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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12권, 고종 12년 5월 10일 병오 1번째기사 1875년 조선 개국(開國) 484년

대신들과 일본에서 보내온 서계에 회답하는 문제를 의논하다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의정부 당상(議政府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일본에서 보내온 서계(書契)에 대한 회계(回啓)에 관한 일로 널리 하문하여 재결해야 할 것인데다 변경 정세에 관계된 일이라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어서 이렇게 모이라는 하교를 내린 것이다."

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이 일이 결말나지 않고 있는 지 벌써 한 해가 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방법은 오직 서계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데 달려 있는데, 외간에서는 이 일로 논의가 한결같지 않습니다. 서계를 받아들인다면 일시적인 미봉책이야 되겠지만 앞으로 무궁한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든 저렇게 하든 매우 어렵고 신중히 해야 하는데, 신은 용렬하여 이미 원대한 사려가 없다 보니 눈앞에 닥친 근심을 결단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충분히 타산하여 헤아려서 재결하여 주소서."

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서계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은 거기에 있는 서너 마디의 말 때문에 그러한 것입니다. 춘추 시대에 오(吳) 나라초(楚) 나라가 왕(王)을 참칭(僭稱)하였으나 자기 나라에서만 왕을 칭했을 뿐 열국(列國)에 사신을 보냄에 미쳐서는 과군(寡君)이라고 칭하고 폐읍(弊邑)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서계의 호칭은 해괴망측하여 전에 없었던 일일 뿐만 아니라 바로 또한 지난날의 서첩(書牒)에도 없던 바입니다. 이 때문에 한 해 넘게 허락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향 때 〖저들이〗이전에 입던 옷을 입지 않는다면 훗날의 폐단에 크게 관계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살피고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지금 이 일은 이웃 나라끼리 강화(講和)를 닦자는 것이니 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 굳이 우리가 먼저 트집을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자는 크게 격식을 어겼으니 갑자기 받아들이기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아직도 귀일된 의견은 없습니다. 신의 얕은 소견으로는 감히 지적하여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 박규수(朴珪壽)가 아뢰기를,

"저들의 서계에서 칭호를 참람하고 망령되게 한 것은 몹시 놀라운 일입니다만, 과군이니 폐읍이니 하는 예양(禮讓)하고 겸공(謙恭)하는 말을 저들에게 갖추기를 요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그 나라에서 황제라고 칭한 것은 대체로 주(周) 나라평왕(平王) 때부터라고 하니, 지금 이미 수 천 년이 된 셈입니다. 저들의 서계에서 본 국이 칭하는 대로 따른 것은 또한 신하로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성상께서 어떻게 포용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스스로 나라와의 제도를 변경하여 크게 이웃 나라의 우호를 닦자고 말한 것이 지금까지 저지당하고 보니, 반드시 한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일으킬 만한 단서와 앞날의 폐단에 대해서 실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만, 그때 가서 거절하는 데에는 그 방법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의 사단은 저들이 반드시 말을 물고 늘어질 것이니, 구구한 우려가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서계 가운데 마음에 꺼리는 어느 구절, 어느 조항을 연석에 나온 여러 신하들이 하나하나 하문하면 모두 분석해서 대답할 것입니다."

하고, 좌의정(左議政) 이최응(李最應)이 아뢰기를,

"서계가 대마도(對馬島)를 경유하지 않고 외무성(外務省)에서 보내온 것은 300년 동안 없던 일이니 허접(許接)해서는 안 되고, 칭호를 사용하는 데 망령되게 스스로 존대하였으니 허접해서는 안 되며, 연향의 의식 절차를 갑자기 전날과 다르게 하였으니 허접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생각건대, 저 나라가 이미 대마도를 폐하고 관직 제도를 바꾸어 정령(政令)을 일신하였기 때문에 이웃 나라와 사귀는 것은 통호(通好)하자는 저의입니다. 이번의 서계는 대마도에서 보내오지 않고 저들 나라에서 보내온 것으로, 제 나라의 신하가 스스로 그 임금을 존칭한 것이니, 이웃 나라에서 강제로 변경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 밖의 말은 대략 고쳐왔는데 또 이렇게 서로 버티고 있으니 성실하고 미덥게 하는 도리가 아닌 만큼 말썽이 생길까 우려됩니다. 감히 억측하여 아뢸 수는 없습니다."

