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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17권, 고종 17년 9월 8일 계유 1번째기사 1880년 조선 개국(開國) 489년

수신사 김홍집이 일본에서 《조선책략》 1책을 증정하므로 가지고 귀국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신이 수령(守令)이 관청을 비우는 일로 아뢰어서 여러 번 신칙(申飭)하였는데도 수령은 수유(受由)를 받아 가고 도신(道臣)이 잘못을 그대로 따르기를 계속해서 전과 같이 하면서 경계하는 것이 없고 조령(朝令)을 경시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수령이란 백성을 가까이하는 관리인데, 고을에 있지 않고 집에 가 있으면 백성들의 근심을 어떻게 두루 살피고 고을의 직무를 어떻게 잘 다스려 나가겠습니까? 수령이 하루를 비우면 하루의 폐단이 있게 되고 이틀을 비우면 이틀의 폐해가 있게 되니, 작은 고을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큰 고을을 오래도록 비워두는 것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데도 도신 역시 내버려두고 따지지 않으니, 참으로 개탄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이후로는 휴가를 받아 가는 한 가지 사항은 감히 경솔하게 허락하지 말 것이며, 만약 부득이 휴가를 받아 가야만 하는 자가 있으면 노정(路程)을 헤아려 날짜를 계산하여서 갔다가 돌아오는 기한을 정하여 가첩(暇帖)을 주되, 절대로 수령에게 주지 말고 한 편은 해조(該曹)에 곧바로 보내고 한 편은 의정부(議政府)에 치보(馳報)하여 증빙하는 자료로 삼도록 하고, 만약 혹시라도 정한 기한을 넘기면 해당 수령은 계문(啓聞)하여 감죄(勘罪)하기를 청하고 그 간의 녹봉(祿俸)은 반드시 겸관(兼官)으로 하여금 주관하도록 할 것을 여러 도에 행회(行會)하고, 이 규정을 어기는 도신이 있으면 신(臣)의 부에서 적발하여 논의하여서 경책(警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토호(土豪)의 무단(武斷)은 곧 나라 법으로 엄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첫째도 백성을 위해서이고 둘째도 백성을 위해서입니다. 전후로 조정에서 신칙한 것이 얼마나 여러 번이었는데, 근래에는 이러한 버릇이 곳곳에서 자행되니, 가까이는 왕도(王都)에서부터 멀리는 읍촌(邑村)의 사이에 이르기까지 진신사부(搢紳士夫)가 무고하고 불쌍한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탐학하는 것이 백 갈래 천 갈래이며 빼앗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집에 재산이 있으면 모두 빼앗기고 뿔뿔이 흩어지니 수재(水災)나 한재(旱災), 도적의 근심보다도 더 심합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저도 모르게 머리털이 곤두서고 가슴이 떨립니다. 이른바 토호가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전하므로 지목되는 사람이 있는데도 한결같이 규찰하고 적발하는 일이 없으니, 어찌 법을 맡고 있는 곳에서만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아니면 듣기도 하였고 알기도 하였는데도 간섭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법이라는 한 글자가 장차 무너져버려도 강구하지 않아도 좋단 말입니까? 천하의 어느 나라에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우선 거듭 명령하는 의미에서 삼법사(三法司)와 팔도(八道) 및 사도(四都)의 도신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문구(文具)로만 여기지 말고 백성을 사랑하고 구휼하는 뜻을 깊이 생각하여, 조관(朝官)은 지명하여 논계(論啓)하고 조관이 아니면 직접 형배(刑配)한 뒤에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혹시라도 두려워서 내버려두고 즉시 준수하여 시행하지 않는다면 모두 응당 특별히 엄중하게 추궁한다는 것을 중앙과 지방에 반포하고 동네마다 게시하여 각기 잘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산(釜山)을 개항한 후에 우리나라 백성들이 미곡(米穀)을 몰래 파는 자를 염탐하여 체포하고 금지시키는 문제는 일찍이 행회한 적이 있었습니다. 요즘 연해 여러 곳에서는 혹은 마땅히 금지시켜야 할 것을 금지시키지 못하고 혹은 금지시키지 말아야 할 것을 금지시킵니다. 이러한 때에 곤수(閫帥)와 수령들이 그것을 기화(奇貨)로 생각하여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뇌물을 받는 데에만 뜻을 두어 몰래 실어 나르는 것을 눈감아주는 자가 있는가 하면 없는 죄를 꾸며내어 제멋대로 강탈하는 자도 있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은 생각하지 않고 잇속만 채우는 계책을 써서 원성과 비방이 마구 일어나니, 들리는 소문이 놀랍고 한스럽습니다. 