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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실록3권, 고종 3년 9월 8일 갑자 3번째기사 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이양선이 강화도에 침범하였으므로 장녕전의 어진을 백련사에 임시로 모시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이인기(李寅夔)가 올린 장계(狀啓)에,

"이달 7일 미시(未時)에 저들이 동쪽 성에 돌입하여 총을 마구 쏘아대는 바람에 우리 쪽 사람 중에 부상당했거나 죽은 사람이 2인입니다. 파수군(把守軍)들이 저지하지 못하여 추악한 무리들은 성을 파괴하고 넘어 들어와 온 성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본 후에 다시 나가 버렸습니다. 일이 벌써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급하게 되었습니다. 장녕전(長寧殿)에 모셔 둔 두 어진(御眞)을 임시로 본 부(府) 서문(西門) 밖에 있는 백련사(白蓮寺)에 옮겨 놓았습니다.

신이 관방(關防)에 있으면서 방어를 잘 하지 못하여 저 추악한 무리들로 하여금 이렇듯 창궐하게 하였으니, 두렵고 황송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

하였다. 또 ‘이양선(異樣船)에서 육지에 올라 산에 오른 경로는 이미 치계(馳啓)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들의 배가 그냥 정박하여 있으면서 밤을 새울 의향이 있는 듯하기에 본 부 경력(經歷) 김재헌(金在獻)을 문정(問情)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그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문정을 하기 위해 나가는 길인데 저들 수십 명이 중도에서 길을 막아서며 당현(堂峴) 고개의 길 옆에 있는 시골집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문정하려는 사유를 글로 써서 보여 주었더니 저들은 손을 내저으며 모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갑곶진(甲串津) 해문(海門)에 있는 농가로 끌고 갔는데 저들 수백 명이 창과 총을 각각 가지고 모여들어서는 쭉 늘어섰습니다. 그리하여 글로 써서 묻기를, 『당신들이 수만 리 풍파를 헤치고 왔는데 앓는 사람은 없습니까?』라고 하니, 저들은 없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글로 써서 보이기를, 『당신들은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는데 무슨 일 때문에 여기까지 왔습니까?』라고 하였으나 저들은 또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자신이 쓴 글을 우리의 문정서(問情書)와 함께 저들 배로 보냈는데 우리나라의 글과는 같지 않았습니다. 얼마 안 가서 저들이 우리에게 배에 올라가자고 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 그들의 배에 올라갔는데, 무수한 서양인들이 좌우에 늘어섰으며 2층에 있는 배 칸으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그 방 안에는 등불과 촛불이 환히 켜져 있었는데 서양인 한 명이 한가운데 앉아 있고 그 곁에 우리나라의 복색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우리나라 말로 묻기를, 『강화 유수(江華留守)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지방관입니다.』라고 하자 그는 묻기를, 『누가 당신을 보냈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문정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묻기를, 『금년 봄에 당신네 나라에서는 무엇 때문에 서양사람 9명을 죽였습니까?』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사실 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신네 나라 사람이 도성에 잠복해 있으면서 부녀자를 강간하고 남의 재물과 돈을 빼앗았으며 암암리에 반역 음모를 꾸몄으므로, 나라의 법에 비추어 사형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처형하였습니다. 대체로 우리나라 사람이 만일 당신네 나라에 들어가서 이와 같이 불법을 자행하였다면 당신네 나라에서도 역시 사형에 처하였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들이 말하기를, 『지금 당신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므로 대답하기를, 『죽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통사(通使)로서 문정(問情)하러 온 사람을 살해하는 일은 예로부터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당신들은 빨리 배를 돌려 가십시오.』라고 하자, 저들이 칼을 빼들고 가라고 독촉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다시 육지에 올라와 진영의 해문 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한 무리의 추악한 자들이 칼과 창을 뽑아들고 길 가운데 막아서서 음식물을 요구하였습니다. 때문에 소 3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로 써서 보였는데 그들은 만족하지 않고 끝내 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 사람들을 너그럽게 대해주어야 한다는 마음에서 부득이 소 5척(隻), 돼지 5마리, 닭 10마리를 주도록 하겠다는 내용으로 글을 써서 보였더니 저들은 그제야 비로소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저들의 배 3척은 갑곶진 앞바다에 정박해 있는데, 10척의 종선(從船)을 타고 마음대로 육지에 내려와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으며 온 산과 들을 마구 돌아다녔습니다. 배 모양이며 연통이며 기계들은 지난번 올라왔던 배 모양과 같았으며 배 안에 있는 서양인은 몇 백 명이나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계속하여 광성보 별장(廣城堡別將) 김준모(金濬模)의 보고를 보면, 「이양선 4척 가운데서 3척은 이미 지나가고 뒤에 떨어졌던 1척의 배가 또 들어와서 본 진(鎭)의 건너편에 있는 통진(通津) 지방의 사오서(沙五嶼)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원본】 7책 3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33면
  • 【분류】
    외교-프랑스[法]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기(軍器) / 사법-치안(治安) / 교통-수운(水運) / 농업-축산(畜産)

