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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21권, 고종 21년 6월 25일 정유 1번째기사 1884년 조선 개국(開國) 493년

의복 제도를 변경하는 문제에 관하여 송병선이 상소하다

찬선(贊善) 송병선(宋秉璿)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삼가 듣건대, 요즘 의복 제도를 변경하는 일로 명을 내리고 절목을 이미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처럼 인심을 거스르고 듣기에 놀라운 천만뜻밖의 지나친 일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감히 많은 말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만, 대개 제왕의 정사를 보면 연혁(沿革)하고 손익(損益)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거기에는 모두 곡절이 있어서 혹은 옛것을 가지고 오늘의 것을 바꾸기도 하고, 혹은 중하(中夏)의 문명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바꾸기도 하며, 혹은 등위(等威)를 밝게 보이기도 하고, 혹은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게 하기도 하였을 뿐인데, 지금의 조치는 이 네 가지 중에 해당되는 게 과연 있습니까?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큰 원칙이 있고 요령이 있으며, 일정한 규정이 있고 시급히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인륜을 닦고 도술(道術)을 숭상하며 성헌(成憲)을 지키고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물채(物采) 같은 부차적인 것은 비록 좋게 바꾸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명왕(明王)이 급급해할 것이 아닌데, 더구나 좋게 바꾸는 것이 아닌 경우이겠습니까? 또 차림새나 물채는 설사 부차적인 일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국조(國朝)의 전헌(典憲)과 관계되어 매우 중대한 것인데 전하께서는 혹 이에 대하여 생각하셨습니까?

아, 우리나라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 제도가 옛 제도에 다 부합되지는 못하지만 실상 이것은 명(明) 나라의 제도이니, 어찌 선왕(先王)의 법복(法服)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온 세상이 오랑캐의 복장을 하게 되었으나 오직 한 모퉁이의 우리나라에만 그 유물이 겨우 보존되고 있으니, 세상에서 우리나라가 중시되는 것도 이 때문이며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단히 이를 바꾸어 괴이하고 법도에 맞지 않게 한다면 중화(中華)를 따르고 생각하는 뜻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 세상이 바뀌어 명나라가 망한 갑신년(1644)이 다시 돌아오니 대소 신민이 다 같이 나라를 잃은 명나라에 대하여 슬픈 감회에 젖어 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겨우 보존되고 있는 의물(儀物)마저 모두 쓸모없는 것으로 보아 버린다면 천리(天理)와 민이(民彝)의 상도(常道)에 어긋나는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말이 여기에 미치니 신은 통곡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또 듣건대, 새로 제정한 절목이 저 사람들의 복식과 거의 유사하다고 하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저들에게서 그것을 취하셨는지 내심 의아스럽습니다. 넓은 소매의 옷과 늘어뜨린 띠는 여유 있고 위엄 있는 모습이 저들의 몽땅한 것에 비해 편리함과 겉보기가 천지 차이입니다. 더구나 귀천(貴賤)과 존양(尊攘)의 뜻이 그 가운데 있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생각하건대, 옛날 고려조(高麗朝)에 세자(世子)가 원(元) 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는데 나라 사람들이 그가 머리를 땋아 늘이고 오랑캐의 복장을 입은 것을 보고는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다고 하니, 여기에서 인정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왕래하는 저들의 차림새는 우리 도성 사람들의 의상 속에서 가라지와 쭉정이 같이 눈에 거슬려서 나라 사람들이 원래 미워하고 있는데, 더구나 저들의 복식을 본떠서 만백성이 원치 않는 것을 억지로 입게 한다면, 신은 필부(匹夫)의 뜻은 필시 빼앗지 못할까 염려스러우며 야만의 땅이 될 것이라 했던 이천(伊川)의 한탄이 당장에 있게 될 것 같습니다.

