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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15권, 고종 15년 8월 27일 갑진 1번째기사 1878년 조선 개국(開國) 487년

영의정 이최응이 풍덕과 인천 등의 대동미를 돈으로 대납할 것을 청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윤자덕(尹滋悳)이 보고한 바를 보니, 풍덕(豐德)의 부세(賦稅)와 인천(仁川)·부평(富坪)·통진(通津)의 대동미(大同米)를 다시 기한을 연장하고 돈으로 대신 바칠 것을 청하였습니다. 다만 풍덕은 읍(邑)으로 회복된 나머지 끌어다 보충하기가 아직도 곤란하고, 인천은 영(營)으로 승격된 후에 배정하여 획급하는 것이 많이 모자라며, 부평통진은 포군(砲軍)을 설치할 자금을 마련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번에 만약 일반 규정대로 본색(本色)으로 받아낸다면 경기 연안 요충지의 각종 급료는 장차 마련할 데가 없게 될 것입니다. 풍덕 한 부(府)의 부세와 인천 등 세 고을의 대동미는 3년 정도 기한을 연기하여 상정(詳定)해서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전라 감사(全羅監司) 이돈상(李敦相)이 보고한 바를 보니, 영광 군수(靈光郡守) 박제교(朴齊敎)의 첩정(牒呈)을 일일이 열거하여 말하기를, ‘병자년(1876)의 대흉은 읍을 설치한 뒤 처음 당한 일로 도내(道內)에서 가장 심하였으며 게다가 전염병까지 겹쳐서 대부분 유망(流亡)하였습니다. 그런데 각종 상납을 규정대로 독촉한다면 남아있는 백성들마저 모두 흩어져 고을이 장차 텅 비게 될 것이니, 해당 군(郡)의 병자년 세미(稅米)에서 유망한 사람들의 몫인 900여 석을 특별히 탕감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1,000여 석은 상정하여 대봉(代捧)하도록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 군의 황급한 정상은 부안과 서로 같은데, 개간하지 않은 땅에서 어떻게 강제로 거두어들인단 말입니까? 조정에서 돌봐주는 뜻에 있어서는 일반 규정만을 고집할 수 없으니, 부안에서 이미 시행한 규례대로 병자년 조의 미납된 조세미(租稅米)는 모두 상정하여 대납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김세균(金世均)이 보고한 바를 보니, ‘도내 갑산(甲山) 땅의 혜산(惠山)·운총(雲寵) 두 진(鎭)은 저쪽 땅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그것이 요충지로서 다른 곳에 비하여 더욱 구별됩니다. 그러나 몇 개의 진속(鎭屬)들이 피폐하고 약해서 이미 의지할 자산이 없습니다. 혜산진은 본사(本社) 중에서 본부(本府)의 환민(還民) 21호 및 토지 188결을 본 진에 떼어 주어 환곡(還穀)의 모조(耗條)와 결세를 모두 거두어서 포군(砲軍)을 설치하여 급료를 주고, 운총진은 본 사 중에서 본 부의 환민(還民) 102호를 본 진에 떼어 주어 진속으로 창감(倉監)·색고(色庫)를 차출하여 규례대로 조적(糶糴)을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환곡은 비록 본 부에서 관할하지만 전적으로 본 진에 속하게 하여서 포군을 설치하여 급료를 주게 한다면 영락된 진이 조금 소생할 가망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주진(主鎭)인 고을은 하루아침에 두 가지를 잃게 되니, 생각해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부는 근년 이래로 공한지로서 개간된 땅과 호적 외에 더 늘어난 호구가 모두 ‘세금이 면제되고 있으니, 어느 곳이나 샅샅이 조사하여 참작해서 세를 받아 양사(兩社)에서 부족 되는 것을 채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보고한 대로 시행하도록 허락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광주 유수(廣州留守) 김보현(金輔鉉)의 장계(狀啓)를 보니, ‘본 부 공도회(公都會)의 해액(解額)이 일 년에 세 사람에 지나지 않는데, 수원(水原)개성(開城)은 해마다 뽑는 인원이 여덟 사람이니, 문치(文治)를 장려하는 정사에 있어서 마땅히 피차간의 차이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수원개성의 규례대로 똑같이 돌보아주는 혜택을 입을 수 있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청하였습니다. 이 부(府)는 중요한 곳으로서 모든 제도를 두는 데에 있어서 진실로 화성(華城)이나 개성보다 못할 것이 없는데, 다만 공도회의 액수가 두 부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경내의 많은 선비들이 울분을 품는 것도 괴이할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유수(留守)가 진술한 바를 허락하여 이제부터 두 도(都)의 규례대로 8인을 시취(試取)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하여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제주도(濟州道)는 먼 바다 밖에 치우쳐 있어 조정의 관심이 다른 곳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문관(文官)은 괴원(槐院)까지 허락하고 있으나 무관(武官)은 선전관(宣傳官)으로 추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비단 먼 곳의 사람들이 원망을 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균등하게 대해 주는 정사가 아닙니다.

