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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21권, 고종 21년 10월 19일 경인 1번째기사 1884년 조선 개국(開國) 493년

밤에 북묘에 거처를 옮겼다가 청나라 오조유의 영방으로 옮기다

밤에 상께서 북묘(北廟)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길로 또 선인문(宣仁門) 밖에 있는 청(淸) 나라 통령(統領) 오조유(吳兆有)의 영방(營房)으로 옮겼으며,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노원(蘆原)으로 옮겼다. 이날 신시(申時)에 청나라 병사들이 대오를 나누어 궁문(宮門)으로 들어오면서 총포(銃砲)를 쏘았고 우리나라 좌영(左營)과 우영(右營)의 병사들도 따라 들어오니 일본 병사들이 힘을 다해 막았다. 유시(酉時)에 상께서 후원(後苑)에 있는 연경당(演慶堂)으로 피하였는데 각 전과 각 궁과 서로 연계를 잃고 옮겨 피하여 옥류천(玉流泉) 뒤 북쪽 담문에 이르렀다. 이때에 무예청(武藝廳) 및 위사(衛士), 별초군(別抄軍)이 비로소 들어와서 호위하여 문을 열고 나가 북묘(北廟)로 향하였다.

일본 공사(日本公使)가 병사를 거느리고 궁을 떠났는데,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은 모두 따라나갔고, 오직 홍영식(洪英植)박영교(朴泳敎) 및 생도(生徒) 7인만이 뒤따라 북묘로 갔다. 해시(亥時)에 오 통령(吳統領)은 상께서 북묘에 계시다는 말을 듣고 대오를 거느리고 맞이하러 갔다. 홍영식 등이 어의(御衣)를 끌어당기면서 가지 말라고 청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상을 모시고서 사인교(四人轎)에 태우니 홍영식 등은 또 성을 내며 고함쳤다. 우리 병사가 홍영식박영교를 쳐죽이고, 또 생도 7인도 죽였다. 원세개(袁世凱) 또한 병사를 보내어 임금을 영접하였다. 자시(子時)에 선인문 밖에 이르러 오 통령의 영방에서 머물렀다.


  • 【원본】 25책 21권 8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7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청(淸) / 외교-일본(日本) / 변란-정변(政變)

    十九日。 夜, 上離次于北廟, 仍又轉次于宣仁門統領吳兆有營房, 各殿、宮離次于蘆原。 是日申刻, 兵分入宮門, 放銃砲, 我左右營兵隨之, 兵儘力禦之。 至酉刻, 上避于後苑演慶堂, 與各殿、宮, 相失轉避, 至玉流泉後北墻門。 武藝及衛士、別抄軍, 始入衛, 開門而出, 向于北廟公使率兵辭宮。 金玉均朴泳孝徐光範徐載弼等, 皆隨而去。 惟洪英植朴泳敎及生徒七人從後至北廟。 亥刻, 吳統領聞上在北廟, 領隊往迎。 英植等挽御衣, 請勿往。 衆奉上御四人轎, 英植等, 又盛氣叱之。 我兵斫殺英植泳敎, 又殺生徒七人。 袁世凱亦遣兵迎駕。 子刻, 到宣仁門外, 駐次營。


    • 【원본】 25책 21권 80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74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외교-청(淸) / 외교-일본(日本)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