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순목이 서북 경략사 어윤중의 장계에 대하여 보고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방금 서북 경략사(西北經略使) 어윤중(魚允中)의 장계(狀啓)를 보니, ‘관서(關西)의 강변에 설치한 각 진보(鎭堡)는 요충지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 중국에서 현(縣)을 두고 초소를 철수하였으니 변경에서 봉화(烽火)를 올릴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보가 거의 다 영락하여 군사들도 몇 명 안 되므로 제대로 지킬 수 없게 되었으니, 지방 관리와 부근의 각진(各鎭)으로 하여금 다시 형편을 살피게 한 다음 성채와 장수를 두어 변경을 단속하고 망을 보게 함으로써 전적으로 관할하게 하는 것이 사리에 맞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각 진보 가운데 위원(渭原)에서는 짓동(嗭洞)과 갈헌동(乫軒洞)을 혁파하고, 초산(楚山)에서는 산양회(山羊會)를 혁파하고, 벽동(碧潼)에서는 광평(廣坪), 대파아(大坡兒), 소파아(小坡兒), 소길호리(小吉號里), 추구비(楸仇非)를 혁파하고, 창성(昌城)에서는 대길호리(大吉號里), 묘동(廟洞), 운두리(雲頭里), 어정탄(於汀灘)을 혁파하고, 삭주(朔州)에서는 구령(仇寧)을 혁파하고, 의주(義州)에서는 청수(靑水), 방산(方山), 옥강(玉江), 수구(水口), 건천(乾川)을 혁파하는 것에 대하여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요해처에 진(鎭)을 설치하는 것은 원래 요충지를 지키자는 계책입니다. 그런데 강변의 형편이 옛날과 달라진 만큼 설사 그것을 종전대로 그냥 두어도 긴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그와 같이 영락한 진과 얼마 안 되는 군사들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에 경략사가 가서 필시 그 이해 관계를 깊이 알아보았을 것이니 그 18개의 진보를 장계의 요청대로 다 혁파하고, 뒤처리 방안은 충분히 토의하여 멀리 앞을 내다보는 제도를 모색할 것을 해도(該道)의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에게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 고을에서 서울에 바치는 것이 지연되는 문제와 관련하여 호조(戶曹)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지난날 받지 못한 것을 성책(成冊)한 문건을 가져다가 상고하여 보니 수량도 매우 많고 햇수 또한 오랩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어떻게 재정이 궁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특별히 책임지고 신칙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입니다. 각도(各道)의 도신들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각 고을을 엄하게 독촉하여 석 달 안으로 기어코 제 수량대로 바치고 확인서를 받게 할 것입니다.
만일 혹시라도 또다시 허우적대면서 정신을 차리지 않는다면 해당 수령은 즉시 파면하여 나치(拿致)할 것을 청할 것이며, 안찰(按察)하는 위치에 있는 관리들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내용을 가지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상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후에 걸쳐 신칙한 것이 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아직도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가? 감사(監司)와 수령(守令)들에게 조금이라도 책임지고 신칙하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어찌 이럴 수 있겠는가? 상주(上奏)한 대로 관문을 보내 신칙하며, 만일 다시 어길 때에는 먼저 도신과 수신부터 징계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영종(永宗)에 있던 방어영(防禦營)을 최근에 인천부(仁川府)에 옮겨다 설치하였습니다. 이 부(府)는 개항지로서 동래(東萊)나 덕원(德源)과 같은 변방이므로 지금 이미 감하(減下)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군영은 결코 등한시하고 버려둘 수 없으니 종전대로 다시 그 진(鎭)에다 설치함으로써 해안 방어를 더 증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이전부터 황단(皇壇)에 친향(親享)하는 날에는 옛날 충신의 집에 뜻을 표하는 것을 품지하여 시행해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충정공(忠正公) 홍익한(洪翼漢)의 봉사손(奉祀孫)이 아직도 벼슬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결같이 돌보아 주는 정사로 보아 임기가 차 가는 초사(初仕) 자리를 내서 조용(調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김성근(金聲根)의 보고를 보니, ‘용담현(龍潭縣)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 대동태(大同太)는 삼가 계하(啓下)에 근거하여 돈과 무명을 절반씩 물기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을은 목화가 귀해서 상납할 무명을 다른 고을에서 사와야 하는 만큼 들어가야 할 잡비가 오히려 원래대로 상납하는 것보다 더 많습니다. 위 항목에서 무명으로 내야 할 부분을 돈으로 대납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고을은 산골짜기에 있는 영락한 곳이며 백성들의 생업도 성하지 못합니다. 지난번 폐해를 알아본 도신(道臣)의 계사(啓辭)와 관련하여 세미(稅米)와 세태(稅太)는 돈과 무명을 절반씩 대납하기로 상주하여 윤허를 받았습니다.
