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병선이 더욱 소란을 피우는 것에 대하여 자문을 만들어 북경에 보내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양이(洋夷)들이 소요를 일으킨 데 대하여 중국(中國)에 자문(咨文)을 보내는 것은 근래의 규례이지만, 이번의 전후한 전말에 대해서도 자세히 진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임(文任)들로 하여금 자문을 짓도록 하고, 별도로 자문을 가지고 갈 관리를 사역원(司譯院)으로 하여금 차출(差出)하여 속히 들여 보내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미국 병선(美國兵船)이 소요을 일으킨 상황을 진술한 자문의 대략에,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 박영보(朴永輔)와 강화 진무사(江華鎭撫使) 정기원(鄭岐源) 등 관리들이 금년 4월 11일에 올린 장계(狀啓)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富平都護府使) 이기조(李基祖)의 첩정(牒呈)에, ‘이번 달 3일 이국선(異國船) 5척(隻)이 서남쪽으로부터 부평부의 앞바다에 와서 정박하고 글을 보내왔는데, 자칭 미국 군주가 흠차(欽差)한 대신과 수군 제독(水軍提督)이라고 하고, 협상할 일이 있으므로 고관(高官)을 만나볼 것을 요구하면서 결코 해칠 의도는 없으니 놀라지 말라는 등의 내용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즉시 의정부(議政府)에다 3품의 관원(官員)을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온 수고를 위문하며, 협상할 내용을 대략 알아보도록 칙하(飭下)하였습니다. 의정부의 장계와 차송관(差送官)의 문보(文報) 내용에, ‘문안 총판(文案總辦) 두덕수(杜德綏)라는 자가 나와서 응접사(應接使)에게 하는 말이 이 관리들은 직품이 낮으므로 자기네 나라 공사와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서 거절하고 들여놓지 않았으며, 다시 더 말하지도 않고 항구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관찰사 박영보와 진무사 정기원 등이 올린 치계(馳啓)를 계속하여 받아 보니, ‘이범선(二帆船) 미국배 2척이 손돌목〔孫石項〕으로 들이닥쳤는데, 여기는 우리나라 수역내의 항구로서 중요한 요새지입니다. 병인년(1866)의 난리를 거친 다음부터 군사를 늘리고 방비를 더 엄하게 해서 설사 우리나라의 관청이나 개인의 배라고 하더라도 통행증이 없으면 통과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군사를 실은 이국선이 우리나라에 통지도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고 있는 형편에서 절대로 팔짱을 끼고 앉아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물목을 지키던 장수와 군사들이 포를 쏘아대며 막으니 그들의 배는 곧 물러가서 부평 해상에 정박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생각건대 그림자를 보고 형태를 살피며, 나타난 형적을 가지고 사실을 논한 것은 천하의 응당한 이치로써 여기서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이번에 미국배가 왔을 때 먼저 밀봉한 편지를 띄우고, 이어 글을 보내오면서 걸핏하면 ‘화목하게 지내려고 왔다.’,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생각은 없다.’, ‘놀라지 말라.’느니 하였는데 갖은 말로 가장하는 내용이 다 이러한 말들이고, 예의로써 접대해달라는 것이 특히 그들의 요구였습니다. 상대방이 호의를 가지고 대하면 내가 호의로 응하며, 상대방이 예의를 갖추어 대하면 내가 예의로써 접대하는 것은 사람들의 마음으로서 당연한 일이며, 나라 간의 일반적인 규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화목을 표방하면서도 어찌하여 군사를 싣고 오며 예의로써 접대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어찌하여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단 말입니까?
