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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10권, 고종 10년 11월 3일 무신 2번째기사 1873년 조선 개국(開國) 482년

호조 참판 최익현이 다시 상소문을 올려 만동묘와 서원의 복구 등을 청하다

호조 참판(戶曹參判) 최익현(崔益鉉)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은 일소(馹召)를 받았을 때 외람되이 개인의 사정을 진달하여 전하의 이해를 받으려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방의 공식 인편을 통하여 봉해 올린 글이 길에서 지체되어 제때에 올라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소문을 지을 적에는 신중히 잘하지 못하여 꺼리는 문제들을 건드림으로써 명령에 대해 태만한 죄가 드러났으며 가까이 있는 관리들과 높은 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렀으므로 행장을 갖추고 처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하늘같이 큰 도량으로 포용하며 변변치 않은 말도 받아들이고 조그마한 질책도 없었을 뿐 아니라 관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신은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고 구부려 남 보기 부끄럽습니다. 참으로 뜻밖에도 응당 받아야 할 벌을 요행 면하고 이렇듯 몹시 외람되고 분수에 넘치게 벼슬에 임명되었습니다.

대저 작록이란 나라의 명기(名器)입니다. 만일 적임자를 등용하지 못하면 위로는 임금의 정사에 오점을 가져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심정에 어긋나는 만큼 그로 인하여 미치는 폐해는 끝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가 물러가고 나아가고 하는 것으로 말하면 풍속의 성쇠와 염치의 중대한 의리에 관계되는 바가 이보다 더한 문제가 있는 데야 말할 것이 있습니까? 이러므로 신은 임금의 명령에 따라 응당 벼슬에 나가야 할 것을 나가지 않아도 공손치 못한 것이 되고, 나가지 말아야 할 것을 나가는 것도 역시 공손히 못한 것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오늘날 형편을 놓고 말하면 신은 사실 어리석고 무식한 시골사람입니다. 설사 문을 지키고 야경을 서는 일도 오히려 감당할 수 없거늘 하물며 호조(戶曹)의 관리라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지금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곤궁을 겪고 있는 이때에 신과 같은 사람은 결코 잠시라도 이 벼슬자리에 무턱대고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벼슬에 나가지 못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높은 벼슬을 사양하고 낮은 벼슬에 처하며 부(富)를 사양하고 가난에 처하는 것은 사양하고 받고 하는 데서 지켜야 할 큰 지조입니다. 신이 전날에 승지의 벼슬을 사양하였고 오늘날 순차를 뛰어넘어서 발탁된 벼슬에 도리어 태연스럽게 나가 앉아 있다면 참으로 이른바 만 냥은 사양하고 10만 냥을 차지하는 격이니, 장차 맹자(孟子)의 죄인이 되는 데서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가지 못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신이 연전에 망령되게 시정에 대하여 논하였으니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하였습니다. 그러나 간삭(刊削)된 지 얼마 안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올라갔습니다. 성은이 망극하지만 권종록(權鍾祿)의 상소에 대해서도 좋게 비답을 내리셨으니, 신의 죄에는 공경스럽지 못한 점이 없지 않을 것이므로 마땅히 해당한 처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형편없는 탓으로 하여 명예를 낚는다는 심한 무함이 신의 스승인 전 참판(參判) 이항로(李恒老)에게까지 미쳤으니, 이 어찌 몹시 억울한 노릇이 아닐 수 있습니까? 자신의 죄명도 씻지 못하고 스승이 당한 호된 무함도 해명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신의 한 몸만 단호하게 얼굴을 쳐들고 나갈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

전날에 역말로 불렀을 때 은혜와 총애를 탐내어 경솔하게 행동한 결과 염방(廉防)이 어그러지고 관리들에게 수치를 끼쳤으므로 속으로 자신의 결함을 반성하고 후회해도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넷째 이유입니다.

태평했던 조정에서는 신이 한번 올린 상소로 시비가 터져 나와 대신들이 연명 차자(聯名箚子)를 올리고 삼사(三司)가 연합하여 상소를 올리게 되었으며 전직과 직무 없는 관리로 있던 신하들도 성토가 바야흐로 팽팽해져서 죄악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이것이 신이 감히 나갈 수 없는 다섯째 이유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신이 스스로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신이 형편상 안정할 수 없다는 것을 가엾게 여겨 이미 내린 명령을 속히 철회함으로서 공기(公器)를 중히 하시고 신의 분수를 편안히 여기도록 해 주신다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그리고 신이 이미 나가지도 않으면서 의견도 아뢰지 않으면 충성을 다하는 신하의 의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역시 간하는 말을 받아들이는 전하의 성덕을 받들어 빛내는 도리도 아니라고 봅니다.