해도(該道)의 도신이 필경 살피지 못할 리가 없으니 우선 알려주어서 그로 하여금 적발해서 치계하도록 하며, 해부를 시켜 잡아다가 속히 해당 형률을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재가를 받아 신칙한 뒤에도 만약 혹시라도 숨기고 보고하지 않으면 이것이 어찌 변방을 살피고 직무를 수행하는 도리라 하겠습니까? 엄중히 감죄를 논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으니, 이런 뜻으로 일체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생각건대 지금 중앙과 지방의 지출이 아득하여 한정이 없으므로 비록 공부(貢賦)를 모두 기한 내에 바치도록 한다고 하더라도 각종 지출을 오히려 감당해내지 못하겠는데, 하물며 가을철이 벌써 반이나 지났는데도 세선(稅船)이 도착한다는 보고는 줄곧 막연하니, 당장의 황급한 정상이야 무슨 일인들 그렇지 않겠습니까? 각영(各營)의 졸오(卒伍) 같은 자들의 경우에는 밤낮없이 고생하고 위급할 때에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달이 주는 급료가 이미 자체적으로 대기에는 넉넉지 못한 데다가 오랫동안 주지도 못했습니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애통합니다. 올라오고 있는 세곡(稅穀) 중에서 도착하는 대로 즉시 지급하라는 내용으로 신칙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각영 군졸들의 급료를 주지 못한 지가 이미 여러 달 되었다는 것은 나도 역시 들었다. 매번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잠자리가 편안하지 못하다. 올라오는 세곡 가운데에서 항구에 도착하는 대로 먼저 나누어 주어서 어루만져 구휼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세선이 경강(京江)에 와서 정박하면 변미(邊米)·계미(稧米) 등의 명목을 붙여 막중한 공부를 내려주기도 전에 함부로 취하고 힘으로 빼앗기를 조금도 꺼려하고 두려워하지 않아 원납(元納)이 부족하게 되니, 나라에 법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설령 사공과 곁꾼〔格軍〕들에게서 마땅히 받을 것이 있다 하더라도 원래 세곡을 운반하는 배에 나쁜 버릇을 자행하는 것은 부당하며, 이에 사공과 곁꾼들은 알지도 못하는 오래된 빚을 변미·계미라고 칭하면서 방자하게 제멋대로 침해하여 스스로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이른단 말입니까? 무릇 개인의 재물을 훔쳐도 도적을 다스리는 법을 적용하는데, 하물며 정공(正供)에 대해서야 어찌 감히 이럴 수 있겠습니까? 각 해당 아문(衙門)과 좌우포도청(左右捕盜廳)에 분부하여 경선(京船)·조선(漕船)·임선(賃船)을 막론하고 만약 이와 같이 놀랍고도 패악한 놈이 있으면 낱낱이 체포하여 즉시 효수(梟首)하도록 하고, 또 경조로 하여금 변미·계미 등의 문서를 찾아내어 모두 소각해버리라는 뜻으로 엄하게 신칙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주부(全州府)의 재결(災結) 230결과 직산현(稷山縣)의 진결(陳結) 252결은 각 해당 도신의 장계에서 청한 대로 특별히 5년 동안 조세를 감면하도록 허락하고, 개간을 권장하고 시기결(時起結)을 조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충정공(忠靖公) 김우항(金宇杭)은 늙은 대신으로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옥사(獄事) 당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고 상소를 올려 착한 사람과 간사한 사람을 엄하게 분변하고 의리를 지킨 바가 사대신(四大臣)과 다를 것이 없으며 후세 사람들에게 감흥을 일으킬 만합니다. 그런데 그 후손의 대가 다하여 사판(祠版)을 장차 사당에서 없애게 되었으니, 특별히 부조(不祧)하는 은전(恩典)을 베풀고 사손(祀孫)은 해조로 하여금 연기(年紀)에 구애되지 말고 이름을 물어서 조용(調用)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 신임사화에 사대신이 화를 입은 것을 어떻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사대신의 원통함을 펴지 못하면 원릉(元陵 : 영조(英祖))에 대한 무함도 그대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 영의정 문익공(文翼公) 유척기(兪拓基)는 일생동안 확고한 주견과 끊임없는 열성으로 오직 ‘성무를 해명한다〔辨聖誣〕’는 세 글자를 자기의 임무로 삼았습니다. 중서(中書)에 배명(拜命)한 초기에 여러 차례 글을 올려 변명하고 해명하였는데 의리가 바르고 공적이 매우 많았으니, 그를 경모하는 여론은 비록 오래되어도 민멸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의 사판을 부조하도록 허락하시면 아마도 조정에서 의리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법에 빛남이 있을 것입니다.

