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 홍순목이 농사가 풍년이 들어도 많은 조세 때문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움을 아뢰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호남(湖南)에 갔을 때 농사가 아주 잘된 것을 직접 보았고 근년에 와서 여러 번 풍년이 들었으니, 응당 공사 간에 축적하여 여유가 넉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조세(租稅)와 부역(賦役)이 번거롭고 과중하여 북〔杼〕과 바디〔柚〕가 다 빈 상태입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래도 괜찮지만 저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한 것은 예로부터 근심해온 일이지만 가난한 백성들의 원망이 어떻게 위에 보고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안으로 여러 관청의 서무(庶務)와 밖으로 팔도(八道)의 삼정(三政)의 고질적인 폐단과 바로잡을 수 있는 폐해는, 거문고와 비파를 뜯어 고치듯이 크게 고치면 소득이 크고 작게 고치면 소득도 적을 것입니다.
대개 땅에서 나는 것이 풍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 지키는 것에 늘 잘못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검박하게 생활한다면 한두 섬의 곡식으로도 넉넉할 것이고, 만일 하고 싶은 대로 써버린다면 산더미같이 저축하여도 부족하다는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비유하면 물과 같고 백성은 물고기와 같습니다. 물이 신선하지 않으면 물고기도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먼저 대궐과 관청에서부터 사치를 부리는 버릇을 막고 검박한 기풍을 숭상하도록 힘써 인심을 다스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백성들로 하여금 마치 물고기가 물에 의지하여 즐겁게 노닐면서 살아가듯이 함양시켜 주는 혜택을 크게 받게 하여야 비로소 풍년이 든 태평 세월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힘쓰고 힘쓰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진술한 말이 절실하니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나라에 기강이 있는 것은 마치 사람에게 혈맥(血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혈맥이 통하지 않으면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할 수 없고, 기강이 서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강을 세우려면 먼저 명분을 바로잡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근래에 군정(軍政)에서는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고 거듭 징수하는 일이 많아 부득이 가호(家戶)에 배당하여 군포(軍布)를 거두어 마감해 서울에 바치며, 시골의 관리나 선비에게도 역시 다 마찬가지의 법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 사족(士族)과 유학(儒學)에 종사하는 사람들 중 집안을 부지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군포를 물리지 않고 시골의 우두머리 관리나 장정들의 위에 놓았던 것인데, 지금 일반 백성과 마찬가지로 군적(軍籍)에 올리고 똑같이 취급한다면 저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때가 기회를 틈탈 시기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뜸 ‘나도 이미 군포를 냈고 그들도 군포를 내는 이상 상인(常人)이나 천인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멸시하는가?’라고 한다면, 폐해를 수습하는 본의가 어찌 그와 같은 것이겠습니까?
이 때문에 신이 가는 길가에서 사람들이 수십 수백 명씩 무리지어 소장(訴狀)을 들고 와서 호소하는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이것을 각별히 눌러 놓지 않으면 완악한 버릇은 더욱 자라나고 쇠잔한 양반들은 더욱더 한미해질 것이니, 참으로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상하를 구분해야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으니, 상하를 구분하지 않고 백성들의 뜻을 안정시켰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방금 삼군부(三軍府)를 시켜 관문(關文)을 내어 각별히 신칙하여 군정(軍丁)을 뽑는 일을 거듭 엄하게 하도록 하였습니다. 만일 어리석고 완악한 자들을 바로잡고 경계시키려면 중죄수(重罪囚)는 형벌을 가하여 귀양 보내고 경죄수(輕罪囚)는 징계하면 자연히 개과천선하여 죄를 멀리할 것입니다. 이는 오직 수령의 책임에 달려 있으니, 어찌 날이 가고 달이 가는 데 따라 점차 닦아나갈 방도가 없겠습니까? 신이 아뢴 내용을 팔도(八道)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조정의 법령을 알게 함으로써 명분을 정하고 기강을 세우는 근본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호포(戶布)는 양반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같이 바치는 것이 옛 법이다. 지금 일반 백성들이 호포를 다같이 바친다고 하여 양반을 업신여기는 것은 기강과 크게 관계되는 만큼 각별히 금지하도록 신칙하고 양반들도 스스로 욕되게 처사를 하지 말도록 감영(監營)과 고을에 각각 효유하라."
