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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 3권, 고종 3년 10월 15일 경자 3번째기사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이양선의 문제로 일본에 편지를 보내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양 배의 상황을 이미 북경(北京)에 자문(咨文)으로 보고하였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일본은 강화 조약을 맺은 이후로 변경의 상황에 관계되는 문제에 대해 서로 통보하였습니다. 예전 경신년(1860)에는 서양 교인(敎人)들을 철저히 막는 일을 대마 도주(對馬島主)가 동무(東武)의 뜻에 따라 편지로 우리나라에 알려주었습니다.

지금 이 서양 오랑캐들이 바람처럼 순식간에 출몰하니 그들의 상황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통영(統營)의 외양(外洋)에서 출몰하는 배들이 일본에 사단을 끼치는 일이 꼭 없으리라고는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웃 나라와 사이좋게 지내 방도에 있어서는 일에 앞서 통지하는 것이 합당할 듯합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 요사이 겪은 일의 전말을 자세히 적어 동래에 있는 왜관(倭館)에 서계(書契)를 작성하여 보내며 이어 동무에게 전달되게 함으로써 변방 방어를 튼튼히 하고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두터이 가지려는 뜻을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예조 참의(禮曹參議) 임면호(任冕鎬)가 일본국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편안히 지낸다니 위안되고 안심된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와 귀국은 좋은 관계를 맺어온 지 300년 동안에 무릇 변방 방어와 관련한 정사나 변경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서로 알려주지 않은 적이 없는데, 여기에서 그 방도를 내놓는 이유는 경신년(1860)에 귀국의 서계(書契)의 경우는 바로 옛 조약을 거듭 밝히며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더욱 두텁게 하는 것이다.

서양의 영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들이 멀리 겹겹이 가로놓인 넓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와서 무역할 것을 청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며 끝내 무력을 서로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해가 점점 더 참혹해지고 있다.

올봄에 있었던 사건에 관련된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라는 자들은 높은 관리로서 임금 가까이에 있는 반열에 있기도 하였고 대대로 관리 노릇을 한 후손들로서 사교(邪敎)를 전습하며 비적 무리들과 결탁하여 암암리에 서양인들을 끌어들여서 교주(敎主)로 받들어 모셨다. 이미 오래 전에 물들어 갈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는데, 간사한 자취가 수색 체포할 때에 발각되어 고약한 무리들이 다같이 법에 의하여 처단당하였다. 여름과 가을 사이에 1척의 서양 배가 먼저 호서(湖西)해미현(海美縣) 앞바다에 정박하였고 다음에는 경기(京畿)강화부(江華府) 근처에 와서 정박해 있으면서 쉴새 없이 왔다갔다하며 무역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엄한 말로 굳게 거절하고 끝끝내 들어주지 않자 저들은 포기하고 물러갔었다.

또 이러한 때에 서양 배 1척이 서해로부터 평양부(平壤府) 양각도(羊角島)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고 사람들을 살해하고 가축들을 죽였다. 그래서 도신(道臣)이 화공(火攻) 전술을 써서 모두 무찔렀다.

8월 16일에 2척의 서양 배가 남쪽 바다에서 곧바로 경강(京江)에 들어와 사흘 밤을 묵고 돌아갔는데, 말이 서로 통하지 않아 사정도 알 수 없었고 거동도 따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제멋대로 오가다가 9월 6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 30여 척이 또 경기 일대에 도착하여 혹 부평부(富平府) 앞바다에 정박하기도 하고 혹은 강화부갑곶진(甲串津)으로 곧바로 향하여 망루(望樓)를 파괴하고 공해(公廨)를 불태워 버리고 백성들을 살해하고 소와 가축을 약탈하였으며 사고(史庫)에 있는 책들을 배로 모두 약탈하여 실어갔다.

