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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15권, 고종 15년 9월 18일 갑자 6번째기사 1878년 조선 개국(開國) 487년

대행 대비의 묘지문

대행 대비(大行大妃)의 지문(誌文)에,

"우리 철종 대왕비(哲宗大王妃)께서 병으로 편치 않다가 무인년(1878) 5월 12일 인시(寅時)에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昇遐)하셨으니, 춘추는 42세이다. 우리 전하께서는 엄숙한 여막에서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셨다. 신은 대비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지문을 지으라는 명을 받았는데, 이어 친히 지은 행록(行錄)을 내려 보냈으니, 다음과 같았다.

‘대비께서는 정유년(1837) 3월 23일 신시(申時)에 순화방(順化坊)의 사제(私第)에서 탄강(誕降)하였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의 뜻을 공순히 받들었는데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병이 있으면 걱정하는 표정이 매우 불안하였고 병이 회복되면 처음과 같았다. 동기를 사랑하는 것이 지성에서 나왔으며 어른을 섬기는 예절을 게을리 하지 않고 능하였다. 점점 자라면서 침묵하며 말이 적었고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덕과 도량이 일찍 성숙하여 근엄하기가 마치 어른 같았고 내외의 친척들이 칭송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해년(1851)의 초간택(初揀擇) 전 며칠 동안 상서로운 무지개가 연달아 대청 앞 물 항아리에 보이고 온 마을을 한 광채가 가로지르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삼간택(三揀擇) 후에는 별궁(別宮)에서 거처하였는데 규례대로 《소학(小學)》을 받아서 한 번 문장의 뜻을 해석하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 거침없어서 막히는 데가 없었다. 몇 달이 못 되어 문리(文理)가 크게 통하였으나 오히려 만족하지 못한 듯 자신만만하지 않았다.

이미 혼례를 치른 후에는 행동거지가 법도가 있었고 주선하는 바가 규례에 맞았다. 편안하고 자상하며 온순하고 너그러운 마음이 안으로 간직되고 겉으로 드러나 상서롭고 화순한 기운이 온종일 궁중에 넘쳤다.

우리 순원 성모(純元聖母)를 섬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헤아려 살피고 뜻에 맞는 물품을 모두 갖추어 드렸다. 아침과 저녁으로 정성(定省)을 다한 외에도 궁녀(宮女)를 시켜 때때로 안부를 살핀 다음에야 마음을 놓았다. 만년에 성모의 몸이 이따금 편치 않으면 몹시 걱정하면서 항상 좌우에서 모시며 조섭하고 부축하였으며 곁의 사람들에게 모시도록 맡기지 않았다. 성모께서 그의 수고를 측은히 여겨 잠자리로 돌아가라고 명하여도 끝내 물러가서 휴식하지 않았다. 정사년(1857)에 가슴 아픈 순원 성모의 초상이 나자 곡하고 울며 슬퍼하는 모습은 차마 쳐다볼 수 없었고 3년 동안 하루같이 극진히 추모하였으니, 하늘이 내린 효성으로 모두 감복하였다.

순원 성모의 초상을 마친 뒤에는 우리 태모(太母)를 섬기는 일을 성모 섬기듯 하였다. 매사를 반드시 아뢰어 시행하였고 항상 말하기를, 「가르쳐 이끌어주고 돌보며 사랑해주는 은혜에 어떻게 보답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지난가을 태모께서 편치 않았는데 그때 그도 몸이 편안치 않았으나 오히려 매일 문안하였다. 태모께서 병이 더할까봐 걱정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 그만두게 하니 잠자는 것도 잊고 밥상을 드려도 맛을 모를 지경이었다. 문안하는 궁녀들이 서로 이어 건강이 회복되었다고 아뢰니, 기뻐하면서 경축하는 마음이 얼굴과 맘에 넘쳤으니 그의 돈독한 효성이 이와 같았다.