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경상 감사(慶尙監司) 김세호(金世鎬)에게 지난해에 이미 임기를 더 연장해 주는 특전을 베풀었는데, 그의 명성이 가리울 수 없고 실제 업적이 표창할 만하니 특별히 한 품계를 올려주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처음 수령에 임명되는 사람에 대해 서경(署經)을 거치게 하는 것은 대개 그 사람의 인품과 문벌이 좋은가 나쁜가에 대해 반드시 대간들의 공정한 평가를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수령을 하는 사람 중에서 그 전에 감찰(監察)을 거친 사람은 감찰로 있을 때 이미 서경을 거쳤기 때문에 다시 서경하는 규례는 없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별천(別薦)으로 초사(初仕) 자리에 천거된 사람은 이미 공론에 따라서 천거된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수령에 제수되는 자에 대해서는 감찰의 전례대로 서경을 거치지 않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조의 보고를 보니, ‘임술년(1742)에 환자법〔還上法〕을 폐지한 다음 제반 지출을 마련하여 쓸 방도가 없습니다. 병인년(1746)의 별비미(別備米)와 정묘년(1747)의 사창미(社倉米)가 있어서 환곡을 곡식으로 만들어 취한 이자가 있기는 하지만 몇만 냥에 불과하므로 오히려 일정치 않은 지출을 충당하지 못하니 지금에 와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만 석(石)까지는 대전(代錢)하고 60만 냥은 환곡을 만들어 이자를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기(京畿), 삼남(三南), 관동(關東), 해서(海西) 등 6개 도(道)에 대해서는 별비미와 사창(社倉)의 곡식을 나누어 보내는 것이 있지만 관북(關北)에는 이런 규례가 없습니다. 관서(關西)에서는 환자곡을 나누어주고 이자를 취할 수 있으니 해도(該道)에 관문(關文)을 내어 그것을 환곡으로 만들어 모두 나누어주고 이자를 받되 영원히 탕감해 주지 말게 해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호조의 경비가 지금처럼 몹시 부족한 적은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래도 특별한 변통이 있어야 비로소 조금이나마 곤란한 형편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관서에서 환곡을 만들어 이자를 받아 보태어 쓰는 것 역시 운영해본 지 오랜 일입니다. 이 도의 환곡을 탕감하고 전결세를 내는 제도로 바꾼 이후 나라에서 늘 걱정하고 있기에 병인년과 정묘년 두 해의 별비곡(別備穀)을 다른 도에 두루 나누어주면서도 오히려 거론하지 않은 것은 실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을 버리고 방도를 찾아 다른 것으로 입본(立本)하려 한다면 더는 손댈 곳이 없을 것입니다. 관서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단을 염려해야 한다는 것은 본래 알고 있었으나, 이것은 경비와 관계되는 것이니 사실 부득이한 정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곡식을 사들이는 것으로 규례를 세우는 것은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고, 곡식 이름은 계유년(1753) 별비미라고 하며, 거두어들이고 내어주는 일은 도신(道臣)이 좋은 쪽으로 처리하게 하소서. 그리고 당년(當年)의 이자는 받아낼 수 없으니 특별히 우선 면제해 주고 후년부터 받아냄으로써 실제적인 효과가 있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충청 감사(忠淸監司) 김병시(金炳始)의 보고를 보니, ‘도내(道內)의 각 고을에서 해마다 응당 써야 할 저치미(儲置米)는 5천여 석(石) 정도인데 종전에는 으레 환곡을 가져다 썼습니다. 환곡을 탕감(蕩減)하도록 총수(總數)를 정해 놓은 다음 더는 손을 대어 나눠 줄 곳이 없다고 하여 결전(結錢) 중에서 매 1석마다 3냥씩 대신 돈으로 떼냈으므로 비용이 늘 부족하였는데 고을마다 모두 그러합니다. 