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도 육진이 조세를 낼 수 없는 형편이기에 기한을 연기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이유원(李裕元)이 아뢰기를,
"《명의록(明義錄)》은 일성(日星)처럼 밝고 부월(斧鉞)처럼 대단히 엄하니, 만세토록 고칠 수 없는 법입니다. 이번에 내린 처분에서 경사를 널리 함께 하려는 때를 맞이하여 특별히 죄명을 씻어주는 조치가 있었는데, 이런 역적 무리들을 어떻게 죄를 용서하고 죄명을 말소하는 대상으로 의론할 수 있겠습니까? 대각(臺閣)의 간쟁과 법(法)을 집행하는 관사의 상소가 분명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더욱 두려운 것은 백대를 내려갈 공론(公論)입니다. 신들의 정성이 성상을 감격시키지 못하고 말은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여 윤허를 받지 못한 것은 이미 신들의 죄입니다. 한 번, 두 번 감히 계속 상소를 올리지 못하는 것은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칠까 두려워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어전에 나와서 어찌 다시 명백히 주장하는 의리를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 허물을 고쳤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봅니다. 삼가 바라건대, 다시 깊이 생각하시어 속히 명을 취소함으로써 온 나라에 들끓고 있는 의론을 사라지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지금 경사를 널리 함께 하려는 때를 당하여 처분을 하였으며, 이미 엊그제 연명 차자(聯名箚子)에 대한 비답에서 다 말하였으니, 나의 뜻을 이해하기 바란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방금 함경 감사(咸鏡監司) 서당보(徐堂輔)의 장계(狀啓)를 보니, ‘부령(富寧)과 육진(六鎭)의 여러 고을들의 묵은 전결(田結)과 없어진 배와 염분(鹽盆)에 대해서는 신미년(1871)에 도신의 장계(狀啓)에 의하여 3년 동안 조세(租稅)를 정지하고 진휼하고 남은 전(錢)으로 이자를 받아 급대(給代)하였습니다. 그런데 기한이 이미 찼지만 유랑민(流浪民)들이 모여들지 않고 있으니 형편상 실로 내년부터 다시 세를 징수할 길이 없습니다. 다시 3년을 연기해서 특별히 세를 정지하고 급대도 종전대로 시행하도록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육진의 여러 고을들에 대한 문제는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것을 조정에서도 환히 알고 있습니다. 장계의 내용대로 기한을 연기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방금 충청 감사(忠淸監司) 성이호(成彛鎬)의 장계(狀啓)를 보니, ‘사환미(社還米) 5,000석(石)을 우선 가져다 쓰고 입본곡(立本穀)의 문제는 지금 사세로 보아 3년 안으로 수량을 완전히 맞추기는 어려운 듯 합니다. 특별히 2년을 더 연장해 주도록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도(本道)의 사정이 이미 이와 같으니, 3년과 5년은 시간적으로 그다지 멀지 않고 또 도신이 반드시 명확한 견해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니 장계에서 청한 대로 5년으로 다시 통지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환곡(還穀)은 특별히 중요하기 때문에 허류(虛留)할 수 없으며 또 나이(挪移)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 변하지 않는 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허류나 나이하는 것 외에도 허다한 농간질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영남(嶺南)에서는 ‘이무(移貿)한다.’고 하고 호남(湖南)에서는 ‘가작(加作)한다.’고 하며 해서(海西)에서는 ‘별작(別作)한다.’고 하는데, 이는 모두 백성들을 병들게 하는 발판으로 되고 있습니다. 호남과 해서에서는 이 폐단이 조금 중지되었지만 유독 영남만은 아직도 이무의 근원이 제거되지 않아 주고받을 때마다 뇌물과 청탁이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는데도 중지시키지 못하니, 결국 이익은 하리(下吏)에게 돌아가고 폐해는 백성들에게 돌아갑니다.