계해년(1863)에 큰 상사를 당하여 슬퍼하여 몸이 여윔이 예를 넘어섰다. 그때 날씨가 추웠지만 오히려 날마다 찬궁(攢宮)에 가서 현궁(玄宮)을 봉심(奉審)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도록 의대(衣襨)를 풀지 않으면서 3년상을 마치었다. 이로부터 한여름이 되었으나 부채질을 하여 더위를 쫓지 않았고 추운 겨울에도 따뜻한 자리에 눕지 않았으며 일이 없으면 혹시라도 뜰에 나가지 않았다.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항상 보았는데 늘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의 〈효자편(孝子編)〉을 읽다가 문득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으니, 대개 순원 성모를 7년밖에 모시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지극히 원통해하며 스스로 마음이 상하여 금하지 못하고 그랬던 것이다. 매번 제삿날을 당하면 반드시 기일에 앞서 소복(素服) 차림을 하였고 아침저녁으로 오르는 반찬 중에 혹시라도 고깃국물이 섞였을까 걱정하여 젓가락을 대지 않았고, 수라를 드실 때에는 채소만 들었다. 제삿날 밤이 되면 새벽이 되도록 촛불을 켜놓고 있다가 철향(徹享)하기를 기다려 비로소 잠자리에 들었다. 친정 부모의 기제사를 당해서도 그러하였다.

옷은 비단을 입지 않았고 다만 겨울에는 무명옷을 여름에는 모시옷을 항상 입었는데 검소한 것을 좋아하는 덕은 자못 옛날의 왕비들에게도 없었던 일이었다. 전계 대원군(全溪大院君) 사당의 은제기(銀祭器)가 일찍이 없어졌을 때 조사하게 되면 혹시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걸려들지 않을까 걱정하여 급히 명하여 그만두게 하고 같은 모양으로 제기를 만들어 보냈으니 이것으로도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덕을 볼 수 있다. 선왕의 궁인(宮人)으로 은총을 입은 자는 모든 것을 돌보아주어 다하지 않음이 없었으므로 밑에까지 미치는 덕에 육궁(六宮)이 모두 칭송하였다. 영혜 옹주(永惠翁主)에 대해서는 특별히 사랑하였는데 혼례를 치르자 배나 스스로 기뻐하였고 항상 병에 잘 걸리는 것을 몹시 걱정하였다. 마침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매우 슬퍼하였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잊지 못해하였다. 궁인으로서 나이 많은 사람은 잘 돌봐주었고 나이 어린 사람은 사랑해 주었으며 매번 선물을 주고 한결같이 대해 주었기 때문에 모두 은덕에 감격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평소에 거짓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혹시 남을 헐뜯는 사람이 있으면 잠자코 대답을 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게 하였기 때문에 말했던 자가 황송해서 다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승하하기 하루 전에도 오히려 직접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였으며 비록 본 가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속옷 차림으로 만나지 않았다. 각전(各殿)이 왔을 때에는 부축하여 일어나서 맞이하고 공경스럽게 대하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다. 11일 한밤중에 우레 소리가 일자 증세가 갑자기 더하였는데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묻기를, 「우레 소리가 왜 저렇게 큰가?」라고 하였다. 12일 새벽이 되자 우레 소리가 더욱 요란해지면서 장수(長壽)를 상징하는 별이 갑자기 빛을 잃었는데 이것은 하늘이 암시한 징조가 아니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생각건대 우리 성후(聖后)의 높은 덕과 지극한 행실을 어떻게 창졸간에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대략 평시에 전해들은 것과 직접 보고 느낀 것을 가지고 삼가 만 분의 하나를 적은 것이다.’

신은 삼가 읽은 뒤 손을 모아 쥐고 머리를 숙여 말한다.

