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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2월 15일 임술 4번째기사 1894년 조선 개국(開國) 503년

의정부에서 민란의 원인이 된 충청 병사 이정규의 처벌과 고부 민란을 처리할 것 등을 아뢰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조병호(趙秉鎬)가 전 병사(前兵使) 이정규(李廷珪)의 죄상에 대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도신(道臣)의 계사(啓辭)에, ‘백성의 원망을 많이 초래하니 듣기에 해괴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였고, 또, ‘잘 신칙하여 격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의 원망을 불러일으켜 방화(放火)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일반적으로 말하고 꼭 집어서 말하지 않았으니, 유사(有司)의 신하가 장차 무엇으로 죄를 따져서 의율(擬律)하겠습니까?

연제(蓮堤) 아래에 있는 8동(洞)의 몇 천의 백성들이 이정규의 집과 그 관하의 12호(戶)를 불태워버린 데는 반드시 그럴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모두 장두(狀頭)라고 하는데, 백성들의 소장이 엄연히 있고 소장의 내용에 근거가 있으니 다시 도신으로 하여금 하나하나 자세히 조사하여 사실대로 등문(登聞)하게 하소서.

그 전에 곤수(梱帥)를 지냈다면 이미 두 읍을 맡아 다스릴 책임이 없는데도 전에 없던 이런 민란(民亂)을 빚어냈다는 것은 더구나 극히 해괴하고 통탄할 일이니 차라리 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심상하게 경고할 수만은 없습니다. 전 병사 이정규를 도신의 계사로 인하여 잡아왔으나 미처 법조문을 토의하기 전에 마침 경사를 만나 다른 죄수들과 뒤섞여 석방되었습니다. 사계(査啓)가 올라온 다음에 왕부(王府)로 하여금 다시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게 하고, 난민(亂民)은 주모자와 추종자를 사핵(査覈)하여 구별하고 경중을 갈라서 감처(勘處)하라는 뜻으로 해도(該道)의 도신(道臣)에게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이 올린 장계(狀啓)의 등보(謄報)를 보니, 고부(古阜)의 난민(亂民)은 아직 잡지 못해 명백히 조사하지 못하였고, 단지 해당 백성들이 올린 소장에 폐단을 설명한 조목과 해읍의 수령을 논죄(論罪)하여 파직(罷職)하고 잡아오도록 하는 것, 해당 관속(官屬)들에 대해 공초(供招)를 받아 감처해 달라는 요청만 있었습니다.

요즘 백성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대체로 관리와 백성이 서로 믿지 못하는 데 원인이 있지만 나라의 기강이 허물어지고 백성의 풍습이 고약한 것으로는 역시 고부처럼 심한 경우가 없습니다.

가령 고통을 견딜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무리를 불러 모아 제멋대로 법을 무시하고 본분을 어긴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응당 먼저 제창한 사람과 추종한 사람이 있을 것이니 조사하고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道)를 안찰하는 지위에 있으면서 단지 역마(驛馬)만 번거롭게 하는 계사만 올릴 뿐 난민(亂民)의 두목이 날뛰도록 내버려두고 고약한 습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징계를 미루고 있으니 이것을 어찌 조정의 명령을 받들고 나라의 체모를 보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대개 이번 소란은 사실 원한이 쌓이고 화기(和氣)를 상하게 하는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하루 이틀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닐 것이 뻔합니다. 해당 수령이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일을 그르쳤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표상하였다가 나중에는 파직하고 잡아왔으니 어찌 앞뒤가 이렇게 서로 판이합니까? 매사가 개탄할 일이므로 경고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에게 우선 월봉삼등(越俸三等)의 형전(刑典)을 시행하소서.

고부 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이 소란을 초래하고 범장(犯贓)한 죄는 이미 도신의 계사에 열거되어 있으니 왕부(王府)로 하여금 나문(拿問)하여 정죄(正罪)하게 하소서. 고부 군수의 후임은 해조(該曹)로 하여금 상격(常格)에 구애되지 말고 각별히 가려 차임(差任)하게 하며 【이조(吏曹)에서 박원명(朴源明)을 차하(差下)하였다.】 하직 인사를 올린 다음에 역마를 주어 당일로 내려 보내소서.

