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강 김영선이 상소를 올리다
직강(直講) 김영선(金榮善)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일찍이 삼가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상고하여 보니, 효종(孝宗) 8년에 효종께서 연석(筵席)에서 신하들과 우리나라 의복 제도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르시기를, ‘고려의 정몽주(鄭夢周)가 중국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사모(紗帽)와 단령(團領)의 제도를 전파하였다. 대체로 중국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관디 차림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갓은 아주 괴이하여 문을 출입할 때 걸핏하면 걸려서 장애를 받는다. 소매도 너무 길고 넓어서 행동하기에 불편하다. 그전에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보니, 무사들의 옷소매는 겨우 주먹이 드나들 정도였으니, 실로 군복은 행동에 편리함을 취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자,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임진년(1592) 이후에 중국의 제도대로 상하가 다 작은 모자를 쓰려고 했으나 결국 실행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라고 하니, 효종께서 이르시기를, ‘도포(道袍)도 임진년 이후부터 입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철릭〔帖裏〕과 오랑캐의 철릭은 그 제도가 같으며 옛날에는 오랑캐의 이엄(耳掩)이 있었는데 협소하여 쓰기 편리했지만 지금은 없다. 대체로 이런 것들은 애초에 정한 제도가 없고 다만 한때 풍속이 숭상하는 것에 따라 변천해 왔다.’ 하셨습니다. 성훈(聖訓)이 지당하니, 신이 속으로 되뇌이고 마음에 새겨 둔 지 오래입니다.
신이 몇 해 전에 전하(殿下)의 명이 내려진 것을 보니, ‘조복(朝服), 제복(祭服), 상복(喪服) 외에 직령 도포(直領道袍)를 비롯하여 소매가 넓은 옷들은 다 없애버리고 단지 소매가 좁은 긴 도포를 입으며, 관리로 있는 사람은 전복(戰服)을 더 입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계속하여 또 전복을 답호(褡護)라고 부르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신이 생각건대 우리 전하(殿下)의 처분은 실로 번거로운 것을 없애고 간편하게 하려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역시 선대 임금들이 실천하지 못한 뜻을 계승하여 실천하시려는 것이라 여겼으므로, 신은 우러러 칭송함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다시 진신(搢紳)들과 사서인(士庶人)들의 연회 옷차림을 편리할 대로 놔두라고 영(令)을 내리셨으니, 신은 실로 의혹이 생겨나고 계속하여 근심하고 한탄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의 훌륭한 조치는 옛날 것을 인용하여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니 사실 동요하지 말고 시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의 의견을 물리치기 곤란하면 도로 철회하고 중지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가불가(可不可)를 결정하지 않은 상태로 두는 것은, 신은 참으로 성상께서 유순(柔順)의 도리로 나라를 다스리는 정모(政謨)가 대단히 훌륭하다는 것을 물론 알고 있지만, 어찌 강건하고 결단력 있는 도리에 훼손됨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생각건대, 우리 왕조의 의복 제도는 신의 소견으로 그것이 옛 제도에 부합되는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신은 대략 진달하고자 합니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위만(衛滿)이 망명할 때 북상투〔魋結〕와 오랑캐의 옷으로 변장한 다음 동쪽으로 나왔다.’ 하였으니, 북상투는 바로 오랑캐의 복식인 것입니다. 《명사(明史)》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미행(微行)하다가 신관(新觀)에 이르러 도사(道士)가 망건(網巾)을 맨 것을 보고 이것을 취하여 반포하였다.’ 하였으니, 망건은 바로 도사의 차림새입니다. 폭건(幅巾)은 보살로부터 나와 도사에게 전하여진 것인데 송 나라에 이르러 유생들의 옷차림이 되었습니다. 도포(道袍)는 도사로부터 시작되어 승려들에게 전파된 것이 우리나라에 이르러 정복(正服)으로 되었습니다. 창의(氅衣)란 것은 인조(仁祖) 병자년(1636) 이후에 폐기된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상복(上服)이 되어 온 나라 사람들이 입게 되었습니다. 소매가 넓은 주의(周衣)는 순조(純祖) 경진년(1820)에 요사스런 의복으로 입는 것을 금지했으나 그대로 회복되어 법을 어기고 행해지다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온 나라에 퍼졌습니다. 직령(直領)은 관복(官服)인데 그 깃을 한쪽으로 기울어지게 했습니다. 중의(中衣)는 도포에서 그 옷섶을 없애버린 것입니다. 이른바 학창의(鶴氅衣)는 또한 경서와 역사책에서 볼 수 없으며, 행의(行衣)라는 이름은 더욱 근거가 없습니다. 동자(童子)들의 변발(辮髮)이나 부녀(婦女)들의 옷차림 같은 것은 북원(北元)의 옛날 풍습을 따른 것으로서 올바른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기타 세세한 옷차림은 어느 하나도 옛날 것을 본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복(章服)으로 말하면, 조복(朝服)은 삼고법복(三古法服)입니다. 위에 웃옷을 입고 아래에 치마를 두르는 것은 대체로 하늘과 땅의 뜻을 취한 것이겠는데 지금은 순수 붉은 색깔입니다. 조관(朝冠)과 제관(祭冠)은 원래 제도가 같은데 지금은 분리해서 사용합니다.