그 가운데서 수영(水營)과 연해(沿海) 고을의 백성들에게 미치는 피해는 더욱이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본영(本營)의 공사에 쓰고 남은 돈 중에서 1만 5,000냥을 저치환(儲置還)이라고 이름하고 매 1석에 3냥씩 쳐서 1년전에 나누어 주고 모조(耗條)는 제하고 본색(本色)만 받아들여서 다음해의 비용으로 쓰고 그 다음해에 원래 지출하여야 할 돈도 또한 환곡으로 만들어서 해마다 이렇게 순환시켜 미루어 쓰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본래 곡식으로 나누어 갖추던 것을 지금 대전(代錢)하여 임시변통한다면 궁핍하게 될 것은 형편상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도신이 청한 것이 대개 부득이한 형편에서 나온 만큼 우선 편의에 따른 정사를 하여 아뢴 내용대로 시행하게 하고, 곡물 이름은 ‘정부구관곡(政府句管穀)’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 김기석(金箕錫)의 장계(狀啓)를 보니, ‘관할하고 있는 곡식에 대해 바치는 것을 정지해 주거나 탕감시켜 준 것이 많기 때문에 창고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더할 나위 없이 매우 허술합니다. 이번에 운현궁(雲峴宮)에서 떼어준 돈 8,600냥에다가 또 본영(本營)에서 마련하여 1만 냥을 채웠습니다. 지방 규례대로 환곡을 만들어 절미(折米)하면 5,000석의 쌀로 환산됩니다. 그런데 경성(鏡城) 한 고을의 경우 백성들의 형편에 곤란한 점들이 많으니 지금 우선 관북(關北)의 각 고을들에 분배하여 주고 이자를 받아서 작전(作錢)하게 하며, 2, 3년 뒤 백성들의 형편이 약간 펼 때까지 기다렸다가 경성(鏡城)에 환곡을 만들어놓고 해마다 절반은 나누어주고 절반은 남겨두며 모조(耗條) 없이 개색(改色)하여 묵은 것은 쓰고 햇것을 저축하도록 묘당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한 경내에서 환곡을 만드는 것이 혹 편중된 일이기는 하지만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은 나누어주며 모조 없이 개색하면 틀림없이 큰 폐해는 없을 것이니 아뢴 대로 시행하게 하고, 곡식 이름은 ‘운현궁 별비곡’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이 곡식은 중요한 만큼 잘 보관하라는 내용으로 신칙하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左議政) 강로(姜㳣)가 아뢰기를,
"성학(聖學)을 닦는 것은 오늘날의 급선무입니다. 대체로 제왕의 학문은 옛사람들의 글귀를 여기저기서 따오는 것을 업으로 삼지 않고 오로지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학문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아는 것이 없으면 행할 수 없으며, 아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제 만일 ‘학문을 강론하는 것은 학문을 강론하는 것이고 정사는 정사다.’라고 한다면 학문에 기초하여 정사를 베푸는 원칙이 아닙니다.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태평하게 하는 데는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을 앞세워야 하며, 나라의 운명이 오래 가게 하려면 백성들을 화락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을 바르게 가지지 못하고 나라를 다스린 사람은 없으며 백성들을 화락하게 하지 못하고도 나라의 운명이 오래 가게 한 사람은 없습니다.
임금은 깊은 대궐 안에 있는 만큼 그 마음이 바른가 바르지 못한가 하는 것은 살필 수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이 외면에 드러나는 것은 가리울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을 때나 홀로 지낼 때 응당 경계하여야 할 것은 편안하고 안일하게 지내려는 마음입니다. 전하는 지금 한창 젊은 나이에 혈기가 왕성한 만큼 응당 조심해야 할 문제는 몸을 잘 보호하고 돌보는 일입니다. 조용하고 편안히 지낼 때 화를 내지 않고 몸을 엄숙하게 가지는 데서 응당 막아야 할 것은 요행을 바라는 문이 열리는 현상입니다. 듣고 보는 데 끌리지 않고 모든 일을 바르게 하는 데서 응당 물리쳐야 할 것은 놀잇감입니다. 때에 맞게 백성을 부리고 부세(賦稅)를 적게 거두며 백성을 기르는 정사를 하는 데서 응당 앞세워야 할 것은 품어주고 돌보아주는 혜택을 베푸는 것입니다. 대체로 이 다섯 가지는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 공적인 마음과 사적인 마음을 어떻게 가르고 어떻게 사욕(私欲)을 막고 하늘의 이치를 보존하는가 하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신 한 사람의 말이 아니라 모두 옛날 성현들의 훈계이고 책에 쓰여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 우리 전하께서 날마다 어진 선비들과 관리들을 만나 서로 일을 강구하고 힘써 시행하고 의리로 일을 절제하고 예의로 마음을 절제함으로써 정사와 교화가 훌륭하게 베풀어져 나라와 백성들이 영원히 그 덕을 입는 것을 보게 되는 것, 이것이 신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술한 말이 절실한 만큼 응당 마음에 새겨 두겠다."