아아! 성대하다. 신이 어떻게 감히 빼고 더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해서는 신이 그전에 대궐에 있을 때 안부를 물으니 후비께서 신에게 말씀하시기를, ‘양전(兩殿)께서 늘 나에게 대해 주시기를 일마다 지극하지 않음이 없으니 내 마음은 몹시 기쁘다.’라고 하셨다. 갑술년(1874) 큰 경사 때 후비께서는 흔연히 기뻐하며 말씀하시기를, ‘명철한 사람을 세자로 맞아 온 나라를 밝게 비치니 억만 년을 무궁할 것이다. 이제부터 나라의 터전은 우리 열조(列祖)께서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돌보아주시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또한 우리 성상의 어진 덕이 하늘에서 밝은 세상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훌륭하다! 신이 어찌 감히 여기에 기록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신에게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벼슬하여 재상에 이르는 것은 신하로서 매우 영예롭고 중요한 자리이다. 형과 동생이 의정부(議政府)에서 다투어 명예를 차지하게 되어 우리 가문은 지나친 데에 이르게 되었다. 어느 자리에 있든 마땅히 이 말을 명심하라.’고 두세 번 거듭 타일렀는데, 삼가 바라보니 조심하고 두려운 기색이었다. 그러니 신이 또한 어찌 감히 사적인 일이라고 해서 빼버리고 여기에 기재하지 않겠는가?

아아! 원통하다. 신은 생각건대, 효라는 것은 모든 행실의 근원이다. 그래서 공자(孔子)는 일찍이 이르기를, ‘행실은 여기에 달려있다.’라고 하였고 글로 써서 경서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것이 지극한 지경에 이르면 귀신과도 통하고 사해를 빛내게 된다. 아, 그 위대함이여! 왕후가 그것에 극진하였다.

공경이라는 것은 한마음의 주장이 되는 것이다. 지극하도다, 왕후여! 지극히 유순하면서 강직하고 지극히 조용하면서 떳떳하였다. 왕비로 있으면서 공순하게 임금을 받들며 자기 자리에 꿋꿋이 서 있었고 마음이 독실하였으니, 우리 왕후가 바로 그러하였다. 어진 마음은 모든 착한 것의 으뜸으로, 인자하고 선량하고 공경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것이 나타나 보일 때에는 측은한 생각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이 되는 것이다. 처음에는 벌레처럼 변변치 않게 보이지만 어미가 자식을 기르듯 품어 기르는 가운데 자라지 않음이 없어 확대되고 충실해져 마치 불길이 타오르거나 샘줄기가 뻗어 올라가듯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 그 광대함이여! 왕후의 행실이 검소하여 백성 교화의 근본이 되었으니, 이미 부유하고 이미 귀한 처지에서도 오히려 그런 덕을 지니고 있었다. 잠관(蠶館)에서 실을 뽑다가 옷을 더럽히게 되면 아랫사람들의 옷을 얻어 입기까지 하였으니, 아, 고상하다! 왕후가 그렇게 하였다.

신이 감히 역사에서 칭송한 바를 상고하건대, 중국 한(漢) 나라명덕 마황후(明德馬皇后)는 허름한 천으로 옷을 지어입고 푸른 겉옷을 몸에 걸치고 집안을 경계하였으니, 그 검소함으로 수신제가하였다. 또 화희 등황후(和熹鄧皇后)는 많은 음식을 차려놓는 것을 경계하였고 풀을 뜯어먹게 된 기근이 들었을 때 자신의 음식상을 걷어 내주어 굶주린 무리들을 구원하였으니, 어질고 살리기를 좋아하였다. 당(唐) 나라 고조(高祖)의 황후 태목(太穆)은 옷을 벗을 틈이 없이 언제나 부지런히 일하기를 좋아하였고, 태종(太宗)문덕 황후(文德皇后)는 예의를 숭상하고 《여칙(女則)》을 본받아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을 스스로 거울삼았으니, 모두 타고난 천성이었다. 그러나 네 가지의 덕성 중에서 각기 한 가지를 칭송하였으니. 만약 이상의 네 가지 덕성을 겸비한다면 모든 좋은 점이 구비되는 것이다. 여자 중에 이것을 모두 갖추어 이룩한 인물은 오직 삼대(三代) 이상이라야 아마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皇帝)의 아내라든가 당요(唐堯)의 어머니라든가 그런 여인들은 훌륭했지만 경서(經書)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주 소략하였다. 삼가 우순(虞舜) 이후부터 주(周) 나라 시대까지 상고해보면 우순(禹舜)의 배필인 당요(唐堯)의 두 딸 아황(娥皇)여영(女英)은 총명하고 절개 있는 점에서 본보기가 되었고, 하우(夏禹)의 배필인 도산씨(塗山氏)는 의리에 통달하고 공훈이 있어 뛰어났다. 은탕(殷湯)의 배필인 유신씨의 가르침으로 순위가 올바르게 되었고, 주 문왕(周文王)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의 단정함으로 전일하고 성실하면서 엄정하였다. 주 문왕(周文王)의 배필인 태사(太姒)로 말하면 모든 덕을 겸비한 동시에 부녀자의 도리도 다하였기 때문에 《모시(毛詩)》의 〈권이(卷耳〉·심관〈審官〉·교목〈樛木〉등의 노래에 실려 있다.