지금 듣건대 민란(民亂)이 다시 일어났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이른바 난민이라고 하는 것이 어찌 다 자기 본성을 잃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단지 위협하는 것에 겁을 먹고 때를 틈타 불평을 풀려는 데 불과할 따름이니, 이것은 철저히 조사하여 법으로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고부군 안핵사(古阜郡按覈使)로 차하하여 그로 하여금 밤을 새워 달려가서 엄격히 조사하여 등급을 나누고 구별하여 등문하게 하소서. 고을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에 대해서는 일체 자세히 논열(論列)하도록 해야 하는데, 지금 한창 바쁜 농사철에 경내에 소란이 퍼지면 반드시 살길을 잃고 농사철을 놓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제창한 사람 외에 일체 속임을 당하였거나 위협에 못이겨 추종한 사람들은 될수록 공정하게 하고 일일이 깨우쳐주어 각각 생업에 안착하게 하여 조정에서 보살펴주는 뜻을 표시하라고 삼현령(三懸鈴)으로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고부(古阜) 백성들의 소란은 곧 이른바 동학당란(東學黨亂)의 시초였다. 원래 경주(慶州) 견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 사람인 최제우(崔濟愚)는 어릴 때 이름은 복술(福述)이고 호(號)는 수운재(水雲齋)이다. 순조(純祖) 갑신년(1824)에 태어나서 목면(木棉) 파는 것을 업으로 삼고 경주와 울산(蔚山) 사이를 왕래하였다. 하루는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고 상제(上帝)의 신탁(神託)을 받았다고 하고는, 주문(呪文)을 만들어 퍼뜨리기를, "나의 교(敎)를 믿는 사람은 재난을 면할 수 있고 오래 살 수 있다."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천도교(天道敎)가 포덕(布德)을 한 원년(元年)이다. 이때 천주교(天主敎)가 점점 성해지자 포덕문(布德文)을 지었는데, "서교(西敎)는 우리의 옛 풍속과 오랜 습관을 파괴하니, 만일 그것이 퍼지도록 내버려둔다면 장차 나라를 잃고 백성이 장차 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빨리 막아야 하겠는데 유교(儒敎)는 힘이 약하니 임무를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우리 교이다." 하고는, 그 교를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서학(西學)에 상대하여 이른 말이다. 고종(高宗) 광무(光武) 9년에 교(敎)의 이름을 ‘천도교(天道敎)’라고 고쳤다. 그 교의(敎義)는 유교(儒敎), 불교(佛敎), 도교(道敎) 세 교의 내용을 대략 취하여 부연하여 꾸미고 또 상제가 우주(宇宙)를 주관한다는 기독교(基督敎)의 주장을 취하여 상제가 인간의 화(禍)와 복(福)을 실제로 맡고 있다고 하여, 시골 백성들이 많이 믿었다. 그 신도들은 밤이면 반드시 맑은 물을 떠놓고 보국 안민(輔國安民)을 빌었으며 밥을 지을 때에는 쌀 한 숟가락씩을 덜어 내어 ‘성미(誠米)’라고 하면서 교주(敎主)에게 바쳤다. 몇 해 사이에 신도가 점점 많아지니 정부에서는 그것이 이단이고 사설(邪說)이라고 해서 금지하였다. 옛날 철종(哲宗) 계해년(1863)에 최제우를 체포하여 대구부(大邱府)의 옥에 가두었다가 이듬해 고종 갑자년(1864)에 저자에서 참수(斬首)하였다. 그의 제자인 최시형(崔時亨)이 그 뒤를 이어 제2세 교주가 되어 포교(布敎)하는 데 힘쓰면서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하였다. 그 후 그의 제자인 손병희(孫秉熙)가 최시형의 뒤를 이어 제3세 교주가 되었다. 이때에 주군(州郡)에서 동학을 금지한다고 하면서 때때로 그들을 박해하고 못살게 구니 교도(敎徒)들이 분노하여 모여 상소를 올려 교조(敎祖)가 억울하게 죽은 일을 하소연하고 탐오하는 관리들의 포학상을 호소하였다. 이에 그들은 더욱 굳게 단합되고 신도가 더욱 많아져서 곳곳에서 소동을 피웠다. 정부에서는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문현(金文鉉)과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용직(李容直)에게 타일러 해산시키도록 명령하였으며, 또 어윤중(魚允中)을 양호 선무사(兩湖宣撫使)로 임명하여 충북(忠北) 보은군(報恩郡)에 달려가서 그 신도를 모아놓고 선유(宣諭)하였으나 모두 따르지 않았다. 고종(高宗) 갑오년(1894) 2월 전라북도(全羅北道) 고부(古阜) 백성들이 군수(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오와 횡포에 견딜 수 없어 모여서 소란을 일으켰다. 정부에서는 장흥 부사(長興府使)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按覈使)로 삼아 그로 하여금 진무(鎭撫)하게 하였는데 이용태는 그 무리가 많은 것을 꺼려서 병을 핑계대고 머뭇거리면서 도리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민심이 더욱 격화되었다. 고부 사람 전봉준(全琫準)이 떨쳐 일어나 동학당(東學黨)에 들어가니 각지(各地)의 폭도(暴徒)들이 소문만 듣고도 호응하였으며, 김해(金海) 백성들은 부사(府使) 조준구(趙駿九)를 내쫓았다.】 또 아뢰기를,