하고, 우의정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서계는 글자 모양의 한 점이나 한 획이라도 전의 규례와 같지 않으면 곧바로 물리치는 것이 바로 규례입니다. 지금 이 서계 가운데 몇 구절은 한 점 한 획에 비교할 수 없으니, 지금까지 서로 버텨온 것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지난번에 먼 지방의 사람을 친절히 대우하는 뜻에서 연향하라는 처분을 내렸는데, 의복과 정문(正門) 등의 일을 야기하여 지금까지 질질 끌고 있는 것은 진실로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지금 만약 받아들인다면 목전의 말썽은 생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또 따르기 어려운 청이 없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신의 얕은 소견으로 어찌 억측하여 대답하겠습니까?"

하였다. 그 이하 여러 신하들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하교하기를,

"내가 여러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고 재결하려고 하였는데, 오늘은 날이 몹시 더우니 물러가고 빈청과 여러 재신들이 서로 의논하여 정론(正論)을 세우라."

하니, 이유원이 아뢰기를,

"이것은 위에서 처분하시기에 달려 있는 것인데, 어찌 다시 상의할 것이 있겠습니까? 오늘의 번연(蕃衍)은 다른 때의 차대(次對)와는 다른데, 만일 귀일된 처분이 없이 신 등이 규례를 따라서 물러가게 된다면 이것은 이웃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다. 이최응이 아뢰기를,

"강학(講學)을 정지한 지 다섯 달이 넘습니다. 주자(朱子)가 이르기를, ‘공부는 중단하기 쉽고 세월은 다시 찾기 어렵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배우는 사람에게 매우 절실한 경계입니다. 제왕이 학문을 함에 있어서 이 가르침을 간직하고 항상 정성껏 가슴에 새긴다면 온갖 법도 곧아져 온갖 교화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소서."

하니, 또 아뢰기를,

"재정이 고갈된 것이 오늘날 제일 급한 정사입니다. 대체로 나라의 재물은 모두 토지와 백성들로부터 나오는데 토지가 줄어들지 않았고 백성들이 없어진 것이 아닌데 재물은 고갈되었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날로 용도를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 전각을 중건하는 데 호조의 경비가 이미 바닥났고 내탕고(內帑庫)의 저축도 텅 비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 마음속으로 근심하시어 오히려 재물을 손상시키고 백성들을 해칠까 염려하시니 신은 참으로 흠앙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용도를 절제하는 방도는 오직 전하께서 소박하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음을 보여주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힘쓰소서."