띠의 제도는 대부(大夫)들과 사(士)가 각각 달랐는데 지금은 후수(後綬)에 고정시켰으니, 고증할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곡거(曲裾) 같은 제도는 어느 곳에서 실시했고 후수의 두 개 고리는 어느 때에 사용한 것이겠습니까? 마치 흰 적삼이 푸른 적삼으로 변하고 무릎 가리개가 가슴 가리개로 변한 것과 아주 유사한데, 그 제도가 없어지고 그릇되게 답습된 데 대해서는 이 상소에서 두루 열거하기는 어렵습니다.
단령(團領)이란 상령(上領)인데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기를, ‘상령이란 본래 오랑캐의 옷에서 나왔다.’라고 했고,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상령을 댄 적삼은 송(宋)이 당(唐)을 답습하고 당은 수(隋)를 답습하고 수는 주(周)를 답습하고 주 나라는 원위(元魏)를 답습하였다.’ 하였으니, 원위는 척발씨(拓跋氏)입니다. 만약 그 근원을 찾는다면 하나도 똑바른 데서 나왔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복 제도에 대해 말할 때면 반드시 명(明)의 제도라고 하면서 사실을 구명하지 못하고 과장된 것이 많습니다. 《명사(明史)》와 《대명회전(大明會典)》은 다 비서(祕書)가 아닙니다.
선정신(先正臣) 조헌(趙憲)이 우리나라에 돌아 와서 올린 상소에서도 아주 자세하게 진달했는데 그는 중국의 의관 제도(衣冠制度)를 논하기를, ‘윗사람으로부터 아랫사람까지 크고 화려한 것을 숭상하지 않으니 소매의 너비는 모두 한 척(尺)입니다. 소맷부리는, 문관(文官)은 9촌(寸)이고 무관(武官)은 겨우 주먹이 드나들 정도입니다.’라고 했으니, 이것은 바로 문충공(文忠公) 정몽주(鄭夢周)가 우리나라에 와서 전한 홍무(洪武) 년간의 제도입니다. 척(尺)은 바로 생척(省尺)으로서 오늘날의 천을 재는 척(尺)이 아니니 어찌 우리나라의 의복처럼 크고 화려했겠습니까? 문충공의 유상(遺像)이 지금 숭양 서원(嵩陽書院)에 있고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유상도 경성(京城)의 수진방(壽進坊)에 있는데, 반령(盤領)과 좁은 소매는 홍무 년간의 옛 제도라는 것을 역역히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것이 어찌 명(明)에서 창시한 것이겠습니까? 이태백(李太白), 두보(杜甫), 한유(韓愈), 백낙천(白樂天) 등 여러 사람의 유상이 지금까지 전하는데 다 반령 차림입니다.
