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학이 태조와 태종 대왕을 본받아 학문에 힘쓸 것을 요청하다
대신(大臣)과 의정부당상(議政府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이 아뢰기를,
"올해는 바로 임신년(1872)으로서 우리 왕조를 세운 지 여덟 번째 회갑이 되는 것과 관련하여, 태조와 태종의 거룩한 덕과 신령스러운 공적에 대하여 휘호(徽號)를 올려 천양하고 책보(冊寶)를 친히 올렸습니다. 전하께서는 왕위를 계승하고 정전(正殿)을 중건하셨으며 선대의 뜻을 잇고 사업을 계승하는 데서는 선대의 법을 거울로 삼고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두 선대 임금의 큰 업적과 공적에 대해서는 역사책에 이루다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성과를 이룩한 것은, 사실 자주 경연(經筵)에 나아가 이치를 연구하고 지식을 넓히며 생각을 성실하게 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공부를 지극히 한 데서 말미암았을 뿐입니다.
전하께서 요순(堯舜)을 본받고자 하신다면 응당 조종(祖宗)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두 선대 임금께서 학문에 전념하신 일을 가지고 먼저 전하를 위하여 삼가 말씀드리면서 새해의 축사로 삼으려 합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진달한 말이 절실하니 마음에 새겨두겠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연세도 한창 젊으시고 학문도 밝고 고명하신데 강연(講筵)의 명칭을 아직도 진강(進講)이라고 하고 있으니, 사체상 매우 황송합니다. 이제부터는 진강을 일강(日講)이라고 칭하고 강관(講官)도 모두 일강관(日講官)이라고 칭하도록 하비(下批)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하교하기를,
"앞으로는 법강(法講)을 행하고 사이사이 진강을 하게 될 것이니, 아직은 일강이라고 고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김병학이 아뢰기를,
"방금 평안 감사(平安監司) 한계원(韓啓源)이 보고한 것을 보니, ‘강서(江西)의 의창곡(義倉穀) 800석에 대하여 해마다 이자를 받는 것은 이미 정식(定式)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산성의 군량으로 장리(長利)하는 외에 또 이런 명목을 두어 이자 위에 이자를 보태어 해가 갈수록 늘어나게 하는 것은, 그 이자를 제해 놓고 본곡을 절반은 남겨두고 절반은 나누어주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자를 불려서 총량을 늘리는 것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계제가 되기 십상이니 요청한 대로 이자는 떼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의 보고에 의하면, ‘도내의 각읍(各邑)의 삼마청(三馬廳)은 이전부터 내려오는 손실이 매우 많았습니다. 갑자년(1864) 경장(更張) 때에 그 가운데 3분의 2는 견감하고, 그 나머지인 6만 7,800석을 20년에 걸쳐 나누어 바치게 하였는데, 경오년(1870)까지 바친 것이 2만 3,729석이고 바치지 못한 것이 4만 4,071석이나 됩니다. 그런데도 각 역참의 영락한 형편이 전보다 도리어 더 심한 것은 조세 면제를 받은 토지가 모두 나누어 내는 데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온 도가 큰 홍수를 겪어 지정된 몫의 토지가 거의 다 씻기고 묻혔으니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바라건대 전부 탕감하는 은혜를 내려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나라의 재정을 조정하는 문제를 어찌 논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이번의 이 보고는 반드시 부득이한 사세가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탕감해주는 것에 대해 비록 경솔히 논의하기는 곤란하지만,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나누어 바치도록 한 연한을 다시 더 10년간 연기해주어 그들로 하여금 숨을 돌리게 해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 이곳은 북경(北京)으로 왕래하는 통로이므로 뜻밖의 사변에 대한 대비책으로 뒷날을 위한 방략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동안 받아들인 2만 3,729석과 그 밖에 받아들인 것을 돈으로 바꾸어 환곡(還穀)을 세우거나 토지를 사들이거나 간에 조절하여 보충할 계책에 대하여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려 보내라는 뜻으로 행회(行會)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문충공(文忠公) 유성룡(柳成龍)은 일에서나 공적에서, 학문에서나 명망과 덕행에서 세상 사람들의 존중을 받고 있습니다. 조정에서 그의 공로에 대해 보답하는 은전을 베풀어 준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지금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벼슬길에 나아가 녹을 받지 못하여 제사마저 계속해서 지내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이름을 물어서 초사(初仕) 자리에 조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덕산군(德山郡)은 지금 변경 지방의 이력으로 잡아주는 자리인데다가 단독 진(鎭)이니 김해(金海)의 규례대로 별중영장 토포사(別中營將討捕使)로 하비(下批)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북병영(北兵營)에서 5리 정도 떨어진 곳에 독구미진(獨仇味津)이 있는데 이는 바다 어귀의 아주 중요한 요해처입니다. 경성(鏡城)의 보화보(寶化堡)와 삼삼파보(森森坡堡)는 깊은 산골짜기에 처해 있으니, 이 두 보를 없애고 저 독구미진 한 진을 설치하는 것이 변경의 방비를 공고히 하는 계책에 실로 부합됩니다. 지금 해도(該道)의 수신(帥臣)이 장계(狀啓)를 올려 청하였으니, 그대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군수(郡守) 조병윤(趙秉允)은 14촌뻘 되는 조병필(趙秉弼)의 아들 조양하(趙亮夏)를 양자로 삼아 데리고 산 지 지금 이미 10여 년이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양하가 제 손으로 양자 노릇을 그만둔다는 글을 써놓고는 떠나버렸습니다. 인륜이 이미 정해진 뒤에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이런 변고를 일으킨 것은 인륜을 무너뜨리는 문제와 관계되는 것으로서 정말 몹시 놀랍고 증오스러운 일입니다. 형조(刑曹)로 하여금 엄히 형신한 다음 원배(遠配)하게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인륜이 이미 정해진 뒤에 이처럼 전에 없던 변고를 일으켰으니,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림이 어찌 이리도 극도에 이르렀단 말인가? 아뢴 대로 시행하되 물간사전(勿揀赦前)하라."