문충공(文忠公) 김만기(金萬基)숙종(肅宗)의 국구(國舅)로서 맹부(盟府)의 공적은 후세에 빛나고 조정에서 포숭하는 은전을 극진히 베풀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지금 들으니 그 집안이 영락하여 향화(香火)를 잇기 곤란하다고 합니다. 공의(公議)가 있는 바이니, 뜻을 보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의 사손의 이름을 물어 연한에 구애되지 말고 초사(初仕) 자리가 비기를 기다렸다가 제일 먼저 조용하기 바랍니다.

고 좨주〔祭酒〕 신 김이안(金履安)은 바로 좨주인 문경공(文敬公) 신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입니다. 가훈이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대대로 임금의 부름을 받들었습니다. 경서에 두루 통하고 실천이 또한 독실하며 유교의 연원을 발휘하고 의리를 견지하여, 천인(天人)·성명(性命)의 근원과 예학(禮學)·절문(節文)의 논리에 있어서 세세히 분석하여 사도(斯道)를 자기의 책임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선비들이 우러러 받드는 바가 되고 있으나 역명(易名)의 은전을 아직까지 베풀어주지 못하였으니, 실로 흠전(欠典)이 됩니다. 특별히 정경(正卿)으로 추증하고 이어 시호(諡號)를 주어서 후대를 빛내고 어진 이를 숭상하는 의리를 보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수신사(修信使)가 무사히 돌아왔으니 다행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과연 무사히 갔다 돌아왔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신사의 말을 들으니, 일본(日本) 사람들이 매우 다정하고 성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도 역시 들었습니다. 병자년(1876)에 김기수(金綺秀)가 갔을 때에는 그들의 실정을 알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자못 특별한 우대를 받았으니 호의를 믿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 사람과의 문답 중에 러시아[俄羅斯]의 일은 우려됨이 없지 않았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러시아가 근래에 자못 강성하여 중국에서도 능히 제어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중국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나라는 더 말할 것이 있는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몇 년 전에 미야모토 고이치[宮本小一]가 연향 때에 바싹 다가앉아서 러시아 문제를 언급하였는데 그것은 진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과연 의심하였으니, 이번 수신사 편에 청(淸) 나라 사람이 보낸 책자를 보면 그 실정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러시아가 비록 우려된다 하더라도 일본 사람들은 과연 극진한 모습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번 수신사에 대한 연회의 기물(器物)과 사행 중의 역관(譯官)과 종자(從者)에 대한 우대는 병자년(1876)과 달랐으니, 이것으로도 그들의 실정을 알 만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연히 믿지 않고 근거 없는 말을 많이 한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수신사 편에 가지고 온 책자는 청나라 사신이 전한 것이니, 그 후한 뜻이 일본보다 더하다. 그 책자를 대신(大臣)도 보았는가?" 【김홍집(金弘集)이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청나라 공서 참찬(公署參贊) 황준헌(黃遵憲)을 만났는데, 그가 쓴 《조선책략(朝鮮策略)》 1책을 증정하므로 가지고 돌아와 임금이 열람하도록 올렸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일본이 오히려 이처럼 성의를 다하는데 청나라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반드시 들은 것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로 하여금 대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인심은 본래부터 의심이 많아 장차 그 책을 덮어 놓고 연구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 책을 보니 과연 어떻던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신이 과연 그 책을 보았는데, 그가 여러 조항으로 분석하고 변론한 것이 우리의 심산(心算)과 부합되니, 한 번 보고 묶어서 시렁 높이 얹어둘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러시아는 먼 북쪽에 있고 성질이 또 추운 것을 싫어하여 매번 남쪽을 향해 나오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이득을 보려는 데 지나지 않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은 땅과 백성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백두산(白頭山) 북쪽은 바로 러시아의 국경입니다. 비록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라도 한 척의 돛단배로 순풍을 타면 오히려 왕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만강(豆滿江)을 사이에 두고 두 나라의 경계가 서로 접한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통 때에도 숨 쉬는 소리까지 서로 통할 만 한데 얼음이 얼어붙으면 비록 걸어서라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러시아 사람들은 병선 16척을 집결시켰는데 배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추워지게 되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의도를 진실로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대단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 사람들의 말을 보면, 그들이 두려워하는 바는 러시아로서 조선이 대비하기를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 나라를 위한 것이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사실은 초(楚) 나라를 위한 것이고 조(趙) 나라를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이 만일 방비하지 않으면 그들 나라가 반드시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야 어찌 러시아 사람들의 뜻이 일본에 있다고 핑계대면서 심상하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성곽과 무기, 군사와 군량은 옛날만 못하여 백에 하나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비록 무사하게 되더라도 당장의 방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방비 대책은 어떠한가?"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방비 대책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어찌 강구한 것이 없겠습니까마는, 청나라 사람의 책에서 논한 것이 이처럼 완벽하고 이미 다른 나라에 준 것은 충분한 소견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믿고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틀림없이 믿지 않을 것이니, 장차 휴지가 되고 말 뿐입니다.