지난번 상소 가운데 이미 문제를 끌어내고는 말을 자세하게 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오늘의 의논을 보니, 정변구장 이륜두상(政變舊章彝倫斁喪)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을 규탄하는 칼자루로 삼고 있으니, 신은 거듭 다시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아! 우리나라는 은사(殷師) 이래로 이미 오랑캐의 옛 풍속을 고쳤고 본조(本朝)에 이르러서 여러 열성(列聖)이 잇달아 나오고 뭇 어진 이들이 많이 나타나 일세를 한 범위에 넣어 후손에게 넉넉함을 물려주게 된 것은 모두 하늘의 이치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고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을 배척하여 한 번 다스려지는 운수를 담당한 것이었으니, 세워도 어그러짐이 없고 후세에 가서도 의혹이 없으며 이 세상을 마치도록 잊지 못 할 것입니다. 후세의 임금이나 후세의 백성들이 혹 하나라도 이와 반대로 하면 문물제도는 오랑캐와 같은 형편에 빠지고 사람들은 짐승의 처지에 빠지게 될 것이니 하루도 익히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나라의 일들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말이 불순하여 고치지 않으면 끝이 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지고 심한 것을 보면 황묘(皇廟)를 없애버리니 임금과 신하 사이의 윤리가 썩게 되었고, 서원(書院)을 혁파하니 스승과 생도들 간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後嗣)로 나가니, 부자간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나라의 역적이 죄명을 벗으니 충신의 도리가 구분 없이 혼란되고, 호전(胡錢)을 사용하게 되자 중화(中華)와 오랑캐의 구별이 어지러워졌습니다. 이 몇 가지 조항들은 한 조각이 되어 하늘의 이치와 백성의 윤리는 벌써 씻은 듯이 없어져 더는 남은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토목공사의 원납전(願納錢) 같은 것이 서로 안팎이 되어 백성들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몇 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선대 임금들의 전장을 변경하고 천하의 의리와 윤리가 썩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에 신이 생각건대,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에 대해 논한다면 만동묘(萬東廟)를 복구하지 않아서는 안 되며, 중앙과 지방의 서원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며,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것을 막지 않을 수 없으며, 죄명을 벗겨준 나라의 역적에 대해 추후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으며, 호전을 사용하는 것도 혁파하지 않을 수 없고, 토목공사의 원납전의 경우도 한 시각이나마 그냥 둘 수 없습니다.

이른바 황묘를 복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우리 왕조는 명나라에 대하여 이미 300년 동안을 신하로서 섬겨왔고 임진년(1592)에는 재조(再造)해 주었으니 만대를 두고 잊지 못할 은혜가 있으니, 만대를 두고 반드시 보답해야 할 의리가 있습니다. 옛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은 천지가 뒤바뀌고 상하가 도치된 것을 통탄스럽게 여기면서 무기를 갖추어놓고 밤낮으로 뛰어난 인재를 기다렸습니다. 이때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물고기와 물처럼 계합(契合)하여 빈틈없는 계책을 세워 물리칠 작정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운수가 제한되어 효종이 승하하여 일은 성공을 보지 못하니, 온 나라의 신민이 원통한 마음을 드러내 보일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한 칸의 초가집을 지어놓고 제향을 올렸으니, 이것은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의리로서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었으며 먼 후세에 가서도 영원토록 떳떳이 말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제단을 설치하여 제사의식 절차를 위에서 충분히 갖추어 거행하게 되어서는 이 제단을 설치하는 것으로도 크게 보답하지 못할 듯이 해야 하는데도 번잡하고 중첩되는 혐의를 품는 일이 있습니다. 삼가 열성조의 분부를 상고하여 보면 번잡하고 중첩되게 여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관심을 기울여 중시하면서 관청 토지를 떼어주어 제물을 공급하게 하였고 친히 편액(扁額)을 써주어 드러내 빛내주는 뜻을 보였으며, 인정에 따라 원칙을 세움으로써 먼 후세에 가서도 의혹됨이 없게 하라는 명령까지 있었습니다. 또한 전교하기를, 우리나라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모두 황은의 혜택이 깃들어 있으니 집집마다 시동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들 안 될 것은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선대 임금의 거룩한 뜻이 어찌 그저 제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기만 하고 그것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의리에서만 나온 것이겠습니까?