이제 또 목화가 귀한 시골이기 때문에 무명을 사기가 매우 힘들어서 이와 같이 돈으로 대납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변통 자체가 백성들의 사정과 관계되니 특별히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우의정(右議政) 김병덕(金炳德)이 아뢰기를,
"신은 이 직책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정승은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훌륭한 의견을 아뢸 학식도 없는 판에 무슨 의견을 내어 돕겠습니까? 사람을 가지고 임금을 섬기는 것인데 사람을 감별(鑑別)할 수 있는 식견이 없으니 어떻게 훌륭한 사람을 뽑아서 올릴 수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분산되어 가고 있는데 무슨 도량과 재간을 가지고 안정시키겠습니까? 나라의 계책은 날로 더욱 군색하여지는데 무슨 재주와 학술로 운영해 나가겠습니까? 기강은 날로 더욱 해이해지는데 무슨 위력을 가지고 추세우겠습니까? 게다가 고질병으로 용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모든 것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단 한 가지도 모범이 될만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감히 사람들이 바라보는 벼슬자리에 무릅쓰고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성명(聖明)께서는 속히 물리쳐서 나라와 개인에게 모두 다행스러운 일이 되도록 다시 어질고 덕 있는 정승을 선발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경이 오늘 연석(筵席)에 나오니 정승의 자리가 갖추어졌다. 흡족한 나의 마음을 어떻게 다 이야기하겠는가? 더구나 극히 어려운 이 시기에 내정과 외교의 허다한 사업에 대한 운영은 오직 정승들이 서로 협력하여 일하는 데 달려 있다. 경은 다시 사임을 청하지 말고 나라를 보호하고 다스림을 돕는 방도로 임금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을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과 더불어 맡아 일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팔짱을 끼고 성공의 기쁨을 맛보게 하기를 절절히 소원한다."
하였다.
- 【원본】 24책 2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0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왕실-경연(經筵)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
初四日。 次對。 領議政洪淳穆曰: "卽見西北經略使魚允中狀啓, 則‘關西沿江各鎭堡之設置, 爲防守關隘, 而現今自中國置烽撤卡, 則可無烽火之警。 且鎭堡, 擧多殘薄疲卒數三, 無足爲備, 使地方官及附近各鎭, 更番形便, 設置砦將, 邊禁瞭望俾, 專管轄, 恐合便宜。 而各鎭堡中, 渭原革嗭洞·乫軒洞, 楚山革山羊會, 碧潼革廣坪、大坡兒、小坡兒、小吉號里、楸仇非, 昌城革大吉號里、廟洞、雲頭里、於汀灘, 朔州革仇寧, 義州革靑水、方山、玉江、水口、乾川事, 請令廟堂稟處’矣。 關隘設鎭, 固是宇險之策。 而沿江形便, 自有古今之異宜, 則雖其仍舊留置, 不甚緊要, 且以若殘鎭零卒, 顧何能有爲乎? 今此經略之行, 必有所深識利病, 其十八鎭堡, 依狀請竝革罷, 若乃善後方略, 爛加商確, 俾圖經遠之規制事, 分付該道道帥臣處何如?" 允之。 又曰: "各邑京納愆滯者, 取考戶、惠廳舊未收成冊, 則厥數甚夥, 年條亦久。 夫如是而經用, 安得不窘絀乎? 若無別般董飭, 將至莫可收拾之境。 行關各道道臣, 嚴督列邑, 限三朔, 期於準納受尺。 而如或更事玩愒, 該守令, 卽請罷拿, 按察之地, 亦不得辭其責, 以此分付何如?" 敎曰: "上納之先後申飭, 不啻申嚴, 而尙此玩愒。 方伯守令, 苟有一念董飭, 寧有是也? 依所奏關飭, 復或違越, 先從道、帥臣論警可也。" 淳穆曰: "永宗之防禦營, 近年移設於仁川府。 該府以其開港處與東萊、德源, 同一邊地, 故今旣減下矣。 此營終未可等聞抛置, 仍舊復設於該鎭, 以爲海防增重之圖何如?" 允之。 又曰: "向來皇壇親享日, 以故忠臣家, 合有示意稟白施行。 而追聞之, 則忠正公 洪翼漢祀孫, 尙未霑祿矣。 其在一視之政, 瓜近初仕作窠調用何如?" 允之。 又曰: "卽見全羅監司金聲根所報, 則以爲‘龍潭縣田稅、大同米、太, 謹依啓下關, 以錢、木參半爲定。 而該邑, 以綿貴之鄕, 上納木, 勢將貿取於他邑, 容入雜費, 猶浮元納, 上項木邊, 以錢代納’爲辭矣。 該邑, 以峽裏殘局, 民業蕭條。 頃因詢瘼道啓, 稅、米、太奏許, 錢、木參半矣。 今又以綿貴之鄕, 貿木甚艱, 請此代錢變通。 有關民情, 特令許施, 何如?" 允之。 右議政金炳德曰: "臣於是任, 莫或承當, 非止一端。 爲大官者, 以道事君。 而旣無啓沃之學, 將何以獻可替否? 以人事君而又無鑑別之識, 將何以簡修進良? 民志日益渙散, 而以何器量靖鎭之? 國計日益窘絀, 而以何才術經濟之? 紀綱日益解弛, 而以何風力振肅之? 重以癃痼之疾, 尫羸之形, 有百可差。 無一可儀, 其何敢冒忝具瞻之地乎? 伏願聖明, 亟賜斥退, 改卜賢德, 寔公私萬幸。" 敎曰: "卿今登筵, 而鼎席備矣。 予心充然, 曷以盡喩? 況時當極艱之會, 凡內修外交許多事之彌綸經濟, 惟在於輔相之任, 寅協共貞而已。 卿須更勿巽辭, 保邦制治之道, 匡君底民之責, 與元輔左揆, 擔夯做去。 使予有垂拱仰成之喜, 染切企望焉。"
- 【원본】 24책 20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2책 90면
- 【분류】군사-관방(關防) / 왕실-경연(經筵)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임면(任免) / 재정-공물(貢物) / 재정-전세(田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