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무영에서 강화도의 피해 상황을 보고하다
순무영(巡撫營)에서 아뢰기를,
"선봉 중군(先鋒中軍) 이용희(李容熙)가, ‘이달 5일 해시(亥時)에 강화도(江華島)에 검열하러 나갔던 별군관(別軍官) 박정화(朴鼎和)와 신석범(申錫範)이 돌아와서 보고한 데 의하면 놈들에 의해 약탈과 파괴를 당한 참혹한 정상이 한눈에 가득 들어왔다고 합니다. 내성(內城)에서는 장녕전(長寧殿)과 만령전(萬寧殿), 객사(客舍)와 공해(公廨)가 다 불에 타 없어지고 아정당(衙政堂)은 단지 세 칸만 남았으며 아전(衙前)들이 일보는 건물은 온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향교(鄕校), 충렬사(忠烈祠), 열무당(閱武堂), 중영(中營)과 포청(捕廳)은 온전하였으며 민가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진 호수가 절반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동문(東門)과 서문(西門)은 온전하였고 남문(南門)은 문짝과 현판, 여성(女城)이 모두 파괴되었으며 성위의 좌우에 우리나라 창 12병(柄)을 나누어 벌려놓았다고 합니다. 외성(外城)에는 진해루(鎭海樓) 안의 민가 한 집이 불에 타고 진해사(鎭海寺)와 전 금위영(禁衛營) 창고는 온전하였으며 훈련원(訓練院)과 어영청(御營廳)의 두 창고는 불에 타 없어졌고 인정종(人定鍾)은 외성 안 길 위에 운반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대완구포 6좌(座)를 갑곶포 나룻가에 비치하고 우리나라의 총통 4좌는 외성 안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전날 운반해가다가 놈들에게 빼앗겼던 쌀로써 갑곶포(甲串浦)의 민가에 보관해두고 있던 쌀을 어림짐작하니 약 400여 석(石) 되었습니다. 운반선 1척에 실어서 언덕위에 가져다 놓았으며, 또 남아있는 200석에 대해서는 인가들도 텅텅 비어 있고 날도 또한 저물었기 때문에 미처 수량을 따져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군 초관(領軍哨官) 추정욱(秋正旭)으로 하여금 즉시 수습해 가지고 수직(守直)을 서도록 하였습니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600여 석의 쌀은 세미(稅米)와 관계되니 의정부(議政府)에서 품처(稟處)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7책 3권 7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금화(禁火)
巡撫營啓: "卽見先鋒中軍李容熙所報, 則‘今初五日亥時, 沁都摘奸別軍官朴鼎和、申錫範回告: 「經刦敗局, 滿目慘痛。 而內城則長寧殿、萬寧殿、客舍及公廨, 竝入灰燼。 貳衙政堂, 只餘三間。 作廳則完。 校宮忠烈祠、閱武堂、中營及捕廳完, 民戶則不可一一計數。 而灰燼過半, 東西門完, 南門門隻及懸板女城, 皆爲毁破。 城上左右, 分列我國槍十二柄。 外城則鎭海樓內, 民家一戶被燒。 鎭海寺前禁營庫完。 訓局、御營兩庫燒燼。 人定鐘運到于外城內路上。 我國大碗口六座, 落在於甲串浦邊。 我國銃筒四座, 散在於外城內。 向日見奪漕運米之遺在甲串浦之民家者, 假量爲四百餘石, 而漕船一隻掛岸上。 又有二百石, 而人家空虛, 日勢且暮, 未及照數。 故使領軍哨官秋正旭, 卽爲收拾守直。」云’矣。 六百餘石之米, 係是稅穀, 令廟堂稟處何如?" 允之。
- 【원본】 7책 3권 7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42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군사-금화(禁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