也。 日昨伏見勅旨下者, 湖西災減結爲七千餘結, 被燹尤甚之村閭, 戶布名色, 一竝蠲除, 猗歟盛哉! 大聖人愛恤元元之盛德至意, 逈出尋常萬萬, 凡在含生之類, 特蒙如傷之殊恩, 孰不感喜歡忭也哉? 然而方今之急務, 莫先於制民之産, 民産之急務, 莫先於務農, 而以兼竝之弊, 貧者雖欲耕作, 旣無田土, 又乏資糧, 所以駸駸於遊食, 不能振作也。 爲今之計, 使無田失農之民, 與有田自耕之民, 逐戶計口, 使廣置兼竝者, 分田均排, 俾爲各自務農, 則失業遊食者歸農, 擧致鼓腹之資, 夫何他變之敢圖? 噫! 彼東徒、南學, 豈其本性也哉? 實由於遊食失業, 且不堪官吏之侵虐, 困苦所迫, 不惜一縷, 甘蹈水火, 有此悖擧, 究其罪則罔赦, 而原其情則亦慼矣。 今於制産之後, 能悔過歸化, 願爲良民者, 亦赦而許之, 匪徒自禁而盜賊不起矣。 大經擾攘之餘, 慶尙道 大邱等十七邑, 全羅海西關西等道, 不可無賑濟農民, 而國無貯粟, 將何以賑之? 以臣愚見料之, 忠淸道則已蒙曠絶之恩典, 不必設賑, 兩西則雖云經擾, 多賴日本兵齎助, 富民之貯穀, 別無受損, 則可使各坊、各面, 計其貧民無農糧者, 逐戶成冊, 抄出饒民食餘之穀, 使當該邑分排劃給, 以繼新麥, 待秋本色還報穀主, 而切禁生殖之弊如此, 則富者有周窮之惠; 貧者有含恩之心, 貧富得合, 上下雍睦矣。 慶尙道 大邱等十七邑, 全羅道偏被擾攘, 富者猶不能自保, 況貧者乎? 自朝家特捐帑錢幾百萬, 庶可以賑濟斯民, 亦可以作今年之農。 而現今帑無所貯, 民所共知, 何以賑之? 古人云, ‘無野人莫養君子; 無君子莫治野人。’ 今此經擾之餘, 阽於危亡之民, 卽曩時養君子之良民, 而莫之存恤, 民安圖生? 雖然不得不辦出巨款, 然後可以行此大政, 而此亦有策焉。 近年八道各邑貪官、墨吏之贓錢, 一一責捧, 則可得巨億, 綽有餘裕, 而督刷之際, 易致時日遲滯, 安得救此目下之急乎? 贓錢收捧之前, 內而在朝百官, 外而方伯、守宰, 各捐一月俸金, 先充贓資, 待贓錢收納, 依數計給, 則似爲一時之權變, 而可以濟貧乏致富庶矣。 以此十匙一飯之惠, 活彼幾萬生靈, 豈不盛且美哉? 如此則五道仰哺之民, 得蒙全活之澤, 歌詠聖德, 帝力何有之謠, 復聞於今日。 匪類之除、賊黨之戢, 指日可待, 而無一夫不獲其所。 戶口歲增, 蓄積日餘, 老者衣帛食肉; 黎民不飢不寒, 然後可以養兵自固, 亦可以自主於東洋。 然而不治平者未之有也。 伏願陛下淵然澄鑑, 穆然遠思, 勿以人微而廢言, 亟令有司爛商方便, 不日施行, 無失農時之地焉。" 批曰: "省疏具悉。"


    • 【원본】 37책 33권 14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4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사상-동학(東學) / 농업-권농(勸農) / 구휼(救恤)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