참으로 밝히기 어려운 것은 하늘의 이치이고 무너지기 쉬운 것은 인심입니다. 백성들의 위에 있는 사람들이 만일 지성으로 장려해서 견문을 넓히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다면 떳떳한 의리를 배양할 수 없고 영원히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우(夏禹)의 사당(祠堂)이나 태백(泰伯)의 사당 같은 것을 놓고 미루어보아 백성들이 슬픔에 잠겨 그러면서 백대를 내려가도 변함없는 것인 경우에는 틀림없이 시골에서 사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은 여기에 더욱 관심을 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훗날에 나온 성인들은 응당 그를 준수하며 고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 열성들이 의리를 바로잡아 전통을 드리운 것이 그와 같이 심원하였고 솔선 모범을 보이면서 조장 발전시켜준 수고가 그와 같이 빛나고 밝기 때문에 온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충성과 의리에 의한 교화에 감화되고 뼈 속에까지 깊이 배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관계로 몇 해 전에 만동묘를 철폐할 때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은 전하의 뜻이 오로지 공경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서러워하며 슬피 울었던 것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심정은 약속하지 않았는데도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유신(儒臣)은 상소를 올려 의리를 진달하였고 각 도의 유생들은 서로 꼬리를 물고 합문(閤門)에 나와 엎드려 상소하였습니다. 이로써 떳떳한 양심이 모두 같고 여러 열성(列聖)들이 배양하여 놓은 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천하의 일에는 어진 사람들이 의견을 내고 많은 선비들이 같은 계(啓)를 하며 온 나라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은 경우에 공론이 아닌 것이 없는 데야 더 말할 것이 있습니까?

전하가 새롭게 정사를 총괄하면서 산만한 것을 정리하고 옳지 못한 것을 없애려고 한다면 공론에 대해서는 더구나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는 조용히 심사숙고하고 시원하게 생각을 바꾸어 빨리 제사를 회복하자는 요청을 허락함으로써 위로는 조종의 유지를 따라 준수하고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의 심정에 부합되게 해 주소서.

만일 난처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어서 혹 말하기를, 중대한 예를 그만두었다가 갑자기 다시 설행한다면 성심으로 공경하는 것에 결함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옛날에 주자는 태묘(太廟)의 예의 개정(改定)을 논하여 말하기를, ‘종묘의 예는 더없이 엄하고 중대한 일이니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놓고 보면, 오늘 황묘의 제사를 회복하는 것은 성덕에 더욱 빛을 드러낼 것이며 누(累)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 비속한 말들이 어찌 전하의 용단을 동요시킬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서원은 흥기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옛날의 교육은 집에는 숙(塾)을 두고 마을에는 상(庠)을 두며 주(州)에는 서(序)를 두고 나라에는 학(學)을 두어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배움에 있어서는 정밀하지 않은 것이 없었기 때문에 위로는 윤리가 밝아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화목하게 지냈다고 봅니다. 지금 아조(我朝)의 성균관(成均館)이 옛날의 국학이며 향교(鄕校)도 옛날의 주서(州序)이고 서원은 옛날의 숙상(塾庠)입니다. 500가(家)에 한 개 ‘상’이 있은 뜻을 미루어 보면 만호나 되는 고을에 겨우 한두 개의 서원을 둔 것은 소략이 매우 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원을 둔 기본 뜻은 학문을 강론하여 도를 밝히는 것이 사실 주된 것이며 시골의 향선생(鄕先生)의 덕을 높이고 공에 보답하려는 일은 그 나머지 일이었습니다. 모의하지 않았는데도 널리 설치하게 되자 겹쳐서 제사지내는 것을 혐의쩍게 생각하여 이미 세운 것까지 함께 폐지하고 천이나 백에 열이나 하나만 남겨둔다면 학교에 관한 옛 제도와는 크게 어그러지며 창건한 본래의 뜻을 크게 잃게 될 것이니, 교육이 해이되고 풍속이 퇴폐해진 것을 이웃 나라에서 듣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명사(明史)》를 고찰하여 보면, 천하의 서원을 철폐한 것이 두 번 보이는데 그에 따라서 왕실이 뒤집혔으니, 이것이 또한 어찌 길상(吉祥)의 일로써 사람들이 원할 만한 일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삼가 바라건대, 속히 이미 내린 명을 환수하여 주소서. 다만 제사를 그만둔 서원에 대해서는 그 인물의 일생을 논하여 덕망도 공로도 없고 음사(淫祠)에 가까운 것은 모두 폐하되, 도덕이나 절의가 한 마을의 스승으로 될 만한 사람은 본향에서 제사를 지내게 하며, 온 나라와 천하의 사표가 될 만한 사람은 주(州)마다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고 곳곳에서 높여 보답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금대(金帶)가 많고 많으며 현송(絃誦)이 넘실거려서 옛날의 번성하던 시기에 못하지 않게 된다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늘 오늘날의 서원은 실효는 없고 폐단만 있다고 하여 마땅히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도 매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자공(子貢)이 희생으로 쓰는 양을 없애려고 하니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너는 양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의를 아낀다.’ 하였습니다. 양이 남아 있으면 예도 회복될 가망이 있는 것이니, 서원을 철폐하면 어찌 학문이 영원히 폐지될 한탄이 없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이 있으면 그에 따르는 정사도 거행되는 것이니 서원을 두면 실제 성과는 자연히 있게 될 것이고 폐단은 자연히 없어질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밝게 살피소서.

