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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3일 기묘 2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이 조경묘와 경기전을 위봉산성에 모신 것을 의논하다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예조 당상관(禮曹堂上官)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홍집(金弘集),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시(金炳始), 좌의정(左議政) 조병세(趙秉世), 우의정(右議政) 정범조(鄭範朝), 행 예조 판서(行禮曹判書) 이헌직(李憲稙)이다.】 을 소견(召見)하였다. 하교하기를,

"남도(南道)의 비적(匪賊)들이 창궐하여 전주부(全州府)에 갑자기 달려들었다. 이곳은 실로 경기전(慶基殿)과 조경묘(肇慶廟)를 모신 곳인데 이봉(移奉)한 것에 대해서는 비록 전보(電報)를 받았지만 어느 곳에 이봉했는지 알지 못하여 밤낮 걱정하며 매우 황송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위봉산성(威鳳山城)에 임시로 봉안(奉安)하였다는 사실을 상세히 알았으니 항상 불안하던 마음이 다시 다행하게 되었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어제 연석(筵席)에서 이미 아뢰었지만 아직까지 확실한 보고가 없어서 더욱 황송하던 가운데에 지금 봉안(奉安)하였다는 하교를 받들고 보니 매우 다행스럽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경기전과 조경묘에 만일 변고가 있으면 위봉산성(威鳳山城)의 행궁(行宮)으로 이봉한다는 내용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이봉 후에는 마땅히 위안제(慰安祭)가 있어야 한다. 단오절(端午節) 제향이 며칠 남지 않았는데, 어찌 임시로 봉안하였다고 제사를 지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겸하여 행하되 축문(祝文)은 다시 말을 만들고 대압(代押)한 다음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대신 지내도록 전보를 쳐서 통지하면 제사를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날짜가 매우 촉박하니 설사 전보(電報)로 통지한다 하더라도 거행하는 절차가 반드시 궁색하게 될 것이니, 먼 외방의 신하들은 마음이 더욱 불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종묘(宗廟)에는 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야 하는데 영녕전(永寧殿)에도 함께 지내야 하는가?"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지나간 병인년(1746)에 강화(江華)장녕전(長寧殿)을 이봉할 때는 남전(南殿) 각실(各室)에 고유하였고, 지나간 정유년(1837)에 영흥(永興) 준원전(濬源殿)에 사고가 있었을 때에는 종묘의 해당 신실(神室)에 고유하였습니다. 남전에 고유한 것은 장차 남전에 봉안하려 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하고, 정범조(鄭範朝)가 아뢰기를,

"정유년(1597)의 전례를 상고하여 보건대 신하들에게 물은 후에 해당 신실(神室)에만 고하였으니 이 전례가 근거삼을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조경묘(肇慶廟)의 신주(神主)를 이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므로 추후에 존경하는 뜻에서 각 신실(神室)에 모두 고하려는 것이다."

하니, 조병세(趙秉世)가 아뢰기를,

"변란치고 정유년(1597) 변란보다 더 큰 것이 없었지만 단지 해당 신실에만 고하였으니 이번에도 그 전례를 끌어다가 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초토사(招討使)의 전보(電報)를 보니 또다시 대포를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이것은 성(城)을 공격하려는 의도 같은데 성 안에 살던 백성들 중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혹시 옷을 바꾸어 입고 피하려 해도 저 비적 무리에게 살해될까 두려워서 성을 나가지 못한다고 하니 아! 이 죄 없는 백성들이 지극히 불쌍하다."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아직 성을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죄 없는 백성들까지 함께 상할까 걱정되어 그럴 것입니다. 순변사(巡邊使)가 가서 합세하면 응당 며칠 내에 토벌하여 평정시킬 것입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군무사(軍務司)를 차하(差下)한 것은 전적으로 오늘의 군무를 위한 것인데 한 가지 명령도 거행하지 않았다고 하니 묘당(廟堂)에서 서울과 지방에 신칙하여 순무영(巡撫營)의 규례대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 【원본】 35책 31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8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상-동학(東學) / 변란-민란(民亂)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정(軍政)

召見時原任大臣、禮堂。 【領議政沈舜澤、判府事金弘集、領敦寧金炳始、左議政趙秉世、右議政鄭範朝、行禮曹判書李憲稙】 敎曰: "南匪猖獗, 闖入完府, 此實殿、廟尊奉之地也。 移奉之節, 雖有電報, 未知何處移奉, 夙夜憂慮, 萬萬驚悚。 今始詳承, 則權安于威鳳山城矣。 一念憧憧之中, 還爲萬幸矣。" 舜澤曰: "昨筵已爲仰達, 而尙無確報, 普切驚悚之中, 今承奉安之敎, 萬幸矣。" 敎曰: "殿、廟若有事, 則移奉于威鳳山城行宮, 載於文獻矣。 移奉後, 宜有慰安祭, 而端午節享隔日, 豈可以權安闕享乎? 兼行, 祝式改措語代押, 令道臣替行, 發電知委, 則可以行事矣。" 舜澤曰: "日字甚迫, 雖有電通, 擧行之節, 必致窘跲, 遠外益切憧憧矣。" 敎曰: "太廟又當有告由祭, 則竝行於永寧殿可乎?" 舜澤曰: "往在丙寅年, 江華 長寧殿移奉時, 告由于南殿各室。 往在丁酉年, 永興 濬源殿有事時, 告由于太廟當室矣。 南殿告由, 似以將奉于南殿而然矣。" 範朝曰: "考見丁酉已例, 則詢問後只行於當室, 此可爲援矣。" 敎曰: "肇慶廟移奉, 初有之事也。 以追後尊敬之義, 欲竝行於各室者也。" 秉世曰: "變莫大於丁酉, 而只行於當室, 則今可以援行。" 敎曰: "見招討使電報, 則又請送大砲矣。 似是攻城之意, 而城內居民之未及避者, 或變服欲避, 而恐爲彼類所害, 不能出城云。 哀此無辜, 極爲矜憐矣。" 舜澤曰: "尙不攻城者, 爲慮玉石俱焚而然歟! 巡邊之行又合勢, 則自當不日討平也。" 又敎曰: "軍務司差下, 專爲今日之軍務, 而一令不行云。 廟堂董飭京外, 依巡撫營例擧行可也。"


  • 【원본】 35책 31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87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사상-동학(東學) / 변란-민란(民亂) / 왕실-의식(儀式)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