이후에는 그곳의 지위와 문벌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순서를 뛰어넘어 선전관으로 추천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뜻으로 전조(銓曹) 및 선전관청(宣傳官廳)에 분부하게 해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이어 하교하기를,

"인천(仁川)부평(富平) 등지에 돈대(墩臺)를 설치할 만한 곳이 있으면 본 소에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니, 강화(江華)에 비교하면 더욱 요충지가 될 것이다. 진(鎭)을 창설하고 돈대를 설치하여 방어하고 지키는 것이 좋겠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양선(異樣船)이 늘 인천(仁川)을 경유하여 오는데, 이 고을은 서울과 가깝습니다. 지금은 비록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었지만 기타 관액(關阨)의 어귀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하여 사전 대비책을 더욱 강화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옛날 영조(英祖) 때 일찍이 장산도(長山島)에 진(鎭)을 설치한 일이 있었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영조 때에 이미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 또 설치한다면 어찌 그것을 계승하는 아름다운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인천부평 땅에 본 소에서 돈대를 창설하는 일은 어영 대장(御營大將)이 응당 들었을 것이다."

하니, 어영 대장 신정희(申正熙)가 아뢰기를,

"신이 별장(別將)으로 있을 때 이미 들었습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미 본 소에서 이 일을 관할하기로 하였는데 어영 대장이 이미 별장을 지냈고 본래 시임과 원임의 구별이 없으니, 비록 대장의 임무를 맡기는 하였지만 편할 대로 오갈 것이며 며칠 안으로 내려가서 형편을 헤아려보라."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이것은 관방(關防)에 관계되는 중대한 일로서 이미 어영 대장에게 맡겼으니, 모든 제도의 설치를 그로 하여금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게 하고 훗날 상벌(賞罰)의 근거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렇다. 강화 돈대에 대한 일은 어영 대장의 부친이 진무사(鎭撫使)로 있을 때 잘 만들어 설치하였으니, 어영 대장도 이 일을 잘 해낼 것이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한 해 동안의 급료와 군사 제도도 장차 강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것은 아직 늦지 않았으니, 그때에 가서 변통해도 될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병국(金炳國)이 사퇴를 윤허하여 줄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세 정승의 자리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의지하는 바가 더욱 무겁다. 경은 겸손하게 사양하지 말고 오직 백성과 나라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 【원본】 19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79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호구-호구(戶口) / 재정-전세(田稅) / 농업-개간(開墾) / 인사-선발(選拔)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