우리는 순무사(巡撫使) 이경하(李景夏)로 하여금 도성을 엄히 방어하게 하였고,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통진부(通津府)에, 좌선봉장(左先鋒將) 정지현(鄭志鉉)제물진(濟物鎭)에, 우선봉장(右先鋒將) 김선필(金善弼)부평부(富平府)에, 유격장(遊擊將) 한성근(韓聖根)문수산성(文殊山城)에, 유격장 양헌수(梁憲洙)정족산성(鼎足山城)에, 유격장 이기조(李基祖)광성진(廣城鎭)에, 총융사(總戎使) 신관호(申觀浩)와 소모사(召募使) 이원희(李元熙)양화진(楊花津)에, 소모사 정규응(鄭圭應)서강(西江) 어귀에, 어영청 중군(御營廳中軍) 권용(權)과 경기 중군 백낙현(白樂賢)행주(幸州) 어귀에, 양주 목사(楊州牧使) 임한수(林翰洙)여현(礪峴) 어귀에, 초토사(招討使) 한응필(韓應弼)연안부(延安府)에, 방어사(防禦使) 유환(柳晥)파주목(坡州牧)에, 도호사(都護使) 신숙(申橚)장단부(長湍府)에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저들에게 격문을 보내 싸움을 청하고 약속한 날짜에 보니, 적들은 그 무리를 모두 모아서 포구에 집결해 있으면서 서로 맞붙어 싸움할 생각은 없이 우리 연해와 포구의 배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간간이 혹은 몰래 문수산성, 정족산성 등 여러 성을 습격하였는데 번번이 성을 지키는 장수들에 의해 격퇴당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 무기와 의장(儀狀)들을 수리하고 벼리기도 하고 전선(戰船)을 수리하였으며, 또 삼로(三路)의 수군(水軍)으로 하여금 힘을 합쳐 공격하게 하였는데 10월 12일에 크고 작은 서양 배들은 이어 즉시 무리를 거두어 외양(外洋)을 향해 물러갔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적의 침입을 받은 대략적인 내용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오랫동안 태평스럽게 지내 군정(軍政)이 해이해지고 군사 방비가 허술해져 장구한 계책을 써서 놈들을 제압하여 하찮은 배들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비록 2, 3차 싸움에서 이기고 다소나마 적들을 섬멸하기는 했지만 진실로 무력을 크게 떨쳐 멀리에서 온 저들을 두렵게 만들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오랑캐들의 사정도 헤아릴 수 없고 그들이 수시로 들락날락하고 있었으므로 목전의 다급함을 늦추고 앞으로의 근심거리를 영원히 없앨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일에 대해 사실에 근거해서 알려주어야 할 것이 있다. 우리나라 동남쪽의 해변으로 말하자면 귀국의 여러 주(州)들의 해변과 서로 소와 말도 환히 변별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놓여 있으며, 두 나라 경계에서는 닭 우는 소리와 개 짖는 소리도 거의 들리는 가까운 거리이다. 여름과 가을에서부터 요사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돛단배들이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향해 갔는데 그 배들은 운도(雲島)와 연도(烟島) 사이에서 출몰하고 있어 변경을 지키고 있는 관리들의 급보가 매일 오고 있으니, 저 오랑캐들이 장차 사단을 일으키려는 것인데 귀국에서 방비를 갖추고 변란에 대처하고 있는가? 모르겠거니와 귀국에서 이미 군사 방비를 갖추었으므로 저 오랑캐 놈들이 날뛰다 패배하였는가? 또 저들 쪽에서 방자하고 횡포하게 날뛰면서 몰래 기회를 노리며 이를 갈고 혀를 날름거리면서 침략할 틈을 엿보고 있는데도 귀국에서 혹 그 교묘하고 음흉한 정상을 알아차려 그 기세를 미리 꺾지 못한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에서는 이것을 몹시 걱정하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이에 전말을 들어 써 보내니 위에서 쓴 사유를 동무에게 전달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살펴주기를 바라며 이만 줄인다."

하였다.


  • 【원본】 7책 3권 7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44면
  • 【분류】
    외교-영국(英) / 외교-프랑스[法] / 외교-왜(倭) / 사법-치안(治安)

又啓: "向以洋舶情形, 已有咨報於北京。 而第念日本自講和以後, 凡事係邊情者, 互相通報。 曾於庚申, 以緊防洋敎事, 島主因東武意, 書通我邦矣。 今此洋夷之猋往倐來, 情狀叵測。 且統營外洋出沒之舶, 有事於日本, 難保必無。 其在交好之道, 似合先事通知。 亦以我國近日所經, 詳述顚末, 修書契送于館。 仍今轉致東武, 以示警邊防敦隣好何如?" 允之。禮曹參議任冕鎬抵于日本國 對馬州太守書:

