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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 1월 5일 병오 1번째기사 1890년 조선 개국(開國) 499년

근정전에 나아가 존호 추상을 칭경하고 진하를 받고 반사하다

근정전(勤政殿)에 나아가 존호(尊號)를 추상하는 것을 칭경(稱慶)하고 진하를 받고 반사(頒赦)하였다. 왕세자가 따라 나아가 예식을 행하였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7대의 사당에서 그 덕을 관찰하는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선조를 높이고 업적을 찬양하였으며, 세 왕후에 대해서도 성대한 의식을 거행함으로써 존위를 높이고 미덕을 밝혔다. 그리하여 다함없는 추모의 정을 붙여 크게 대고(大誥)를 펴는 바이다.

생각건대 묘호(廟號)를 종(宗)이라고 하고 조(祖)라고 하는 것은 왕법(王法)을 고찰해 보건대 덕이나 공로를 가지고 부르는 것이다.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은 〈우서(虞書)〉의 첫머리에 실렸는데 하늘의 명령을 받은 것으로 해서 큰 칭호를 받았고, 고조(高祖)와 광무제(光武帝)는 모두 한 나라를 융성하게 하였는데 왕업을 창시한 것으로 해서 특별한 칭호를 받았다. 대를 잇고 선대의 업적을 고수한 공적에 대해서는 왕업을 창시한 데 비해 응당 차이를 두어야 하겠지만, 변란을 평정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업적은 반드시 큰 이름을 얻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옛날 역사에 기술한 사례로서 우리 왕조에서도 이미 시행한 규례이다.

삼가 생각건대, 영종 지행 순덕 영모 의열 장의 홍윤 광인 돈희 체천 건극 성공 신화 대성 광운 개태 기영 요명 순철 건건 곤녕 배명 수통경력 홍휴 익문 선무 희경 현효 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은 자질이 빼어난 성인으로 태어나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운수를 지녔으며, 은(殷) 나라 고종(高宗)처럼 오랫동안 노고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았고, 한(漢)나라 문제(文帝)처럼 들어가 계승하자 모두 왕통이 빛남을 우러렀다.

부모를 잘 섬기고 형제간에 화목하여 인륜의 도리를 다했으니 그 마음을 따르고 그 뜻을 이은 것이며, 학문에 근거하여 정령(政令)을 내었으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화합시킨 것이었다. 황단(皇壇)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니 그 의리는 《춘추(春秋)》의 원칙에 의거한 것이고, 왕도(王道)에 표준을 세웠으니 정사는 홍범구주(洪範九疇)에 근거한 것이었다.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맹자(孟子)의 말에 감동되어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혜택을 입히었다. 위(衛) 나라 무공(武公)이 〈억편(抑篇)〉을 노래한 나이에도 오히려 엷은 얼음을 밟으며 깊은 못에 임한 것 같이 조심하는 마음을 간직했으니, 그 금궤(金匱)와 석실(石室)에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옥검(玉檢)과 은승(銀繩)에 모두 실려 있다.

허름한 옷차림으로 검소하게 한 것은 우(禹) 임금의 세 가지 정사인 정덕(正德), 이용(利用), 후생(厚生)을 본받은 것이고, 부세(賦稅)와 부역(賦役)을 고르게 한 것은 홀아비, 홀어미, 부모 없는 어린이, 자식 없는 늙은이에게 먼저 은정(恩政)을 베푼 문왕(文王)의 정사를 본받은 것이었다.

질서를 바루고 토벌을 명하는 것은 반드시 사리를 따랐으니 가을 서리와 봄바람보다 뚜렷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다 성의(誠意)에 근본을 둔 것으로써 맑은 하늘의 해와 같이 명백하였다. 이룩한 사업은 오랜 왕도(王道)를 조화롭게 만들고, 어려움과 위험을 극복한 것은 곧 위대한 업적을 이룩하게 하였으니, 어찌 단지 훌륭한 덕을 잊기 어려운 것뿐이겠는가? 성대한 무열(武烈)은 그 누구도 다툴 수 없었다. 천벌을 내려 간악한 무리를 치고 난리를 평정한 공훈을 세웠으며, 우정(禹鼎)과 같은 신기한 계책으로 괴물들의 간악함을 통찰해 의리를 밝히는 귀감을 세웠다. 신무(神武)하여 죽이지 않은 결과 대궐에서 태평한 정사를 폈고, 의리를 크게 밝혀 나라의 위태한 형세를 돌려 세웠다. 나라의 여론이 정해지자 나쁜 무리들이 자연 감화되고, 나라를 다스리는 기강을 떨치자 큰 운수가 길이 안정되었다. 돌아보건대 선대에서 세운 공적이 너무도 많으니, 아! 어찌 드러나지 않겠는가? 후대 임금이 높이 보답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명분을 바로 세워야 할 것이다.