하였다. 우의정(右議政) 한계원(韓啓源)이 아뢰기를,
"신이 염치를 무릅쓰고 뻔뻔스럽게 억지로 나온 것이 어찌 조금이나마 명령을 감당할 만한 가망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성의가 얕고 말이 졸렬하여 벼슬에서 체차시키는 은혜를 베풀어줄 것을 바란 것이 도리어 분에 넘치는 칭찬을 받은데다, 지루하고 번거롭게 상소를 올려 거듭 번거롭게 구는 죄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조그마한 자리를 빌어 전하 앞에서 직접 말씀을 올림으로써 전하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편이 낫기 때문입니다.
신은 재주가 우둔하고 학식이 변변치 못한데 어떻게 전하의 교화를 도우며 어떻게 사람들의 기대를 채울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나라에 일이 없고 조정이 한가하다고 하여 신으로 하여금 자리나 채우며 인원수나 채우게 하신다 해도 아무 일도 안하는 재상 역할도 해내기 곤란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중요한 벼슬자리를 오랫동안 비워 두기 어렵고 내린 명령을 갑자기 철회하기 곤란하다고 하여 신을 우선 시험 삼아 시켜보신다고 해도 일을 망치는 불행을 결국 면치 못할 것입니다. 여러 모로 거듭 생각해 보아도 백 가지 일에서 한 가지도 감당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전하의 명은 이미 자주 독촉한 데서 시행되었고 신의 정성도 역시 외람되게 숙배한 데서 표명되었으니, 하루 빨리 신을 해임시킴으로써 나라나 개인 모두 다행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정승의 자리에 인원을 채운 것은 조정으로서는 다행한 일이다. 경이 이미 나왔으니 나는 가만히 앉아 있어도 일이 잘되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다시는 사임을 청하지 말고 나의 미흡한 점을 도와주고 이끌어 주도록 하라. 이것이 내가 두터이 기대하는 바이다."
하였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세균(金世均)이 아뢰기를,
"신이 호조를 책임지고 있으면서 받아들여야 할 쌀 총량을 상고하여 보니, 근래에 와서 종전에 비하면 좀 넉넉하기는 하지만 정상적인 규례를 놓고 따져보면 지출할 몫은 아직도 모자랍니다.
대원군(大院君)이 먼 앞날에 대한 계책을 깊이 생각하여 별비미 10만석을 떼어줌으로써 계유년(1753)부터 10년 동안 해마다 1만 석씩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지금 중앙과 지방의 각 창고들을 보면 거의 다 차서 저장할 데가 없습니다.
신이 명을 받들고 경희궁(慶熙宮)에 나아가 숭정문(崇政門) 밖을 살펴보니 터가 널찍하여 충분히 창고를 지을 만하였습니다. 그리고 행랑 창고와 서로 가까이 있어서 수직(守直)하는 일도 매우 편리합니다. 내년 봄에 가서 여기에 새로 200간(間)을 지어 곡식을 저장하게 하되, 호조와 선혜청(宣惠廳)에서 융통하여 환색(換色)해서 묵은 곡식은 쓰고 햇곡식은 저축하는 것이 좋겠기에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13책 9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02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왕실-경연(經筵) / 농업-농작(農作)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신분-양반(兩班)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금융-식리(殖利) / 군사-병참(兵站)