啓居珍毖, 慰溯竝摯。 竊以敝邦與貴國, 講信修好, 垂三百年。 凡係邊圉之政, 疆場之事, 未有不陳述因由。 開示方略, 如庚申貴國書契者, 卽所以申舊約而敦隣誼也。 西洋諸國, 遠涉重溟, 來請交易於敝邦者, 不止一再。 而竟至於兵刃相加, 則其毒愈憯矣。 本年春間, 有南鍾三洪鳳周者, 或簪紳邇列, 或衣冠遺裔, 傳習邪敎, 糾結匪類, 潛引洋人, 奉爲敎主。 薰染旣久, 煽惑益廣奸跡掀發於緝捕之際, 悖黨駢就於刑辟之下。 夏秋間洋舶一艘, 先泊於湖西 海美縣前洋, 次泊於畿內 江華府近地, 乍往旋來, 懇請通貨。 弊邦嚴辭牢拒, 終不聽允, 則彼乃缺望而退。 又於此際, 洋舶一艘, 自西海轉入平壤府 羊角島, 剽掠商貨, 殺害人畜。 道臣設計火攻, 盡行勦滅。 八月十六日, 洋舶二艘, 自南洋直入京江, 三宿而返。 言語不通, 情款相阻, 行止莫詰, 朅來自恣。 乃於九月初六日, 洋舶大小三十餘艘, 又到京畿, 或留碇於富平府前洋, 或直向江華府 甲串津, 打破樓櫓, 焚燬廨宇, 殺害人民, 攘奪牛畜, 宬籍輓漕, 盡爲剽刦。 著巡撫使李景夏, 開營戒嚴於輦下。 先鋒中軍李容熙, 陣于通津府; 左先鋒將鄭志鉉, 陣于濟物鎭; 右先鋒將金善弼, 陣于富平府; 遊擊將韓聖根, 陣于文殊山城; 遊擊將梁憲洙, 陣于鼎足山城; 遊擊將李基祖, 陣于廣城鎭; 總戎使申觀浩、召募使李元熙, 陣于楊花津; 召募使鄭圭應, 陣于西江隘口; 御營中軍 京畿中軍白樂賢, 陣于幸州隘口; 楊州牧使林翰洙, 陣于礪峴隘口; 招討使韓應弼, 陣于延安府; 防禦使柳晥, 陣于坡州牧; 都護使申橚, 陣于長湍府。 移檄請戰, 期日相見, 賊盡竝其衆, 聚保港汊, 無意交鋒, 沿浦舟楫, 沒數燒燼, 間或潛襲文殊鼎足諸城, 輒被守將擊郤。 敝邦敿敹器仗, 修繕戰艦, 又令三路舟師, 合勢進攻。 十月十二日, 大小洋舶, 仍卽捲還, 退向外洋而去。 此爲敝邦被兵之大略也。 敝邦昇平日久, 戎政弛而武備疎, 未能長計制勝, 使片帆不還。 則雖有數三克捷, 多少勦殪, 固不足爲耀威武而讋遠人。 且夷情叵測, 進退無常。 未可以目下之紓急, 永蠲方來之憂虞也。 又有一事之不容不據實相報者。 敝邦之瀕海東南, 與貴國諸州, 涯涘可辨牛馬, 境界殆聞鷄狗。 而自夏秋至于近日, 無數帆檣, 自西而南者, 出沒於雲烟島嶼之間。 封疆之臣, 飛報日至。 未知彼夷, 將欲起釁。 而貴國設備而待變歟? 未知貴國, 已與構兵。 而彼夷左次而敗衂歟? 又未知彼方, 恣雎潛伺, 磨牙鼓吻。 而貴國或未覺悟其閃祕之情狀, 逆折其猋發之氣勢歟? 敝邦用是憂慮, 不卬自恤。 玆以控擧顚末, 修牘展布, 幸將右項事由。 轉達東武, 是所深望。 統惟崇照肅此不備。


  • 【원본】 7책 3권 79장 B면【국편영인본】 1책 244면
  • 【분류】
    외교-영국(英) / 외교-프랑스[法] / 외교-왜(倭)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