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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권, 고종 3년 11월 5일 경신 3번째기사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승문원에서 중국 예부의 공문을 보고하다

승문원(承文院)에서 아뢰기를,

"방금 중국 예부(禮部)에서 보내온 자문(咨文)을 보니, ‘동치(同治) 5년(1866) 10월 8일에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에서 아뢴 것에 준거(準據)한 것이다. 신 등이 조선국에서 예부에 보내온 자문 원본을 보니, 대개 영국인 모리슨〔馬力勝〕 등이 강제로 해국(該國)과 통상을 하려고 중국에서 자문이 있었다고 빙자하고, 교민(敎民)과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예수교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였다고 한다. 또한 해국의 장병들은 영국 배에 포로로 잡히고, 영국 배가 포를 쏘아댔기 때문에 마침내 또한 포를 쏘아 반격을 가하여 사람들과 배가 모두 불에 타고 물에 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배 안에 중국북경(北京), 성경(盛京), 광동(廣東), 하문(廈門) 등지의 사람들이 있었으니 스스로 깊이 뉘우친다고 하였다. 또, 서양인들이 해마다 바다를 건너와서는 백성들을 살해하니, 잘 타일러서 물리쳐주며 교역을 하자는 말도 막아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신 등이 조사해 본 데 의하면, 지난해 프랑스의 사신(使臣) 박이덕밀〔拍爾德蜜〕이 해국의 선교사로서 조선에 가서 선교하려고 하여 미리 공문을 보내달라고 청하는 것을 신 등이 거절하고 아울러 가지 말도록 권고하니 곧 의견을 철회하였다.

금년 여름에 영국 사신(使臣) 아례국〔阿禮國〕이 화륜선 1척을 파견하여 조선의 해변 일대에 이르러 계속 점령하고 있겠다고 공문을 보내왔으며, 프랑스 사신 백락내〔伯洛內〕조선이 자신들의 주교와 선교사들을 살해하였으니 프랑스의 병선(兵船)을 일제히 조선으로 집결시켜 얼마동안 그 나라를 점령하고 있겠다는 조회를 보내왔다. 6월 7일에 신의 아문(衙門)에서 두 나라에 회답 공문을 보내 이해시키고 저지하였다.

7월 이후에 영국 사람 모리슨〔馬力勝〕 등이 번갈아 가면서 조선에 정박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통상을 하자는 의도로서 그런 모략을 꾸며온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신의 아문에서〗 그때그때 저지하여, 실로 조선과 통상해도 좋다는 허가를 하지 않았다. 영국 사람이 중국의 자문이 곧 올 것이라고 한 말은 분명히 날조해 낸 것인 만큼 해국의 왕은 염려할 것이 없다.

어제 미국 사신 윌리엄스〔衛廉士 : Williams, S. W.〕의 편지에 의하면, 8월에 두 개의 돛을 단 1척의 배가 고려국에 갔다가 좌초되었는데 고려국의 장선(將船)들이 불사르고 선주와 선원 24인을 붙잡아갔는데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고려에서 혹시 그들을 중국으로 보내줄지 모르니, 봉천부(奉天府)의 관리에게 신칙하여 잘 보살펴 달라고 청하였다.

지금 조선에서 배를 공격해 불태웠다는 것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으나, 단지 한 가지 일로 풍문(風聞)을 판단할 길이 없다. 프랑스가 군사를 일으켜 조선으로 나가려는 것을 일찍이 영국과 미국 두 나라가 저지하였으나, 프랑스는 듣지 않는다고 한다. 조선에서도 분별 있게 처리해야 많은 적을 만드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의 자문(咨文)에서 영국 배를 공격하여 죽인 20명 중에서 중국 사람으로 이름이 불리는 사람이 13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중국 백성은 사사로이 국경을 나가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는 것이 극히 엄함에도 불구하고 적의 배에 가 붙어서 속국을 위협하다가 창과 포에 맞아 죽었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며 조선에서는 잘못이 없으니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시끄럽게 되지 않도록 타일러 이해시켜 달라고 한 것은 프랑스가 군사 행동을 하겠다는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만큼 신의 아문에서 그때그때 사건에 따라 힘을 다해 이해를 시켰다. 이 때문에 프랑스 사신이 조선의 바다를 막아버리겠다고 한 조회에 대해서도 갑자기 싸움을 벌이지 말아 두 나라의 백성들의 생명을 보호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가 군사 행동을 한 이후부터는 전에 선교나 하겠다고 요구하던 분위기와는 같지 않을 것이며 영국과 미국도 전번에는 권고하여 저지시켰지만, 지난번에 또 조선과 불화를 일으켰으니 통상을 하자는 말이 더욱더 강하게 나올 형편일 뿐만 아니라 이미 군사 행동을 했으니 화해를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배상금 문제가 나올 것이다.