영문(營門)에서는 수에 맞추어 내주지만 고을에서는 반드시 값을 감하여 분급(分給)하기 때문에 ‘소상정(小詳定)’, ‘소소상정(小小詳定)’ 등 부정한 명색(名色)들이 있게 되며, 하리들이 속이는 폐단을 발각할 수 없습니다. 설사 발각한다고 해도 적당히 얼버무려 덮어주고 봄부터 가을까지 여러 번에 나누어 조금씩 분표(分表)하는데, 분표하는 사이와 거두어들이는 날이 달로 계산해서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환곡(錢換穀)은 이미 법에 벗어난 일인데, 적게 주고 많이 받아내니 어찌 차마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나누어 줄 때에 한 번 엄하게 신칙하여 감히 그 사이에서 못된 전례를 만들지 못하게 해야겠습니다. 먼저 영남에 행회(行會)하고 호남과 해서에 대해서도 일체(一體) 통지함으로써 사전(事前)에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각별히 신칙하라."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유학(儒學)을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중시하는 것은 열성조(列聖朝)부터 전수해 오는 법이니, 학문이 깊은 이를 추장(追獎)하여 빛내는 것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다운 제도입니다. 증 대사헌성균관 좨주(贈大司憲成均館祭酒) 이몽규(李夢奎)는 인종조(仁宗朝)의 유현(儒賢)으로, 충정공(忠貞公) 김극성(金克成)의 가문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것을 계기로 해서 김극성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문목공(文穆公) 김정국(金正國)은 매번 당대의 학자를 논할 때면 반드시 그를 먼저 꼽았으며,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는 그를 선생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행장을 짓기를, ‘천성(天性)이 광활하고 밝으며 기개와 도량이 고상해서 위협에도 굽혀들지 않고 권세나 이득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벗어나 깨끗하게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홀로 정직한 마음을 품고 우뚝히 서서 영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다. 그가 졸(卒)하자 방아 찧는 자는 타령을 부르지 않고 농부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 것이 한달을 넘었다.’ 하였습니다. 문정공(文貞公) 김육(金堉)은 이몽규의 언행을 《동국명신록(東國名臣錄)》에 기록하였으며, 나라에서는 후에 그가 거처하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사액(賜額)하였습니다. 그가 학문을 연구하고 행실을 규제하는 것이 문정공(文正公) 김인후(金麟厚)와 비슷하였습니다.
고(故) 대사헌 겸 찬선(大司憲兼贊善)이었던 이유태(李惟泰)는 젊어서 선정신 김장생(金長生)을 스승으로 삼아 그 연원(淵源)의 학문을 체득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인조조(仁祖朝)에 초빙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가 효종조(孝宗朝)에 와서 선정신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과 함께 부름을 받았으며 숙묘(肅廟)의 성대한 즈음에 등용되었으니, 군신의 훌륭한 조우와 종사(宗師)로서의 막중함이 역사책에 밝게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誠敬)은 성리학을 위주로 하였고 정대함은 춘추의 의리를 밝혀서 당대의 걸출한 인물로 일컬어졌습니다. 이 두 유현(儒賢)이 아직 시호(諡號)가 없으므로 사림(士林)이 억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특별히 시호를 의논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숨어 있는 인재를 밝히는 것은 실로 훌륭한 일이다. 내가 참작한 것이 있으니, 마땅히 처분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이유원이 아뢰기를,
"고 경연관(經筵官) 성근묵(成近默)은 선정신 성혼(成渾)의 후손입니다. 학문에 연원이 있고 성경에 종사하였습니다. 《효경부전(孝經附傳)》등을 저술하여 정밀한 뜻을 밝혔으며, 정미년(1847)에 올린 상소는 더욱이 위정척사(衛正斥邪)의 공을 이루었습니다. 태평 성대를 맞고 있는 이때에 천양(闡揚)하는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품계를 뛰어 넘어 정경(正卿)과 좨주(祭酒)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는 은전을 시행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 유신(儒臣) 대하여 특별히 포창하는 것은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마땅히 처분을 내릴 것이다."
하였다.
