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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6월 6일 무자 4번째기사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호조 판서 김병국이 환곡의 폐단에 대한 상소를 올리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김병국(金炳國)이 올린 상소의 대략에,

"당(唐) 나라의 신하 육지(陸贄)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여러 사람들의 심정을 잘 살펴서 매우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먼저 시행하고 매우 싫어하는 것을 먼저 없애야 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아! 신은 생각건대, 오늘날 여러 사람들의 심정에서 매우 싫어하는 것은 환곡(還穀)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의논하여 없앨 수는 없습니다. 5, 6년 이래 조정에서 충실하게 바로잡아 나간 정사를 보면 대체로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이롭게 하는 의리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탕감해준 것이 천만 냥을 헤아리게 되었으니, 비축한 것이 비어서 경비가 부족하게 되고 백성들도 아래에까지 미치는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작년에 내탕금(內帑金)을 내어서 부족한 것을 보태주고 본전을 보존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있는 것을 그만두지 않은 것이겠습니까? 홍수와 가뭄에 쓰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삼가 일전에 전교를 내리신 것을 보건대, 삼남(三南)해서(海西)에 작년 여름에 넉넉하지 못하게 준 수량을 추가로 더 주고, 이어 올해에 바치게 되어 있는 모곡(耗穀)을 면제시켜 주었으니, 보고 듣는 사람들치고 그 누가 칭송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폐단을 구제하는 대책이 일찍이 강구되지 못하고 폐단을 낳는 근원이 옛날의 잘못을 그대로 따르고 있으니, 원대하게 다스리는 큰 계획에는 반드시 결함이 있을 듯합니다. 반드시 법에 따라 나누어주고 거두어들이며 부지런히 맡아 지킨 연후에야 백성과 나라가 그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일찍이 주자(朱子)의 사창 제도(社倉制度)를 의심함이 없이 반드시 시행하고 폐단이 없이 영원히 지켜나갈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여름에는 창고에서 곡식을 받아 겨울이 되면 이자를 더해 쌀로 계산해서 갚는다.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그 이자의 절반을 감면하여 주고 큰 기근이 들었을 때에는 모두 감면시켜 준다. 대체로 14년이 되면 원래의 수량 600석(石)을 관부(官府)에 반환하고 현재 비축되어 있는 쌀 2,100석을 가지고 사창(社倉)을 만들어서 매석마다 모곡을 3승(升)씩 걷는다. 10집을 1갑(甲)으로 삼고 그 가운데에서 1인을 추천하여 수(首)로 삼으며 50집의 경우에는 1인을 추천하여 사수(社首)로 삼는데, 오직 그 관리를 백성들이 맡아 하여서 아전(衙前)들이 농간을 부릴 수 없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백성들도 옛날의 백성들과 같은 것입니다. 마을의 논밭에서 하는 말들을 들어보면 왕왕 사창 제도를 설치하는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이 마침 큰 농사를 맡아보는 직책에 있는데다 별비곡(別備穀)을 또 본조(本曹)에 치부(置簿)해두라는 명이 있었으므로, 이에 여러 사람들이 간절히 하고자 하는 바를 가지고 진술하는 바입니다.

바라건대 신의 이 글을 내려보내어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여러 신하들과 상세히 의논하게 하되, 만약 혹시라도 채택할 만한 것이 있게 되면 속히 여러 고을에 행회(行會)하여, 내려 보낸 돈 150만 냥(兩)을 군읍(郡邑)에 배정하여서 작년 여름에 본전으로 만든 곡식과 한데 합쳐서 사창을 설치하도록 한다면, 앞으로 조정의 혜택이 널리 미쳐서 길이 힘을 입게 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계책이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보전시킬 대책이다. 더구나 주자가 이미 시행했던 법이니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자성(慈聖)께 들어가 아뢰면 반드시 시행하라는 하교를 받게 될 것이다. 처분이 있을 터이니, 경은 그리 알도록 하라."

하였다.


  • 【원본】 8책 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6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전세(田稅)

戶曹判書金炳國疏略:

陸贄告其君曰: "審察群情, 所甚欲者, 先行之, 所甚惡者, 先去之。" 噫! 臣以爲今日群情之所甚惡者, 莫先於還餉。 而未可遽議去之。 自五六年來, 廟朝之上慥慥乎釐正之政者, 大扺附之於損上、益下之義。 畢竟蠲蕩, 以千萬計, 則封樁枵而經費絀, 民亦未蒙下究之澤。 昨年發帑金, 補缺存本, 是豈可已不已也? 資水旱而備陰雨, 於是焉存矣。 伏見日昨傳敎下者, 三南海西, 追贍昨夏不敷之數, 仍除今年當捧之耗, 凡在瞻聆, 孰不欽頌? 而救弊之責, 未能早講, 生弊之源, 自循舊謬, 恐有欠於經遠之宏圖。 必也斂散有法, 典守惟勤然後, 民國當興受其利矣。 臣嘗以朱子社倉之法爲必行無疑、永遵無弊。 其言曰: "夏受粟於倉, 冬則加息, 計米以償。 歉蠲其食之半, 大饑則盡蠲之。 凡十四年, 以元數六百石還府, 見儲米二千一百石, 以爲社倉, 每石上取耗三升。 十家爲甲, 推一人爲首, 五十家則推一人爲社首。 惟其管攝在民, 吏不得操弄, 故民皆便之。" 今之民猶古之民也。 竊聽於閭里、畎畝之言, 往往有盻望於社倉之設。 臣適忝大農之穀, 別備之穀, 又命置籍於臣曹, 乃以群情之所甚欲者, 控陳。 伏乞下臣此章, 令廟堂諸臣爛確, 如或言有可採, 亟令行會于諸省。 以頒下錢一百五十萬兩, 排攢郡邑, 竝與昨夏立本之穀, 創設社倉, 將見朝家之澤廣被而永賴焉。

批曰: "此是有國經遠之謨、生民安保之策。 而況有朱夫子已試之法乎? 入稟慈聖, 承有必行之敎矣。 當有處分, 卿其諒之。"


  • 【원본】 8책 4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6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재정-전세(田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