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두순이 경과의 공정성과 호서와 호남의 환곡의 문제 등을 건의하다
차대(次對)를 행하였다. 영의정(領議政) 조두순(趙斗淳)이 아뢰기를,
"이번 경과(慶科)는 팔도(八道)의 많은 선비들과 민심의 향배가 걸린 기회이니, 만일 사후에 들리는 소문이 기대했던 것과 달리 나타난다면 단순히 임금의 명을 받드는 데 정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리에 어긋날 뿐만이 아닙니다. 어찌 규찰해서 징벌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미리 단속하고 신칙하여 기어이 실제 효과가 있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대왕대비(大王大妃)가 이르기를,
"묘당에서 경시관(京試官)에게 발패(發牌)하여 하나하나 불러서 면대하고 신칙하여 삼가는 마음으로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호서(湖西)와 관서(關西)의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로 품의를 거쳐 행회(行會)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몇 달이 지나도록 아직껏 아무런 소식이 없으니, 두 도(道)의 도신(道臣)을 모두 엄하게 추고하고 그들로 하여금 조목별로 대책을 진술하여 빠른 시일 내에 등문(登聞)하라고 행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정의(旌義)와 대정(大靜) 두 고을의 수령(守令)을 최근에는 대부분 제주(濟州) 출신 문관(文官)과 무관(武官)에게 맡겼습니다. 대체로 그 고을에 살면서 그 지방 관원이 되는 것은 무릇 정사를 함에 있어서 진실로 허다한 문제점이 있게 됩니다. 이것이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 ‘그 조상의 분묘나 전토(田土)가 있는 곳에 수령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한 까닭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 두 고을을 변지과(邊地窠)로 만들어 경외(京外)의 치적(治績)이 있는 사람을 가려 차임하고, 제주 출신 문관이나 무관 중에서 수령의 품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삼남(三南)의 고을 가운데에서 상당과(相當窠)에 따라서 차송(差送)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종실 중에서 대왕의 별자(別子) 이외에는 세천(世遷)하는 것이 예(禮)입니다. 그러나 남연군(南延君)의 사판(祠版)은 오늘날의 사체로 보아 특별하니, 부조(不祧)의 법을 세차(世次)가 오랜 뒤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 생전에 근신하여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지 않고 시종 성실하고 돈독해서 경사를 기르고 복을 쌓아 우리 종묘 사직의 억만년 아름다운 복에 이바지한 것을 생각하면 당시에 내린 시호(諡號)가 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에 있어서는 또한 의당 좋은 시호로 고쳐 정하여 성상의 생각에 부응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대왕대비가 이르기를,
"나도 이런 마음을 가진 지 오래되었으나 주상이 아직 어려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대신이 이렇게 아뢰니, 당연히 처분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조두순이 아뢰기를,
"증 영의정(贈領議政) 문숙공(文肅公) 이일상(李一相)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말을 하여 청나라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끝내 절개를 지키고 돌아왔습니다. 같은 때에 절의를 지켰던 신하들은 모두 대대로 제사 받는 은전〔世祀之典〕을 받았는데, 이 집의 사판(祠版)은 친진(親盡)하여 장차 묻히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부조를 허락하여 높이 권장하는 정사에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故) 상신(相臣) 김상철(金尙喆)의 시호는 충정(忠靖)인데 그 할아버지의 이름과 음이 같습니다. 증 이조 판서(贈吏曹判書) 조흥진(趙興鎭)은 의주(義州)에서 성(城)을 지키면서 시종 용감하게 싸운 공로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남아 있는데 시호에 ‘충(忠)’이라는 한 글자가 빠졌으니, 이것은 흠이 되는 일인 듯합니다. 이 두 시호를 모두 홍문관(弘文館)으로 하여금 다시 정해서 들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또 아뢰기를,
"고 생원 민치순(閔致舜)은 고 상신 문충공(文忠公) 민정중(閔鼎重)과 고 상신 문효공(文孝公) 민진장(閔鎭長)의 후손으로서 계모(繼母)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겨 지금 50여 년이나 지나서까지 사우(士友) 사이에 칭찬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극한 행실은 의당 대사헌을 추증해서 세상의 교화를 권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러러 아룁니다."
하니, 윤허하였다.
- 【원본】 5책 1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7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初四日。 次對。 領議政趙斗淳曰: "今番慶科, 爲八方多士人心向背之機。 萬一事後傳聞, 出於期望之外, 則不但非對揚、殫竭之義, 安得無糾逖、警罰之擧乎? 豫先操飭, 期有實效何如?" 大王大妃曰: "自廟堂京試官發牌, 面面申飭, 使之惕念擧行可也。" 斗淳曰: "頃以湖西、關西糴弊釐正事, 有所經稟行會, 而于今屢朔, 訖無動靜。 兩道道臣, 竝從重推考, 使之條陳方略, 不日登聞行會何如?" 允之。 又曰: "旌義、大靜兩守令, 挽近多屬濟州文武人, 夫居其鄕, 爲其官, 凡係爲治, 誠有許多窒礙。 此《通編》所以不許其墳墓、田土所在處者也。 臣意則此兩邑, 作爲邊地窠, 京外有聲績人, 擇差以送, 濟州文武之有守令階級者, 則以三南邑中, 隨其相當窠差送, 似好矣。" 允之。 又曰: "宗英中, 大王別子外, 世遷, 禮也。 而南延君祠版, 在今日事體有別, 不祧之典, 有不待世次悠久之後。 且念平昔愼謹晦默, 終始肫篤, 毓慶儲祉, 用供我宗社萬億之休, 當時節惠, 非不優渥, 而在今日, 亦宜改定美諡, 以寓聖思, 恐好矣。" 大王大妃曰: "予亦有是心久矣。 而主上方在沖年, 姑未及領會。 大臣所奏如此, 當有處分矣。" 斗淳曰: "贈上相文肅公 李一相, 抗言斥和, 旋作質北之行, 畢竟全節而還。 同時節義之臣, 擧蒙世祀之典, 而此家祠版, 親盡將埋矣。 特許不祧, 以寓崇奬之政, 恐好矣。" 允之。 又曰: "故相臣金尙喆諡號忠靖, 與其祖名, 音相同。 贈吏判趙興鎭, 義州守城, 始終敵愾之功, 于今塗人耳目, 而節惠闕一‘忠’字, 似是欠典。 此兩諡, 竝令弘文館改定以入何如?" 允之。 又曰: "故生員閔致舜, 以故相臣文忠公 鼎重、故相臣文孝公 鎭長之後, 事所後母至孝, 于今五十餘年, 士友間稱述不衰。 似此至行, 宜施臺憲之贈, 以勖世敎, 故仰達矣。" 允之。
- 【원본】 5책 1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57면
- 【분류】재정-전세(田稅)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물(人物)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