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심순택이 정사에 대해 의논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일전에 신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기강(紀綱)을 일으키고 경비를 넉넉하게 하며 법령을 신의 있게 하는 문제에 대해 신에게 권면하고 요구했는데, 이것은 대개 요(堯) 순(舜)이 백성을 기른 정사로 정덕(正德)·이용(利用)·후생(厚生)하는 근거입니다.
옛날에 주자(朱子)는 ‘사해의 백성들이 각기 사욕을 채우자고 할 때 정사를 잘하는 사람이 능히 총섭(總攝)해서 장악하고 정돈해서 각기 사리를 따르도록 한 것은 기강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또 ‘규율은 저절로 설 수 없는 것이니 반드시 임금이 공평하고 정직하며 당파에 치우치거나 사적인 것에 기울어지는 것이 없어야만 기강이 잡혀서 서게 되는 것이다. 임금의 마음은 저절로 바르게 될 수 없는 것이니 어진 사람을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하며 의리를 밝히고 사심을 막아야 바르게 될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신도 주자의 말을 전하(殿下)에게 올리고 잘못된 것을 충고한 옛사람의 의리를 본받아 총섭하여 장악하고 정돈하는 방도를 진술하는 바이니 살펴보기 바랍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잘못된 것을 충고하는 말을 감히 명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면려하는 뜻이 또한 매우 절절하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무명수세(無名收稅)를 없애도록 신칙한 명령이 준절하고 엄하여 칭송해마지 않는데 불량한 모리배들이 각 아문의 권세를 빙자하여 온갖 방법으로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있습니다.
금지시키면 잠깐 동안 그만두고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서는 공적인 증명서를 얻어가지고 패악질을 도리어 더 심하게 하는데, 해당 관청의 관리가 조정의 명령을 두려워하고 백성들의 형편에 대해서 돌보아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어 도리어 조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것은 따질 수 없으니 지금부터 금령(禁令)을 어기는 놈이 있을 때는 중앙에서는 법사(法司)가, 지방에서는 감사가 잡아다가 조사하여 형장을 쳐서 귀양 보내며 잘 살피지 못한 해당 아문의 당상(堂上官)도 발각되는 대로 규탄하여 경계시켜서 영원히 뒷날의 폐단을 막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신칙한 것을 소용없는 것으로 여긴다면 명령을 집행하고 금지시키는 뜻이 어디 있는가? 특별히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심순택이 아뢰기를,
"고(故) 판서(判書) 문정공(文貞公) 윤급(尹汲)은 영조(英朝) 임금의 훌륭한 시대에 큰 절개와 높은 지조를 가지니 선비들이 마치 주춧돌이나 높은 산악처럼 의지했습니다. 정미년 이후 충신과 역적이 뒤섞이고 어진 이와 간사한 자가 함께 등용되는 것을 한 몸으로 바로잡자고 하다가 자신이 여러 번 위험을 겪었습니다. 의리를 부지하고 역적을 쳐서 복수한 대의는 백대에 걸쳐 영원히 덕을 보게 되었는데 듣자니 그의 사당에 제사를 지낼 기간이 다 끝나간다고 합니다. 충신을 표창하는 은전으로 보아 응당 부조(不祧)의 은전을 베풀어야 합니다.
고(故) 대사간(大司諫) 김시걸(金時傑)은 가풍을 계승하여 임금과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숙종(肅宗) 때 윤기(倫紀)를 바로잡고 역적을 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으며 국문하는 좌석에서 붓을 내던지고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지내면서 시를 지었으니 그의 나라를 따르는 충성심과 간사한 것을 배척하는 곧은 절개는 찬연히 빛나서 백대를 가도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높이 표창하는 일을 미처 하지 못하여 사람들이 아직도 답답해하고 있으니 찬성(贊成)으로 초증(超贈)하고 시장(諡狀)이 올라온 뒤에 시호(諡號)를 내려주어야 합니다.
지평(持平)의 벼슬을 추증한 이운영(李運榮)은 행실이 순박하고 독실하여 일찍이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어주었으나,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해 벼슬을 더 추증한 전례가 많이 있으니 특별히 이조 참의(吏曹參議)나 좨주(祭酒)의 벼슬을 추증하여 착한 것을 표창해야합니다.
문원공(文元公) 송명흠(宋明欽)은 이미 부조의 명을 입었으나, 은덕을 베푸는 훌륭한 은전은 아직 베풀어주지 못했습니다. 표창하는 의리로 볼 때 응당 성의를 보이는 조치가 있어야 합니다."