그들의 생각에 벌써 요새지에는 반드시 방어가 심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의심하지 말라.’, ‘절대로 해칠 뜻은 없다.’는 등의 갖은 말을 잔뜩 늘어놓음으로써 실로 우리의 방비를 완화시키고, 그 틈을 이용하여 감히 들어오자는 간사한 속임수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남의 나라를 짓밟고 멸시하며 무인지경과 같이 보았다는 것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화목하자는 것이 이러하며, 예의로 사귀자는 것이 이렇겠습니까? 그 의도는 사건을 일으키자는데 있으며, 그 계책은 오로지 강제로 조약을 맺자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월 24일에 계속해서 올린 강화 진무사 정기원의 치계에, ‘미국배가 다시 항구로 들어와서 광성진(廣城津)을 습격하고 함락하였는데,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이 힘껏 싸우다가 목숨을 바쳤고, 사망한 군사가 매우 많습니다. 적병은 초지포(草芝浦)에 진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변진(邊鎭) 이렴(李濂)이 밤을 이용하여 습격해서야 그들을 퇴각시켰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이어받은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치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적의 군사가 성과 보루를 파괴하고 모든 것을 불지르고 약탈하여 털끝만큼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또 정찰해보니 그놈들의 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매우 많았으며 다 나라를 배반한 간악한 무리들로서 길안내를 해가지고 온 자들이었습니다. 놀라움과 격분을 금하지 못하여 편지를 보내어 꾸짖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인천 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구완식(具完植)의 첩정에, ‘이연귀(李蓮龜)와 이균학(李筠鶴)은 원래 예수교의 두목이었던 이승훈(李承薰)의 손자인데, 그들의 배가 정박해 있는 바닷가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면서 살피는 것을 현장에서 체포하여 엄격히 신문하니, 그들의 배에 들어가서 기꺼이 길 안내를 하려고 하였다는 등의 사실을 남김없이 실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서둘러 효수(梟首)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였으며, 부평 등 고을에 엄격히 명하여 그 놈들의 배와 다시는 복잡하게 편지질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올해 5월 14일에 계속해서 올린 경기 관찰사 박영보의 차계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 이기조의 첩정에, ‘지난달 27일에 그들의 배에서는 한통의 편지를 보내면서 조정에다 전달해달라고 하였습니다. 편지는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었으나 봉투에 쓴 글은 자못 헷갈리는 것 같으니 어찌 이 나라의 신하로서 이것을 감히 위에다 전달하겠습니까? 그래서 거절해 버렸는데도 그들은 오히려 끈질기게 굴면서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 전달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논쟁하였는데, 그들이 따로 대책을 세워 다른 길을 통해서 전달하겠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이달 7일에 그들의 배 1척이 먼바다 쪽으로 갔다가 13일 날 다시 돌아와 정박하였는데, 그 배가 가고 온 데는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16일에 올린 치보에 첨부된 부평 도호부사의 첩정에, ‘정박하고 있던 여러 미국배들이 본부(本府)에다 한 통의 편지를 보내온 동시에 닻을 올리고 먼바다 쪽으로 가버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러 미국배들이 우리나라에 정박한 것을 조사해보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40여 일입니다. 그들이 지방의 관리, 통역들과 서면으로 논쟁한 것과 떠날 즈음에 남겨둔 편지를 비롯한 상황을 다 진술하게 되는 지금, 귀 예부(禮部)에서 이해하도록 갖추어 보내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번에 초록한 것들을 모아서 함께 첨부해 올리니 진상을 대체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겉으로는 화목을 빙자하여 감언이설로 접어들지만 속에는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으므로 실로 간사하고 음흉한 계책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위문하는 것을 거절한 까닭은 반드시 높은 관리가 서둘러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요충지에서 충돌을 일으켜놓고도 저들이 도리어 애써 방어하였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이와 같이 오만하고 이와 같이 포악한 놈들입니다. 더구나 나라를 배반한 비적 무리들을 숨겨두고 수도로 들어올 길잡이로까지 삼았습니다. 도대체 이와 같이 하고도 스스로 화목을 부르짖으며 예의로 접대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우리의 불신임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그들 자신이 우리가 틀림없이 화해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이제 떠나면서 편지를 남겨 공연히 성을 내며 마구 으름장을 놓은 것은, 저들이 불순한 뜻을 이루지 못하여 스스로 이러한 불만과 원망을 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거짓말을 꾸며 비방함으로써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의혹을 일으키게 하여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가 멀리서 온 사람들을 후하게 접대하지 않는다고 잘못 의심을 사게 한다면 그것도 매우 수치스러운 노릇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가지고 그 나라 공사가 이해관계를 똑똑히 알게 하고 양측에 다 유익한 점이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게 하며, 다시는 사단을 일으키지 말고 각기 아무 일없이 편안히 지내도록 해줄 것을 간절히 원합니다."
하였다.