"금성 전 현령(金城前縣令) 이승일(李承一)은 민란 사건 때문에 도신의 계사에 열거되었고 전 주사(前主事) 임응호(任應鎬)는 협잡을 부린 사건으로 교섭아문(交涉衙門)의 계품(啓稟)으로 인하여 이미 잡혔으나 미처 형률을 토의하기 전에 마침 이번 경사를 만나 뒤섞여 석방되었습니다.

이 두 죄수의 범죄가 모두 가볍지 않으므로 원래 가볍게 처결해서는 안 되는데 완전히 석방되었으니, 모두 해부(該府)로 하여금 다시 나수(拿囚)하고 형률대로 감처(勘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35책 3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79면
  • 【분류】
    변란-민란(民亂) / 사법-치안(治安) / 사상-동학(東學) / 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상-서학(西學) / 사법-탄핵(彈劾)

議政府啓: "忠淸監司趙秉鎬, 以前兵使李廷珪罪狀, 請令攸司稟處矣。 道啓曰: ‘多致民怨, 有怪聽聞’, 又曰: ‘不善飭勵, 自速衆怨, 致有此放火之境’。 蓋泛言之而無的執報者矣, 有司之臣, 將何以責罪而擬律乎? 蓮堤下八洞幾千民之燒燼李廷珪家、竝所率十二戶者, 其必有所以然。 而衆民一心皆曰狀頭, 則民狀自在, 狀辭有據。 更令道臣, 一一詳査, 從實登聞。 以若曾經梱帥之臣, 卽無兩邑官守之責, 而致此無前民鬧者, 尤極駭歎, 寧欲無言。 此不可尋常勘警, 而前兵使李廷珪, 因道啓, 就拿, 未及議律, 適値慶會, 混被放釋矣。 待査啓上來, 令王府更爲拿問定罪, 亂民首從, 査覈區別, 分輕重勘處之意, 亦爲行會於該道道臣何如?" 允之。 又啓: "卽見全羅監司金文鉉狀啓謄報, 則‘古阜之亂民未捉, 明査未行, 而只有該民狀之說弊條目, 該邑倅之論罪罷拿, 該官屬之取招請勘’矣。 近日民之起鬧, 多由於官民之不相孚, 而國綱之頹弛, 民習之駭悖, 亦未有如古阜之甚者。 藉曰痛苦之不堪, 及其嘯聚而自恣, 蔑法干分, 罪著罔赦。 宜其有首倡隨從, 鉤覈區別。 而其在按道之地, 徒煩馳驛之啓, 亂魁一任猖獗, 悖習尙稽懲創, 是豈可曰奉朝今而存國體乎? 蓋此鬧, 實由於積冤干和之政, 而必其所由來者, 非一朝一夕之故矣。 該倅之溺職僨事, 不言可知, 而始也褒仍, 終焉罷拿者, 何前後相反之若是乎? 事事慨歎, 不可無警, 全羅監司金文鉉, 姑先施以越俸三等之典。 古阜郡守趙秉甲致鬧犯贓之罪, 旣有道啓之臚列, 令王府拿問定罪。 古阜郡守之代, 令該曹勿拘常格, 各別擇差 【吏曹以朴源明差下】 , 辭朝給馬, 當日下送。 今聞民鬧再起, 傳說狼藉。 所謂亂民, 豈可盡失其恒性而然哉? 直不過怯於威脅, 乘時逞臆耳, 此不可不到底査覈, 以法從事。 