지난 6월에 미국[米利堅] 사람들이 동래부(東萊府)에 왔었는데 본래 원수진 나라가 아니었으므로 그들이 만약 서계(書契)를 동래부에 바친다면 동래부에서 받아도 잘못될 것은 없으며, 예조(禮曹)에 바친다고 한다면 예조에서 받아도 역시 괜찮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양 나라라고 해서 거절하고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내 신문지상에 널리 전파되어 마침내 수치가 되고 모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에 대해 무슨 소문을 들은 것이 있어서 원수진 나라라고 하겠습니까? 먼 지방 사람을 회유하는 의리에 있어서 불화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듯합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풍습이 본래부터 이러하므로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다. 비록 서양 나라들에 대해 말하더라도 본래 서로 은혜를 입은 일도 원한을 품은 일도 없었는데 애당초 우리나라의 간사한 무리들이 그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강화도(江華島)평양(平壤)의 분쟁을 일으켰으니, 이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바이다. 몇 년 전에 서양 사람들을 중국에 들여보낸 것은 중국의 자문(咨文)에 의하여 좋게 처리하였다. 대체로 양선(洋船)이 우리 경내에 들어오기만 하면 대뜸 사학(邪學)을 핑계 대는 말로 삼지만, 서양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사는데도 중국 사람들이 모두 사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다. 이른바 사학이란 배척해야 마땅하지만 불화가 생기게까지 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 【원본】 21책 1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20면
  • 【분류】
    외교-러시아[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신분-양반(兩班)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군사-지방군(地方軍) / 재정-전세(田稅) / 교통-수운(水運)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외교-일본(日本) / 외교-청(淸) / 풍속-풍속(風俗)

    初八日。 次對。 領議政李最應曰: "臣以守令曠官事奏啓, 屢飭, 而守令之由行、道臣之曲循, 一直如前。 無所警惕, 弁髦朝令, 乃至於此, 何事其可做乎? 夫守令, 近民之官也。 不在邑而在家, 則民憂曷以周察, 邑務奚能綜理? 所以一日之曠有一日之弊, 二日之曠有二日之害。 小邑猶然, 況鉅局久關者乎? 如是, 而道臣亦任他勿問, 誠不勝慨歎。 從今以往, 由行一款, 毋敢輕許。 而若有不得不已之由行者, 較程計日往還間定限, 給暇帖。 切勿付諸守令, 一邊直送該曹, 一邊馳報政府, 以爲憑驗之資。 而苟或踰越定限, 則該守令啓聞請勘, 這間廩況, 必令兼官主之事, 行會諸道。 而有違是規之道臣, 自臣府摘發論警何如?" 