    二十七日。 次對。 領議政李最應曰: "卽見京畿監司尹滋悳所報, 則‘請豐德賦稅與仁川富平通津大同, 更加展限, 以錢代納矣。’ 第念豐德則復邑之餘, 牽補尙艱; 仁川則陞營之後, 排劃多缺; 富平通津則設砲之資, 措辦無術。 今若責之常例, 準以本色, 則畿沿要衝各項餼料, 其將無可靠、可藉之地矣。 豐德一府賦稅、仁川等三邑大同, 限三年展限, 詳定代納何如?" 允之。 又曰: "卽見全羅監司李敦相所報, 則‘枚擧靈光郡守朴齊敎牒呈以爲: 「丙子大歉, 卽設邑後初有, 一省中最甚, 而重之以癘疫, 流亡居多。 各項上納, 如例督責, 則餘民盡散, 邑將空虛。 該郡丙子稅米, 流亡條九百餘石, 特爲蠲蕩, 未收條一千餘石, 詳定代捧」爲辭矣。 本郡遑汲之狀, 與扶安互相甲乙, 其何以苛斂於不墾之土而强督乎? 其在朝家懷保之義, 有不可膠守恒式, 依扶安已施之例, 丙子條未納稅米, 竝許詳代何如?’" 允之。 又曰: "卽見咸鏡監司金世均所報, 則以爲: ‘道內甲山惠山雲寵兩鎭, 與彼地只隔一帶水, 其爲要衝, 比他尤別, 而幾箇鎭屬, 疲殘孤弱, 旣無聊賴之資。 惠山鎭則以本社中本府還民二十一戶及田結一百八十八結, 劃付本鎭, 還耗與結納, 竝取之而設砲、放料, 雲寵鎭則以本社中本府還戶一百二戶, 劃付本鎭, 以鎭屬差出倉監、色庫, 依例糶糴。 而還穀雖管於本府, 任賴全屬於本鎭, 俾爲設砲、放料, 則殘鎭有稍蘇之望。 而第其主鎭邑之一朝兩失, 不可不念。 該府之近年以來, 閒曠墾闢之地、籍外添增之戶, 皆是免賦、免稅者也。 逐處査櫛, 參量執稅, 俾充兩社虧欠’爲辭矣。 依報許施何如?" 允之。 又曰: "卽見廣州留守金輔鉉狀啓, 則以爲: ‘本府公都會解額, 歲不過三人, 而水原開城, 每年取額爲八人, 則其在揆文之政, 宜無彼此之異同。 依水原開城例, 冀蒙一視之澤事, 請令廟堂稟處矣。’ 是府重地也。 凡厥制置, 固無遜乎華城開城。 而第惟都會之額, 未居兩府之半, 闔境多士之齎菀, 亦無怪矣。 特許守臣所陳, 從今以往, 依兩都例, 試取八額, 著式施行何如?" 允之。 又曰: "濟州一島, 僻在層溟之外, 朝家眷念, 視他有別。 文官, 則旣許槐院; 而武官, 則不許宣薦者, 非徒遠人之懷菀, 寔非均一之政。 此後則擇其有地閥人, 許越宣薦之意, 請分付銓曹及宣傳官廳。" 允之。 仍敎曰: "仁川富平等地, 有墩臺可設之處。 自本所有所經略, 而較諸江華, 尤爲要衝。 創鎭設墩, 以爲防守之節, 好矣。" 最應曰: "異船之來, 每由仁川, 而此邑密邇京洛。 今雖陞爲防禦之營, 其他關阨之口, 不可不設鎭、堡, 益爲陰雨之策矣。" 敎曰: "昔在英廟朝時, 曾有長山島創鎭之事矣。" 最應曰: "英廟朝, 旣有此事, 而今又行之, 豈不爲繼述之美事乎?" 敎曰: "仁川富平地, 自本所創設墩臺事, 御將似應聞之矣。" 御營大將申正熙曰: "臣爲別將時, 已聞之矣。" 敎曰: "已自本所, 句管此事, 而御將旣經別將, 本無時原任之別, 則雖帶將任, 從便往來, 而日間下去, 商度形便也。" 最應曰: "此係關防重事, 旣任御將, 則凡屬制置, 使之終始責成, 以爲後日賞罰之地, 恐好矣。" 敎曰: "然矣。 江華墩臺事, 御將之父, 爲鎭撫使時, 善爲制置, 御將亦當善做此事矣。" 最應曰: "一年餼料與軍制, 亦將講究, 恐好矣。" 敎曰: "此則尙未晩也, 臨時變通, 亦可也。" 左議政金炳國, 乞賜體諒。 敎曰: "鼎席旣備, 倚賴益重。 卿勿巽讓, 惟以民國爲念。"


    • 【원본】 19책 15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579면
    • 【분류】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호구-호구(戶口) / 재정-전세(田稅) / 농업-개간(開墾) / 인사-선발(選拔) / 교통-수운(水運) / 군사-군정(軍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