이 위공(李衛公 : 당나라 이정(李靖))의 《고물기(故物記)》에 이르기를, ‘소금포(素錦袍)는 한결같이 옷깃과 소매가 좁고 작으며, 자문릉오(紫文綾襖)도 한결같이 소매를 좁게 만들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윤화정(尹和靖 : 윤돈(尹焞)의 호)이 아뢰기를, ‘이천(伊川)은 늘 옷에 대하여 애착을 가졌는데, 일찍이 굵은 포(布)나 명주 도포를 입었으며 그 소매도 일반 사람들과 같았고 머리에 쓴 사모는 바라보면 마치 종 모양과 같았다.’ 하였으니, 지금 이천을 따라 배우는 사람들이 소매를 크게 하고 깃을 모나게 하는 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육선공(陸宣公)과 양귀산(楊龜山)의 진상(眞像)이 본집(本集)의 첫 권에 새겨져 전해 오는데 이것도 역시 반령 차림입니다. 이것을 미루어 보건대, 당(唐) 나라, 송(宋) 나라의 옛 제도를 대개 알 수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답호(褡護)와 전복(戰服)이 비록 삼대(三代)의 법복(法服)은 아니라 하더라도 당(唐) 나라, 송(宋) 나라가 남긴 제도인 만큼 지금의 옷차림이 근거없는 것에 대비하면 그 차이가 천리 정도만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나 답호와 전복을 대비할 때, 제도에서 차이가 날 뿐 아니라 시원(始原)도 조금 오랜 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니 전복을 답호로 개칭한 것은 그 실지는 없고 그 이름만 빌린 것으로서 곧장 답호를 쓰는 것만 하겠습니까?
기어이 옛날의 제도를 실행하려 한다면 삼고(三古)의 법복으로 실낱같이 끊어지지 않고 전승되고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는데, 심의(深衣)가 그것입니다. 대체로 심의라고 하는 것은 존비와 남녀, 문무와 길흉에는 관계없이 통용된 정식 복장인데 유생들로서 도안을 넣고 설명한 사람이 수백 명입니다. 그러나 옛날 제도에 근거하여 오늘날을 생각하고 절충하여 취사 선택한다면 어찌 편리하게 적용하는 방도가 없겠습니까?
온공(溫公)이 말하기를, ‘12폭으로 하면 아래가 위보다 곱절이나 되니 척(尺)과 촌(寸)의 수치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라고 하였고, 양신재(楊信齋)는 구변(鉤邊)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선생은 말년에 옛 논의를 버리고 쓰지 않았다.’라고 했는데 선생은 바로 주자(朱子)입니다. 이에 근거하면 편의에 따라 덜거나 보태는 것도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심의(深衣)에 대하여 경서(經書)에서는 이르기를, ‘둥글게 한 것은 손을 들 때 용의(容儀)를 갖추기 위한 것이다.’ 하였으니, 이것은 소매의 형태가 둥글다는 것이 아니라 손을 들어 읍하는 용모가 둥글다는 것입니다.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는 이르기를, ‘공(拱)이란 북을 안은 모습이다.’ 하였으니, 공은 손을 드는 짓을 말하고 북을 안은 듯하다는 것은 규(規)를 말합니다.
또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주인이 제사 음식을 받아서 왼쪽 소매에 담고 소매를 새끼손가락에 건다.’ 하였으니, 소매가 둥글다면 어떻게 손가락에 걸도록 닿겠습니까. 그렇다면 심의도 소매가 좁은 것인데 하필 답호(褡護)만 그렇겠습니까? 예로부터 성왕(聖王)의 제도에서 문장(文章)으로 귀천을 표시한 것은 있었으나 그 제도를 각각 다르게 하였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글을 고증하고 예를 의논하는 것은 당대의 왕이 할 바이고 문(文)과 질(質)을 손익하는 것은 안 될 것이 없습니다.
