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 4월 23일 신축 4번째기사 1868년 조선 개국(開國) 477년

영종에 정박해 있는 서양배에서 대원군에게 편지를 보내오다

영종 첨사(永宗僉使) 신효철(申孝哲)이, ‘22일에 정탐할 목적으로 신의 진영(鎭營)에 있는 토중군(土中軍) 이보능(李輔能)과 교리(校吏) 4, 5인을 먼저 그들의 배가 정박한 곳에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이 먼저 필담으로 관리인지의 여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정상을 탐지하기 위하여 대답하기를, 「아니다. 어째서 묻는가?」하니, 그들이 답하기를, 「당신들이 관리가 아니면 잠깐 올라와서 구경하라.」하면서 사다리를 내려 보내주었기 때문에 그들의 배에 올라갔습니다. 묻기를,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무슨 일로 이곳에 왔는가?」하니, 그들은 대답하지 않고 「생선, 돼지, 닭, 무, 배추 등 음식물을 사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생김새와 배의 연통을 보니 틀림없이 서양 놈이었습니다. 「당신들이 구하는 것은 없다.」고 하자 배에서 내리라고 독촉하였습니다. 배의 모양은 길이가 40파(把)쯤 되고 너비는 10파쯤 되며 배 위에서 왔다갔다하는 그들의 숫자는 100명은 넘었고 배 위에 실은 것은 창과 총 같은 물건들이었다고 합니다. 저들이 정박하여 있는 곳이 신의 진영과 10리 밖에 되지 않는데도 아직도 섬멸하지 못하였으니 황송하기 그지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영종(永宗)에 정박해 있는 서양 배에서 보낸 편지에, 【겉봉에 대원군(大院君) 좌하에게 전하게 할 것이라고 씌어 있었다.】

"삼가 말하건대 남의 무덤을 파는 것은 예의가 없는 행동에 가깝지만 무력을 동원하여 백성들을 도탄 속에 빠뜨리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본래는 여기까지 관을 가져오려고 하였으나 과도한 것 같아서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예의를 중하게 여기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군사와 백성들이 어찌 석회(石灰)를 부술 기계가 없었겠습니까? 절대로 먼 데 사람의 힘이 모자라서 그만두었으리라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귀국의 안위(安危)가 오히려 귀하의 처리에 달려 있으니 만약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 있거든 대관(大官) 1원(員)을 차송(差送)하여 좋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만일 미혹에 빠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나흘이 지나면 먼 데 사람들은 돌아갈 것이니, 지체하지 말 것입니다. 몇 달이 되지 않아서 반드시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우환을 당할 것이니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년 월 일 아리망(亞里莽, allemand) 수군 제독 오페르트〔戴拔 : Oppert, Ernest Jacob〕】 "

하였다. 회답 편지에, 【영종 첨사의 명의로 회답 편지를 써서 보냈다.】

"우리나라 대원군(大院君) 각하는 지극히 공경스럽고 존엄한 위치에 있다. 이런 글을 어떻게 전달하겠는가? 그래서 도로 돌려보낸다. 귀국과 우리나라의 사이에는 애당초 소통이 없었고 또 서로 은혜를 입었거나 원수진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덕산(德山) 묘소에서 저지른 변고야말로 어찌 인간의 도리상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또 방비가 없는 것을 엿보고서 몰래 침입하여 소동을 일으키고 무기를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강탈한 것도 어찌 사리상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런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에 우리나라 신하와 백성들은 단지 힘을 다하여 한마음으로 귀국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것을 다짐할 따름이다.

보내온 편지에서 좋은 대책을 도모하라고 한 것은 바로 사류(邪類)를 위하여 그들을 대신해서 좋은 말로 용서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가? 우리나라는 바로 단군(檀君)기자(箕子)로부터 몇 천 년 동안 이어온 예의의 나라인데, 어찌 이단에 유혹되어 그것을 없애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이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것으로써 보면 우리나라의 비적 무리 가운데 법의 그물에서 빠져나간 자들이 당신네 배로 도망가서 백방으로 부추겨서 그렇게 된 것이다. 남의 부추김을 받아서 이유 없이 소동을 피우는 것은 귀국을 위하여 매우 좋지 못한 일이다.