初四日。 次對。 領議政洪淳穆曰: "臣於向來湖南之行, 目見年穀大登, 比歲屢豐, 宜其公私蓄積, 綽有餘裕。 而賦役繁重, 杼柚俱空, 哿矣富人, 哀此惸獨者。 自昔憂歎, 而窮蔀遺怨, 豈可上達乎? 況今內而百司庶務, 外而八路三政, 痼瘼捄弊, 若琴瑟之更張, 大變則大益, 小變則小益。 蓋地所生者匪不豐, 而人所守者恒有失, 能約其躬, 甔石之蓄亦裕。 苟肆其欲, 海陵之積不足, 自是灼然之理也。 夫財者水也。 民者魚也; 水之不活, 魚亦匪樂。 先自宮府, 禁制奢麗之習, 務崇敦朴之風, 平物情固衆心, 使四民安業, 如魚之依水, 休養生息, 丕冒涵育之澤, 始可曰三登泰平。 伏願懋哉懋哉!"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淳穆曰: "國之有紀綱, 猶人之有血脈, 血脈不通, 人不可以爲人; 紀綱不立, 國不可以爲國。 若欲立紀綱, 先自正名分始。 而近來軍政, 虛額未塡, 疊徵居多, 不得不排戶收布, 磨勘京納。 雖鄕紳韋布, 亦用一切之法。 而窮居士族, 儒業從事, 扶持門戶者, 以不侵軍布, 標置於里魁村丁之上。 今與兵籍編伍, 泯然一色, 則惟彼蠢愚, 謂此時可乘, 輒以爲‘我旣出布, 彼亦出布, 常賤則一也, 彼胡爲侮蔑我乎?’ 捄弊本意, 曷當如此哉? 所以臣之往役沿路, 十百爲群, 抱狀呼訴, 不勝其紛紜。 此而無別般操制, 頑習之滋長, 殘班之寢微, 諒非細故。 《易》曰: ‘辨上下定民志,’上下不辨而民志有定, 未之聞也。 臣方令三軍府發關, 另飭申嚴簽丁之法。 而若夫矯警其愚頑, 重則刑配, 輕則懲勵, 自底遷善而遠辜, 惟在長吏之責, 而豈可無日月漸磨之術乎? 將臣此奏, 行會八道、四都, 俾知朝家先甲之令, 以定名分, 爲立紀綱之本焉。" 敎曰: "戶布大小民同納, 此是古法也。 今此小民之謂以同納戶布而凌蔑者, 大關紀綱, 各別禁飭, 而大民無至自侮事, 營邑各爲曉諭。" 淳穆曰: "嶺伯金世鎬, 昨年已有加瓜之典。 而聲聞莫揜, 實績可酬, 請特加一資。" 允之。 又曰: "初除守令之署經, 蓋人地可否之必待臺閣公議者。 而初倅中曾經監察人, 則監察時已有署經, 故更無署經之例矣。 第念別薦初仕, 旣因公議而剡擧, 則似此之初除守令, 依監察例, 俾勿署經何如?" 允之。 又曰: "卽見戶曹所報, 則‘壬戌罷還之後, 諸般應下, 無以排用。 雖有丙寅別備, 丁卯社倉還作穀耗條, 不過幾萬兩, 猶不當不恒上下, 則不容不及今變通。 限二十萬石代錢, 六十萬兩作還取耗。 而京畿、三南、關東、海西六道, 旣有別備與社倉穀之分送者, 關北曾無此例。 關西則可以分還取耗, 發關該道, 使之作還, 盡分取耗, 永勿蠲蕩’爲辭矣。 度支經費之極絀, 莫此時若也。 而必有別般變通, 始可以稍存紓力, 則作還關西取耗補用, 亦是經紀旣久者也。 此道蕩還歸結以後, 朝家常所軫念, 故丙·丁兩年別備穀, 雖遍排他道, 而猶不擧論者, 良有以焉。 然今若捨此而求之, 從他立本, 更無下手處。 固知西民貽弊, 在所當念。 此乃經用攸關, 則寔出不得已之政。 開糴立規, 依所報施行。 穀名以‘癸酉別備米’爲稱。 至於斂散之節, 令道臣從長措處。 而當年耗條, 不可責徵, 特姑除之, 自再明年, 始爲取捧, 俾圖實效何如?" 允之。 又曰: "卽見忠淸監司金炳始所報, 則‘道內各邑每年應用儲置米, 假量爲五千餘石, 而在前例以還米取用矣。 蕩還定總之後, 更無得著手以排, 結錢中每石三兩式代劃。 