아! 전하께서는 이런 점을 어찌 미처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황천(皇天)과 조종(祖宗)께서 반드시 말없이 도와주고 일깨워주어 중천(中天)에 나타난 일식(日食) 현상이 잠시 보였다가 곧 회복되는 것처럼 될 것이니, 신은 삼가 기다리겠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진달한 것이 모두 근거가 있는 의견이다. 그러나 이전의 공복(公服)과 사복(私服)의 제도는 본래 고제(古制)가 아닐 뿐 아니라, 또 지금은 법도가 문란하고 습속이 타락하여 떨쳐 일어날 기약이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전후의 칙교(飭敎)에서 고제를 원용하고 지금의 것을 참작하여 번잡한 것을 제거하고 간편하게 하되 먼저 의복 제도부터 변통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때에 경이 산림(山林)의 숙망(宿望)으로서 분연히 달려와서 아침저녁으로 곁에서 보좌하고 인도해 준다면 지금 세상 사람들의 모범이 될 뿐 아니라 또한 풍속을 순박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떠나려고만 하지 말고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원본】 25책 21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63면
  •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의생활-상복(常服)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二十五日。 贊善宋秉璿疏略:

伏聞近日以衣制變改事, 有成命, 節目已定。 伏未知殿下何爲而有此咈人心駭人聽, 千萬不意之過擧也? 臣未敢多言。 蓋觀帝王爲治, 沿革損益, 時或有之, 而皆有曲折。 或以古變今, 或用夏變夷, 或昭眎等威, 或節冗冗費, 如斯而已。 今玆之擧, 於斯四者, 果有所當乎? 大凡治國有大經焉, 有要道焉, 有定規焉, 有急務焉。 修人紀, 崇道術, 監成憲, 厚民生數者是已。 至於衣章物采之末, 雖係善變者, 非明王之所汲汲, 況不善變者乎? 且儀章物采, 雖云末節, 亦有關係於國朝典憲, 具甚重且大, 殿下其或念及於此耶? 噫! 我國公私衣制, 雖未必擧合三古, 而實是皇明一王之制, 則豈不是先王之法服乎? 顧今率土左衽, 而惟此一隅偏壤, 遺物僅存, 本國之見重於天下者此也, 有辭仿來世者此也。 今乃無端變改, 怪詭不經, 其於從之義, 果何如也? 嗚呼! 歷數邅變, 涒灘重回, 風泉悲感, 小大同情。 而乃於此時, 竝與其儀物之僅存者, 弁髦之得, 不有乖於天理民彝之常耶? 言之及此, 臣不勝痛泣焉。 且伏聞新制節目, 大類彼人之所服, 竊怪夫殿下奚所取於彼也? 潢袖之衣、厲垂之帶, 其寬碩嚴偉, 比彼之氋氃便儇, 瞻視不啻霄壤。 況貴賤尊攘義存乎其中乎? 念昔朝世子還自元京, 國人見辮髮左衽, 有流涕者, 可見人情之無古今。 目今彼人之來住者, 莠秕乎大都衣裳之叢, 國人固已惡之。 況取樣彼服, 强之以億萬人所不欲, 則臣恐匹夫之志, 必有不能奪者, 而伊川之歎, 已迫目前矣。 嗚呼! 殿下未之思也, 豈有是哉? 惟皇天若祖宗, 必陰相而啓牖之, 中天薄蝕, 不經時而復矣。 臣竊顒俟焉云云。

批曰: "所陳無非可稽之論, 然曾往公私所服, 本非古制, 且今法度委靡, 習俗隳遊, 振刷無期。 所以有前後飭敎, 援古酌今, 刪繁就簡, 先從衣制變通者也。 迨此之時, 卿以林下宿望, 賁然來思, 朝夕左右, 匡輔啓沃, 則非但爲模時範世, 亦可以回淳反樸。 須勿邁邁, 副予至意。"


  • 【원본】 25책 21권 5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63면
  •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의생활-상복(常服)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