요즘 풍속이 나쁜 버릇에 젖어 고치기 어려우며 조정의 명을 반포할 때마다 막혀 행해지지 않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윗사람이건 아랫사람이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공적인 일이건 사적인 일이건 전적으로 심의(深衣)를 착용함으로써 바르고 간편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봅니다. 가에 두른 색깔로 자급(資級)을 식별하고 띠의 제도를 가지고 문관과 무관을 구별하는 것은 옛날의 성인들이 문장으로 귀천을 표시한 뜻에 부합되니 어찌 훌륭하지 않으며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많은 책들을 널리 인용하지 못했지만 이런 정도로 논한 것도 모두 경전에 실려있는 것이지 신이 근거 없이 억측으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殿下)께서는 옷을 제작한 근본을 깊이 구명하고 시세에 따라 개혁하는 마땅함을 살펴서 신이 말한 답호(褡護)와 심의(深衣)의 제도를 가지고 특별히 묘당(廟堂)에 물어 보시고 여론을 널리 받아들이소서. 만약 옛날 것을 상고하지 않았고, 오늘날에 불편하다면 신은 망녕된 말을 한 처벌을 만번 받는다 하여도 달게 여기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것은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였다.
- 【원본】 29책 25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8면
- 【분류】의생활-예복(禮服)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
直講金榮善疏略:
臣嘗謹按《國朝寶鑑》, 孝宗八年, 上與筵臣, 語及我朝衣服之制曰: ‘前朝鄭夢周還自中原, 始傳紗帽、團領之制。 蓋中原, 雖戰陣, 亦以冠帶從事。 而我國笠制, 極其駭異, 出入門戶, 動輒罣礙。 至於表袖, 亦太長闊, 不便行步。 曾見《大明會典》, 武士衣袖, 僅容其拳, 良以戎服, 取其輕捷也。’ 鄭太和曰: ‘壬辰後, 嘗欲依中國之制, 上下皆戴小帽子, 而竟未能行’云矣。 敎曰: ‘道袍亦自壬辰後始有之。 我朝帖裏, 與胡人帖裏, 同其制。 古有胡耳掩, 狹小輕銳, 而今無之。’ 大抵此等, 初無定制, 只因一時俗尙, 輾轉變易也。 至哉聖訓也! 臣竊莊誦而銘諸心者久矣。 臣於年前, 伏讀聖旨下者, 有曰‘朝服、祭服、喪服外, 如直領道袍凡廣袖之類, 皆令除之, 只著窄袖長袍, 有官者加戰服。’ 繼又下戰服, 稱以褡護之令。 臣竊以爲我殿下處分, 寔出於祛繁就簡, 而亦所以繼述先朝未卒之志事也。 臣不勝欽仰攅祝。 曾未幾何, 更令搢紳、士庶宴服, 任其從便, 臣實滋惑, 繼以憂歎焉。 今此盛擧, 旣是援古矯俗, 則固當勿撓而行之, 可也。 若難於拂衆, 則繳還而寢之, 亦可也。 不然, 置之可不可之間。 臣固知大聖人柔道御國之謨, 亶出尋常萬萬, 而豈不有損於乾剛夬正之道哉? 第伏念我朝衣制, 以臣見之, 未知其有合於古制者, 臣請略陳之。 《史記》, ‘衛滿亡命, 魁結變夷服而東出。’ 椎髻者, 是蠻夷服也。 《明史》, ‘太祖微行至新觀, 見道士結網巾, 取以頒示。’ 網巾者, 是道士服也。 幅巾則出於菩薩而轉于道士, 至宋而爲儒著; 道袍則始於道士而轉于僧徒, 至於我東而爲正服。 氅衣者, 仁祖朝丙子後, 斥而廢棄者, 挽近爲上服, 衣被一國焉。 