故需用常患艱乏, 邑邑皆然。 其中水營及沿邑民之貽害, 尤爲難保。 就本營役餘錢中一萬五千兩, 名以儲置還, 每石三兩式, 前期一年分給, 以本色除耗捧納, 以圖翌年需用。 以其翌年原上下之錢, 又爲作還, 年年如是。 以爲循環推用’爲辭矣。 本是以穀排備者, 今乃代錢彌縫, 則艱乏事勢, 固其然矣。 而道臣所請, 蓋出於不得已也。 姑從權宜之政, 依報施行, 穀名以‘政府句管殼’稱之何如?" 允之。 又曰: "卽見北兵使金箕錫狀啓, 則‘所管殼停蕩居多, 庫無儲留, 疎虞莫甚。 今自雲峴宮有措劃錢八千六百兩, 又自本營辦備, 以充萬兩之數。 以土式作還折米, 爲五千石。 而以若鏡城一邑, 民情多有難便, 今姑分排於關北各邑, 使之取耗作錢, 而待二三年民力稍紓, 作還於鏡城, 每年半分半留, 無耗改色, 用舊蓄新事, 令廟堂稟處’矣。 一境作還, 雖或偏重, 苟是半留半分, 除耗換色, 則必無大弊。 依報施行, 穀名則以‘雲峴宮別備穀’爲稱何如?" 敎曰: "此穀旣有所重, 以十分典守之意, 申飭可也。" 左議政姜㳣曰: "聖學爲今日急先之務。 而蓋帝王之學, 不以尋摘爲事, 專以知行爲貴, 非學則無以知, 非知則無以行, 而非知之艱, 行之惟艱。 今若曰講學自講學、政事自政事、則非所以資於學而措諸政也。 治平以誠正爲先, 祈永以諴小爲本, 末有不正心而能治國者, 亦未有不誠民而能永命者。 人君居深宮之中, 其心之邪正, 若不可得窺, 而符驗之著外, 有不可得揜者。 紛華幽獨之地, 所當戒者, 宴安之畏也; 春秋鼎盛, 血氣方剛, 所當愼者, 保嗇之節也; 從容燕息, 不怒而嚴, 所當杜者, 倖門之啓也; 不緣耳目, 百度惟貞, 所當斥者, 玩好之物也; 時使薄斂, 政在養民, 所當先者, 懷保之惠也。 凡此五者, 皆從吾心上公私界分, 遏欲存理之如何耳。 此非臣一人之言也, 皆古聖賢之垂戒, 而布在方冊。 今我殿下, 日接賢士大夫, 相與講究, 用力行之, 以義制事, 以禮制心, 將見治化郅隆, 民·國永賴。 是臣區區之望也。"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右議政韓啓源曰: "臣冒沒抗顔, 黽勉呈身, 豈或有一半分承當之望而然哉? 誠淺辭拙, 所以祈褫鞶之恩者, 反以紆踰衮之奬。 與其支煩, 重速瀆屑之誅, 無寧仰借方寸之地, 格回咫尺之天故耳。 臣材器惷愚, 學識空疎, 將何以裨補聖化? 將何以稱塞物情也哉? 殿下謂國家暇豫、廊廟優閒, 姑使臣充位備員已也, 則伴食之宰, 亦且難做; 殿下謂重任難於久曠、成命難於遽收, 姑使臣試可乃已也, 則覆餗之災, 終所難免。 千裁萬度, 百無一可矣。 殿下命令已行於敦迫, 賤臣悅誠, 亦伸於叨肅。 伏願早賜斥退, 以幸公私焉。" 敎曰: "鼎席備員, 朝廷之幸也。 卿旣出膺, 予有仰成。 更勿辭巽, 輔導不逮。 是所厚望矣。" 戶曹判書金世均曰: "臣待罪度支, 所考應捧米總, 近雖稍裕於前較之恒式, 應下猶有不敷矣。 大院君深軫經遠之謨, 區劃以別備米十萬石, 將自癸酉, 限十年歲入一萬石。 而顧今內外各倉, 擧皆充衍, 積儲無所。 臣奉承敎意, 進詣慶熙宮, 看審崇政門外, 則基址閒曠, 優可以經營倉舍。 而與月廊之庫相近, 守直之節, 亦甚便宜。 待明春新建二百間於此地, 以爲入峙, 而戶曹、惠廳, 通融換色, 用舊蓄新, 恐好。 故仰達矣。" 允之。
- 【원본】 13책 9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1책 402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왕실-경연(經筵) / 농업-농작(農作) / 인사-선발(選拔) / 군사-군정(軍政) / 군사-군역(軍役) / 신분-양반(兩班) / 인사-임면(任免) / 재정-국용(國用) / 구휼(救恤) / 금융-식리(殖利) / 군사-병참(兵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