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리대신을 인견하여 영제를 변통하는 것 등에 대해 의논하다
총리대신(總理大臣)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 판부사(判府事) 김홍집(金弘集)이다.】 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오늘 대신(大臣)들을 소견(召見)한 것은 오로지 영제(營制)를 변통하기 위한 것인데 현재의 급선무로는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듣건대 각국(各國)의 군제(軍制)도 시기에 따라 개혁하여 훈련에 많이 종사한다고 한다.
근래 중국(中國)의 신기영(神機營), 녹영(綠營)의 군제 역시 변통이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시기에 따르는 마땅한 조치로써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나간 몇 해 동안 각 영을 나누어 두었더니 불필요한 비용이 실로 많았다. 그리고 매 영마다 500병(兵)은 훈련하는 규모에도 적합지 않다. 그래서 이제 다만 3개 영만을 남겨두고, 우영(右營), 후영(後營)과 해방영(海防營)을 합쳐 통위영(統衛營)으로, 전영(前營)과 좌영(左營)을 합쳐 장위영(壯衛營)으로, 별영(別營)은 총어영(總禦營)이라 부르도록 하라."
하니,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옛부터 영제를 나누거나 합치는 것은 대체로 편리한 조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제 성교(聖敎)를 듣고서, 신은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성지(聖旨)의 훌륭한 계책에 대하여 우러러 흠송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하였다. 김홍집(金弘集)이 아뢰기를,
"역대로 군제는 원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록 시기에 따라 알맞게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지만 모두 변동시킬 수 없는 일정한 규제(規制)가 있은 뒤에야 몇 백 년 준수하여도 폐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6, 7년 이래로 영제를 몇 번 변통했으나 변통할 때마다 규제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또 이런 변통하는 조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제 성상(聖上)께서 계책을 묵묵히 궁리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일정한 규제를 세워 몇 백 년 동안 준수할 법도로 삼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몇 해 전에 오제독(吳提督)의 영제에 근거하여 500병을 한 영(營)으로 만들었는데 지금 훈련을 한 번 해 보려고 하니 일군(一軍)의 제도가 될 수가 없다고 한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한 영을 500으로 하는 것은 바로 편장(褊將)의 부곡(部曲)으로서 실로 대국(大國)의 3군, 다음가는 나라에서 2군으로 하는 군제가 아닙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번에 영을 합친다면 그 불필요한 비용으로 아주 넉넉히 군사를 양성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어찌 그저 군사를 양성하는 것만 그렇겠습니까? 쓸데없는 것을 없애버리고 방만한 비용을 제거하는 것이니 실로 치국(治國)의 중요한 방도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춘천(春川)은 바로 동북쪽의 관문이다. 옛날 정묘호란(丁卯胡亂)때 단지 200명의 정병(精兵)만으로 석파령(石坡嶺)에서 승리를 거두기로 하였다. 그 후에 방략사(防略使)를 두었고 또 방어영(防禦營)을 둘 것을 논의했는데 실현하지 못하였다. 간혹 감영(監營)을 이설(移設)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으나 그 지형이 보장(保障)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점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이나 강화도(江華島)와 차이가 없다. 이제 이미 진어영(鎭禦營)으로 되었으니 기전(畿甸)에 이속시키고 유수(留守)를 둔 다음에야 견고하게 방어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심순택이 아뢰기를,
"영제를 변통하는 것은 나라의 큰 정사입니다. 진어영을 기전에 이속시키고 유수를 설치하는 것도 관제(官制)와 관계되니 사체(事體)상 널리 의견을 물어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춘천은 바로 옛날에는 나라의 수도였는데 그 지형이 정말 좋은 곳입니다. 그리고 지금 영을 설치하였으니 유수를 두어 그 체제를 중시하는 것도 시기에 알맞은 조치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원(水原), 광주(廣州)에 유수를 설치할 때의 전례를 상고해 보니, 모두 약방(藥房)이 입시(入侍)할 때 그저 대신과 문의하여 논의했을 뿐이고 장신(將臣)이나 전신(銓臣)은 등대(登對)한 적이 없었다."