允之。 又曰: "土豪武斷, 卽邦法之不容不嚴禁者。 則一則爲民也, 二則爲民也。 前後朝飭, 何等申複? 而挽近此習在在恣橫。 近自輦轂之下, 遠至邑村之間, 搢紳、士夫之貽毒、肆虐於無辜可哀之小民者, 千岐百塗。 不奪不已, 劣有家産, 擧被蕩析, 殆甚於水旱盜賊之患。 思之及此, 不覺髮竪而心寒。 所謂土豪之誰某, 衆口喧傳, 指目有歸。 而一直無糾摘之擧, 豈獨掌法之地不聞不知而然乎? 抑聞之知之, 不欲干涉而然乎? 然則法之一字其將壞了, 不講可乎? 天下國家, 安有是理? 姑付令申之義, 令三法司及八道四都道帥臣, 毋得視以文具, 深念愛民恤民之意, 朝官則指名論啓, 非朝官則直爲刑配後修報政府。 而復或伈泄抛置不卽遵施, 則竝當別般重究事, 頒示京外, 揭付坊里, 俾各知悉何如?" 允之。 又曰: "釜山開港之後, 我民米穀潛賣者, 詗捕防禁事, 曾有行會矣。 近日沿海諸處, 或當禁而不禁, 或不當禁而禁之。 於斯之際, 閫帥守令, 視同奇貨, 惟意操縱, 受賂而闔眼暗輸者有之, 構罪而恣臆白奪者有之。 罔念守法之重, 乃作網利之計, 怨謗朋興, 聽聞駭惋。 該道道臣, 必無遺察之理。 爲先知委, 使之摘發馳啓, 令該府拿來, 亟施賞律。 而今於奏飭之下, 若或匿不以聞, 則是豈按藩擧職之道乎? 從重論勘, 在所不已。 此意一體分付何如?" 允之。 又曰: "顧今京外支調, 茫無涯畔。 雖使貢賦皆趁程限, 各項應下, 尙患塗抹不獲。 況秋序已闌, 而稅船到泊之報, 一向漠然, 目下遑汲之狀, 何事不然? 至若各營卒伍, 則晝宵服苦, 緩急可用者也。 月料已不足自贍, 而許久停闕。 念之及此, 不覺哀痛。 就其上來稅穀中, 隨到隨放之意, 請申飭。" 敎曰: "各營軍卒之餼料不給, 已爲屢朔, 予亦聞之。 每念及此, 丙枕靡安。 稅穀上來中, 隨其到泊, 先爲放下, 以示撫恤之意。" 最應曰: "稅船之到泊京江也。 謂以邊米、稧米等名目, 莫重貢賦, 卸下之前勒取豪奪, 不少憚畏, 以致元納之朒蹙, 其可曰國有法乎? 設有當捧於沙格, 固不當恣行惡習於運稅之船, 而乃以沙格所不知積久之債, 稱邊米稱稧米, 肆然橫侵, 自抵罔赦之科乎? 凡偸取私物, 尙用治盜之律, 況於正供, 焉敢乃爾? 分付各該衙門及左右捕廳, 毋論京船·漕船·賃船, 如有似此駭悖之漢, 則一一執捉, 亟施梟警, 亦令京兆搜得其邊米、稧米等文券, 竝爲燒火之意, 嚴飭何如?" 允之。 又曰: "全州府災結二百三十結、稷山縣陳結二百五十二結, 依各該道臣狀請, 特許限五年減稅, 而勸墾、査起何如?" 允之。 又曰: "故相臣忠靖公金宇杭, 以癃老大臣, 當辛、壬禍獄, 以箚以疏, 嚴辨淑慝, 秉執義理。 與四大臣, 無異同。 可以興感於後世矣。 其後孫親盡, 祠版將去廟。 特施以不祧之典, 祀孫, 令該曹不拘年紀, 問名調用何如?" 允之。 又曰: "粤在辛、壬四大臣之罹禍, 尙何言哉? 四大臣之冤未伸, 則元陵之誣自在也。 故領相文翼公兪拓基, 一坐確乎之秉執、斷兮之血誠, 只以辨聖誣三字爲己任。 中書拜命之初, 屢徹章奏, 辨明而伸析之。 義理峻正、績庸弘多, 嚮慕之公議雖久, 而有不可泯者。 其祠版, 許以不祧, 恐有光於朝家崇奬之典。 文忠公 金萬基, 以肅廟朝國舅, 盟府勳業炳耀後世, 朝家褒典靡不用極。 而今聞‘其家零替香火難繼’云。 公議攸在, 合有示意。 請其祀孫問名, 不拘年限, 初仕待窠, 首先調用。 故祭酒臣金履安卽祭酒文敬公臣金元行之子也。 生於詩禮之門, 世膺弓旌之招。 經術也博, 踐履且篤, 發揮淵源, 秉執義理, 天人性命之原、禮學節文之論毫分縷析, 自任斯道, 迄今爲士林所景仰。 而易名之尙此未遑, 實爲欠典。 特贈正卿, 仍施節惠, 以寓晠世象賢之義, 恐好矣。" 竝允之。 仍敎曰: "修信使無事往還, 可幸矣。" 最應曰: "果無事往還矣。" 敎曰: "聞修信使之言, 則‘日本人極爲款曲’云矣。" 最應曰: "臣亦聞之。 而丙子年金綺秀入去時, 不知其情實矣。 今番則見待頗異, 信好意矣。" 