이른바 귀신의 우사로 나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천륜(天倫)입니다. 그 낳아준 바를 버리고 남에게 후사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일에서 변고입니다. 옛날에는 오직 종가(宗家)에 후사가 없어야 이렇게 남의 자식으로 대를 잇게 하였는데 후세에 와서는 종가(宗家)고 방계고 먼 친척이고를 따지지 않고 뒤를 잇게 함으로써 그 길이 매우 넓어졌으니 이미 주공(周公)의 뜻에 어긋납니다. 이렇게 널리 만연되다 보니 신주에 후사를 세워주는 풍속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옛날의 예법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귀신의 도리로나 사람의 도리로 보아도 대단히 공손하지 못한 노릇입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종친(宗親)들을 화목하게 대하고 어진 선비들을 내세워주며 끊어진 대를 이어주는 것은 천지와 같이 사물을 살려 주시려는 심정에서 출발한 것이고 화육(化育)을 도우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도리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마치 정조(正祖)가 고 판서(故判書) 유몽인(柳夢寅)을 위하여 제사를 지낼 후손을 세워준 것처럼 한다면 의로운 발기가 만대를 내려갈 법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일을 맡은 신하가 물어 보지도 않고 자신이 사적으로 아는 것에 빙자하여 그릇된 규례를 답습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에 이익을 쫓아 어버이는 잊고 확상(矍相)의 활쏘기에서 쫓겨난 무리들이 때를 타서 부합하여 자기의 부(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고조부(高祖父)를 끌어대었으며 나아가서는 9대 조상이나 10대 조상들까지 끌어다가 기꺼이 대를 잇게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대수가 비게 되면 각 갈래의 귀신들을 억지로 끌어다 맞추어 그 대수를 채우고 자기의 조상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하늘의 이치에 가깝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인정에 편안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끊어진 대를 이어주려는 전하의 본의는 그처럼 훌륭하였지만 봉행하는 신하가 잘 받들지 못하여 마침내 금지옥엽과 같은 후예로 하여금 이익을 보고 의리를 잊어서 못하는 짓이 없어 오랜 역사를 더럽히고 있으니, 애통하지 않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나라의 역적에 대해서는 소급하여 법조문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건대,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윤리는 천하의 대륜(大倫)이며 이 천지 사이에서 도망할 곳이 없는 것입니다. 하늘이 명하고 하늘이 토벌하는 것은 만대의 공의(公儀)이므로 한 번도 사람이 사사로운 뜻으로 옮겨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하께서 등극하신 초기에 속된 무리들이 멋대로 하여 사설(邪說)이 횡행(橫行)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정(邪正)을 묻지 않고 충역(忠逆)도 살피지 않고는 그저 죄명에 걸려든 모든 사람들을 다같이 신설(伸雪)해 주고 화기를 인도하여 맞이하려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대저 화(和)를 말한다면 공평(公平)한 것이며 바른 것입니다. 하늘을 놓고 말하면 비 오고 개고 춥고 더운 것이 각각 때에 알맞은 다음에야 화기롭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을 놓고 말하면 기뻐하고 성내어 슬퍼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모두 절도(節度)에 알맞은 연후에야 화기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비 오고 개고하는 것이 때를 어기거나 기뻐하고 성내는 것이 마땅함을 잃어서 혹 항상 비가 오거나 기쁨에만 치우친다면 사리에 몹시 어그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화평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신설해 주어야 할 것을 신설해 주었다면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설해 주지 말아야 할 것을 신설해 주어도 화기를 이끌어올 수 있습니까? 응당 신설할 것을 신설해 주지 않으면 물론 화기를 손상시키게 되고 벗겨주지 말아야 할 것을 벗겨주어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지금 신설해 준 사람들 중에서 신설해 주어서는 안 될 자들은 특히 나라의 역적들이며 이 나라의 역적들 중에서도 더욱 심한 자는 혼조(昏朝)의 한효순(韓孝純)과 기사년(1569)의 이현일(李玄逸)목내선(睦來善)입니다.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대륜(大倫)을 무너뜨리고 하늘의 의사에 따라 천벌을 주는 공정한 원칙을 어긴다면 떳떳한 윤리와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을 터인데 어떻게 화기를 이끌어다가 성궁(聖躬)에 복을 돌릴 수 있습니까? 이것은 결코 성조(聖朝)의 독단이 아니라 속류들의 사설이 해친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더욱 깊이 생각하고 변별하여 법과 의리로 재단하여 용서할 것은 용서하되 마치 화기로운 바람에 단비가 내리듯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응당 죄를 주어야 할 자들은 죄를 주기를 드센 우레가 울고 된서리가 내리듯이 함으로써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인륜을 세워 화기를 가져올릴 것이며 만물의 운명을 바로잡아 많은 복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하가 더없이 다행하게 되고 만대를 두고 더없이 다행하게 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른바 호전(胡錢)을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신이 삼가 생각하건대 중화(中華)와 오랑캐를 엄하게 구별하며 통분함을 참는 마음을 보존하는 것은 효종(孝宗)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이 전해준 심법(心法)으로써 그 공로는 공자(孔子)주자(朱子)의 공로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정(先正)이 오랑캐들의 물건매매를 금지하였던 일로 보면 호전을 쓰는 것은 역시 옛적 회계에서 신하 노릇하고 첩 노릇한 수치를 잊거나, 음양의 향배(向背)에 관한 구분에 어두운 것이니, 정사에 펴서 일에 폐해를 끼친 것이 이미 심하였습니다. 그리고 신은 전날에 벌써 당백전(當百錢)을 폐지할 것을 청한 바 있는데 오랑캐 돈의 폐해는 당백전보다도 심합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모든 물건들이 유통되지 못하게 하고 오랑캐 돈의 폐해는 모든 물건을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당백전의 폐해는 마치 속이 결리고 아픈 증세와 같아서 배를 씻어 내리는 약을 써서 내려가게 하면 전과 다름없이 나아지지만 오랑캐 돈의 폐해는 설사증과 같아서 원기가 날로 빠지는데 그것이 다 빠지면 죽어버리게 되니 두려워할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의도로 보아도 그렇고 이해관계를 보아도 또한 이러하니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다시 쓰는 문제는 단 하루도 늦출 수 없는 일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유념하여 맑게 살피소서.

