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선이 개화의 문제에 대해 상소하다
전 승지(前承旨) 신기선(申箕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듣건대 일본(日本) 사람들이 우리에게 자주(自主)를 권하고 개화(開化)할 것을 가르친다고 하는데, 자주는 어찌 좋은 일이 아니며, 개화도 물론 아름다운 말입니다. 그러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심이 흩어지고 법과 기강이 무너져 나라의 명맥이 위기일발에 처하고도 자주와 개화를 이룬 나라가 언제 있었습니까?
자주를 잘하는 나라는 먼저 자주할 형세를 세우고 그 명색에 급급하지 않으며, 개화를 잘하는 나라는 먼저 개화하는 실제에 힘쓰고 그 형식에 구애되지 않습니다. 지금 다른 나라와 외국 군대가 대궐에 침범하고 요충지를 점거하여 생사존망이 남의 손아귀에 쥐여 있는데도 한갓 개국(開國) 연호나 내세우면서 세상에서 제가 잘났다고 하고 있으니, 자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으로는 변고가 자꾸 생기고 밖으로는 요사스러운 변란이 하늘에 넘쳐 온 나라가 가마솥이 끓듯 하고 전혀 법과 기강이 없는데도 한갓 관직 제도나 고치고 관청 이름이나 바꿈으로써 외국을 모방하고 있으니, 될 수 있겠습니까?
새로운 법령의 여러 조항이 그 본의가 좋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르겠지만 오늘 액운을 털어버리고 좋은 운수를 여는 데 있어 급한 일이 과연 이런 말단적인 형식을 차리는 데 있겠습니까? 등급을 깨뜨리고 노비(奴婢)를 없앤다는 조항은 애당초 해석도 없고 설명도 전혀 없다 보니, 결국 변란을 선동하는 백성들로 하여금 구실을 삼아 일어나게 하였으며 일반 백성의 위엄이 장수나 정승보다 커져서 정승이 묶인 채로 맞는 모욕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의관 제도가 거꾸로 되고 윤리가 다 없어졌으니 법령이 신중하지 못한 것을 사두마차인들 따라 갈 수 있겠습니까?
이른바 개화라는 것은 공정한 도리를 넓히고 사사로운 견해를 제거하기에 힘쓰며, 관리들은 자리나 지키지 않게 하고 백성들은 놀고먹지 않게 하며, 사용하는 기구를 편리하게 하고 의식을 풍부하게 하여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근원을 열며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군사를 강하게 만드는 도리를 다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찌 의관 제도를 허물어 버리고 오랑캐의 풍속을 따른 다음에야 개화가 되겠습니까? 요컨대 천지개벽 이후로 외국의 통제를 받으면서 나라 구실을 제대로 한 적은 없으며 또 인심을 거스르고 여론을 어기며 근본도 없고 시초도 없이 새로운 법을 제대로 시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저들이 과연 호의에서 출발하였다면 응당 대궐을 지키는 군사를 철수하고 약탈한 물건을 계산하여 돌려주어야 할 것이며, 우리에게 시행하기 어려운 일을 강요하지 말고 우리의 내정(內政)을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임금과 신하들이 정신을 모아 근본을 배양하여 안으로 잘 다스리고 밖으로 안정시켜 민심을 따르고 시국 형편을 참작하여 점차 자주할 형세를 튼튼히 하고 천천히 개화를 실속 있게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그네로 하여금 주인의 권리를 빼앗지 않게 한 뒤에야 우리에게는 개혁의 실효가 있을 것이고 저들에게는 진심으로 우리를 위해 도모하는 명분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저들이 악의에서 출발한 것이니, 그 교활한 생각과 음흉한 계책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으로써 바로 이른바 빨리 뉘우치면 화(禍)가 적고 늦게 뉘우치면 화가 크다는 것입니다. 어찌 일찌감치 스스로 주장을 세우고 성(城)에 의지하여 한 번 싸우는 것만 하겠습니까. 이렇건 저렇건 두 마디로 결단할 것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깊이 생각하고 빨리 결단을 내리소서.