하였다. 하교하기를,

"권면(勸勉)한 것이 매우 정성스러우니, 삼가 명심하겠다."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포도청을 설치한 것은 전적으로 도적을 막기 위한 것인데, 요사이 여염에 밤도둑에 대한 보고가 곳곳에서 들려오고 심지어는 불을 밝히고 뛰어들어 잔뜩 빼앗아 가기까지 합니다. 도성의 엄숙하고 맑은 곳에 어찌 이와 같은 변괴가 있단 말입니까? 좌우포도대장(左右捕盜大將)을 엄하게 추고하여 각별히 기찰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문충공(文忠公) 민익수(閔翼洙)는 일생동안 선정신(先正臣) 김장생(金長生)을 존경하고 사모하였으며 학문은 극기(克己)하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신사년(1701)과 임오년(1702)의 사화(士禍) 후에는 한결같이 임금의 무함을 밝히는 데 주력하였기 때문에 조정과 선림들이 명분과 의리의 영수(領袖)로 대하였습니다. 영묘조(英廟祖)의 50년 동안 의리가 해와 별처럼 빛났던 것은 사실 문충공이 논의를 제창한 힘입니다. 영원히 조천(祧遷)하지 말도록 하여 높이 보답하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16책 12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9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일본(日本)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재정-국용(國用) / 사법-치안(治安)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初十日。 引見時原任大臣政府堂上。 敎曰: "日本書契回啓事, 宜博詢裁斷, 而事係邊情, 不可捱過, 有此來會之敎矣。" 領府事李裕元曰: "此事之未出場, 已有年矣。 爲今之道, 惟在於書契之捧不捧, 外間以此事, 其議不一。 捧之則雖有姑息之道, 將來無窮之憂, 不可勝言, 左右極難愼。 臣庸陋旣無遠慮, 無以斷近憂。 惟願十分裁度焉。" 領敦寧金炳學曰: "書契之不捧, 以其數三句語而然矣。 《春秋》 之僭王也, 王於其國而已。 及夫送使列國, 稱寡君, 稱弊邑。 則今此稱謂駭妄, 非但前所未有, 卽亦往牒所無。 所以積年靳持者也。 且宴饗時, 不著前服, 則大關後弊矣。 不容不十分審愼。" 判府事洪淳穆曰: "今於此事, 講修隣好, 包容得其宜, 未必自我先爲生釁也。 或曰此文字大違格式, 不可遽然許納云, 尙無歸一之論。 以臣淺見, 不敢指的立言。" 判府事朴珪壽曰: "彼書之稱謂僭妄, 極可駭然。 寡君、弊邑, 禮讓謙恭, 恐難責備。 其國之稱皇, 蓋自 平王之世, 今旣數千餘年矣。 彼書從其本國稱, 亦其臣子之不得不然者, 則在聖度包容之如何。 而彼之自謂變更國制, 大修隣好者, 于今見阻, 必有憾恨。生釁之端, 來頭之弊, 固所當念。 而其時拒塞, 不無其道, 目下事端, 彼必執言, 區區憂慮, 實在於此。 書契中某句某條之關念者, 一一下詢登筵諸臣, 皆當辨析仰對矣。" 左議政李最應曰: "書契不由馬島, 自外務省送來, 三百年所無事, 不可許接。 稱號之間, 妄自尊大, 不可許接也。 宴饗儀節, 頓變前日, 不可許接也。 第念彼國, 旣廢馬島, 變更官制, 一新政令, 交隣通好底意也。 今非馬島送來, 卽渠國送來。 渠國臣子, 自尊其君, 非隣邦强令變改者也。 其他辭意, 略有改來, 又此相持, 有非誠信之道, 則生釁是慮。 不敢臆料仰對。" 右議政金炳國曰: "書契字樣之一點一畫, 若不如前規, 則直爲退却卽例也。 今此書契中數句語, 不可與一點一畫之比, 則至于今相持者此也。 向以柔遠之意, 有宴鄕之處分, 而惹出衣服正門等事, 尙此延拖者, 誠莫曉其意之所在也。 今若捧納, 雖無目下生釁, 又安知無難從之請乎? 以臣淺見, 豈敢臆對乎?" 以下諸宰, 議論不一。 敎曰: "予欲聞衆言而裁處。 今日日氣甚熱, 退出賓廳, 與諸宰相議歸正也。" 裕元曰: "此在自上處分。 有何更爲相議者乎? 今日賓筵, 異於他時次對, 而如無歸一之處分。 臣等循例退出, 則此不可使聞於隣國矣。" 最應曰: "講學之停, 五踰月矣。 朱子曰, ‘工夫易間斷, 歲月難推尋。’ 此乃學者切至之戒, 而帝王之爲學也, 當持此訓, 拳拳服膺, 百度貞而萬化成矣。 伏願留神焉。" 又曰: "財用之竭, 爲今日最急之政。 凡國之財, 皆從土地人民而出。 土地無缺矣, 人民不耗矣, 而財則竭矣, 此其故何哉? 卽惟曰不節用。 見今三殿閣重建, 大農之經費旣枵, 內帑之儲蓄亦空。 惟聖衷憂勤, 猶恐傷財而害民, 臣固欽仰。 然其節用之方, 亶出於殿下之示敦朴爲先也。 伏願聖明懋哉。" 敎曰: "陳勉甚摰, 謹當佩服矣。" 最應曰: "捕廳之設, 專爲戢盜。 近日閭里穿窬, 在在入聞, 至於明火突入, 爛漫攫奪。 輦轂肅淸之地, 寧有如許變怪? 左右捕將, 從重推考, 使之各別譏詗何如?" 允之。 又曰: "文忠公 閔翼洙, 平生尊慕先正臣金長生, 其學專力於克己。 辛壬士禍後, 一以辨君誣爲事, 朝廷士林, 待之以名義領袖。 英廟朝五十年, 義理之炳若日星, 實文忠倡論之力也。 永世不祧, 以寓崇報, 恐好。" 允之。


    • 【원본】 16책 12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9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외교-일본(日本) / 역사-고사(故事) / 왕실-경연(經筵) / 재정-국용(國用) / 사법-치안(治安) / 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