이 성헌(成憲)을 변란 시키는 몇 가지 문제는 실로 전하께서 어려서 아직 정사를 도맡아보지 않고 계시던 시기에 생긴 일이니, 모두 전하 자신이 초래시킨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일을 책임진 관리들이 전하의 총명을 가리고 제멋대로 권세를 부린 결과 나라의 기강이 모두 해이되게 되었고 오늘날의 폐해를 초래케 하였습니다. 삼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임금이 권한을 발휘하고 침식을 잊을 정도로 깊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속론과 사설에 이끌리지 말고 가까이 돌거나 권세 있는 관리들에게 속지 말며 기를 부리는 현상이 없게 하고 본래의 마음을 깨끗이 가지며 욕심을 깨끗이 다하여 하늘의 이치가 유행되게 할 것입니다. 정령(政令)을 내려 조치함에 있어서 응당 집행해야 할 것은 사나운 우레나 바람과 같이 드세게 시행하며 응당 제거하여야 할 것은 제거하고 쇠를 끊듯이 단호하게 잘라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주 명령을 내려 조신(朝臣)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고 의혹함이 없는 원칙을 세우고 덕을 수양하는 책임은 어진 스승에게 맡기고 관리들을 등용하고 물리치며 음양을 조화롭게 하는 책임은 정승들에게 맡기고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와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책임은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 맡길 것입니다. 임금을 위하여 토론도 하고 사고도 하며 임금을 바른말로 깨우쳐주는 책임은 유신들에게 맡기며, 군사를 훈련하고 선발하며 외적을 막는 일은 절도사(節度使)들에게 맡기고, 돈과 곡식의 출납과 군사비용에 대해서는 유사(有司)에게 맡기고, 효도가 있고 청렴한 사람을 뽑으며 선비들을 거두어들이는 일은 감사에게 맡길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지위에 있지 않고 다만 종친의 반열에 속하는 사람은 그 지위만 높여주고 후한 녹봉을 줄 것이며 나라의 정사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면서 《중용(中庸)》에서 아홉 가지 의리에 대한 교훈과 직분에서 벗어나 정사를 논하는 데 대한 《논어(論語)》의 경계(警戒)를 어기지 말고 잊지 말아 날로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지도록 하소서. 이미 썩은 윤리를 다시 펴고 위태로운 나라의 형편을 안정시킨다면 백성들은 태평세월을 즐기게 되고 종묘와 사직은 만년의 향사(享祀)를 누릴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가 당요(唐堯)나 우순(虞舜)과 같은 임금이 되면 대소(大小)와 원근 할 것 없이 모두 다행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게 될 것입니다. 미미한 신이 비록 시휘(時諱)에 저촉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하였으니, 천만 번 죽더라도 구구한 광영이 가문에 흘러넘칠 것입니다. 신은 임금을 아끼고 나라를 근심하는 지극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만동묘에 대한 일은 이미 자성(慈聖)의 처분이 있었으니, 오늘 감히 거론할 수 없다."

하였다.