요즘 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요가 시작된 원인을 찾는다면 물론 수령들이 탐욕스럽고 방종하며 세력 있는 자들이 기광을 부린 데에서 연유하지만 외국과의 갈등과 새로 정한 제도가 뒤따라 격동시켜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거짓 유혹에 이미 깊이 빠지고 패악한 난동에 이미 익숙해져 요원의 불길처럼 그 기세가 하늘을 찌르려 하니 말이나 조서(詔書)로 그 기세를 꺾을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그런데도 대승기증(大承氣症)에 지금 사군자탕(四君子湯)을 쓰고 있으니, 이것도 의논하는 신하들의 실책이건만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오히려 그 화가 이 지경으로 심한 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빨리 강경한 결단을 내려 위엄으로 은혜를 베푼다면 이제라도 수습할 수 있겠지만 이때를 놓치면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은 말이 사리에 맞지 않고 계책이 졸렬하여 시국 형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설사 신으로 하여금 부름에 응하여 회의의 말석에 참석하게 한다 하더라도 할 말은 여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니, 또한 신을 불러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신의 간절한 심정을 헤아리고 신의 어리석은 소견을 살펴서 특별히 새 품계를 체차하고 이어 소명(召命)을 취소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경의 말은 옳다. 지난 일을 굳이 인협할 필요가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고 즉시 숙배하라."
하였다.
- 【원본】 36책 32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일본(日本) / 신분-천인(賤人)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임면(任免)
前承旨申箕善疏略:
臣聞日人勸我自主, 敎我開化。 自主豈非好事? 開化固亦美談。 然自古及今, 曾有人心渙散, 法紀凌夷, 國脈澟如綴旒, 而能自主、開化者乎? 善自主者, 先立自主之勢, 而不汲汲於其名; 善開化者, 先務開化之實, 而不屑屑於其跡。 今異類外兵凌犯宮闕, 據守要隘, 生死安危, 在人掌握, 而徒標開國年號, 以自高於天下, 則足可爲自主乎? 內則變怪百出, 外則妖亂滔天, 八域鼎沸, 蕩無法紀, 而徒變官制、易衙號, 以效嚬於外國, 則足可爲開化乎? 新令諸條, 其本意非不好矣。 然未知今日傾否濟屯之急務, 果在於此等文爲之末乎? 劈破等級、革罷奴婢之文, 初無註脚, 全欠曲折, 遂使煽亂之民, 藉口而起, 氓庶之威, 重於將相, 縛打之辱, 及於卿宰。 冠屨倒置, 倫理喪盡, 令之不愼, 駟可追乎? 夫所謂開化者, 不過曰恢張公道, 務祛私見, 使官不尸位, 使民不遊食, 開利用厚生之源, 盡富國强兵之術而已。 安有毁冠冕、從夷狄之俗然後爲開化也哉? 要之, 剖判以來, 未有受制外國而能爲國者, 又未有咈人心、違衆論、無本無漸而能行新法者。 彼果出於好意也, 則固宜撤歸把守之兵, 算還掠奪之物, 不强我以難行, 不干我之內政, 俾我君臣, 得以聚精會神, 培根端本, 內理外靖, 因民心酌時宜, 漸鞏自主之勢, 徐就開化之實。 不使客奪主權, 然後我有維新之效, 而彼有謀忠之名矣。 苟其不然, 是彼出於惡意也, 其狡思陰計, 不言可知, 政所謂"反速禍小, 反遲禍大"者。 曷若早自立異, 背城而一戰乎? 於左於右, 兩言而決, 伏願殿下深念而早斷焉。 至若近日外鄕之擾, 原其所始, 則固由於牧守之貪縱、豪右之武斷, 而外釁新制, 又從以激成之。 然誑惑旣深, 悖亂已狃, 燎原之火, 勢將熛天, 非口舌綸綍之所可消戢也, 審矣。 而大承氣症, 方用四君子湯, 此亦議臣之失策, 而廟堂猶未知其禍之烈, 至於斯極也。 伏惟殿下亟揮乾斷, 威以濟恩, 則今猶可救, 過此則不可爲矣。 臣言迂計拙, 懸知不合時宜。 雖使臣冒應飭召, 叨參末議, 言不過如此而已, 則亦安用召臣爲哉? 伏乞聖明諒臣苦懇, 察臣狂愚, 特鐫新資, 仍寢召命焉。
批曰: "卿言是矣, 往事何必爲引? 卿其勿辭, 卽爲肅命。"
- 【원본】 36책 32권 51장 A면【국편영인본】 2책 523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외교-일본(日本) / 신분-천인(賤人)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