    江華留守李寅夔狀啓: "本月初七日未時, 彼人等突入東城, 銃放所及, 我人之被傷、被死爲二人, 把守軍校, 不能阻擋。 醜類毁破城堞而踰入, 周覽城內後, 還爲出去。 而事旣到此, 十分遑急, 長寧殿兩聖御眞, 權奉于本府西門外白蓮寺。 而臣處在關防, 未得捍禦, 使彼醜類, 若是猖獗, 惶恐待罪。" 敎曰: "勿待罪。" 又以"異樣船下陸登山之由, 已爲馳啓, 而彼船仍爲停泊, 似有經夜之意。 故令本府經歷金在獻, 問情次出送矣。 回報: ‘問情次出往之路, 彼人幾十名, 攔阻於中路, 引入堂峴路邊村舍。 故書示以問情之由, 則彼人揮手不知云。 引往甲串津海門內閭家, 則彼人幾百名, 各持鎗銃, 屯聚排立。 故書問「爾們萬里風波, 能無疾病邪?」 彼人不答。 繼書示「爾們未知何國人, 而緣何事來此邪?」 彼又不答。 渠自修書, 竝與問情書, 送于渠船, 而與我國書不同矣。 居無何, 彼請上船, 故隨往彼船, 則無數洋人, 左右排列而引入, 二層船間則燈燭輝煌, 洋人一名主壁, 坐傍有我國服色者一人, 交椅坐, 以我國之言問之曰: 「江華留守邪?」 答曰: 「非也。 地方官也」云。 則彼問「誰送爾邪?」 答「我以地方官, 問情次來到」云爾, 則彼問「今春間, 汝國以何故殺洋人九名乎?」 答「果於春間, 有此事。 而爾國人, 隱伏都城, 姦昵婦女, 奪人財貨, 暗售不軌, 則於國法, 難逭一律, 故果爲行刑。 大抵我國人, 若入爾國, 行此非法, 則爾國亦當鋤誅之矣。」 彼云: 「今方殺汝也。」 答「死則不懼也。 但通使問情人之殺害, 自古未有也。 爾們斯速返棹」云爾, 則彼拔劍促去, 不得已還爲下陸, 到鎭海門內。 一隊醜類, 拔劍持鎗, 遮攔道中, 且請食物。 故牛三隻許給之意書示, 則彼不滿意, 終不開路。 以其柔遠之意, 不得已牛五隻、猪五首、鷄五十首許給之意書示, 則彼人始乃通路。 而彼船三隻, 留碇於甲串前洋, 以十餘隻從船, 恣意下陸, 奪人閭家, 滿山遍野。 船形烟筩火輸, 依如前日上來船樣子, 而船中洋人, 不知幾百名’云。 連接廣城堡別將金濬模所報, 則‘異樣船四隻內, 三隻已爲過去。 落後一隻, 又爲入來, 掛在於本鎭前洋越邊通津地方沙五嶼’云"啓。


    • 【원본】 7책 3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1책 233면
    • 【분류】
      외교-프랑스[法]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군사-군기(軍器) / 사법-치안(治安) / 교통-수운(水運) / 농업-축산(畜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