우리 왕후로 말하면 우리나라의 태사이다. 이미 하늘이 내려 준 덕이 있었고 정일한 심법(心法)을 전수하여 임금의 배필이 되어서 왕실의 계통을 이었다. 만물을 마땅하게 다스리려면 그 몸을 잘 보살펴 그 수명을 길게 해 주어야 할 것인데, 어찌 공사(公私) 간에 언짢은 일을 당하게 하여 건강이 나빠져서 중신(中身)의 나이를 누리지 못하고, 어쩌자고 이 나라 백성으로 하여금 갑자기 어머니를 잃은 것과 같은 지극한 슬픔을 당하게 만들었는가? 어찌 이른바 귀신의 일이란 밝히기 어렵고 세상의 이치란 가늠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 그런 것인가?

아아! 원통하다. 왕후는 신해년(1851)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무오년(1858)에 원자(元子)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다. 계해년(1863)에 여러 신하들이 명순(明純)이라는 존호를 올렸고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대비(大妃)라는 칭호를 올렸다. 3년 병인년(1866)에는 휘성(徽聖)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으며, 같은 해 여름에는 정원(正元)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다. 10년 계유년(1873)에 수녕(粹寧)이라는 존호를 더 올렸고, 이때에 와서 철인(哲仁)이라는 시호(諡號)를 올렸다. 휘호(徽號)는 경헌 장목(敬獻莊穆)이고 전호(殿號)는 효휘(孝徽)이다. 산릉(山陵)은 예릉(睿陵)과 같은 언덕에 정하고 초하루가 정미일(丁未日)인 9월 18일 갑자일(甲子日)에 왼쪽에 부장하는 예식을 거행하였다. 이렇게 하면 평상시 매우 가까이하던 뜻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돌이켜보건대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차마 이 일을 하면서 구구한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그 지극한 슬픔을 막아보려고 하였으나, 28년 동안의 숨은 노력과 너그러운 교화를 신의 변변치 못한 글재주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성상께서 지어 내려주신 글을 공경히 받들어 첫머리에 제시하였다.

아아! 백대토록 내려가도 여기에서 장차 교훈을 찾을 것이니, 아아! 아름답다, 아아! 원통하다."

하였다.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지었다.】


  • 【원본】 19책 15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8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왕실-궁관(宮官) / 윤리-강상(綱常)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과학-천기(天氣) / 왕실-종사(宗社)