하였다.
- 【원본】 13책 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85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금융-식리(殖利)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가족-가족(家族) / 사법-행형(行刑)
二十五日。 引見大臣、政府堂上。 領議政金炳學曰: "歲紀在壬, 創垂之舊甲八回, 太祖、太宗聖德神功, 揚徽闡美, 親上顯冊。 殿下誕承丕緖, 重新正衙, 繼志述事, 監于先憲。 竊念兩聖朝大業洪烈, 史不勝書。 而若其實惟繇乎頻御經筵, 以極格致誠正之學耳。 殿下欲法堯·舜, 當法祖宗。 以兩聖朝典學一事, 先爲殿下敬誦之, 用寓新年之祝。" 敎曰: "所陳切實, 當服膺矣。" 炳學曰: "殿下春秋鼎盛, 聖學緝熙, 講號之尙稱進講, 事體悚惶。 自今進講, 稱日講; 講官, 竝以日講官下批何如?" 敎曰: "將行法講, 間有進講, 姑不必以日講改定矣。" 炳學曰: "卽見平安監司韓啓源所報, ‘江西義倉穀八百石逐年取耗, 已有定式。 而城餉糶糴之外, 又有此名目, 耗上添耗, 年增歲加, 莫如除其耗, 以本穀, 半留半分’爲辭矣。 長耗添總, 易致厲民, 依所請使之除耗何如?" 允之。 又啓: "箕伯所報以爲, ‘道內各邑三馬廳流來負逋夥多。 甲子更張時, 蠲減三分二。 其餘六萬七千八百石, 定限二十年排納。 而至庚午, 所捧爲二萬三千七百二十九石, 未捧爲四萬四千七十一石之多。 而各站之凋瘵, 反甚於前者。 以其復結, 盡入於排納。 況今全省, 才經懷襄, 位土率多汰覆, 冀蒙全蕩’爲辭矣。 公貨闊狹, 豈可議到, 而今玆之報, 必有事勢之不獲已而然。 蠲蕩雖難遽議, 未納排年, 更展十年之限, 使之紓力。 而此是通燕之路不虞之備, 則不容不有善後之方略。 其間所捧二萬三千七百二十九石及其餘收捧, 使之作錢, 立還與買土間。 措劃充補之策, 節目修上之意, 行會何如?" 允之。 又曰: "文忠公 柳成龍, 事業勳庸, 學術名德, 爲世推重。 朝家崇報之典, 非不至矣。 而今其祀孫, 未及霑祿, 香火難繼云。 問名初仕調用何如?" 允之。 又曰: "德山郡, 今爲邊地履歷窠, 且爲獨鎭, 依金海例, 別中營將討捕使下批何如?" 允之。 又曰: "北兵營五里許, 有獨仇味津。 此是最要隘口。 而鏡城之寶化、森森坡兩堡, 則深在窮峽。 罷此兩堡, 設彼一鎭, 實合固圉之策矣。 今有該道帥臣狀請, 依施何如?" 允之。 又曰: "前郡守趙秉允, 率養其十四寸秉弼子亮夏爲后, 今至十餘年矣。 亮夏自書罷養文字而去。 大倫旣定之後, 有此民彝之變者, 事係斁敗, 誠極駭惡。 請令秋曹嚴刑遠配。" 敎曰: "大倫已定之後, 有此無前之變, 斁敗民彝, 胡至此極。 依所奏施行, 而勿揀赦前。"
- 【원본】 13책 9권 4장 A면【국편영인본】 1책 385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 / 구휼(救恤) / 금융-식리(殖利)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가족-가족(家族)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