하니, 모두 다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연전에 선혜청(宣惠廳) 낭청(郎廳)이 아뢴 내용을 헤아려서 변통한 것은 당시의 조건에 맞추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조(吏曹)에서 바꾼 것은 잘못된 것이니 다시 옛 규례대로 대신 임명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호준(李鎬俊)이 보고한 것을 보니, ‘도내 각 고을에서 갑신년 몫 이전 것으로 아직까지 거두지 못한 쌀이 1만 6,620여석이고 콩이 7,790여석인데 모두 선한(船漢)들이 횡령한 것을 받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횡령한 선주들이 대부분 흩어져 도망가고 또 처벌을 받은 자도 있지만 거듭하여 참혹한 흉년을 맞아서 징수할 도리가 없으니 모두 다 특별히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배에서 횡령한 것을 징수할 방도가 없는데 이제 억지로 독촉하여 받게 되면 그 해가 장차 곤궁한 백성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보고한 대로 시가(時價)를 참작하고 헤아려서 특별히 돈으로 대신 바치도록 허락하여 백성들과 고을 형편이 펴지게 하기 바랍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번에 전라 좌도 어사(全羅左道御使)의 별단(別單)과 관련하여 흥양현(興陽縣)에 진결(陳結)이 많은데 백징(白徵)하게 되어 딱한 형편이니 감사를 시켜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복계(覆啓)하고 행회(行會)하였습니다. 지금 그 도 감사인 이헌직(李憲稙)이 보고한 것을 보니 진결이 도합 864결(結) 80부(負)인데 병자년과 정축년의 흉년을 겪은 뒤로 묵힌 토지가 계속 그대로 있어서 개간할 가망이 없으니 빨리 편의대로 해 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토지가 있어도 진전(陳田)이고 개간한 것은 없는데 조세를 독촉하는 것은 실상 거행할 수 없는 정사입니다. 그러니 진결을 5년을 한정해서 임시로 조세를 감면시켜주고 기어이 기한 안에 진전을 일구어 구세(舊稅)를 완전히 청산하도록 신칙할 것입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28책 24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69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재정-잡세(雜稅)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농업-개간(開墾)
初三日。 次對。 領議政沈舜澤曰: "日前臣之疏批中, 以振紀綱、裕經用、信法令, 勉臣、責臣。 此蓋堯、舜養民之政, 所以正德、利用、厚生者也。 昔朱子曰: ‘四海兆民, 各欲行其私, 而善爲治者, 乃能總攝而整齊之, 使各循其理者, 以有紀綱也。’ 又曰: ‘紀綱不能自立, 必人主公平、正直, 無偏黨、反側之私, 然後紀綱有所繫而立, 君心不能以自正, 親賢遠小, 講明義理、閉塞私邪, 然後乃可以正也。’ 臣亦以朱子之說, 獻於殿下, 效古人責難之義、陳總攝整齊之方, 伏願澄省焉。" 敎曰: "責難之言, 敢不服膺? 而勉勵之意, 亦復深切矣。" 舜澤曰: "以無名收稅革罷事, 飭敎裁嚴, 不勝欽誦。 而無賴牟利之輩, 憑藉各衙門, 百端侵虐。 禁則乍止, 散而復集, 圖得公文, 行惡反甚。 有司之臣, 苟知朝令之可畏、民勢之當恤, 則豈可一任其所爲, 反爲之助耶? 已往不可追究, 而自今若有犯禁之漢, 內而法司、外而道臣, 捉査刑配。 不察之該衙門堂上, 隨現論警, 永杜後弊, 恐好。" 敎曰: "朝飭視若弁髦, 則安有令行禁止之意乎? 別般嚴飭, 可也。" 舜澤曰: "故判書文貞公 尹汲, 當英廟盛際, 姱節峻操, 士類依之若砥柱喬嶽。 而丁未以後, 忠逆混淆、賢邪雜進, 隻手廻瀾, 其身屢危。 扶植討復之大義, 永有賴於百世。 聞其祠版, 將親盡云, 其在襃忠之典, 合施不祧。 故大司諫金時傑, 承籍家庭, 乃心王國。 當肅廟時, 以正倫紀、討亂逆爲己任。 鞫座擲筆, 湖藩作詩, 其循國之忠、折奸之直, 炳然有百世不泯者矣。 崇奬未遑, 輿論尙鬱, 超贈貳相, 待諡坐易名。 贈持平李運榮, 以經行純篤, 曾施襃典, 而似此人多有加贈之例, 特贈三銓祭酒, 以示彰善。 文元公 宋明欽, 已蒙不祧之命, 而恩侑盛典, 尙有未遑。 其在表章之義, 合有示意之擧。" 竝允之。 又曰: "年前宣惠郞之揆奏變通, 出於因時制宜。 而銓曹移擬, 不無難便, 復舊例差代, 恐好。" 允之。 又曰: "卽見慶尙監司李鎬俊所報, 則‘道內各邑甲申條以上未收, 米爲一萬六千六百二十餘石零, 太爲七千七百九十餘石零, 而俱是船漢欠逋之未刷者也。 所逋船主, 擧皆逃散, 亦有伏法。 而荐遭慘歉, 末由指徵, 竝特許詳代’爲辭矣。 流來船逋, 指徵無處, 今若强令督刷, 則其害將歸於窮蔀。 依所報酌量時價, 特許代納, 請俾紓民邑事力。" 允之。 又曰: "頃因湖南左道繡衣別單, 興陽縣陳結夥多, 白徵可矜, 令道臣査報之意, 覆啓行會矣。 卽見該道臣李憲稙所報, 則‘陳結合爲八百六十四結八十負, 而自經丙丁以後, 陳地相仍, 墾闢無望, 不得不亟施便宜’爲辭矣。 有田成陳, 無墾責稅, 實是行不得之政。 陳結限五年權行蠲稅, 期於限內起陳, 復完舊稅之意, 請申飭。" 允之。
- 【원본】 28책 24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69면
- 【분류】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왕실-사급(賜給)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왕실-국왕(國王) / 재정-잡세(雜稅) / 윤리-사회기강(社會紀綱) /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재정-전세(田稅) / 구휼(救恤) / 농업-개간(開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