大行大妃誌文曰: "我哲宗大王妃, 有疾不豫, 以戊寅五月十二日寅時, 昇遐于昌慶宮養和堂, 春秋四十二。 我殿下嚴廬皇瞿, 靡所逮及。 以臣之忝后近屬, 命幽宮之誌。 仍降親撰行錄。 若曰: ‘后以丁酉三月二十三日申時, 誕降于順化坊私第。 自幼性於孝, 惟父母意是順, 事無大小, 罔或自專。 其有疾憂戚之容, 皇皇如也, 疾已乃復初, 撫愛同氣, 出於至誠。 事長之禮, 不勉而能, 稍長沈默寡言, 笑喜怒不形於色。 德器夙就, 儼若成人, 內外親族, 莫不讚誦。 辛亥初揀前幾日, 連有瑞虹, 見於廳前, 盛水盆橫亘, 一洞光彩絢爛, 見者咸異之。 三揀後, 館于別宮, 例受《小學》書。 一番解釋, 旨義則必言下融會, 無所礙滯。 未幾月, 文理大通, 而猶欿然不自有焉。 旣舟梁禮成, 動止有則, 周旋中規, 安詳溫厚, 存中發外, 祥和之氣, 一日而洋溢宮中。 事我純元聖母, 怡愉洞屬, 志物備至。 晨夕定省之餘, 使宮女時時承安, 然後心乃釋。 晩年聖母諸節, 往往欠和, 焦遑憂煎, 常侍左右調護扶將, 不委傍侍。 聖母憫其勞悴, 命歸燕寢, 而終不退休。 丁巳巨創, 慟冤崩霣, 哭泣之哀, 未忍仰瞻。 以至三年之內, 追慕罔極如一日, 根天之孝, 咸感服。 純元聖母禮陟之後, 事我太母, 如事聖母。 每事必稟而行之, 常曰: 「敎導眷愛之恩, 曷以仰報?」 昨秋, 太母有不安節, 其時玉度在靡寧中, 而猶復每日進候。 太母慮有添損, 亟令人止之, 則至廢寢睡, 進膳而不知味, 問安之宮女, 殆相續及奏康復, 歡忭慶祝, 溢於色辭。 其篤於誠孝, 有如此。 癸亥大喪, 哀毁踰禮。 時當寒冱, 而猶日詣欑宮, 奉審玄宮, 夙夜不解衣襨, 以終三霜。 自是盛夏而扇不却暑, 嚴冬而席不就暖, 非有事未或出而臨軒, 經史常常進覽, 而每讀《五倫行實》 《孝子編》, 輒三復流涕。 蓋侍奉純元聖母聖母甫七載而止, 以此爲至痛, 自不禁觸感而然也。 每値齋日, 必先期行素, 朝夕膳需中, 或慮肉汁之和, 進箸不一下。 水剌時進御者, 只蔬菜而已。 至於將事之夜, 徹曉明燭, 待徹享始就寢, 遇私忌亦然。 衣襨不近紗緞, 只以冬綿、夏苧爲常服。 崇儉之德, 殆古后妃所未有也。 全溪大院君祠宇, 銀祭器嘗見失, 至於査覈, 而慮或有無罪橫罹者, 亟命置之。 依樣造成而送之, 此可見好生之德也。 先王宮人之承恩者, 凡百顧恤, 靡不庸極, 逮下之德, 六宮咸頌。 其於永惠翁主, 慈愛有別, 吉禮旣成, 倍自嘉悅, 常以善病, 深加憂慮, 及其喪也, 悲苦痛悼, 愈久而愈不忍忘。 宮人之年老者, 眷待之; 年幼者, 愛恤之。 每有頒賜, 其視惟一, 擧莫不感恩戴德。 而平日不喜讕語, 或有誣毁他人者, 默然不賜答。 使自知愧, 言者惶蹙不敢復言。 昇遐前一日, 猶復親自梳洗, 雖本第人, 不以褻衣見, 各殿下臨扶而起迎, 持敬之嚴, 不少弛。 十一日半夜, 雷聲起, 證候忽添㞃, 問左右曰: 「雷何壯也。」 至十二日曉, 益轟轟而寶婺遽掩彩, 此其天之示兆歟! 嗚呼, 慟哉! 惟我聖后盛德、至行, 何能倉卒摹畫? 而略以平昔傳聞, 與夫身親觀感者, 謹錄萬分之一。 臣伏讀, 旣拜手稽首曰: 「猗其盛矣!」 臣安敢損益乎? 