혜경 장신 강선 공익 인휘 소헌 단목 장화 정성 왕후(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는 왕비가 될 복을 받아 하늘의 덕에 짝하였다. 이름 있는 가문에서 길러져 효성과 공경을 천품으로 타고났고 왕실을 빛냈으니, 유순하고 곧은 것은 왕비의 도(道)에 맞았다. 왕비가 되어서는 성녀(聖女)인 문왕(文王)의 비(妃)의 모범을 따라 왕대비를 잘 섬긴 것이 마치 문왕의 비의 덕이 왕업을 일으키는 기초가 되어 남쪽 나라에까지 교화를 편 것과 같았다. 말소리가 중궁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왕후의 복을 모두 송축했고, 은택이 외가에 미친 것이 드물었으니 한 나라 명덕 왕후(明德王后)가 탁룡궁(濯龍宮)에서 숭상했던 절검(節儉)의 경계를 깊이 간직하였다. 30년 간 유순한 덕화를 널리 입히어 한 왕대의 훌륭한 운수를 이룩하였다.

또한 예순 성철 장희 혜휘 익렬 명선 수경 광헌 융인 소숙 정헌 장순 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는 후덕한 품성이 크게 빛났고 공은 넓고도 두터웠다. 당요와 우순 같은 훌륭한 임금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왕실의 많은 곤란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덕화로 운수를 넓힌 왕비의 공적은 아름다운 덕을 전승한 태임(太妊)이나 태사(太姒)라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정사를 대리하니 온 나라가 새 정사에서 이룩한 공을 받들었으며, 3대를 덮어주고 보호하여 한 나라 장락궁(長樂宮)의 보양(保養)보다 융성하게 하였다. 선조의 뜻을 따라 하늘의 이치를 밝히니 큰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고, 이단을 물리치고 백성이 지킬 도의를 부지하니 하교가 부월(鈇鉞)보다 엄하였다. 대개 도운 것이 깊고 성취한 일이 원대한 것은 실로 지극히 유순하면서도 강하고 지극히 고요하면서도 바르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뜬구름이 지나가듯 이미 세상을 떠나 그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나라에 남긴 풍습은 아직도 귀에 들리고 아름다운 명성도 오래오래 울린다. 그래서 못 잊어 하는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가지고 종묘(宗廟)에서 큰 예식을 거행하였다. 아! 세워놓은 훌륭한 업적은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과 맞먹고 어지럽던 것을 다스린 데 대해 칭호를 높임에 있어서는 조(祖)로 높이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원로들의 해박한 의론에서 징험하였고 조정의 의견이 일치하였기에 행적을 형상한 옥책문을 올리니 성대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시호를 올리기 위해 좋은 날을 밝히니 해와 달 같이 빛났다. 주(周) 나라의 크나큰 업적을 찬양함에는 읍강(邑姜)의 덕을 10명의 충신과 같이 놓았고, 우순의 크나큰 공을 칭송함에는 규예(嬀汭)로 시집간 요(堯) 임금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의 모범을 드러내었다. 이에 제사를 지내는 동시에 아름다운 의식을 거행하였다. 올해 1월 4일에 옥책과 금보(金寶)를 삼가 받들어 올렸다.

영종 대왕(英宗大王)에게 올리는 묘호는 ‘영조(英祖)’로, 고쳐서 올리는 시호(諡號)는 ‘정문 선무 희경 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추상하는 존호(尊號)는 ‘중화 융도 숙장 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하였다. 정성 왕후(貞聖王后)의 존호는 ‘원렬(元烈)’로, 정순 왕후(貞純王后)의 존호는 ‘정현(正顯)’으로 하였다. 술잔을 올리니 사모하는 마음이 피어오르고 아름다운 홀〔琬〕을 쥐니 환하게 빛이 어린다. 경사(卿士)의 의견을 따르고 일반 백성들의 소원을 풀어 주니 어진 이를 가까이하고 이익을 누리게 한 은혜를 못 잊기 때문이고, 공적 있는 조상을 높이고 훌륭한 왕후를 높이니 위대한 공렬을 드날린 복락(福樂)을 받기 때문이다. 종묘(宗廟)에 가니 신령이 내려와 밝게 살피고 구석구석까지 미쳐서 온 나라에 널리 퍼진다. 새해에 경사로운 일을 시행하니 천지의 절기(節氣)가 바뀌는 때에 맞고, 따사로운 봄에 덕을 펴니 비가 와서 언 것을 풀어주는 기상에 맞는다. 이달 5일 새벽 이전까지의 잡범으로서 사죄(死罪) 이하는 다 용서하라.