敎曰: "日本人問答中, 俄羅斯國事, 不無爲慮矣。" 最應曰: "俄羅斯國, 近頗强盛, 中原亦不能制之矣。" 敎曰: "中國猶如此, 況我國乎?" 最應曰: "年前宮本小一, 燕饗時促坐, 語及俄羅斯, 此是眞情也。 而我國人果疑之, 今以信使行中, 人所送冊子觀之, 可驗其實情矣。" 敎曰: "俄羅斯則雖爲慮, 日本人則果極盡之樣矣。" 最應曰: "今番信使之供具、行中譯官·從人之優待, 異於丙子年。 則此可見實情矣。" 敎曰: "我國人, 空然不信而多浮言矣。" 最應曰: "聖敎至當矣。" 敎曰: "信使行中所來冊子, 使所傳, 而厚意甚於日本矣。 其冊子, 大臣亦見之乎?" 【金弘集, 以修信使, 在日本, 遇淸國公署參贊黃遵憲。 贈以私擬《朝鮮策略》一冊。齎歸入乙覽。】 最應曰: "日本猶此款曲, 況人乎? 必有耳聞, 故俾我國備之, 而我國人心本來多疑, 將掩卷而不究矣。" 敎曰: "見其冊子, 則果何如乎?" 最應曰: "臣果見之, 而彼人諸條論辨, 相符我之心筭, 不可一見而束閣者也。 大抵俄國, 僻在深北, 性又忌寒, 每欲向南。 而他國之事, 則不過興利而已, 人所欲, 則在於土地人民。 而我國白頭山北, 卽境也。 雖滄海之遠, 一帆, 風猶可往來, 況豆滿江隔在兩境乎? 平時亦可以呼吸相通, 而成氷則雖徒涉可也。 方今人聚兵船十六隻, 而每船可容三千人云矣。 若寒後, 則其勢必將向南矣。 其意固不可測, 則豈非殆哉岌岌乎?" 敎曰: "見日本人之言, 則似是渠之所畏在, 而要朝鮮備之。 其實非爲朝鮮而爲渠國也。" 最應曰: "其實似爲楚非爲趙。 而朝鮮若不備, 則渠國必危故也。 雖然, 我國則豈可諉以人之意在日本而視若尋常哉? 見今城郭、器械、軍卒, 不及於古, 而百無一恃。 終雖無事, 目前之備, 寧容少緩乎?" 敎曰: "防備之策何如乎?" 最應曰: "防備之策, 自我豈無所講磨? 而人冊中論說, 若是備盡, 旣給於他國, 則甚有所見而然也。 其中可信者信之而可以採用。 然我國人必不信之, 將爲休紙而已。 六月米利堅人來東萊, 本非讎國矣。 彼若以書契呈萊府, 則自萊府受之, 未爲不可。 呈禮曹, 自禮曹受之, 亦可也。 而謂之洋國, 拒而不受, 仍爲播傳於新聞紙, 終爲羞恥見侮矣。 米利堅, 有何聲聞之及, 而謂以讎國乎? 其在柔遠之義, 恐不可生釁矣。" 敎曰: "我國風習, 本來如此。 爲天下嘲笑, 雖以西洋國言之, 本無恩怨。 而初由我國憸人輩之招引, 以致江華平壤事之釁隙。 此是我國之自反處也。 年前洋人之入送, 因中國咨文, 好樣周處矣。 大抵洋船入境, 輒以邪學爲藉口之說, 則洋人之入住中國, 未聞中國之人皆爲邪學也。 其所謂邪學, 當斥而已, 至於生隙則不可矣。"


    • 【원본】 21책 17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6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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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러시아[露]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재정-국용(國用) / 신분-양반(兩班) / 사법-치안(治安) / 과학-천기(天氣) / 사법-재판(裁判) / 사법-행형(行刑) / 군사-지방군(地方軍) / 재정-전세(田稅) / 교통-수운(水運) /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 왕실-사급(賜給) / 사상-유학(儒學) / 인사-관리(管理) / 외교-일본(日本) / 외교-청(淸) / 풍속-풍속(風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