此而臣昔濯龍之起居也, 后語臣曰: 「兩殿常於我乎而靡事不致其極至焉。 予心甚樂矣。」 甲戌大慶, 后欣欣然喜曰: 「繼明照四方, 萬億年無疆。 其自今基, 罔非我列祖眷棐于宗社, 亦惟我聖上之德之仁, 有以昭受于天也。」 休哉! 臣安敢不之紀載乎此? 嘗詔臣曰: 「宦而至相, 人臣之極榮也、極位也。 兄及弟競爽中書, 吾家盈爛一至此, 竟當何居, 諄諄然提命者。」 非再三而輒伏覩兢惕之色矣。 臣又安敢以私爲屑, 而不之紀載乎此? 嗚呼冤哉! 臣竊伏惟念, 孝者百行之源也。 夫子嘗謂「行在於是」著以爲經。 而其極功也, 通神明而光四海, 猗乎其大! 后其盡之。’ 敬者一心之主也。 至哉坤元! 至柔而剛、至靜而方, 位乎黃裳、順乎承天, 而其立也直內, 猗乎其篤! 后其居之。 仁者衆善之長也, 包而爲慈良豈弟, 見而爲惻隱不忍。 微如蝡蠢, 初如才乙莫不嫗蘇, 生成於含育中, 其擴而充之, 如火燃泉達。 猗乎其廣! 后其行之。 儉者風化之本也, 已富已貴, 而猶能乎德之共。 蠶館絺綌亦或汚澣, 所以有卑衣之助。 猗乎其崇! 后其昭之。 臣敢以彤史所讚, 而蠡管之明德以大練飾身緣褠、警家其儉修齊。 亦惟鄧后供戒鬱養, 掘萌之新飢, 推撤饍救阨之惠, 其仁好生。 於 太穆之不釋依履, 怡謹於所事。 文德之矜, 尙禮法《女則》, 以自鑑其孝敬, 卽天植然。 然而此猶四德之各稱其一。 若夫兼此四德而萬善俱足, 集大成於女中者, 惟三代上, 其殆庶幾。 自西陵慶都氏尙矣, 見於經者略。 謹稽以來迄于, 聰明且貞, 嬀汭之觀刑也; 達義執勳, 塗山之逸響也。 有㜪之訓, 正有序高也; 摯任之端, 一誠莊性也。 俔天媲文德、嗣徽盡婦道, 以之卷耳審官樛木。 逮下聖矣乎我東方太姒也。 天以后克肖其德, 若精一心法之傳授, 俾配于聖人。 奉神靈之統, 而理萬物之宜, 宜乎厚其餉而遐其算。 夫何公私貽慼, 榮衛隨損, 厥享年未及中身, 使斯民遽纏喪妣之至慟? 豈所謂神者誠難明, 而理者亦難諶者歟? 嗚呼, 冤哉! 后於辛亥, 冊爲王妃; 戊午, 誕生元子, 早卒。 癸亥, 群臣上尊號曰‘明純’, 今上卽位, 進號大妃。 三年丙寅, 加上尊號曰‘徽聖’, 同年夏, 加上尊號曰‘正元’。 十年癸酉, 加上尊號曰‘粹寧’。 至是上尊諡曰‘哲仁’。 徽號曰‘敬獻莊穆’、殿號曰‘孝徽’。 山陵卜於睿陵同原。 九月丁未朔十八日甲子, 附左禮也。 此可慰平日密邇之志歟! 顧臣冥頑, 忍與斯役, 思欲以區區者少塞至哀, 而若其二十有八載陰功柔化, 非臣蔑學可得以鋪張揚厲。 是以敬奉聖製下者, 揭之于篇首。 嗚呼! 百世之下, 其將徵諸斯也。 嗚呼, 懿哉! 嗚呼, 冤哉!" 【判府事金炳國製】


  • 【원본】 19책 15권 30장 B면【국편영인본】 1책 580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어문학-문학(文學) / 역사-고사(故事) / 왕실-궁관(宮官) / 윤리-강상(綱常)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 과학-천기(天氣) / 왕실-종사(宗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