廣袖周衣, 純廟朝庚辰間, 禁以服妖者, 仍復冒行, 到今遍于八省焉。 直領則就官服, 而斜其領者也; 中衣則從道袍, 而去其袵者也。 所謂鶴氅衣, 亦不見於經史, 行衣之名, 尤爲無據矣。 至若童子辮髮、婦女服色, 尙沿北之舊, 而莫之正者也。 然則其他瑣細服飾之無一師古, 推可知矣。 且以章服言之, 朝服, 三古法服也。 上衣下裳, 蓋取乾坤, 而今也則純朱焉。 朝冠、祭冠, 原來同制, 而今也則分用焉。 帶制, 大夫士判然各異, 而今也聯於後綬而無徵焉。 且若曲裾一制, 施於何處? 後綬兩環, 用於何時? 甚或如白衫變爲靑衫, 蔽膝變爲蔽胸之類, 失制而襲謬者, 難遍以疏擧。 團領者, 上領也。 司馬溫公曰: ‘上領者, 本出胡服。’ 朱子曰: ‘上領衫, 本朝因唐, 唐因隋, 隋因周, 周因元魏、元魏者, 拓跋 魏也。 苟求其原, 未可曰一出於正也。’ 東人言, 衣制必稱明制, 而不能求實, 炯疑虛喝者多矣。 《明史》與《會典》, 俱非祕書。 先正臣趙憲東還之疏, 亦甚綜詳。 其論中朝衣冠之制曰: ‘自上達下, 不尙浮大, 而袖闊俱一尺。 祛口文則九寸, 而武則僅容出拳。’ 此卽文忠公 鄭夢周東來所傳洪武定制也。 尺是省尺, 非今布帛尺也, 則何嘗如東衣之浮大者也? 文忠公遺像, 現在嵩陽書院; 文靖公 李穡之像, 亦在京城 壽進坊, 盤領窄袖, 班班可覩 洪武舊制也。 雖然, 是豈大明所創也? 李供奉、杜工部、韓昌黎、白香山諸像, 尙傳至今, 而擧皆盤領也。 李衛公 《故物記》曰: ‘素錦袍, 一其襟袂促小, 紫文綾襖䄃, 一促製小袖袍。’ 且尹和靖曰: ‘伊川常愛衣, 早或博竭紬襖, 其袖亦如常人所戴紗巾, 望之如鍾形。 今之習伊川學者, 大袖方領, 未知何謂。 陸宣公、楊龜山眞像, 刻傳本集卷首, 而是亦盤領也? 推此而唐、宋舊制, 槪可見矣。 臣愚以爲, 褡護戰服, 雖非三代法服, 猶爲唐、宋遺制, 則較諸時衣之無據, 相去奚啻千里哉? 然褡護之於戰服, 不但制度之差殊, 亦不無原始之稍古。 以戰服而改稱褡護, 則是無其實, 而借其名, 曷若直用褡護無已, 而必欲行古之制? 三古法服之不絶如綫者, 有一焉, 深衣是耳。 大抵深衣者, 尊卑、男女、文武、吉凶通用之正服, 而諸儒圖說, 數百其家。 然而因古度, 今折衷取捨, 豈無便宜適用之制哉?’ 溫公曰: ‘要須十二幅, 下倍於上, 不必拘於尺寸之數。’ 楊信齋論鉤邊曰: ‘先生晩年, 去舊說而不用。’ 先生, 卽朱子也。 據此則不害爲隨宜損益也。 深衣, 經文曰: ‘規者行擧手以爲容’, 此謂袂形非圓, 擧手揖讓, 其容乃圓也。 《尙書大傳》曰: ‘拱則抱鼓。’ 拱者, 擧手之謂也, 抱鼓者, 規之謂也。 且《禮書》云: ‘主人受胙, 實于左袂, 掛袂于季指, 袂若形圓, 豈至掛指也?’ 然則深衣, 亦可窄袖也。 又何必褡護爲哉? 自古在昔聖王制度, 以文章表貴賤則有之, 未聞異其制度也。 且考文議禮, 時王所制也, 文質損益, 無所不可。 近日流俗, 狃於習見, 難於更張, 毋頒朝令, 輒閼而不行, 可勝歎哉? 臣愚以爲, 無論上下、吉凶、公私服, 不如專行深衣之爲簡正也。 以緣之色而辨資級, 以帶之制而別文武, 則庶合於古聖爲文章表貴賤之意也。 曷不休哉? 曷不盛歟? 臣於群書, 未暇廣引, 而只此所論, 亦皆著見於經傳者, 非臣無稽之臆說也。 伏願聖明深究乎制作之本、細察乎因革之宜, 以臣所言褡護、深衣之制, 特詢廟堂, 博採輿議。 如謂其不考於古、不便于時, 則臣雖萬被妄言之誅, 亦所甘心。
批曰: "此不可容易說去者矣。"
- 【원본】 29책 25권 5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308면
- 【분류】의생활-예복(禮服) / 정론-정론(政論) / 역사-사학(史學)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