몇 달 뒤에 설사 전선(戰船)이 온다고 하더라도 우리나라도 방비할 대책이 있다. 대원군 합하가 국정을 확고하게 잡고 있는 데 대해서는 내가 잘 알고 있다. 이제부터 표류해 오는 서양 각 국의 배에 대해서는 먼 곳의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 대우하지 않을 것이니, 다른 말을 하지 말라. 이렇게 알라."

하였다.


  • 【원본】 9책 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87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군사-부방(赴防) / 교통-수운(水運) / 사법-치안(治安) / 역사-전사(前史)

永宗僉使申孝哲以"二十二日偵探次, 臣營土中軍李輔能與校吏四五人, 先爲發送于彼船所住處。 則彼先以筆談問: ‘官人否?’ 云。 故欲探彼情, 答曰: ‘非也, 何故問之?’ 彼答曰: ‘爾非官人, 乍可陞翫。’ 云, 而許以下梯。 故乃攀陞彼船, 問: ‘爾們以何國人, 緣何事到此耶?’ 彼不答, 而‘欲買魚鮮、猪、鷄、菁、菜等食物而來’云。 觀彼貌樣與船之煙桶, 乃是西洋也, 答曰: ‘爾們所求, 果是無乎’云爾, 則因促下船。 船樣則長可爲四十把, 廣可爲十把。 船上往來之彼數, 殆過百名, 船上所載, 則鎗銃等物云。 而彼之留碇處, 距臣營十里之地, 而尙未剿除, 不勝惶悚"啓。

永宗所泊洋船投書 【外封云煩帶至大院君座下】 : 謹言, 掘人之葬, 近於非禮, 勝於動干戈, 陷民塗炭之中, 故不得已行之。 本欲奉柩於此, 想必過度, 故停止耳。 此豈非敬禮的道乎? 軍民豈無破石灰之機械也哉? 萬勿遠人之力, 不及疑訝焉。 然且貴國安危, 尙在尊駕之處斷, 若有爲國家之心, 差送一員大官, 以圖良策如何? 若執迷不決而過四天, 遠人將回棹矣, 勿爲遲滯。 不幾箇月, 必値危國之患也, 以免後悔之地, 千萬幸甚。 【年月日亞里莽水軍督吳拜】

答書 【以永宋僉使名, 修答以送】 : 我國大院君閤下, 卽至敬至嚴之地也。 此等書, 何可轉達乎? 玆以還送。 而貴國, 至於我邦, 初無聲氣之相及, 又無恩怨之相干。 而今番德山墓所之作變, 此豈人理所可忍者乎? 又從以瞰其不備, 潛入惹鬧, 掠取軍器, 刦奪民財, 亦豈事理所可行者乎? 到此地頭, 爲我國臣民者, 只當戮力同心, 誓不與貴國, 共戴一天而已矣。 來書中, 以圖良策云者, 無乃爲邪類緩頰而然邪? 我國卽幾千年禮義之邦, 烏可以沈惑異端, 不之殪殄乎? 此所以衛正斥邪, 有不得不然者也。 由是觀之, 則專由於我國匪類之漏網者, 逃在貴船, 百般慫慂而然。 爲人慫慂, 無端惹鬧, 甚爲貴國不取也。 幾箇月後, 設有兵船出來, 我國亦當有備禦之道。 大院君閤下秉執之嚴確, 僕已詳知矣。 從今以往, 凡於西洋各國漂到之船, 不當待之以柔遠之誼, 毋庸他說。 以此諒之。"


  • 【원본】 9책 5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87면
  •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종친(宗親) / 군사-부방(赴防) / 교통-수운(水運) / 사법-치안(治安)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