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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24권, 고종 24년 윤4월 19일 병오 3번째기사 1887년 조선 개국(開國) 496년

삼군부로 나아가 친국을 행하다

삼군부(三軍府)로 나아가 친국(親鞠)을 행하였다. 죄인 신기선(申箕善)을 형추(刑推)하면서 신문하기를,

"이전에 흉악한 역도들이 창궐할 때 음모를 꾸민 자취는 숨길 수 없게 되었는데 출납(出納)하는 직책을 맡고 어째서 승지(承旨)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을 신중히 하지 않았는가? 역적의 하령(下令)을 반포하였으니 죄상을 속이거나 도피할 수 없음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들과 하나가 되어 음모를 꾸민 자는 누구이며 어떤 문제인가? 네가 써서 전포(傳布)한 것은 몇 건이며 몇 장인가?"

하니, 신기선이 진술하기를,

"갑신년(1884) 10월 17일 밤에 갑자기 어가가 경우궁(景祐宮)으로 파천(播遷)한다는 말을 듣고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어서 황급히 경우궁 문밖에 가서 기다렸으나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새벽이 되어 집에 돌아와 아침밥을 먹을 때 조보(朝報)를 들으니 저를 승지로 임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더욱 가까이 모시지 않을 수 없겠기에 오시(午時)쯤 미리 가서 대기했으나 경우궁 문 앞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신시(申時)쯤 되어 무감(武監)이 계동궁(桂洞宮)에서 나오더니 상께서 들어오라시는 명을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어가가 환궁하려 하기에 차문(次門) 밖에 나와 있었습니다. 제가 몸을 굽혀 문안했더니, 상께서, ‘자네가 신기선인가? 이와 같은 때에는 모름지기 멀리 떨어지지 말고 가까이서 수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마음이 더욱 황감해져서 배종(陪從)하여 환궁(還宮)했는데, 각전(各殿)과 각궁(各宮)이 관물헌(觀物軒)에 나아갔으므로 저는 승정원(承政院)으로 물러났습니다.

저의 손으로 반포하였다는 것에 대해서 말한다면, 18일 포시(哺時)부터 새벽까지 몇 장을 출납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미 ‘계(啓)’ 자 도장을 찍어서 내려 보냈을 뿐 아니라 아래에서 규례대로 입품(入稟)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어떻게 역적의 하령(下令)을 선포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이튿날인 19일 손시(巽時)쯤에 소명(召命)을 듣고 급히 들어가니, 박영효(朴泳孝)김옥균(金玉均) 등 여러 역적들과 종척(宗戚) 몇 명이 함께 붓을 쥐고 앉아서, ‘이제 차대(次對)가 있을 것이니 형편상 충분히 토의하게 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얼핏 그 조목을 보니, 어떤 것은 저의 생각에 맞는가 하면 더러는 맞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간략하게 몇 구절을 논하고 박영교(朴泳敎)에게 넘기면서 말하기를, ‘글을 잘하는 도령(都令)이 여기에 있는데 내가 어떻게 참여하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때 김옥균이 말하기를, ‘어떤 문제는 전교(傳敎)했지만, 이제는 곧바로 내보내야 하겠다.’라고 했습니다. 제가 ‘무슨 문제인지 알 수 없고 애초에 품정(稟定)하지 않았는데, 자네가 교서의 초안을 작성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습니다.

김옥균이, ‘일이 급한 때는 먼저 초(草)를 잡아가지고 나중에 보게 하겠다.’라고 하자, 제가 크게 꾸짖고 일어났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여러 역적들이 결단코 신하 노릇을 하지 않을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돌아선 뒤부터는 설사 부른다고 해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침부터 포시까지 기무처(機務處)에 있으면서 승정원에는 관계하지 않았습니다. 문서를 출납할 때 안에 있었던 것은 박영교이고, 승정원에 있었던 것은 신석유(申錫游)김낙진(金洛鎭)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이 이와 같을 따름인데 어찌 역적의 하령을 반포했겠습니까? 의리상 나와서 급히 문안을 하긴 했으나 일의 내막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몇 번 출입하면서 여러 역적신하들과 더불어 몇 차례 대면했을 뿐입니다. 달리 무슨 음모를 꾸미고 퍼뜨릴 만한 단서가 있겠습니까?"

하니, 묻기를,

"함께 공모하지 않았다면 조정에서 글을 잘하는 자가 단지 너뿐인가. 그날 네가 어떻게 승지를 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였다. 진술하기를,

"대면하여 몇 마디 나누기는 하였으나 공모는 하지 않았습니다. 종척인 이재원(李載元), 이재완(李載完), 홍순형(洪淳馨), 심상훈(沈相薰)은 결코 여러 역적들과 공모한 사람들이 아닌데도 먼저 들어가 함께 머물러 있었는데 역시 공모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밖에 진술할 만한 다른 내용은 없습니다. "

하였다.


  • 【원본】 28책 24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68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御前三軍府, 行親鞫。 刑推罪人申箕善, 問: "向於凶徒猖獗之際, 莫掩潛謀綢繆之跡, 職冒出納, 何不審愼於惟允? 賊令頒布, 益見情跡之罔逭, 與之符同而陰圖者, 何人何事? 汝之書出而傳布者, 幾件幾張?" 箕善供: "甲申十月十七日夜, 忽聞大駕播遷于景祐宮, 不知何故, 倉皇往待于景祐宮門外, 不得入去。 至曉歸家, 朝食時聞朝報, 則矣身爲承旨云。 尤不可不近侍, 故午時量等待, 則景祐宮門前路塞不得入。 至申時量, 武監自桂洞宮出來, 傳上命令入來, 而大駕將還御, 出次門外。 矣身鞫躬問安, 上曰: ‘爾是申箕善乎? 如此之時, 須勿遠離, 近隨可也。’ 矣身心尤惶感, 陪從還宮, 各殿宮御觀物軒, 矣身則退出于政院。 而至於矣身之手所頒布, 則不過十八日晡後曉前出納幾張, 而旣踏啓字以下, 又自下依例入稟者。 則此等出納, 何以謂之宣布賊令乎? 其翌十九日巽時量, 聞有召命, 趨入則諸賊及宗戚數臣, 咸報筆而坐曰: ‘方有次對, 勢將爛議。’ 矣身略閱其條目, 則或有合於愚慮者, 或有不合者。 略論幾句, 付之泳敎曰: ‘能文都令在此, 吾何與焉?’ 時適玉均有言曰: ‘某事傳敎, 今當直出’云。 故矣身曰: ‘不知何事, 而初不稟定, 汝爲草敎乎?’ 玉均曰: ‘事急之時, 當先草後鑑也。’ 矣身大叱而起, 始知諸賊決有不臣之心。 自此還出後, 雖招不入自朝至晡。 矣身在機務處。 不關政院, 文蹟出納之際, 在內則 泳敎也、在院則申錫游金洛鎭也。 前後事狀, 如此而已, 安有賊令頒布者乎? 義出奔問, 未詳事機之如何。 幾番出入, 與諸賊諸臣, 幾次對面而已, 又安有綢繆、猖獗之端哉?" 問: "若不同謀, 則朝廷能文者, 只止汝乎? 其日承旨, 汝豈得爲之乎?" 供: "顔面聲氣則有之, 而同謀則不爲也。 宗戚諸臣李載元李載完洪淳馨沈相薰, 決非與諸賊同謀者, 而亦已先入同留, 則亦可謂同謀乎? 此外無他可供之辭矣。"


    • 【원본】 28책 24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2책 268면
    • 【분류】
      사법-재판(裁判) /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