아! 깨끗한 사당에 공적을 칭송하는 글을 올리고 대궐 뜰에서 관대하게 용서하는 글을 내린다. 나는 착한 자손을 마련해 준 선대 임금들의 생각을 따랐으니 규범을 이어받은 것이고, 너희들은 널리 베푸는 임금의 복을 받았으니 떳떳한 교훈이 모여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는 것이니 잘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였다. 【대제학(大提學) 한장석(韓章錫)이 지었다.】


  • 【원본】 31책 2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3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

初五日。 詣勤政殿, 追上尊號, 稱慶, 受賀, 頒赦。 王世子隨詣, 行禮。 敎文若曰:

七世昭觀德之儀, 尊祖廟而揚烈, 三冊煥比隆之典, 竝儷極而闡徽。 庸寓朱絃餘思, 誕敷丹綍大誥, 念廟號曰宗曰祖, 稽王典以德以功。 藝文首揭《虞書》, 建洪號於受命, 竝隆室, 標殊稱於肇基。 若繼世守成之謨, 宜有間於創統, 然撥亂重恢之業, 必其得於大名。 於古史可述其文, 亦我家已行之禮。 恭惟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姿挺上聖, 運撫中興, 自殷宗之舊勞, 習知小人之艱難, 若代王之入繼, 擧仰大統之光明。 孝悌盡乎彝倫, 則因心繼志; 學問發爲政令, 則敬天諴民。 皇壇肇禋, 義秉《春秋》一部, 王道建極, 治在洪範九疇, 感鄒聖保民之言, 惠克行於損上益下。 在 《抑》之歲, 戒猶存於履薄臨深, 金匱石室之不勝書。 玉檢銀繩之所具載, 菲衣昭儉, 法功之治三, 庸布均徭, 體政之先四。 秩敍命討之必循於理, 赫若秋霜春風; 動靜云爲之壹本於誠, 廓乎靑天白日。 作成焉久道之所以化, 艱險乃大業之所由生, 豈但盛德之難諼? 菀有武烈之無競。 天戈奮鯨鯢之討, 式奏戡亂之勳; 神鼎燭魑魅之姦, 昭揭闡義之鑑。 神武不殺, 階戺敷舞羽之治; 義理大明, 宗祊回綴旒之勢。 國論定而鴞音自化, 王綱振而鴻命永綏。 顧前功之將多, 於乎不顯, 在後王之崇報, 必也正名。 粤惟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端穆章和貞聖王后, 曾沙膺祥, 价藩配德。 名門毓美, 孝敬稟乎天資; 京室麗輝, 柔貞合於地道。 禕翟纘聖女之範, 奉怡愉於東朝; 《關睢》爲興王之基, 播詠歌於南國。 聲言不出於中壼, 咸頌貫魚之休; 恩澤罕及於外家, 深存濯龍之戒, 三紀之柔化普洽, 一治之熙運協成。 亦惟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 德資弘光, 功參溥厚。 自之繼陟, 未堪王室之多艱; 雖之嗣徽, 莫尙壼化之廣運。 簾帷靚穆, 八域戴元祐之功; 帡幪庇安, 三朝隆長樂之養。 追先志而明天理, 大義炳如日星; 闢左道而扶民彝, 辭敎嚴於鈇鉞。 蓋其所助者深, 所成者遠, 寔由至柔而剛至靜而方。 太虛之浮雲已過, 褕儀縱閟; 《江沱》之遺風尙聞, 璜聲彌長。 肆以邦人於戲之思, 爰擧宗宮莫大之禮。 嗟! 樹立之閎達, 休烈同符於興邦, 若草昧之經綸, 崇號無加於尊祖。 黃髮徵鴻博之論, 喜廷詢之僉同。 玉簡薦象行之文, 遂物采之大備, 節壹惠而蠲吉, 比兩曜而齊光。 頌烈之丕承, 邑姜與十亂而同德, 讚功之巍有, 嬀汭著二妃之觀刑。 爰及明禋, 竝擧徽典。 乃於本年正月初四日, 謹奉冊寶。 上英宗大王廟號曰‘英祖’, 改上尊諡曰‘正文宣武熙敬顯孝’, 追上尊號曰‘中和隆道肅莊彰勳’, 貞聖王后尊號曰‘元烈’, 貞純王后尊號曰‘正顯’。 奉圭瓚而怵焉興慕, 拚琬琰而煥乎有章。 從卿士從庶民, 親賢樂利之不能忘, 右烈祖右文母, 覲耿揚大之攸受休。 徂廟宮而陟降昭監, 及陬澨而遐邇修播。 行慶首歲, 會天地回泰之期; 布德陽春, 叶雷雨作解之象。 自本月五日昧爽以前, 雜犯死罪以下, 咸宥除之。 於戲! 淸廟登烈文之頌, 昕庭下寬大之書。 予追錫類之先思, 憲章紹述, 爾受敷庶之君福, 彝訓會歸, 故玆敎示, 想宜知悉。

【大提學韓章錫製】


  • 【원본】 31책 27권 2장 B면【국편영인본】 2책 339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