- 【원본】 15책 11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0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
二十五日。 次對。 領議政李裕元曰: "《明義錄》一部, 炳如日星, 嚴如斧鉞, 卽萬世不刊之典也。 今此處分, 有以廣慶之會, 特此疏滌之擧。 然此等逆類, 何可擬議於貸罪爻名之中乎? 臺閣之言, 執藝之章, 非不直截, 而尤可畏者, 百世之公論也。 臣等誠未格天, 辭不達意, 不得蒙允, 已是臣等之罪。 一籲再籲, 不敢屢煩者, 或恐貽累於聖德也。 今借方寸之地, 安得無更陳明張之義乎? 聖人之過, 如日月之蝕, 及其更也, 人皆仰之。 伏乞更加三思, 亟寢成命, 俾息一國沸騰之議焉。" 敎曰: "今當廣慶之會, 有所處分, 而已悉於日昨聯箚之批, 庶可諒予之意。" 裕元曰: "卽見咸鏡監司徐堂輔狀啓, 則以爲: ‘富寧及六鎭諸邑陳荒田結, 無亡船盆, 辛未因道臣所啓, 限三年停稅, 以賑餘錢, 取殖給代, 而期限已滿, 流民未集, 自明年復稅, 勢實末由。 更展三年, 特加停稅, 給代則依前施行事, 請令廟堂稟處矣。’ 六鎭諸邑事, 尙不就緖, 朝家之所洞知也。 依狀辭退限何如?" 允之。 又曰: "卽見忠淸監司成彝鎬狀啓, 則以爲: ‘社還米五千石, 姑先取用, 而立本之節, 以今事勢, 三年之內, 恐難準完, 特許加展二年事, 請令廟堂稟處矣。’ 本道事情旣如此, 則三年與五年, 其去不甚相遠。 且道臣必有定見而然。 依狀請, 以五年更爲知委何如?" 允之。 又曰: "還穀所重自別, 不得虛留, 又不得挪移, 自有金石之典, 而虛留揶移之外, 許多幻弄, 不一其端。 嶺南則曰移貿, 湖南則曰加作, 海西則曰別作。 皆爲厲民之階也。 湖南、海西, 此弊少戢。 惟獨嶺南移貿, 尙不祛其根源, 每於與受之際, 賂囑公行, 莫可止遏, 畢竟利歸於吏, 害歸於民。 營門則雖準數出給, 自邑必減價分給, 有‘小詳定’、‘小小詳定’等不正名色, 下吏之欺蔽, 無以覺察。 縱或覺察, 因循掩置, 經春及秋, 流伊分俵, 分俵之間, 收捧之日, 月計而無幾。 以錢換穀, 已是法外, 寡給多取, 胡寧忍斯? 今當派分之時, 不可不一番嚴飭, 使不敢作俑於其間。 先爲行會嶺南, 至於湖南、海西, 一體知委, 以爲先事警惕何如?" 敎曰: "各別申飭也。" 裕元曰: "崇儒重道, 列聖朝傳授之法, 而追奬邃學, 闡發幽光, 亦美典也。 贈大司憲成均祭酒李夢奎, 仁宗朝儒賢也。 贅於忠貞公 金克成門, 因而師焉。 文穆公 金正國, 每論當世學者, 必先數之。 先正臣李珥稱以先生, 撰其狀曰: ‘天姿曠朗, 氣度高亢, 威武不能屈, 勢利不能動。 蟬蛻邱園, 皭然不滓, 獨抱幽貞, 特立長往者也。’ 及卒, 舂不相、農不謳者逾月。 文貞公 金堉, 編其言行於《東國名臣錄》, 後賜額于所居之花巖書院。 其究學制行, 與文正公 金麟厚相似。 故大司憲兼贊善李惟泰, 少師先正臣金長生, 得淵源之學。 初聘於仁祖朝不就, 逮孝宗朝, 與先正臣宋時烈、宋浚吉, 同爲被徵, 登庸於肅廟盛際, 遭遇之隆, 宗師之重, 照耀簡策, 誠敬。 主性理之學, 正大明《春秋》之義, 稱爲當世人傑。 此兩儒賢, 尙闕易名, 士林齎鬱, 特爲議諡, 似好矣。" 敎曰: "闡幽彰微, 實爲美事, 而有斟量者存, 從當處分矣。" 裕元曰: "故經筵官成近默, 先正臣成渾之後孫也。 學有淵源, 從事誠敬, 所著《孝經附傳》等書, 闡明精義, 丁未一疏, 尤有衛正斥邪之功。 當熙朝聲明之治, 不可無表揚之擧, 超贈正卿祭酒, 仍施節惠之典, 恐好矣。" 敎曰: "此儒臣之特施褒揚, 所奏誠然矣。 從當處分矣。"
- 【원본】 15책 11권 48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60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재정-잡세(雜稅) / 재정-국용(國用) / 사상-유학(儒學)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