세 나라가 점점 협력하려는 형세로서 반드시 통상과 선교 및 배상하는 일로 서로 따지고 들 것인데, 지금 조선에서는 통상과 선교(宣敎)를 전연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상 등의 절차에 미리 생각해두어 타결되도록 힘쓰고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해국은 마음을 다해서 대책을 세워서 분별 있게 처리하여 만전을 기하고, 조금도 허술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자문과는 다르니, 회답 자문을 지어 내어 파발 편으로 보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7책 3권 8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8면
  • 【분류】
    외교-프랑스[法] / 외교-영국(英) / 외교-미국(美) / 외교-야(野) / 사상-서학(西學)

    承文院啓: "卽見中國禮部咨文, 以爲: ‘同治五年十月初八日, 總理各國事務衙門奏曰:

    臣等閱看朝鮮國抵禮部原咨, 蓋以「英國馬力勝等, 强欲通商該國, 藉稱中國曾有咨文, 又竝詰責殺害敎民敎師, 不願習敎。」 且「該國將弁, 被擄船。 而船開砲, 遂亦開砲還擊, 人船均被焚溺。 船中有中國 北京盛京廣東廈門等處人, 深自引咎。」 且言「洋人, 頻年泛海, 殺害人民, 請爲開諭排除, 杜絶交易」之說。 臣等査上年使(拍爾德密)〔拍爾德蜜〕 , 以該國敎士, 欲往朝鮮傳敎, 請先行文, 臣等拒絶, 竝勸其毋往, 卽經罷議。 本年夏間, 使阿禮國照稱, 「擬派輪船一隻, 至朝鮮海」, 繼據使伯洛內照稱, 「朝鮮法國主敎傳敎士人等殺害, 法國兵船, 一日齋集朝鮮, 暫取其國等情。」 六月初七日, 臣衙門照復兩國, 排解阻止矣。 七月以後, 馬力勝等, 迭泊朝鮮, 志在通商, 蓄謀已久。 然只有隨時阻止, 寔無準令, 朝鮮通商之文。 人所云, 「中國咨文, 躡後發配」, 顯係捏造, 該國王無庸傾慮。 昨據使衛廉士函稱, 「八月兩桅船一隻, 在高麗擱淺。 高麗將船燒燬, 捉去船主水手等二十四人, 未知生死。 高麗或送至中國, 請飭奉天府官撫恤」云。 今朝鮮所稱擊燬等船, 未知是否, 另自一事, 無從懸揣風聞。 法國興兵, 前往朝鮮, 兩國, 曾經阻止, 法不聽從。 朝鮮亦當分別核辨, 庶免多樹之敵至。 原咨所稱「擊斃船人等二十名內, 有稱中國人姓名十三人」云者, 中國人民, 私出邊境, 法禁綦嚴, 甘附敵船, 脅喝屬國, 斃于槍砲。 無由分別, 咎由自取, 朝鮮竝無不合, 毋庸引咎開諭。 排解一節, 法國用兵, 明知非空言, 在臣衙門, 不得不隨時隨事, 力爲排解。 是以於使堵塞朝鮮海之照會, 答以毋庸遽行征戰, 以全兩國民命。 然自其用兵之後, 比前求傳敎, 局面不同。 雖前有勸阻, 頃又與朝鮮構釁通商之說, 勢將愈堅。 旣經用兵, 如欲講解, 必有兵費之說。 三國駸駸有相合之勢, 必以通商、傳敎、賠償之事相責。 今朝鮮以通商、傳敎, 深不可行者, 是亦曾慮及於賠償等節, 務須妥爲處置, 不可稍有大意。 該國仍當悉心籌畫, 分別核辨, 計出萬全, 不可稍涉疎虞可也。

    云’矣。 此與例啓有異。 撰出回咨, 撥送何如?" 允之。


    • 【원본】 7책 3권 87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8면
    • 【분류】
      외교-프랑스[法] / 외교-영국(英) / 외교-미국(美) / 외교-야(野) / 사상-서학(西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