하니, 김홍집이 아뢰기를,
"몇 해 전에 영제를 변통할 때는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 영의 장신들이 연석(筵席)에 나와 모두 의견을 아뢴 적이 있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차대(次對)를 통해서였습니다."
하였다. 김홍집이 아뢰기를,
"금일의 하교에 대하여 연석에 나오지 못한 대신들에게는 영상(領相)이 직접 구체적으로 편지 왕래를 해야 하고 전관(銓官)들과도 상의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제 6개 영을 합쳐서 3개 영으로 만들었는데 통위영은 중영(中營)으로 하고 깃발 색깔은 황색으로 하고, 장위영은 좌영으로 하고 색깔은 청색으로 하고, 총어영은 우영으로 하고 색깔은 백색으로 하라. 수기(手旗)와 초요기(招搖旗)는 각각 그 영의 색깔에 따라 만들고, 군제에 속하는 모든 것은 중영, 좌영, 우영이 거행하라는 내용으로 각 영에 통지하라."
하였다.
- 【원본】 29책 2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9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왕실-국왕(國王)
十九日。 引見總理大臣。 【領議政沈舜澤、判府事金弘集】 敎曰: "今日召見大臣, 專爲營制變通, 而目下急務, 莫先於此矣。 聞各國軍制, 隨時改革, 而多從布操。 近日中國之神機營綠營軍制, 亦有變通, 則此乃時措之宜, 不得不然者也。 年來各營分置, 冗費實多。 且每營五百兵, 不合於演操之規。 故今欲只存三營。 合右後及海防, 而稱統衛營; 合前左, 而稱壯衛營; 別營則稱總禦營矣。" 舜澤曰: "自古營制之或分、或合, 蓋出於隨宜措宜。 而今聆聖敎, 臣無容他見。 聖旨神算, 祗不勝欽頌矣。" 弘集曰: "歷代軍制, 固多沿革。 雖不得不因時制宜, 而皆有一定不易之規然後, 可以幾百年遵守無弊也。 竊以六七年來, 營制凡幾變, 而變通之際, 規制未定。 故又有此變通之擧矣。 今也聖筭之默運已久, 則必立一定之規, 以爲幾百年遵守之圖。 是臣之望也。" 敎曰: "年前因吳提督營制, 五百兵爲一營, 而今欲試布操, 則不能成一軍之制云矣。" 弘集曰: "一營五百, 乃褊將之部曲, 實非大國三軍、次國二軍之制矣。" 敎曰: "今若合營, 則以其冗費優, 可以厚養其兵也。" 弘集曰: "豈但養兵爲然也? 汰冗祛濫, 實爲治國之要道也。" 敎曰: "春川卽東北關隘也。 昔在丁卯虜亂, 只以二百精兵, 得捷於石坡嶺。 其後置防略使, 又議設防禦營而不果。 或有監營移設之論, 其形勝之堪爲保障, 與南漢、江都無異。 而今旣爲鎭禦營, 則不可不移屬畿甸, 設置留守然後, 庶爲捍衛綢繆之圖矣。" 舜澤曰: "營制變通, 卽有國大政也。 鎭禦營之移屬畿甸, 設置留守, 亦係官制, 其在事體, 博行詢議, 似宜矣。" 弘集曰: "春川卽古之國都也。 其形勝, 實爲上游之最。 且今旣設營, 則置留守而重其體制, 亦可爲時措之宜矣。" 敎曰: "考見水原、廣州設置留守時例, 則皆於藥房入侍, 只與大臣詢議, 而將臣、銓臣, 未嘗登對矣。" 弘集曰: "年前營制變通時, 則時原任大臣、各營將臣登筵, 皆有所奏矣。" 敎曰: "此則因次對故也。" 弘集曰: "今日下敎, 未登筵大臣處, 領相自當詳爲往復, 而銓官亦可以相議矣。" 敎曰: "如是爲之, 好矣。" 又敎曰: "今合六營爲三營, 而統衛爲中營, 色當尙黃; 壯衛爲左營, 色當尙靑; 總禦爲右營, 色當尙白矣。 手旗、招搖旗, 各隨其營方色爲之。 而凡屬軍制, 亦以中、左、右營擧行事, 知委各營也。"
- 【원본】 29책 25권 2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92면
- 【분류】군사-군정(軍政)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