  • 【원본】 14책 1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2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가족-가족(家族) /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금융-화폐(貨幣)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

    戶曹參判崔益鉉疏略:

    伏以臣馹召之下, 猥陳情私, 冀蒙睿燭。 而縣道封章, 自爾淹滯, 未趁登徹。 且復治疏之際, 措辭下字, 專沒審愼, 撞觸忌諱, 罪著逋慢, 忤犯貴近, 嶺海鈇鉞, 束裝竣命。 乃者聖量天涵, 納汙藏疾, 旣無絲毫之譴, 寵以越例之典。 臣仰而愧天, 俯而怍人。 誠不意幸逭當罰, 濫叨匪分, 至此之甚也。 夫爵祿, 國家之名器也。 苟或非其人, 適足以上累君政, 下咈民情, 末流之弊, 及於無窮。 況人臣去就, 其所以關風俗之盛衰, 廉隅之大防, 尤有加於此者乎? 是以臣於君命, 當進而不進, 爲不恭, 不當進而進, 亦爲不恭。 以臣之今日事勢言之, 臣實蠢蠢一鄕闇耳。 雖在抱關、擊柝之任, 猶不可堪承, 況於地部之官? 當此財窮民困之時, 決非如臣身所可須臾冒據。 此臣之不敢進者, 一也。 辭尊居卑, 辭富居貧, 辭受之大節也。 臣於日前, 旣辭承宣之命, 今於超擢, 乃反晏然冒膺, 有若倘來, 則眞所謂辭萬而居十萬, 將不免於孟子之罪人矣。 此, 臣之不敢進者, 二也。 臣於年前, 妄論時政, 宜伏誅譴。 而刊削未久, 卽陞通政。 聖恩雖曰罔極, 而權鍾祿之疏, 亦蒙優批, 臣罪之無將不敬, 固其當勘。 而緣臣無狀, 鈞名沽譽之厚誣, 及於臣師前參判臣李恒老, 則是豈不冤抑之甚乎? 自己之罪名未洗, 父師之厚誣未白, 則臣之一身, 斷無擧顔出脚者, 三也。 乃於前日馹召, 貪變恩寵, 率意妄行, 打乖廉防, 貽羞縉紳, 內省自疚, 悔不可及。 此, 臣之不敢進者, 四也。 太平朝廷, 緣臣一疏, 雌黃層激, 至於大臣聯箚, 三司交章, 以及前銜散官之臣, 聲討方張, 朝著騷擾而罪惡彌彰。 此臣之不敢進者, 五也。 伏乞聖明, 念臣自知之明, 憫臣情勢之難安, 亟爲還收成命, 以重公器, 以安私分, 千萬幸甚。 且念臣身旣不進而言亦不進, 非人臣盡忠之義, 亦非所以對揚我殿下容諫之聖德。 前陳中旣有引而不發者, 存焉。 且見今日議者, 以政變舊章彝倫斁喪八字爲論臣之欛柄。 臣請申言之。 嗚呼! 惟我東方, 自殷師師以來, 已變夷俗之舊。 而逮至本朝, 則列聖繼作, 群賢迭興, 其所以範圍一世, 垂裕後昆, 莫非明天理而正人心, 崇正學而闢異端。 以當一治之數者, 可以建不悖, 俟不惑, 而沒世不忘也。 後王後民, 一或反是, 則衣裳淪於裔戎, 人類陷於禽獸, 不可一日而不講焉者, 審矣。 見今國事, 無處無弊。 名之不正, 言之不順, 非更僕可了。 而第擧尤著且大者, 則皇廟廟之撤, 君臣之倫, 斁矣; 書院之罷, 師生之義, 絶矣; 鬼神出後, 父子之親, 紊矣; 國賊伸雪, 忠道之分, 混矣; 胡錢之用, 華夷之別, 亂矣。 惟此數三條件, 打成一片, 天理民彝, 固已蕩然而無復餘存矣。 加之以土木、願納之類, 相爲表裏而爲殃民禍國之資斧者, 幾年于此矣。 此非變先王之舊章, 斁天下之彝倫而何哉? 故臣竊以爲爲殿下論今日之急務, 則萬東廟, 不可不復矣; 中外書院, 不可不擧矣; 鬼神出後, 不可不禁矣; 國賊伸雪, 不可不追律矣; 胡錢之用, 不可不革罷矣。 至如土木、願納之類, 亦不容一刻之因仍也。 所謂皇廟廟之不可不復者, 臣竊惟我朝之於皇明, 旣三百年臣事, 而壬辰再造, 又有萬世不忘之恩。 故有萬世必報之義。 昔我孝宗大王, 痛天地之飜覆, 憤冠屨之倒置, 弧矢鐵杖, 寤寐豪英。 時則文正公宋時烈, 魚水契合, 謨猷密勿, 以爲修攘之圖。 