- 【원본】 12책 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65면
- 【분류】외교-미국(美) / 외교-청(淸) / 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 / 인물(人物) / 외교(外交)
議政府啓: "洋匪滋擾, 移咨中國, 卽近例。 然而此次之前後顚末, 亦不容不詳陳。 令文任撰咨, 別䝴咨官, 令譯院差出, 以爲從速入送何如?" 允之。 歷陳美國兵船滋擾情形咨文略:
本年四月十一日, 京畿觀察使朴永輔、江華鎭撫使鄭岐源等官啓, 備富平都護府使李基祖呈, 稱: "本月初三日, 異國船五隻, 來自西南, 碇住本府海面, 投送文字。 自稱‘美國欽差大臣曁水師提督爲商辦事件, 救見大員, 決無害意, 勿得驚恐’等語, 前來。" 當卽飭下議政府, 派遣三品官員, 慰問涉海勞苦, 略叩商辦事情。 議政府狀啓差送官文報內有稱"文案總辦杜德綏者出, 而應接使謂‘該官等品卑職微, 不可與伊國公使相見’, 拒麾不納, 更不打話, 只顧溯上港口"云云。 續接觀察使朴永輔、鎭撫使鄭岐源等馳啓, "美船二帆者二隻, 突入孫石項。 係是內港要緊關防。 自經丙寅兵擾, 增戌戒嚴, 雖本國公私船隻, 如無路引, 不許放過。 今者, 異國載兵之船, 不由本國知會, 肆意恣行, 萬不可斂手坐視。 隘口鎭守將卒, 鳴砲阻擋, 彼船隨卽退出, 碇留富平海上"等因來。 竊念見影而察形、執迹而論情, 天下之事理, 未有外於是矣。 今此美船之來, 先之以封函, 繼之以投文, 動輒曰‘和睦而來’, 曰‘莫生疑慮’, 曰‘決無害意’, 曰‘勿得驚恐’。 滿口誇張, 皆此等說, 而以禮相待, 尤其所求者也。 彼以好來, 我以好應; 彼以禮來, 我以禮接, 卽人情之固然, 而有國之通例也。 和好爲名, 而曷爲載兵而來, 禮接見求, 而何乃麾斥勞問? 彼之智慮, 已料關隘之必有防範。 所以極口稱‘莫生疑慮’, ‘決無害意’等語, 亶出於緩我備禦、乘虛深入之詭計。 如其不然, 憑陵欺侮, 視人國如無人之境, 尤可見矣。 和好者如是乎? 禮交者如是乎? 意在於啓釁, 計專於刦盟, 斯可知矣。 嗣於四月二十四日江華鎭撫使鄭岐源馳啓, "美舶再入港口, 襲陷廣城津, 中軍魚在淵力戰殞身, 士卒死亡甚多。 賊兵屯聚草芝浦邊, 鎭, 李濂乘夜揜擊, 彼遂退碇"云云等因。 續接京畿觀察使朴永輔馳啓, 備富平都護府使李基祖呈, 稱: "彼兵之殘害城堡, 焚燒刦掠, 錐刀無遺。 且偵得彼船, 甚多我國人物。 總是叛國姦徒之鄕導而來者, 不勝駭憤, 投書詰責"等語。 又據仁川都護府使具完植呈, 稱: "‘有李蓮龜、李筠鶴, 本邪魁承薰之孫, 出沒佇望於彼舶碇留之岸, 現捉嚴訊, 「將入彼船, 甘作鄕導」等情節, 輸服無餘’等語, 前來"亟令梟首警衆, 嚴飭富平等官, 與彼船勿敢再煩文字往復矣。 嗣於本年五月十四日京畿觀察使朴永輔馳啓, 備富平都護府使李基祖呈, 稱: "前月二十七日, 彼舶投送一封文字, 要轉達朝廷。 書中所陳, 未知何語, 而封面題字, 殆類相抗, 是豈本國臣所敢遞上者乎? 業已斥退, 而彼猶斷斷不已, 謂‘將另行設法, 別路寄達’, 故不得已再行文字、往復論辯。 而彼所云‘另行設法、別路寄達’, 未知是何等語也, 理會不得。 而本月初七日, 彼船一隻向外駛去, 十三日還復來泊。 其去、其來, 必有以也。" 等因。 又於十六日, 該觀察使馳啓, 據該府使呈, 稱: "美國碇留諸船, 向本府投送一封文字, 一方擧碇, 向外遠去等因來。" 査美國諸船之碇留敝境, 首尾四十餘日。 其與地方官弁, 往復爭詰, 及臨去, 投留文字, 今於歷陳事狀之日, 不可不仰備。 貴部鑑諒, 玆竝收取抄錄付呈。 情僞情迹, 庶可俯燭。 彼其外託和好, 非無甘言婉辭, 內懷危險, 實多詭智譎計。 所以揮拒勞問, 必欲大官之顚倒相迎也。 衝突關隘, 便謂‘防範之無’, 如我何也? 驕蹇也如彼, 桀驚也如彼, 況復藏匿反國之匪類, 作爲入京之鄕導。 夫如是而自稱和好, 欲望禮接, 不待我之不信, 而彼已早知其必不諧矣。 今其臨去投文, 空肆咆勃, 多發恐嚇, 彼旣不逞厥志, 自應有此慍恨。 而若復誣辭興訕, 以惑聽聞, 使天下各國枉疑敝邦之不能厚待遠人, 則其亦可羞之甚者也。 煩乞將此事狀, 使彼國公使洞悉利害, 明知兩無所益。 更勿搆釁, 各安無事, 萬萬大願。
- 【원본】 12책 8권 32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65면
- 【분류】외교-미국(美) / 외교-청(淸) / 왕실-국왕(國王) / 군사-관방(關防) / 인물(人物) / 외교(外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