長興府使李容泰, 古阜郡按覈使差下, 使之罔夜馳往, 嚴査分等, 區別登聞。 至若邑弊之矯捄方略, 一體消詳論列, 而顧今東作方殷, 一境滋騷, 必其有失所失農者矣。 首倡之外, 諸凡詿誤脅從之類, 務從平反, 一一曉諭, 俾各安業, 以示朝家撫恤之意事, 三懸鈴行會何如?" 允之。 【古阜民擾卽所謂東學黨騷亂之始也。 初, 慶州見谷面龍潭里人崔濟愚, 幼名福述, 號水雲齋, 生於純祖甲申, 以販木綿爲業, 往來慶州、蔚山之間。 一日稱致誠祭天, 受上帝之神託。 仍造呪文, 而宣傳曰: "信我敎者, 災害可免, 長生可得。" 此卽天道敎布德之元年也。 時天主敎漸焜, 乃製布德文, 有曰: "西敎破壞我古俗舊慣, 若任其流布, 則國將失而民將滅矣。 此宜亟防遏, 而儒敎則力微, 可當斯任者, 其我敎乎?", 乃稱其敎曰東學, 蓋對西學而言也。 高宗 光武九年, 改敎名爲天道敎, 其敎義, 略取儒佛道三敎之意, 以傳飾之。 又取基督敎‘上帝主宰宇宙’之說, 謂上帝實司人間禍福, 鄕曲之民, 多信之。 其信者, 夜必用淨水, 以祈輔國安民, 炊飯時取米一匙, 謂之誠米, 以供敎主。 幾年之間, 黨衆寖盛, 政府, 以其異端邪說而禁之。 昔在哲宗癸亥, 捕濟愚, 囚之大邱府獄, 翌年高宗甲子, 斬之于市。 其弟子崔時亨繼爲第二世敎主, 從事于布敎, 刊《東經大全》而行之。 後, 其弟子孫秉熙繼時亨, 爲第三世敎主。 時, 州郡之間, 稱禁止東學, 往往迫害侵漁, 敎徒忿怨, 乃聚而上章, 鳴敎祖之冤, 訴貪吏之暴。 於是其結束益堅, 徒衆益盛, 所在騷擾。 政府命全羅監司金文鉉、慶尙監司李容直諭而散之, 又命魚允中爲兩湖宣撫使, 馳往忠北 報恩郡, 聚其徒而宣諭之, 俱不從。 高宗甲午二月, 全羅北道 古阜人民, 不堪郡守趙秉甲之貪暴, 聚而起鬧。 政府, 以長興府使李容泰爲按覈使, 使之鎭撫, 而容泰憚其衆盛, 稱病逡巡, 反乘勢侵奪民財。 民心益激, 古阜人全琫準躍起, 投其黨, 各地之暴民, 望風響應, 金海民逐府使趙駿九。】 又啓: "金城前縣令李承一, 以民擾事, 有道啓臚列, 前主事任應鎬, 以奸僞事, 因交涉衙門啓稟, 已爲就拿, 未及議律, 而値玆慶會, 混被放釋矣。 此兩囚罪犯, 俱係不輕, 固不當末勘而全釋。 竝令該府, 更爲拿囚, 依律勘處何如?" 允之。


  • 【원본】 35책 31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책 479면
  • 【분류】
    변란-민란(民亂) / 사법-치안(治安) / 사상-동학(東學) / 사법-재판(裁判)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상-서학(西學)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