不幸爲氣數所限, 孝廟上賓, 功緖未就, 擧國臣民冤痛之情, 無地可暴, 故有此一間茅屋之享。 此天理民彝之所不容已, 而永有辭於天下萬世者。 建其壇享之儀, 自上備擧, 則此壇之設, 宜若有無而反有, 猥屑疊重之嫌。 然竊攷列聖朝所敎, 不但不以爲猥疊, 乃反致意引重, 旣劃給官田, 以供粢盛, 又親題扁額, 以示表章, 而有緣情制義, 竢百無疑之敎。 又有曰: "環東土一草一木, 莫非皇恩之所被, 則雖家尸而戶祝, 未爲不可。" 此其聖意, 豈但出於有其擧而無其廢之義而已哉? 誠以難明者, 天理也, 易墜者, 人心也。 爲民上者, 苟不至誠奬褒, 以廣耳目, 則無以培植民彝, 永保無射也。 且虞帝泰伯祠之類推之, 民情之所以嘔吟悲慕, 閱百世而不改者, 必在於山谷私享之地。 故聖意尤眷眷於此矣。 在後聖所宜遵守而不可改也。 嗚呼! 列聖正義垂統之意, 如彼其深遠, 而倡率扶植之勤, 如彼其光顯, 故域內含生, 漸染忠義之敎, 至於淪肌浹髓矣。 以故年前撤享之擧, 群下非不知聖意之出於專心致敬, 而猶且愴恨悲泣, 中外輿情, 不謀而同。 至於三儒臣封章陳義, 諸路章甫相繼伏閤。 此可見秉彝之同然而列聖培養之力, 又不可誣也。 且況天下之事, 未有賢人進言, 多士同聲, 擧國無異辭而非公論者也? 殿下新總大政, 將欲萃其所渙, 泰其所否, 則公論所在, 尤不可咈。 伏乞聖明, 淵然深思, 幡然改圖, 亟許復享之請, 上遵祖宗之遺志, 下副國人之輿情焉。 如或有難之者曰: "莫重之禮, 旣已停撤, 忽又復設, 有欠誠敬"云爾, 則有不然者。 昔朱子論整太廟之禮曰: "宗廟之禮, 至嚴且重, 故有差誤, 不容不改。" 觀於此, 則今日皇廟之復享, 在聖德尤見光鮮, 而不足爲累。 彼淺俗之說, 豈足仰擾宸斷也? 伏願殿下, 留神澄省。 所謂書院之不可不擧者。 臣竊惟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州有序, 國有學, 所以人無不學, 學無不精, 倫明於上而民親於下也。 今我朝之太學, 古之國學也; 鄕校, 古之州序也; 書院, 古之塾·庠也。 以五百家一庠之義推之, 則以萬室之邑, 僅設一二院, 已甚疎略矣。 且設院之本意, 講學明道, 實爲之主, 而鄕先生崇德報功, 乃其餘事。 不謀廣置, 惟嫌疊享, 竝其已擧者而廢之, 存十一於千百, 則深違學校之古制, 大失創建之本情, 而敎弛俗頹, 不可使聞於隣國者也。 謹按《明史》, 毁天下之書院者二見, 而帝室隨而覆之, 則此又豈吉祥所願之事耶? 伏願殿下, 亟圖反汗, 就院享已撤者, 尙論其世, 凡其無德無功而近於淫祠者, 皆聽其廢黜。 而至於道德節義, 足爲一鄕師表者, 卽令本鄕俎享, 足爲一國及天下師表者, 雖州州祠享, 在在崇報, 未爲不可。 而衿帶之莘莘, 絃誦之洋洋, 得以無愧於古昔盛時, 則不亦幸甚乎? 或者每以今日書院之無實效而有流弊爲當撤之論, 而是又有大不然者。 子貢之欲去餼羊也, 夫子曰: "爾愛其羊。 我愛其禮。" 夫羊存而禮猶有可復之望, 則院撤而學豈無永廢之歎乎? 而況其人存其政擧, 則實效不自患於不致, 流弊不自患於不祛乎。 伏願殿下, 留神澄省。 所謂鬼神出後不可不禁者。 臣竊惟父子天倫也。 舍其所生, 後於人者, 人事之變也。 古者, 惟宗子無後, 乃有此例。 後世無問宗、支、疎、戚而繼絶存亡, 其路甚廣, 已非周公之意也。 而至其蔓延之廣, 有神主立後之俗, 是古禮所無據, 求之神理, 參之人道, 至爲不順。 今殿下親親、尙賢、繼絶存亡之擧, 亶出於天地生物之心, 參贊化育之意。 苟處之有道, 如正廟朝爲故判書臣柳夢寅立承祀孫之例, 則義起之例, 不患不爲萬世法程。 而只爲有司之臣, 無稽不詢, 聘其私智, 承襲謬差而擧行之。 於是, 見利忘親, 見絶於矍相之射者, 乘時符合, 挈其父、祖、曾、高, 以及九世十世之祖而甘爲之後。 其間代數或空, 則傅會各派之鬼, 苟充其數, 爲其祖。 此於天理, 近乎否乎? 人情, 安乎否乎? 殿下繼絶之本意, 如此其仁且渥也。 奉行之臣, 不能善承, 遂使金枝玉葉之裔, 見利忘義, 無所不至, 以穢千載之汗靑, 不亦痛哉? 伏願殿下留神澄省。 所謂國賊不可不追律者。 臣竊惟君臣、父子, 天下之大倫也, 無所逃於覆載之間者也。 天命、天討, 萬世之公義, 非一番人私意所可移易者也。 殿下登極之初, 俗類肆志而邪說橫行。 不問邪正, 不察忠逆, 凡繫罪名, 一竝伸雪, 而謂之導迎和氣。 夫和之爲言, 平也正也。 以言乎天, 則雨暘寒暑, 各適其時, 然後方可謂之和矣; 以言乎人, 則喜怒哀樂, 莫不中節, 然後方可謂之和矣。 若雨暘失時, 喜怒失當, 或恒於雨, 或偏於喜, 則乖戾甚矣。 其何以爲平正乎? 是故, 當雪而雪, 固是導迎和氣。 不當雪而雪, 亦是導迎和氣乎? 當雪不雪, 固是減傷和氣。 不當雪而雪, 亦是減傷和氣也。 見今伸雪之中, 其不當者, 尤是國賊, 而國賊之尤者, 如昏朝之孝純、己巳之玄逸·來善是也。 若壞了君臣、父子之大倫, 而失却天命、天討之公義, 則乖常違理, 莫此爲甚, 烏能導迎和氣而歸福聖躬哉? 此決非聖明之所獨斷, 只是俗類之邪說, 害之也。 伏惟深加思辨, 裁以法義, 宥所當宥, 如和風甘雨, 罪所當罪, 如壯雷肅霜, 以正國綱, 以立人紀, 致和以正萬物, 配命以求多福。 天下幸甚, 萬世幸甚。 伏願殿下留神澄省。 所謂胡錢之不可不革罷者。 臣竊惟嚴華夷之辨, 守忍痛之意, 是孝廟宋文正傳授心法, 與同功者也。 觀先正禁貿虜中物貨之事, 則胡錢之用, 亦所以忘會稽臣妾之恥, 昧陰陽向背之分, 而發政害事, 固已甚矣。 且臣於前日, 旣請罷當百, 而胡錢之爲害, 又甚於當百。 當百之害, 百物不通; 胡錢之害, 百物盡竭。 當百之害, 如痞滯之證, 用滌腸之劑, 消下則如故。 胡錢之害, 如泄下之證, 元氣日澌, 澌盡則死, 是不可懼哉? 夫以義理言之, 旣如彼; 以利害言之, 又如此, 則常平之復, 不可一日而少緩也。 伏願殿下留神登省。 凡此數者, 變亂成憲, 實在殿下沖年未專政之日, 則未必皆殿下自致之失也。 特因任事之臣, 壅蔽聰明, 操縱威福, 綱目俱弛, 而致有今日之病弊也。 伏願殿下繼自今, 奮發乾剛, 早寢旰食, 克念克勤, 毋爲俗論邪說所引, 毋爲權貴近習所蔽, 使氣機退聽, 本心澄澈, 人慾淨盡, 天理流行。 至於政令注措之間, 當爲卽爲, 有雷勵風猛之勢, 當去卽去, 有斬釘截鐵之力。 而渙發大號, 警勵朝廷, 立道不惑; 薰陶德性, 責於賢師; 進退百官, 燮理陰陽, 責於大臣; 補闕拾遺, 繩愆糾繆, 責於兩司; 論思輔養, 啓沃聖心, 責於儒臣; 鍊兵選武, 折衝禦侮, 責於帥臣; 出納錢、穀, 需用軍國, 責於有司; 選擧孝廉, 收拾士流, 責於道臣; 若其不在其位, 而惟在親親之列者, 只當尊其位, 厚其祿, 勿使干預國政。 以《中庸》九經之訓, 《魯論》出位論政之戒, 不愆不忘, 日新又新, 敍彝倫於旣斁, 安國勢於將危, 則生民遭泰平之樂, 宗社享萬年之祀。 殿下爲之君, 而大小遠近, 莫不幸甚。 至如微臣, 雖觸時諱犯衆怒, 滅死萬萬, 區區光榮, 溢於門族矣。 臣無任愛君憂國之至。

    批曰: "萬東廟事, 旣有慈聖處分, 則今不敢擧論矣。"


    • 【원본】 14책 1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42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상-유학(儒學)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가족-가족(家族) /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 금융-화폐(貨幣) / 정론-간쟁(諫諍) / 건설-건축(建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